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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달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씨알
“젊음을 불꽃처럼 살다간 천재시인”
이상 (李霜,김해경 1910∼1937)
이상은 ‘오감도’나 ‘날개’의 주인공처럼 퇴폐주의적이고 정신 분열적이었으며 괴짜였을까?
고교시절 아버지가 사다준 책 오감도, 일제 폭압의 시기 불꽃처럼 살다 간 이상의 책을 어렵게 읽었다.
01.1 초기 생애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 4통 6호에서 부친 김연창(金演昌)과 모친 박세창(朴世昌)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본관은 강릉이다. 제적부에 기재된 본적은 경성부 통동(이후 통인동으로 개칭) 154번지다. 형제로 누이동생 김옥희와 남동생 김윤경이 있다. 김연창은 일본 강점 전 구한말 당시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절단된 뒤, 일을 그만두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 가계를 꾸렸다.
1913년, 백부 김연필은 본처 사이에 소생이 없던 차에 조카인 이상을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도왔다. 하지만 백부는 북지에서 새로 여자를 데려왔고, 때문에 백모는 집을 나가게 된다. 백부가 데려온 새로운 아내 김영숙 에게는 김연필과 결혼하기 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문경이 있었고, 김영숙은 이상을 문경과 차별하며 홀대하였다. 백부 또한 백모의 이러한 차별에 별다른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린 조카 김해경을 입양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고 한다.
1917년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화가 구본웅과 동기생이 되어 오랜 친구로 이어졌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동광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통학교와 합병되자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1924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재단법인으로 보성고보의 설립자가 되었다. 보성고보에 재학 중에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화가 지망생이 되었으며 학업 성적 상급 수준에 닿았다. 1925년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이 입선했다. 1926년 3월 보성고보 제4회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 경성 동숭동의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에 입학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시절
1929년 동 학교 건축과를 수석 졸업했다. 보성고보 졸업식에 참여한 친부모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그를 문경과 차별하는 백부모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그를 그러한 환경에 내버려둔 그의 친부모에게도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졸업기념 사진첩에 본명 대신 이상(李箱)이라는 별명을 썼는데,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때 받은 화구상자가 오얏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였기 때문에 이상(李箱)은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졸업사진 아래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상
01.2 취직과 등단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자 학교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해 11월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건축기술자를 축으로 1922년 3월 결성된 조선건축회에 정회원으로 가입, 이 학회의 일본어 학회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일반에게 홍보하기 위해 펴내던 잡지 《조선》 국문판에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데뷔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필명 이상(李箱) 아래 연재하였다.
1931년 6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자상〉이 입선했다. 같은 해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가역반응〉 등 20여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1932년 《조선과 건축》에 〈건축무한육면각체〉 제하에 일본어 시 〈AU MAGASIN DE NOUVEAUTES〉, 〈출판법〉 등을 발표했다. 《조선》에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비구(比久) 필명으로 발표하고 단편소설 〈휴업과 사정〉을 보산(甫山) 필명으로 잇달아 발표했다. 동년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서 가작 4석으로 입상했다.
01.3 병고와 활동사항
1931년 이상은 폐결핵 감염 사실을 진단받았고 병의 증세는 점차 악화되었다. 1933년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로 인해 심한 각혈 증세까지 보이는 등 악화된 폐결핵으로 직무를 수행키 어렵게 되자 기수직에서 물러앉고 봄에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요양하였다. 이곳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서울로 불러올려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며 동거하였다.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정지용(鄭芝溶)·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윤태영(尹泰榮)·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같은 해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잡지 《가톨닉청년》에 〈꽃나무〉, 〈이런 시〉 등을 국문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이태준의 도움으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15편을 발표한 후 너무도 난해한 표현이 끝내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에 시달림으로 연재를 중도 작파하였다.
1935년 다방 제비를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한다. 인사동의 카페 쓰루(鶴)와 다방 69를 개업 양도하고 명동에서 다방 무기[參]를 경영하다 문을 닫은 후 성천, 인천 등지를 표표하였다.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01.4 작품 활동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의 유희」·「공복」·「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詩)」·「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시뿐만 아니라 「날개」(1936)·「지주회시(蜘蛛會豕)」(1936)·「동해(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시대에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 있는 감각의 착란(錯亂),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 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 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 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代償) 세계로 탈출하려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 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 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詩作)은 그러한 욕구 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詩的救濟)를 꾀한 시인이었다.
