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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준하
출생 : 1918년 8월 27일
학력 : 일본 신학교
약력 : 1945년 김구 주석 비서
1947년 조선 민족청년단 참가
1949년 도서출판 '한길사' 설립
1952년 월간 '사상' 창간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상 수상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사
평북 의주(義州)출생. 일본의 도요[東洋]대학 예과를 거쳐 니혼[日本]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6천리를 걸어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 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1975년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저서에 《돌베개》가 있다.
1950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으로
1950 국민사상연구원 기획·서무과장, 사무국장 역임
1952 (9월) 국민사상연구원의 지원으로
1952 (9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월간지 「思想」발간
1952 (12월)「思想」 12월호(4호)까지 발간 후 재정문제로 중단
1953 (4월) 국민사상연구원을 사직
1953 (4월) 『思想界』를 창간
1953 (9월)『思想界』 9월호를 끝으로 부산시대를 마감
1953 (9월)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서 『思想界』 계속 발간
1958 (8월)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1958 (8월) 함석헌과 함께 연행됨
1959 (2월) 이사보안법파동 관련
1959 (2월) 『思想界』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정권 비판
1960 (3월) 3·15부정선거 관련『思想界』 권두언에서
1960 (3월) 집권당의 횡포를 신랄하게 규탄
1960 (5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임,
1960 (5월) 홍보분과위원장 역임
1961 (1월) 국토건설본부(본부장 장면) 기획부장으로 활동
1962 (8월)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賞) 언론·문학부문상 수상
1964 (3월)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1964 (3월) 순회하며 70여회의 연설 통해 박정희 정권 비판
1964 (4월)『思想界』긴급증간호(한·일회담의 문제점) 발행
1964 (4월) 박정희 정권의 매국(賣國)외교를 규탄
1965 (7월)『思想界』긴급증간호(신을사조약의 해부) 발행
1965 (7월) 한·일협정 조인을 정면으로 반대
1966 (10월26일)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1966 (10월26일) 규탄 국민대회' 에서의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구속
1966 (10월26일) 연설 내용은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 밀수왕
1966 (10월26일) 초",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1966 (10월26일)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청년의 피
1966 (10월26일) 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 등
1966 (12월) 보석으로 풀려남
1966 (12월) 다음해(1967년2월)의 공판에서 징역 6월 선고
1967 (1월) 야권의 정치지도자 회담인
1967 (1월) '사자회담(四者會談-유진오·윤보선·이범석·백낙준)'
1967 (1월) 주선
1967 (2월) 사자회담의 결과로 형성된
1967 (2월) 신민당(당수 유진오, 대통령후보 윤보선)에 동참
1967 (5월7일) 대통령 선거법 제148호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
1967 (5월7일) 구속혐의는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 취급, 우리
1967 (5월7일) 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박씨는 과거 공산
1967 (5월7일) 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
1967 (5월7일) 라 하여 국가원수를 모독
1967 (6월) 제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1967 (6월)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1967 (6월) 옥중 당선
1967 (7월1일) 제7대 국회의원으로 4년의 임기 시작
1967 (11월) 국회에 등원하여 의정활동을 시작
1967 (11월) 경제과학분과 위원회와 국방부과 위원회 소속
1968년 (1월1일) 『思想界』발행인직을 부완혁에게 위임
1971 (4월)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의원으로 활동
1971 (4월) 자서전 「돌베개」 출간
1971 (5월) 제8대 총선에 국민당 후보로
1971 (5월)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하였으나 여당의 부정선거로
1971 (5월) 낙선
1973 (1월) '10월유신'에 반대하여 양일동과 통일당을 창당
1973 (1월) 통일당 최고위원에 취임
1973 (3월) 제9대 총선에 통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
1973 (3월) 민주회복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
1973 (3월) 재야정치세력 연대·연합의 자유로운 촉구·주선을 위해
1973 (3월) 통일당 탈당
1973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주도
1974 (1월) 대통령 긴급조치1호 위반혐의 제1호로 구속
1974 (1월)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
1974 (1월) 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1974 (1월) 선고
1974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형집행정지 출감
1975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
1975 (8월21일) 경기도 파주군
이 글은 『씨알의 소리』1972년 9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1
민족주의자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한 인간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자기의 생애를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 고달픔과 보람을 민족의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
민족적인 삶이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받고 있을 때 민족적인 양심에 살려는 사람의 눈물과 노력은 모두 이런 민족적인 간난을 극복하려는 데 바쳐진다.
하물며 민족이 민족으로서의 존재조차 없어지려 할 어두운 시절에는,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눌리어 그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려는 암울한 시절에는, 민족주의자는 자기의 생명조차 민족적인 삶을 되찾는 싸움 속에서 불태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족의 생명, 민족의 존재가 이미 없어져버릴 때는 민족의 한 사람인 그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생명과 존재조차 없어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생명과 존재와는 따로 있는 자기, 민족의 생명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 있는 자기, 민족이 눌리고 헐벗고 있을 때 그렇지 않은 자기는 이미 자기 아닌 자기이며, 그렇기에 자기의 생명을 실현하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살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자기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참으로 인간적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살아간 길의 갈림점이었다.
