관광지에 있는 암자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가보는 것이 좋다.
떠드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본래의 암자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많은 사람들에 둘러쌓인 암자를 보면 어딘지 지쳐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홍제암(弘濟庵)도 해인사 옆에 있기 때문에 한낮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린다. 그래서 나그네는 서둘러 정문격인 보승문(寶勝門)을 지나 이른 아침의 암자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관광객이 아무도 없으므로 산새 몇 마리가 짹짹거리고 홍제암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암자 추녀 밑에는 분홍색 모란 꽃눈들이 촉촉하게 부풀어올라 있다.
암자는 사명(四溟)대사가 입적(入寂)하기 3년 전(서력기원 1608년)에 터를 잡았지만, 선조의 도움을 받아 혜규(慧珪)선사가 시창(始創)을 하였다고 한다. 홍제암이란 암자명은 선조가 사명대사의 입적을 애도하여 차통홍제존다(慈通弘濟尊者)라고 시호를 내린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홍제암은 사명대사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만큼 대사의 정신이 깊이 서려 있다. 불사를 이끌어온 주지 종성(宗性)스님도 사명대사 이야기부터 한다.
"이곳은 사명스님의 열반지이지요. 따라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선 스님의 호민(護民) 정신을 기리는 곳이 바로 우리 암자지요."
영자전(影子殿)에는 사명스님 말고도 청허(淸虛), 영규(靈珪)대사를 비롯한 열여섯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특히 일제 때 일본인의 군도(軍刀)에 의해 오른쪽 어깨에 상처가 난 사명스님의 영정은 지난 인진년의 역사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일본인들이 지금까지도 사명대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허균(許筠)이 지은 비문 중에 잘 드러나 있지만 침략국 일본에 대한 배일사상(排日思想) 때문일 것이다. 비문 중에는 사명데사가 왜군 진지로 가서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담판을 지은 사실이 기롣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조선에도 보배가 있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잘라 대답했다.
"본국에는 없고 일본에 있소."
가토가 스님의 말뜻을 몰라 "웬 말이요"하고 반문했다. 이에 스님은 "지슴 우리나라에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보고 반드시 베어 얻으려고 하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 아니요"하고 적장인 그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 것이다.
영자전을 나와 다시 한번 암자를 둘러보노라니 비로소 주연이 눈에 띈다. 추사(秋史)의 글씨라는 종성스님의 설명이다. 주련 중에 한 구절을 읊조려 본다.
도심일월명(道心一月明), 도를 품은 마음이란 밝은 달과 같다는 뜻이라라. 그렇다. 사명대사도 추사도, 이곳에서 입적한 자운(慈雲)스님도 동시대인들의 밝은 달이 되고자 살았던 분들이 아닐까.
밤마다 밝은 달이 되어 가야산 산자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사명대사. 그의 임종게(臨終偈)를 보면 의승대도장(義僧大都將) 아닌 선사로서의 법력에 새삼 가슴이 숙연해진다.
四大假合 훍과 물, 불과 바람이 모여서 된 이 몸
今將返眞 이제 참된 나로 돌아가려 하네
何用屑屑往來 무슨 까닭에 부질 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勞此幻軀 이 허깨비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吾將入滅 내 이제 죽음을 맞이할까 하노라
無染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