기타 시작품으로 「소영위제(素榮爲題)」(1934)·「정식(正式)」(1935)·「명경 明鏡」(1936) 등과, 소설 「봉별기(逢別記)」(1936)·「종생기(終生記)」(1937), 수필 「권태(倦怠)」(1937)·「산촌여정(山村餘情)」(1935)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산문·소설을 총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후기 작품인 <종생기>에서는 자신의 최후를 썼다. 작품 속에는 자신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쓰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1937년 음력 3월 3일을 생년과 대입해 보면 놀랍게도 실제 사망 일시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세의 귀재 李箱은 그 通生의 대작(終生記) 한 편을 남기고 서력 기원후 1937년 丁丑 3月 3日 未時 여기 백일 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막고 문득 卒하다. 향년 만 25세와 11개월. 오호라! 상심 크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 하나의 李箱 구천을 우러러 호곡하고 이 寒山 一片石을 세우노라. 애인 정희는 그대의 몰후 수삼인의 비첩된 바 있고 오히려 장수하니 지하의 李箱아! 바라건댄 명목하라.
01.5 문학세계
이상의 문학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기란 쉽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계열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사정을 내면화한 작품들로 소설 〈12월 12일〉(조선, 1930. 2~7)·〈휴업과 사정〉(조선, 1931. 4)·〈지도의 암실〉(조선과 건축, 1932. 4)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작품들은 대칭구조로 되어 있고 일상어를 써서 개인적 체험을 그대로 살린 점이 특징이다.
둘째, 창작 노트에 실린 일본어로 쓴 작품들과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시들로서 〈이상한 가역반응〉·〈오감도〉·〈삼차각설계도〉·〈건축무한육면각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중 〈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다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되었다. 이 시들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마구 뒤섞여 있고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숫자를 빌어쓰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일상적인 언어체계와 질서를 부정하고 자신의 관념을 통해 고유의 기호와 담론구조를 창출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는데, 여기서 그의 관념은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배운 근대적인 건축이며,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및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성에 기초한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새롭게 받아들이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도쿄행으로, 창작방법으로는 수필체의 소설로 나타난다. 셋째, 수필체 소설들로 〈지주회시 鼅鼄會豕〉(중앙, 1936. 6)·〈날 개〉(조광, 1936. 9)·〈동해 童骸〉(조광, 1937. 2)·〈종생기 終生記〉(조광, 1937. 5)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작품들은 이전의 형식화된 기호체계에서 벗어나 현실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관념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객관적인 현실을 반영한 인물간의 갈등과 대립보다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인물이 객관적인 현실을 관찰하며, 자의식을 확증할 수 있는 몇몇 현실적 징후들을 찾아 헤매는 내면세계가 두드러져 있다. 특히 대표작 〈날개〉는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인해 1930년대 한국소설 가운데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이렇듯 그의 문학작품은 일상의 기호체계를 과감하게 부정한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문학에 대해 한편에서는 일상적인 문법구조의 파괴를 들어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심리소설의 개척자,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미적 자율성을 확립한 모더니즘의 구현자로 높이 평가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부정한 극단적인 관념론자로 규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는 그의 문학작품이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강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간을 구체적·역사적 인간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서 인간주체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이율배반적 성격을 지닌 점에서 비롯된다.
금홍
1933년 폐결핵을 치료차 들른 배천온천에서 금홍과 처음 만났다. 금홍과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한 이상은 종로1가에 제비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불러 그녀를 마담 자리에 앉힌 후 금홍과 동거하기 시작했다. 1935년까지 이어진 동거생활동안 이상의 생활은 절대 순탄하지는 않았다. 제비다방이 경영난에 빠졌고, 이에 심심해진 금홍은 외박을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1936년 발표된 소설 <날개>에서 등장하는 무기력한 남편과 매춘일을 하는 아내에서, 아내의 이름이 연심이로 표현되는데, 이는 금홍의 본명이다. 이 같은 금홍의 일탈에 이상은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났냐며 금홍을 몰아세웠고 이에 금홍은 가출을 하거나 이상을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였다. 1936년 12월 발표된 소설 <봉별기>에서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 보니까 금홍이는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 놓고 나가 버린 뒤였다.”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여름 결국 금홍은 몇 번의 가출 끝에 이상의 집을 완전히 나가버리고 1935년 9월 제비다방은 폐업하였다.