애국자의 길과 매국노의 길, 민족적 사랑의 길과 배신의 길이 갈리는 길목인 것이다.
그렇기에 비민족·반민족적인 길에 빠져버리거나 스스로 택하는 자의 모든 '개인적인', '인간적인' 번뇌는 아무리 그것이 절실하고 불가피하고 자기대로 푸념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이미 진실로 '인간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모습, 또 그의 본질은 자기를 성장시켜 가고 실현해 가는 것이지 노예의 부귀와 영화에 있지 않은 것이다. 저 길 바닥에 던져진 한 개의 돌멩이조차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끝까지 그가 돌임을 지켜갈 때 그는 자기를 실현하고 있다고 하겠거니와 설사 옥(玉)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그 때는 하나의 돌은 아닌 것이다.
하물며 노예의 부귀와 영화와, 참으로 인간적인 영광과는 정반대의 길이며, 오히려 노예 가운데서도 이를 벗어나려는 싸움이야말로 고귀한 인간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민족적인 삶의 길이 험난했던 민족의 경우에는 살아가는 일조차 이렇게 험난했다. 말 그대로, 말은 쉽지만 행동은 힘들었고 그랬기에 구슬처럼 맑게 살아간 젊은 시인조차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라고 옥중에서조차 절규하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의 지난 날, 더욱 가까이 최근세는 정말 험난의 연속이었다.
세계의 시궁창이 이리로 흘러들었고, 세계의 모순, 세계사의 범죄가 이 땅을 무대로 일어났다. 산 높고 물 맑은 강토에 살던 착한 우리 백성들은 홍수처럼, 악마의 불길처럼 밀려드는 이 세계사의 시궁창물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사의 악 중의 악인 제국주의가, 악마중의 악마인 군국주의가 그 가장 표독한 이빨을 우리 민족에 들이댔던 것이다.
누르고 뺏고 마침내 말도 빼앗고 성조차 갈려고 했다. 까닭 없는 싸움터로 내몰아 앞세워 죽이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빼앗아가고 인류의 족보 위에 한민족의 존재조차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하건만 표독한 이빨 앞에서도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 비록 총칼 든 전투, 이름난 의사·열사가 아니더라도 들판에서 공장에서 낯선 이국 땅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이 싸우는 민중에게는 바로 민족적인 삶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었고 국토를 빼앗기는 것은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광복은 생활의 터전과 자기의 인간적인 삶을 되찾는 길이었다.
이와는 달리 애국이 자기의 삶과 일치하지 않고 지식과 논리가 삶의 터전에 뿌리박지 못하고 있던 일부 지식인 지도층에서는 민족에 대한 배반도 일어났다.
하지만 항쟁의 길이 고달프고 외로운 듯 했지만, 그 실은 온 민중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그 승리의 영광은 더욱 보람찬 것이었다.
2
장구한 싸움 끝에 일제는 패망하고 우리 민족에게는 광복이 왔다.
빼앗던 자가 망하고 억누르던 자가 쫓겨가고 포악한 침략전쟁이 패망하여 우리 민족의 삶을 다시 찾은 이 해방의 순간보다 더한 감격이 어디 있겠는가?
민족해방의 환희, 그렇게도 그리던 기쁨, 이 기쁨을 기다리고 참고 견딘 어두운 고통, 이 고통스러운 싸움 속에서 그리던 희망, 이 기쁨과 희망을 이제 현실로 실현하려는 설레임, 이 벅찬 설레임을 무엇에다 비길 수 있으랴.
이 벅찬 설레임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알차게 영글어갔다면 이에 비길 행복이 어디 있으랴만 세계사의 흐름은 그렇게 쉽사리 우리 민족의 앞길을 밝혀주지 않았다. 압제자 일본군국주의를 무장해제하기 위해 남북한에 나누어 진주한 외국군은 군사적 진주와 점령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정치적 진주와 점령으로 굳혀갔다. 세계사의 새로운 모순, 동서냉전체제라는 새로운 범죄가 우리의 강토, 우리 민족의 생명 위에서 새로운 운명을 장난질했다.
게다가 세계사의 이와 같은 새로운 모순이 이 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새로운 외세에 의한 민족의 양분(兩分)이란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이를 권력장악의 조건으로 이용한 일부 신생권력층은 안에서, 밖에서 강요한 양분체제에 대응하였다.
통분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민족은 양분되었고, 통일을 갈망한 민중의 염원은 현실적인 힘을 얻지 못하고 내외가 상응한 분단체제에 묶여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원통한 냉전체제에 의한 민족의 분단은 기억하기도 참혹한 열전으로까지 터지고 말았다. 세계의 갈등이 그 가장 참혹한 열전으로까지 터지고 말았다.
