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제하(閔齊夏)
[생졸년] 1665년(현종 6)~1737년(영조 13) / 壽 72歲
[본 관] 여흥(驪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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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통덕랑 민공 묘갈명(通德郞閔公墓碣銘)
선비 중에는 고결하고 속되지 않으며 독실하게 행하고 곤궁한 생활을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문우(文友) 민제하(閔齊夏) 공이 이러한 분이다. 공은 여흥(驪興) 사람이다. 고려에서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낸 칭도(稱道)가 처음으로 족보에 보인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사건(師騫)이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공에게 8대조가 된다. 증조 휘 성지(聖止)는 효성으로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신량(藎亮)은 벼슬하지 않았고, 부친 휘 정보(鼎輔)는 동몽교관을 지냈다. 공은 어려서 외가에서 양육되어 외삼촌인 후재(厚齋) 김간(金榦) 공에게 배웠다.
공은 비록 성시(城市)에 살았지만 성품이 고아하고 조용하여 교유를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깊이 들어앉아 독서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이 독서에 있으니 이외에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였다.
밤낮으로 송독(誦讀)하고 일찍이 잠시도 게으른 적이 없었으니 경서(經書)를 천 번 가까이 읽었다. 후재가 공에게 보낸 편지에,
“문을 닫아걸고 자신의 뜻을 지켜 일반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았다.”
라는 글이 있었으니, 이는 주자(朱子)가 보한경(輔漢卿)을 권면한 말로서 공에 대한 기대와 허여가 매우 지극했던 것이다.
남은 힘으로 문사(文詞)를 익혀 책문(策文)에 가장 뛰어났는데, 과장(科場)에 나가 번번이 동년배를 압도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여 당시 사우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필법(筆法)이 굳세었으며 작은 글자를 매우 잘 썼다. 일찍이 수십 권의 책을 필사하였는데 한 획도 허술하게 지나치지 않았으니, 거의 옛날의 이른바 “바로 이것이 학문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기묘년(己卯年,1699, 숙종 25) 도성에 역병이 크게 돌아 열흘 사이에 모친과 부친의 상을 당했다. 공은 병으로 고통스러운 중에도 몸에 열이 내리자마자 단괄(袒括)의 절차를 일체 예법대로 따랐다. 당시 공의 부인 이 유인(李孺人)이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나 부엌살림을 주관할 사람이 없었고 노복들도 모두 따로 격리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직접 밥을 지어 때를 어긴 적이 없었다.
집상(執喪)할 때에는 나물 따위라도 조금 맛있는 것이면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만년에 이때의 일을 언급할 때면 항상 눈물을 훔치고 오열하며 말하기를,
“자식이 어버이를 장사 지내는 물품이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나의 종신의 통한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집이 몹시 가난하여 모든 제수(祭需)를 하나도 정리(情理)에 맞게 마련하지 못해 마음이 몹시 아프니, 오직 정성과 예절을 위주로 할 뿐이다.”
하였다.
하나뿐인 아우를 몹시 사랑하여 밥 먹을 때면 밥상을 함께하였는데, 동생이 간혹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이 저물어도 차마 혼자 먹지 못했다. 동생도 공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공은 사람됨이 바르고 곧았다. 한가로이 지낼 때에도 몸에 절대 나태한 기운이 없었으며 입에 비루한 말을 담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에 친밀한 점은 적었으나 오직 성심으로 대하였으니,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한번 구차하게 웃는 것이 한여름에 밭을 매는 것보다 괴롭다.”
하였다.
평소에 거친 밥도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 개도 남에게 취하지 않았으며 때때로 끼니를 굶어도 태연하게 생활하였다. 정사년(1737, 영조13) 윤9월 11일 세상을 떠났으니, 태어난 해 을사년(乙巳年,1665, 현종 6)에서 73년 되는 해이다. 12월 양지(陽智) 추계리(秋溪里)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원배(元配)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고양(高陽)의 선산에 별도로 안장하였다. 계배(繼配)는 함양 박씨(咸陽朴氏)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덕수(德修)와 이상우(李相禹)에게 출가한 딸은 원배의 소생이고, 계배 소생은 아들 항수(恒修)와 감역 윤득경(尹得庚)에게 출가한 딸이다.
손자는 종순(鍾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이종해(李宗海)와 윤선동(尹先東)은 두 사위의 아들이다. 항수가 내게 배웠기에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옥처럼 깨끗하여 티끌 하나도 침범할 수 없었으니 / 如玉之潔一塵不能侵
내가 그 사람을 보지 못했으나 그 마음은 알겠네 / 我不見其人而得其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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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통덕랑 민공 묘갈 :
이 글은 민제하(閔齊夏, 1665~1737)의 묘갈이다. 민제하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우(文友)이다.
[주02] 주자(朱子)가 …… 말 :
주자가 보한경(輔漢卿)에게 답한 편지에 “일반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았다.[味衆人之所不味]”라는 구절이 있다.
《晦菴集 卷59 答輔漢卿》
[주03] 바로 …… 때문이다 :
《이정전서(二程全書)》〈유서(遺書)〉에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글자를 쓸 적에 매우 공경히 하였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
기를 ‘이는 글자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학문이기 때문이다.’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주04] 단괄(袒括) :
왼쪽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를 묶는 것으로, 초상 때 소렴(小斂) 전에 상제(喪制)가 하는 옷차림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