권순옥
제비다방이 경영난에 시달리던 무렵, 이상은 부모의 집을 저당잡혀 다시 인사동 카페 ‘쓰루’를 인수하였고, 카페 ‘엔젤’에서 근무하던 권순옥을 여급으로 데려왔다. 이상이 권순옥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이다. 권순옥은 금홍과는 다르게 고리키 전집을 전부 독파한 지적인 여성이었다. 권순옥은 이상의 창백한 얼굴과 고수머리, 그리고 즉흥적이고 무계획한 생활태도와 천재적인 작품세계가 D.H.로렌스와 흡사하였기에 그에게 ‘D.H.로렌스의 모조품’이란 별명을 붙여주었고, 이상은 이 별명을 몹시 마음에 들어 정인택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이상은 권순옥에게 빠지게 되었지만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 이야기는 1936년 6월 발표된 소설 <환시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환시기에서 ‘나’는 이상 자신을, 순영은 권순옥, 송군은 소설가 정인택을 나타내고, 환시기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나와 순영이 송군 방 미닫이를 열었을 때 자살하고 싶은 송군의 고민은 사실화하여 우리들 눈앞에 놓여져 있었다. 아로날 서른여섯 개의 공동(空洞) 곁에 이상(李箱)의 주소와 순영의 주소가 적힌 종잇조각이 한 자루 칼보다도 더 냉담한 촉각을 내쏘면서 무엇을 재촉하는 듯이 놓여 있었다. (…) 나는 코고는 ‘사체’를 업어내려 자동차에 실었다. 그리고 단숨에 의전병원으로 달렸다.” 이상은 권순옥을 사랑하였지만, 그녀를 이상의 친구였던 정인택이 짝사랑하면서 이들은 삼각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권순옥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정인택은 앞의 책 내용처럼 자살 기도까지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권순옥과 정인택이 결혼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들의 결혼 사회를 이상이 보았다는 것도 당시 화제가 되었다.
변동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문학소녀였던 변동림은 화가 구본웅의 이모다. 구본웅은 친모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계모 변동숙의 손에 자랐는데 변동숙은 구본웅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런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자신과 스물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복여동생을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변동림이다. 변동림은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졌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상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아는 변동숙은 이를 반대했지만, 변동림은 1936년 6월 이상과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상의 호적에는 변동림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였지만, 이상의 폐결핵은 점점 심해졌고 이에 구본웅은 천재이자 연하의 이모부인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일본으로 가서 요양하라고 돈을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기에 결혼 4개월 만인 1936년 9월 이상은 혼자 일본으로 떠났다. 1937년 2월 일본에서 요양하던 이상은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상은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는데, 이때 건강이 다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얼마 후 변동림은 도쿄에 거주하는 이상의 친구에게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이상이 매우 위독하기에 빨리 일본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1937년 4월 17일 이상은 변동림이 병원에 도착하고 며칠 후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변동림은 수필 〈월하의 마음〉에서 이상의 마지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훗날 변동림은 이상의 죽음에 대해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회상했다.
변동림이 유해를 화장하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말년의 이상은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고 하기도 했다.
그를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 역시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상은 작품 내에서 문법을 무시하거나 수학 기호를 포함하는 등 기존의 문학적 체계를 무시한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다. 이는 한국어 문학에서 이전에 시도된 적이 거의 없던 것이며, 이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발표 직후부터 현대까지 문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줄거리의 전개방식이 명확한 경우가 많지 않고 소설의 전개는 극단적으로 주인공의 내면에만 치중되어 있는 자폐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역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자신의 흥미나 형이상학적 의미에만 집착하는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작가 이상 스스로에 대한 묘사라고도 분석된다.