도대체 우리에게 언제 그토록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진 무슨 주의가 있었고, 그 주의에 따라 나라와 민족을 두 동강 내어 살기를 원했던가? 그뿐인가, 역사의 똥인 전쟁, 그 가장 더러운 동족상잔을 우리가 청부맡아 했다니 5천년 민족사 앞에 아니 인류의 역사 앞에 무슨 낯을 들 수 있으랴.
회상하기도 끔찍하고 몸서리치게 싫지만 다시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에 앞서 평화를 확보한 자보다 이긴 승자는 없다. 하물며 동족과 형제끼리의 싸움에 평화보다 더 영광스러운 승리는 없다.
어떻든 우리 민족은 금세기 가장 더러운 세계사의 범죄를 청부받았다.
전후(戰後) 냉전체제에 의한 남북분단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 있어서 우리 민족에게 자기부정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는 이 분단에 대응한 국내세력의 움직임이 어떠했든 그 기본적 계기는 외세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하나는 분단된 민족은 역사의 실천단위로서는 적어도 하나의 주체적 자기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둘로 나누어진 그 한쪽은 어느 쪽도 하나의 주체적 단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강변(强辯)은 분단의 합리화를 위한 거짓명분일 뿐이다.
어떻든 이 분단체제 그 세계적 주범인 양극냉전체제도 긴장완화니 해빙이니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공의 대결과 대립의 완화, 소련과 중공의 동맹과 대립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주변정세를 바꾸어 놓았다.
적어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총칼을 앞세운 대결은 의미를 잃었고 오히려 대국의 공존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보이게끔 되었다.
이와 같은 양분 무력대결의 근본조건이 바뀌어져가는 상황 아래 우리 민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외세에 의한 자기분열을 강요했던 자기부정의 조건이 스스로 변화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기부정을 고집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3
이와 같이 새로운 정세 앞에서 우리 민족이 해야할 단결은 스스로 분명해진다. 그것은 갈라진 하나를 다시 하나의 자기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과 힘을 갈라진 양쪽에서 함께 기울이며 기르는 것이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 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이상의 명제는 없다. 이를 위한 안팎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 이상의 절실한 과제는 없다.
어떤 논리도 이해도 이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이런 대원칙 아래서 굳어진 논리, 고집스러운 자세를 고쳐가야 한다.
근본과 말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거기에 따르는 것인가를 가려야 한다.
모든 통일이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은 이런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종국적으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7월 4일 남북한공동성명이 발표되고 8월말과 9월초에는 적십자회담을 위하여 갈라졌던 동포가 27년만에 오고갔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의 지상과제가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라고 할 때 어떻게 이 사실을 엄청난 감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말로 따지고 글로 적기 전에 콧날이 시큰하고 마침내 왈칵 울음을 떠뜨리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것을 감상이라고도 하고 감정적이라고도 할지 모르지만, 이 감상, 이 감정 없이 그가 하나의 인간, 민족분단의 설움으로 지새워온 민족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생활에 바빠 일에 쫓기어 이런 소식에 늦은 우리 동포가 있을지 모르나 그 모든 민중의 소리내지 않는 가슴의 밑바닥에 파도처럼 철렁이는 감격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리오.
그리고 이 뜨거운 눈물과 감동과 열정 없이 어떻게 얼음처럼 쇠처럼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분단의 벽이 녹아내릴 수 있겠는가?
실로 남북을 잇닿은 전화줄은 한두 사람의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갈라졌던 형제동포의 눈물과 호소와 환희를 서로 만지는 가슴이며 손이어야 한다.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의 결과로 진실로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길이 열린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세계사에도 우리 민족사에도 없을 것이란 말을 감히 하겠다.
생각해 보면 지난 4반세기의 민족분단은 얼핏 말하듯 이념과 제도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 한 사람의 생활의 분단이자 곧 파괴요, 나 자신의 분열이요 파괴였다.
남북한에 걸쳐서 민족의 정력은 모두 민족적 적대, 자기파괴를 위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가난, 이 부자유의 최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분단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더는 '이산가족' 흩어진 가족이란 말에도 보이듯 우리들 한 집안 또 한 사람의 가장 큰 인간적 불행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따져 생각해 본다면, 그 역시 민족적 분열에서 왔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부모형제가 만나지 못하고 부부가 헤어져 살고, 형제끼리 죽이고 죽었고, 어버이와 자식을 잃은 불행이 어디에서 왔던가?
남북분열, 적대적 대결로 남북 양쪽 모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얼마나 비뚤어져 달리기만 해서 마침내는 모두 절름발이가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지 않은가?
그러하기에 우리 민족의 양분, 무력대결은 휴전선의 튼튼한 철조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또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의 파괴와 왜곡을 뜻한다.