문법파괴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특유의 서술방식은 주인공의 비문법적인, 즉 무의식적인 내면을 잘 드러내며, 기존 문학에 대한 반감 또는 무시를 의미하는 동시에, 서술의 대상을 없애고 언어 자체에만 비중을 둔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상은 언어유희를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는 방식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상이 그들을 골탕먹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상이 일제에 대한 큰 반감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부정되기도 한다.
오감도(烏瞰圖)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상의 난해시이다. 원래 30편을 계획했으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독자들의 항의로 15편 만에 조기중단되었다.
현재 한국 난해시의 최고봉으로,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는 이게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기는 한지, 아니, 애당초 해석을 염두에 두고 창작을 한 것인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난해한 작품이다. 위에서 말했듯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가 중단될 정도였다. 이 시는 게재 첫 날부터 파문을 일으켰고, 조선중앙일보는 "이런 시를 실을 거면 폐간해버리라"는 항의전화와 편지가 쏟아졌는데도 15편까지 꿋꿋하게 올렸다.
참고로 당시 이상에게 시를 쓸 것을 추천한 사람은 당시 학예부장이었던 이태준이었고 최종적으로 게재를 승인한 사람은 남의 비난은 신경 안 쓰기로 유명했던 여운형 사장이었다. 이태준은 이상의 시가 실린 신문을 편집할 때 시를 싣지 않으면 그만두겠다며 항상 사표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도 예정된 30편을 다 싣지 못했다. 당시 과격한 독자 중에는 이런 미친 놈의 헛소리를 내지른 이상을 죽여야 한다는 항의를 보냈다.
당시에는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소수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신문을 읽거나(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한글만이 아니라 한문도 섞여 있다) 글을 쓸 줄 알았고 전화기는 비싸서 부자들 정도나 가졌던 시절이었다. 즉 지금처럼 문맹률이 낮거나 이동통신과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항의가 빗발쳐 연재가 중단될 정도였다면 당시 반응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연작들에는 일본어 어조가 매우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여기에 실을 때엔 그나마 순화되어 옮겨졌지만, 본 텍스트에는 외래어, 문법, 전문용어 등이 대부분 일본어 어조로 쓰여있다.
이로써 한국 문학은 대단한 실험으로 진일보를 이루었다는 평을 듣게 되지만 그만큼 문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골치깨나 썩게 되었다. 난해시 중에서도 최종보스급. 사실 이런 게 15편 더 있었으면 국내 국문학자들은 머리가 터졌을 것이다. 2009년 상반기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장이자 국어국문학과 교수 권영민이(현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이상 전집을 내면서 새롭게 해석한 바 있다.
다만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나 이상의 평소 작품 등을 볼 때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그려낸 시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제목에서부터 이를 잘 드러내는데, '조감도(鳥瞰圖)에서 오자가 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까마귀라는 새의 이미지와 획 하나가 부족한 불완전한 단어를 통해 암울한 분위기와 불안감을 일부러 형상화했다는 것이 보편적인 설이다. 애초에 이상도 건축가인데 틀릴 일이 없다. 오감도 시 제1호를 예로 들면 반복되는 13과 '무섭다고 그리오', 막혀있는 길 등이 바로 그런 소재들이다. 또 띄어쓰기가 거의 안 되어 있는 점도 이를 드러낸다.
문학계에서는 조감도의 오자가 난 것이 맞다는 주장도 있다. 구체적인 설명으로는, 당시 활자공이 오감도를 최초로 인쇄할 때, 鳥와 烏를 착각하여 오감도로 인쇄하였다. 활자공은 평소 이상의 이상한 인간상과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뒤늦게 후회하며 크게 깨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이상이 찾아왔다. 활자공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떨었으나 이상은 활자공을 얼싸안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이상은 자신의 시가 오감도라는 이 일탈로 완성되었다며 기뻐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가 전해지나, 어디까지 카더라 수준의 문학계 야사로 사실인지 확인된 바는 없다.
생전에 이 작품을 썼을 때는 비평과 악평만이 가득했지만, 현대로 넘어 오면서 이상의 시는 재평가받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오감도가 서 있었다. 갖가지 인용과 패러디를 통해 오감도(특히 시 제1호)는 널리 알려졌고, 국내 시 역사상 과거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오감도 이후 이상은 국내에서 역단과 위독을 연재했는데, 이 두 작품이 오감도와 흡사한 부분이 많아 오감도의 남은 15편 등이 이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오감도는 두 작품들을 포함한 총 36작으로 오감도 형식을 진정한 의미에서 맺음지었다고 볼 수 있다.