진실로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이 민족평화통일의 첫발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인간적 고통의 해결이요, 민족사가 자기파괴와 왜곡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막을 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4
우리가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과 같은 역사적인 감각을 통째로 받아들이면서도 '정말', '진실로' 따위의 군더더기 같은 말을 그 앞에 붙이지 않으면 안 될 애절한 사연이 있다.
그것은 이제 다시는 이 민족적 감격이 짓밟혀버리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국제정세나 국내정치적 이유로도 적어도 지금까지 진전된 남북관계를 후퇴시키거나 동결시킬 명분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국제정세가 이 새로운 후퇴와 동결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하며, 국내정치적 이유로 이런 일이 획책된다면 우리는 5천만 민족의 이름으로 이를 용납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이 가질 수 있는 모자라는 점이나 부정적인 측면을 냉정하게 가리어 염두에 두고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자주평화통일이 전체민족의 염원이었으되 그 진전이 방해받아온 것은 기본적으로는 국제정세의 탓이었고, 이번 계기도 국제정세의 발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국제정세와 주변열강의 이해가 우리의 남북의 긴장을 요구하기도 했고 이제는 긴장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조건이 언제 다시 긴장을 요구할지 아니면 긴장완화와, 무력만 사용하지 말고 대결하면서 공존할 것을 요구할지 모른다. 아마도 국제정세와 주변열강은 이런 남북의 평화공존을 요구함이 분명할 것이다.
이것은 무력대결보다는 나은 것이지만 진정 우리가 바라는 통일의 길은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은 주변열강의 요구에 따라 남북한이 평화공존으로 동결되고 그 이상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실질적으로 포기한다면 그것은 더욱 분단을 항구화하고 통일과는 반대쪽으로 치달리게 된다.
그 다음, 지금 남북한의 정권 담당층은 주변열강의 요청과 함께 내부개혁은 전연 없는 가운데이긴 하지만 긴장완화에 적극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밖으로부터의 요청일 뿐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만약 주변열강의 요청이 현상동결일 때 이와 맞서서 통일에의 길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말하여 이러한 점을 일부러 의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하지 않을 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며, 이 지난날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어찌 이런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번 실패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물리치는 길은 양쪽에서 함께 주변열강이 우리의 통일로 가는 길과 반대될 때는 물리칠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것은 지배의 발판을 민족적 양심, 민중에게 두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요, 적어도 민중은 이런 각오를 굳게 다지지 않는다면 또다시 지고 말 것이다. 통일은 지배층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민중에게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인 까닭이다.
지금 우리는 적지 않은 염려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무력대결을 회피하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얻는 데 성공해 가고 있다. 통일이 급하고 지상과제이기는 하되 전쟁은 참혹하다. 참혹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은 통일로 가는 가능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전쟁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음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새삼 이를 확인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역사는 때로 작용과 반작용 되풀이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추구되고 있는 긴장완화와 평화는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한치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우리뿐이 아니다. 저 참혹한 월남전쟁 30년 동안 모두가 죽어가고 있는 전쟁이 처참하다는 것과 전쟁이 아닌 방법이 있으면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 귀중한 교훈을 새겨서 귀한 옥동자를 다루듯 벅찬 희망과 감격을 안고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지금부터 온 민중이 이 어렵게 얻은 옥동자를 떨어뜨려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금 통일은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민족통일을 민중과 갈라 현실적으로 이를 다루는 정부나 관계기관의 일로 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는 고향이 그립다든지 흩어진 가족이 보고 싶다든지 하는 감정과 차원에 그치게 하여 직접 이산가족이 아니라면 민중의 실생활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통일 없이는 가난, 부자유, 이 모든 현실적 고통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을 알고 알려야 한다. 그러므로 통일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관여하고 따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 현재 진전되고 있는 남북문제는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점들은 보다 보충하고 염려해야 할 점이지 남북관계의 진전 자체를 부정해야 할 근거가 못됨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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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보충하고 더욱 진전시킬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의 노력은 집중되어야 한다. 그 부정적 측면에 빠지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하고, 그 긍정적인 면을 더욱 앞으로 밀고나가야 한다.
먼저 우리는 분단의 민족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분단의 기본적 계기는 외세였지만 우리의 힘이 이런 외세를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만 책임을 통감하고 더구나 분단을 더욱 굳혀만 온 지난 26년을 반성해야 한다. 특히 이 점에서는 집권층을 비롯한 또 지식인들까지 포함한 우리 사회의 상층부가 더욱 진지하게 반성하고 절실하게 책임을 느껴야 한다. 분단체제의 모든 가치와 논리 그리고 정책과 그 실행을 반성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 반성이 진실하고도 진지했다면 그것은 현재의 우리, 현재의 나의 희생을 요구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 희생은 보다 가치 있는 삶과 세계로의 전진임을 물론이다. 나의 사상, 주의, 또한 지위, 나의 재산, 나의 명예가 진실로 민족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분단체제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위대한 자기희생 없이는 통일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또 새로운 반역이 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분단체제 때문에 누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것, 우리의 것이 아니며 민족통일은 이루어지고 통일조국은 새롭게 자라날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정치적 자유의 확보를 위해 싸웠다. 정치적 자유는 그 자체도 기본적인 것이지만 보다 큰 민족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오늘 민족적 자유가 현실적으로는 확대되고 있음을 인정 안 할 도리가 없다. 다만 그 과정, 그 방법에서 정치적 자유의 억압으로 민족적 참여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 과정을 탓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집권자에 의해 확대된 만큼의 민족적 자유를 민족전체가 향유할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어야 함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를 위한 법적인 또는 현실적 제(諸)조치가 단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민족전체에게 확보되지 못한 민족적 자유란 민족전체에게는 새로운 외압(外壓)이며 따라서 이것은 실만 있고 실체(實體)가 없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대된 자유 위에서 통일을 향한 전진이 이루어져야 한다. 통일을 향하여 경제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국토계획이 마련되어야 하고 민족이 동질성을 함양하는 문화구조가 세워져야 한다.
첫째는 정치, 경제, 문화 어디서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음은 하나의 민족을 향해 서로 개혁해 나가야 한다. 그 개혁은 조국은 하나라는 민족전래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하나의 조국은 두 개의 국가 때문에 피해 받은 민중의 조국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개의 국가란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장악한 몇 사람의 것이요 민중의 조국은 끝까지 하나님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그 현실적인 단계로 지금 일컬어지는 복합국가론(複合國家論) 같은 것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하며, 이것은 또 외형의 문제이고 내부체제에 있어서 복합사회라고 할 제(諸) 제도와 체제의 병존과 같은 사회체제도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동서 양진영이 아니라 제3세계 또는 이스라엘 사회체제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를 향한 현실적인 하나의 단계이지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적어도 각 분야에서 대외의존이 청산되고, 자주성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통일민족의 의식과 도덕이 확립된다면 복합적 사회체제가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통일에의 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하다. 그렇지만 그 길은 기필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우리 한 사람, 몇 사람의 재산과 지위와 명예가 희생되어서라도 가야할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이 희생과 설사 있을지 모르는, 지는 것이야말로 보다 영광스러운 이김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통일의 혈로를 뚫기 위해 몸을 던질 때, 이제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던 그 길을 이제야 우리는 다시 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도 다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길이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이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지난 6월 23일 이른바 <평화통일에 대한 외교전략>을 발표하였다.
7개 항목으로 된 짧은 성명 한 장으로 대한민국 수립 이후 일관되게 걸어온 대북 적대외교노선과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북한에 대한 고립화 정책을 하루아침에 전환시키는 것을 보면 과연 정치권력의 행사가 얼마나 위력적이냐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우리네처럼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구박을 주면 그런대로 살아갈 도리밖에 없는 한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고속으로 돌아가는 정부시책에 과연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할는지 사뭇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래도 나는 생각해 보았다. 석간신문 한 장을 들고 그 성명내용을 조목조목 읽어보았다. 애들도 이미 잠들고 밤거리를 스치는 자동차소리마저 끊긴 면목동의 깊은 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석간신문들 손에서 떼지 못하고 거듭 읽어가며 괴로운 심경을 달래야만 했다.
현정권이 5.16으로 집권한지 13년, 그동안 현정권이 우리 백성들에게 요구한 사항을 크게 줄잡아도 3단계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맨 처음에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한다는 5.16공약에서 보여준 것처럼 4.19 이후의 사태를 동요로 생각한 나머지 반공체제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 백성들은 그저 반공이 옳거니 생각하고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하였다.
그 다음에는 이른바 조국의 근대화라는 엄청난 명제였다. 당초 조국의 근대화라는 명제가 제기되었을 때에는 조국의 근대화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애매하였으나 1965년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협정을 강행하여 외국의 자본을 무제한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조국의 근대화란 결국 한국경제를 외국의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외국자본을 근대화 촉진의 기본동력으로 채택하고 따라서 외국자본의 국내활동, 즉 자본의 본래의 욕구인 이윤추구에 대한 법적 보장(투자보호법)까지를 선심쓰게 되어 조국의 근대화는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온 것처럼 한국경제에 있어서의 자립적인 구조는 날로 해체되어 가고 그 대신 외자의존적인 절름발이 경제로 멍들어가게 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우리 백성들이 먹고 입고 사는 힘이 많은 외국자본에 의하여 점차로 지배받게 되니 이에 따라 정치구조, 문화현상까지 일변하여 조국 근대화를 통한 화려한 치장은 사실은 앞으로 다가올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장애가 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반문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던 차에 정부는 지난 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고하되 앞으로의 최대 명제는 분단된 민족의 평화통일이다. 이 통일운동은 외세에 의존함이 없이 남북에 있는 5천만 민족이 단결하여 자주적으로 쟁취할 것이니 백성들은 무조건 따라오라고 하였다. 이때도 우리 백성들은 민족통일운동이야말로 명실공히 민족적 지상과업이며 이 운동에 누가 앞장 섰던지를 가리지도 않고, 별다른 이의 없이 정부의 시책을 지켜보아왔다.