시는 조선중앙일보에 수록된 원본과, 원본에서 한자표현만 순화시킨 본, 그리고 현대어로 띄어쓰기까지 적용된 본으로 나누었다. 이 중 띄어쓰기 본은 오감도의 해석에서 띄어쓰기가 적용되지 않은 것이 핵심이 되는 것이 현재 유력한 해석의 골자이므로, 문서의 길이를 늘리는 것 또한 고려하여 접어두었다. 현재 띄어쓰기 본은 시 제1호, 2호, 3호에만 적용되어있다. 여기서는 첫 작품 시 제1호만 소개하기로 한다.
시 제1호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첫 작품으로 1934년 7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길은 막달은 골목이 適當하오.) 第一의 兒孩가 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 兒孩가 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 事情은 업는 것이 차라리 나앗소) 그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좃소. 그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좃소. 그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좃소. 그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좃소. (길은 뚤닌 골목이라도 適當하오.)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지아니하야도 좃소. |
보통,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지인들은 어디를 가건 불안에 떨며 절망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이상은 폐병을 앓고 있었기에 죽음의 그림자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상호 불신과 맹목적인 경쟁 속에서 불안 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13인의 아해는 바로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요, 이상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이 시는 암울한 시대를 불안과 공포로 가슴 졸이며 살아야 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공포와 좌절, 그리고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라도 잡아 보려고 하는 위기의식을 '막다른 골목'과 '뚫린 골목'이라는 역설적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다.
ㅇ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상’이라는 필명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성격과 행동이 워낙 남달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김해경’이 1932년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할 때 공사장 인부들이 일본어로 ‘김 상’을 ‘이 상’으로 착각해 부르던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이것은 1929년 경성고등 공업학교 졸업앨범에 이미 ‘이상’이라는 필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설명이다. 세 번째는 친구 ‘구본웅’이 삼촌에게서 받은 화구 통을 ‘김해경’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감격하여 이에 보답하기 위해 ‘오얏나무 상자’라는 의미의 ‘이상’을 필명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세 번째 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ㅇ‘이상’은 여동생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경성 고공 건축과에 진학하고서도 미술부에 들어가 계속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재능도 뛰어나 일본어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공모전에서 1등과 3등으로 당선되기까지 했다. 1931년에는 ‘자화상’으로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해 서양화 부문에서 입선하기까지 했다. 화가였던 친구 ‘구본웅’은 ‘이상’이 죽은 뒤, ‘이상’은 그림을 그렸어도 성공했을 거라고도 말했다.
‘이상’은 미술에 관심과 재능이 있었지만, 백부가 절대 환쟁이는 안 된다고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건축과에 진학시킨다. 그래서 1926년, 서울대 공대의 전신인 경성고등 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전체 학생은 60명이었고 같은 해에 입학한 학생은 12명, 그중에서 조선 사람은 3명이었다. ‘이상’은 거기서 수석으로 졸업한다. 1929년 4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다. 실제로 ‘이상’은 경성제대 문리대 교양학부 건물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인문학부 건물이다.
ㅇ ‘이상’은 1931년부터 각혈을 하며 폐결핵 증세를 보였다. 폐결핵은 영양실조나 불결한 위생으로 인해 약해진 몸에 폐결핵 균이 침투해 생겨나는 질병으로, 당시 가난과 과로를 하나의 유습으로 섬기는 예술가들의 질병이었다. 당시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불치병이었지만, 예술가들에게는 고통스럽고 추잡한 지금의 삶을 정화해주는 영혼의 질병처럼 여겨졌다. 즉 비루한 이승에서 벗어나 죽음으로 인도해주는 축복과도 같은 질병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상’은 늘 자살을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십 년간 긴 세월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여 왔다.” -이상, <실화>
‘김유정’과는 폐결핵 동지로서 가깝게 지냈는데, ‘이상’이 동경으로 떠나기 전 동반 자살을 제안했지만 ‘김유정’의 거절로 실행에 옮기진 못한다.