그러나 7.4성명 이후에 전개될 이 사태에 대해서 나는 두 가지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7.4성명은 파기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 성명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후퇴하거나 사실상의 휴지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북통일의 문제는 7.4성명을 고비로 날이갈수록 한 발자국이라도 전진해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7.4성명은 누가 했던지 간에 그 성명이 담긴 내용으로 보아서 남북의 적대관계를 민족적 차원에서 부정한 것이므로 자칫하면 남북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었다는 사실에 얽매어 남북이 서로 평화곱게 공존하는 방향, 즉 평화 속에 분단의 장기화 내지는 영구화가 획책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계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7.4성명이후 남북의 실권자들이 서울과 평양 사이를 여러 번 오갔건만 민족통일에의 실마리를 보기란 무척 힘들었고 심지어는 7.4성명 이후의 통일논의는 곧 하나의 정치권력의 안전을 도모하는 명분으로 이용되는 듯한 인상을 풍겼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같이 민족통일의 길이 비뚤어져 나감에 따라서 백성들의 실망과 분노는 한없이 높아가고 심지어 근자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하여는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를 않게끔 되었다.
어느 때는 반공을 하라고 강요하여 이에 열심히 적응하다 보면 매사가 우스워진 것 같고 또 어느 때는 조국의 근대화를 하자고 강요하여 한참 지내다 보면 조국의 모든 자주적 조건이 오히려 파괴당하는 꼴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참으로 분단 30년의 비극이 청산되고 조국의 자주적 통일이 이루어지는가 했더니 갑자기 지난 6월 23일 <평화통일 외교전략>을 발표함에 이르러 나처럼 소박한 백성들을 삽시에 당혹케 하고 있다.
그러면 6.23성명의 어느 부분이 나를 당혹케 하였던가, 6.23성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어찌되었건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은 계속하겠다는 것이고
둘째, 유엔이서 북한과의 동시초청,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존 국제기구에서의 평화적인 경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셋째, 적성국가와의 외교관계를 맺어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골자의 성명을 놓고 보면 첫째의 대목, 즉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성명의 전체는 <7.4성명>을 스스로 만든 당국으로서는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당연히 주장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보겠다. 따라서 셋째번도 지금까지 적성국으로 인정하여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던 공산국가들과의 외교를 개방하겠다는 점인데 이것도 외교란 본래 적성국가를 상대로 하는 것이 상계이고 보면 그들을 스스로 배척해 온 지난날의 외교외(外交外)적인 노선을 걸어왔던 폐쇄성을 지양했다는 의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둘째 대목, 즉 유엔에서 남북이 같이 마주앉아 보자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 되겠다.
생각컨대, 대한민국은 유엔이 인정한 합법정부, 유엔군의 지원으로 국토를 보존하는 땅덩어리, 유엔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존립의 국제적 토대였다. 이러한 유엔기구에서 지금까지 적대해 온 북한과 마주 앉아 보겠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기(國基)에 문제되는 중대한 사태이건만 지상에 오르내리는 여론을 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능동외교로의 전환>이라느니 <냉전외교에서 해빙외교에로의 전진>이라느니 하고 떠들고 심지어는 북한측이 외교전략상 곤혹에 빠졌음이 틀림없다는 등, 시어미보다 시누이가 더 설치는 듯 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여론에서 진실성을 발견할 수 없음을 솔직히 지적하고 싶다. 동,서독관계를 우리의 모범할 바로 말하는 이도 있으나 독일은 엄연히 제 2차세계대전에 책임을 지어야 할 전범국이었으며, 그 보복으로 연합국에 의해 분단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국제음모에 의해 미,소냉전의 희생제물로서 분단된 것이 아닌가.
국제사회는 이 사실에 눈을 돌려주어야 하며 우리의 통일을 위한 모든 협조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능동적으로 분단을 국제사회에 내어놓고 합법화시키고 보장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북이 유엔에서 자리를 같이하자는 주장이 남북의 대결관계를 가일층 완화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국제사회에 진출케 하여, 이른바 남한에 대한 전투적인 혁명전략을 후퇴시켜 평화통일의 길을 앞당긴다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하나이다.
<7.4성명>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분단된 조국을 통일함에 있어서 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한다고 했다. 실로 우리 민족의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조국통일, 민족재결합의 대원칙을 발표하지 않았는가.
이 원칙에 입각한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외세, 그리고 이미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온갖 외세는 민족 자주 통일의 장애요 국제적 모순으로 인정하고 이를 민족통일운동의 과정에서 몰아내자는 명제가 제시된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도 물론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이에 방해되는 국제적 모순이라는 차원에서 평가처리되어야 할 요인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적어도 7.4성명 이후의 유엔은 이러한 차원에서 평가되고 이러한 민족적 입장에서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시정해 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이 이와같이 명백히 제시된 바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북이 유엔에서 자리를 같이해도 좋다는 말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또다시 국제권력정치의 냉혹한 와중에 빠뜨리자는 논리와 나란히 유엔에 앉게 되는 경우를 가정한다면 이는 남과 북이 분단을 유엔을 통해서 합법화하자는 논리로 빠져 들어갈 위험이 다분히 있음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반통일의 논리이지 민족통일의 원칙에 입각하여 취해지는 정책이 아닌 것이다.
조국의 분단을 통일하는 길은 조국의 분단을 국제적으로 보장받는 길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간섭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열강의 침략, 즉 일제와 싸우는 민족으로서 그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점은 8.15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와 싸운 한민족, 그 싸움을 통해서 새롭게 드러난 우리의 통일민족상은 미소냉전의 격화로 인한 국토의 분단, 민족분열의 강요로 처참한 타격을 입었고 그리하여 분단된 상태하에서의 조국의 현실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적대관계 속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우리 민족사를 일관 짓는 줄기는 조국의 분단을 주체적으로 거부해 왔고, 또 거부해 오고 있는 깊은 민족사의 흐름의 도도함을 알아야 한다.
7.4성명이란 이와같이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분단이 현실화된 민족사의 한 부분과 이 분단을 거부해 온 민족사의 심연이하는 두 개의 부분이 논리적으로 또는 실천적으로 통일되기를 기원하는 백성들의 염원에 불을 당긴 쾌사였다.
이 쾌사가 있은 지 불과 일년도 못 된 오늘 우리 민족의 분단, 그리고 그 통일의 문제가 바야흐로 국제정치시장(國際政治 市場)에 아무런 거래표시도 없이 상장(上場)하려는 경각에 놓이고 말았다. 이리하여 분단된 남북의 백성들은 우리의 민족통일을 실제에 있어서는 원치도 않는 나라들을 상대로 서로 아양을 떨어야만 된다는 지경에 이르렀고, <남쪽을 지지해 달라>또는 <북쪽을 지지해 달라>고 법석을 떨어야만 되게끔 운명지워져가고 있다.
무엇 때문에 민족통일의 중심과제를 분단의 거부라는 민족사의 맹약에서 이어오지 못하고 분단을 강요한 밖에서 구하려는 것일까. 그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을까. 우리들 모두에게 있는 줄 안다. 남에도 있고, 북에도 있는 줄 안다. 당신이 성명을 냈으니 당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명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조선을 허용하고 만 나와 우리 백성들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단언하다. 적어도 한민족의 통일과 통일된 이후의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민족(民族)외교(外交)를 진행시키려면 다음의 세 가지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줄로 생각된다.
먼저 남과 북은 서로 그 체재 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자주적이 아닌 부분 외세 의존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솔직히 검토하고 이를 극복하는 피눈물나는 청산과정을 겪은 다음에 통일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속속들이 청산되지 않고서는 분단의 문제가 올바로 인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운명은 또다시 동서해빙시대를 장식하는 평화적 분단상태하의 공존관계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 다음 남북은 남과 북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에 손을 뻗치고 있는 일체의 외세와 외압을 남북통일을 위한 조건으로 이용하는 지혜와 슬기를 공동으로 개발하여 실천해야 한다. <유엔에 자리를 같이 하자>, <아니다, 그러한 전략에는 응할 수 없다>는 식의 문제제기와 부정이라는 평행선상의 문제들은 애당초부터 툭툭 떨쳐버리고 민족전체의 이익이라는 확고한 민족적 입장에서 외세를 한번 멋들어지게 이용해 봄이 아쉽다. 이 점은 사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우리들의 소망이기도 하였다.
구한말 당시 이씨조선의 실권자 민비(閔妃)는 침략해 오는 외세에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멋들어지게 열강의 간섭을 이용도 못했기 때문에 소위 개항(開港)이라는 패배전술로, 싸우는 민중의 봉기를 억압하고 침략자들에게 조국을 그냥 넘겨주었으니 실로 원통한 일이었다. 이러한 실패는 8.15이후에도 반복된다. 그때도 우리 민족이 총 단결하여 38선을 강요하는 외세를 배제하였던들 오만한 자세로 세계를 둘로 갈라먹는 미소의 정책을 부수고 통일독립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와 슬기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뼈아픈 민족분단의 비극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끝으로 이 땅에 사는 모든 백성은 한번쯤 조용히 앉아서 참으로 조국은 누구의 것이냐를 따져봄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 다시 묻거니와 조국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네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내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조국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요, 우리들 모두의 것이다. 통일을 한답시고, 평양과 서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만의 조국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면 누가 진실로 통일을 원하는가. 돈 있는 사람들인가, 권력 있는 사람들인가, 물론 이러한 사람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진실로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통일을 해야만 살 수 잇는 이 땅에 백성들, 분단 때문에 생활이 파괴되었고 분단 때문에 생명을 잃어가는 민족적 양심들, 당장 살기가 힘들고 끼니가 어려운 불쌍한 절대다수의 백성들만이 통일을 하루가 여삼추(如三秋)로 기다리고 있다.