“김 형! 김 형만 괜찮다면, 저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동반 자살을 제안한 것이다. -이상, 김유정<우리 서로에게 별이 되자>
ㅇ ‘이상’의 작품에는 성적인 코드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아마 그의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겠다. 초현실주의는 의식 너머의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문학사조다, 무의식은 ‘리비도’라고 하는 성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성’이 억압되고 금기시되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는 ‘리비도’라고 불리는 ‘성적 본능’이 감금되어 있다. 초현실주의는 우리 의식의 검열을 받지 않고 이러한 무의식에 잠재되어있는 것들을 손이 가는 대로, 자동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날개’라는 작품의 공간이 하필이면 성행위를 의미하는 ‘18’가구인 것이나, ‘제비’, ‘쓰루’ 이후 새로운 다방 이름을 ‘69’라고 지은 것은 ‘이상’의 이러한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그의 뮤즈였던 ‘금홍’ 또한 원래 본명은 ‘연심’인데 ‘이상’이 작품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여준다. 이 ‘금홍’이라는 이름은 빨리 발음하면 ‘구멍’이 되는데, 이는 여성의 성기를 속칭한다고 하여 ‘금홍아 금홍아’라는 영화가 나올 당시 굉장히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ㅇ ‘구본웅’은 ‘이상’의 절친으로 곱추였다. 갓난아이 때 하녀가 맷돌 위에 떨어뜨려 허리를 다치면서 그렇게 됐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소학교 시절 놀림을 받고 왕따를 당했다. 유독 한 친구만은 그에게 예의를 갖춰 친절히 대해주었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이상’이었다. 두 사람은 ‘꺼꾸리와 장다리’라고 불렸고, 나란히 걸어가면 곡예단이 왔다며 사람들이 놀려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상’이 곤궁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도와주는 인물이 바로 ‘구본웅’, 다방 ‘제비’를 차릴 때 모자란 돈을 보태주고, 연이은 다방 운영 실패로 힘들 때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동경으로 떠날 때 여행 경비를 대준 것도 구본웅이었다. 참고로 ‘구본웅’의 외손녀가 발레리나 ‘강수진’ 씨다.
ㅇ 또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이상’이 죽은 후 ‘김환기’ 화백과 결혼하는데, 빅뱅 ‘탑’의 외할아버지의 외삼촌이 ‘김환기’ 화백이다. ‘탑’의 외가 쪽이 전부 미술과 연관되어있는데 ‘탑’ 또한 수입의 95% 이상을 미술 작품을 사는 데 쓸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탑’의 집은 동료 연예인들 사이에서 ‘미술관’으로 불리며, ‘앤디 워홀’, ‘김환기’ 등의 수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ㅇ 그리고 ‘이상’의 또 하나의 절친 ‘박태원’은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다. 따로 볼 때는 몰랐는데 함께 놓고 보니까 정말 닮았다.
ㅇ ‘오빠 이상, 누이 옥희’ 동생 옥희 보아라, 이상의 죽음 후 남은 가족의 애사(哀史)다. 이상은 누구보다 누이를 아끼는 오빠였다. 하지만 믿었던 옥희 씨가 애인 K와 만주로 애정의 도피 행각을 벌이자 서운한 마음을 글로 쓴다. 1936년 중앙 9월호에 발표한 ‘동생 옥희 보아라-세상의 오빠들도 보시오’다. 이 글은 이상이 남긴 것 중 가장 사적인 텍스트로 꼽힌다.
저자는 “이상은 옥희를 ‘방탕불효한 이 큰오빠의 단 하나 이해자’라고 쓰고 있다. 이는 이 글의 주체가 작가 이상이 아니라 오빠 김해경임을 우회적으로 말해준다”면서 “나아가 이상은 옥희의 만주행에서 자신의 동경행을 추동하는 용기를 얻기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동생 옥희 보아라’가 이상의 사적 고백이라면 옥희 씨가 1962년 6월과 1964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현대문학과 신동아에 기고한 ‘오빠 이상’은 이에 관한 답가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오빠를 회고한 옥희 씨의 증언을 통해 천재라는 외피에 둘러싸인 이상의 인간적 체취를 끄집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