구한말(舊韓末) 때 이조의 썩은 정치에 시달리고 그 후엔 일제의 간악한 지배하에서 끈질기게 살아온 그 사람들이 엄청난 수난의 긴 여로도 모자라서 또다시 해방 후에는 조국분단이라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백성들, 이들의 애절한 염원을 풀어주기는커녕 이들을 에워싸고 서로 할퀴고 물어뜯고 모략하고, 배신하고, 탄압하고, 빼앗아가고, 왜, 우리 백성들끼리만 악독스레 용맹한지 모를 일이다.
남북의 동포가 다 합해야 겨우 5천만, 일본도 1억이 넘고 미국이 2억, 소련도 2억 넘으며 중공은 약 8억이 아닌가. 우리 민족이 총 단결해도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 사강(四强)중의 어느 하나를 숫자로 맞먹기 힘든 판에 왜 5천만 민족의 총 단결을 부르짖고는 실제에서는 단결 파괴적인 방향으로 돌진하는가.
겨우 5천만을
단결시킬 위대한 통일정신이 아닌 삼천리 금수강산에 비길 수려한 통일양심의 거인이 없단 말인가.아니다. 내 백성 중에 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반드시 통일을 쟁취해 낼 속힘이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다만, 민족통일이라는 위대한 성사 앞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통째로 바칠 수 있는가를 다짐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동시에 내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정치이념도 생활조건도 심지어 사생활까지도 통일을 위해서 방해가 된다면 이에 대한 집착을 탁 털고 홀홀히 나서는 인간이 되어야만 통일을 말할 수 있고 통일운동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 모두가 조용히 한 번쯤 반성해 볼일이다.
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 중도주의자 조봉암
[공산당과 그 지도 아래 있는 모든 정치활동을 부인하는 성명서] - 1946년 6월 23일.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박헌영이 카멜레온 여운형을 암살 시도하며 한국을 공산화 하려고 난동을 부리자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독립운동 후 공산당을 탈퇴하고 인천치안유지회를 조직하여 산업시설 보호와 치안유지에만 힘썼다.
48년 6월 1일 제헌의원 35%를 차지하는 무소속 72명과 함께 무소속구락부를 발족하고, 자신은 '미국, 관련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신중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2그릅에 속한다고 했다.
1그릅은 미소가 철수한 후에 남북협상으로 남북통일에 합의한 후 정부를 세우자면서 속내는 공산화를 획책하는 좌파 계열이고, 3그릅은 내전이 발생하더라도 빨리 남한만이라도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안정시키기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초대 농림부 장관이던 시절에는 (호남중심의) 토지자본을 공업자본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승만이 실시한 자유주의적 유상토지개혁 정책을 한민당의 반대 속에서도 순조롭게 진행해 나갔으나 북한의 침략을 당해서 끝내 완수하지는 못했다.
조봉암의 추진력이 돋보이는 대목이고, 결과적으로 유상토지개혁으로 인해 대북무장격퇴기 때 농민들이 북한의 사회주의를 거부하게 한 성과로 나타났다.
공산주의를 버린 조봉암은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 자격으로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유효 득표율 22.5%에 이르는 2백16만 3천8백8표를 얻어 국민적 지지를 확대해 나갔다.
1956년 11월 10일의 진보당 선언문에서
2.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을 기한다.
4. 우리는 안으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를 강령으로 발표함으로써 중도주의 노선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통일론에서 당시 시대적 상황과 충돌했다. 건국 이전부터 폭력을 일삼아 왔던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실제로 북한의 대규모 침략으로 수 백만명이 죽거나 다친 분노로 인해 국민들은 철저한 반공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비극의 경험은 헌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국가이며, 북한은 반국가단체로 북한지역을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보았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북한지역을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라고 명시했다.
북한에게서 그 어떠한 침략에 대한 사죄나 배상이 없는 가운데 무조건 북한을 평화적으로 수용하자는 조봉암의 주장은 당시 상황에선 받아 들여지기 힘들었다. 지금도 역시 무조건적인 북한 포용 주장은 국민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못받고 있다.
조봉암의 너무 앞선 비현실적 주장은 위험하기조차 했으며, 당장 자유당의 정권유지에 위협이 됨으로써 과거 공산주의 활동을 걸어 간첩죄를 조작해서 처형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