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가자
김재선 김진섭 김태원 마양일 문찬술 박도서 이성우
1. 답사내역
왕릉 답사를 다닐 때부터 조선 제일의 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무덤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한 영회원을 찾아 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광명이란 곳 지리에 어둡고 무엇보다 대중 교통편이 여의치 얺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해마다 활력이 떨어지는게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다 생각하고 찾아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선행자의 답사기를 찾아 보았지만 하나 같이 승용차 편을 이용하였고
한두편 대중교통을 이용하였으나 버스번호나 승하차 장소가 불분명하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회원 인근 자연학습장 운영 학원에 전화하여 광명사거리역에서
6637번 버스를 타고 온신초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아방리 저수지를 찾아가라고 한다.
내가 힘들여 영회원을 찾아 가려고 하는 것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야 말로
조선 제일의 여걸이면서 또한 조선 제일의 비운의 여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공지에 광명사거리역 4번출구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버스타는 곳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
미리 확인하고자 시간을 넉넉히 잡고 8시 20분경 집을 나서 기다리지 않고 전철역에서 바로 승차한다.
잠실역에서 2호선으로 대림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며 광명사거리역에 도착하니 열시가 안되었다.
잠시후 양일이 만나 왜 이렇게 일찍 나왔냐고 물었더니 일이 있어 그렇다는데 5월 6월 네번 모두 개근이다.^^
이어서 재선 태원 진섭 도서 속속 도착하고 찬술에게 전화하여 너무 늦을 것 같다 하여 출발한다.
미리 얻은 정보대로 6637번 버스에 오르고 온신초교에서 내려 부동산사무실에서 알아보고 아방리 저수지를 향한다.
차량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인도도 없는 황색 안전선이 그어진 갓길을 걸어간다.
갓길에 세워진 화물트럭을 요리조리 피해 지루하게 걸어 차도를 벗어나 낙시터에서 물어보고 영회원으로 향한다.
한참을 비포장길을 걸었는데 삼거리가 나타나 자연학습원에 물어보고 400년 된 느티나무를 만난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찬술이 나타나 모두들 놀라게 하고 어케 된거냐고 했더니 온신초교에서 택시로 왔단다.
찬술인 머리도 잘 돌아가고 순발력도 대단하여 찾아오는데 도사 수준이다.^^
우린 영회원을 향해 걷기시작하고 잠시후 앞쪽 언덕으로 연두색 철책을 두른 영회원이 나타난다.
아직도 민회빈은 영어의 몸으로 울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시리다.
소현세자빈 강씨는 1611년 우의정 강석기(금천강씨)의 딸로 태어나 1627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수항단 밑에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로 항복의식을 치른뒤
철수하는 청군을 따라 인조대신 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 부부와 함께 볼모로 심양으로 잡혀간다.
2월 8일 한양을 떠나 4월 10일 심양 남탑 근처 관소에 도착하여 낯선 타국에서 볼모생활이 시작된다.
1640년 본국에서의 지원이 원활치 못하여 어려움을 겪던 차에 청에서 자급자족하라고 논밭을 지급해 주었다.
농장의 경영은 강빈의 몫으로 노예시장에서 조선인들을 사들여 농사일을 시켰다.
자급자족을 넘어 잉여물을 처분하여 자금을 축적하여 세자의 정치자금 혹은 조선인 노예들을 속환하여 귀국시켰다.
1643년 강빈의 부친 강석기가 사망하자 청나라의 허락을 얻어
귀국했지만 성묘도 허락치 않아 친정 근처에도 못가보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11월에 세자의 영구귀국을 허락하여 1645년 2월 18일 한양으로 돌아온다.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귀국하였지만 부왕으로 부터는 냉대를 받으면서 지내다 병약한 세자는 병이났다.
4월 24일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으로부터 침을 맞기 시작하여 26일 낮 세자는 34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세자가 죽고난 후 세자빈과 친정 가족들의 꼬투리를 잡기 위한 감시와 모함으로 시달리게 되어 고통의 나날이였다.
1646년에는 역모로 몰아 2월에 강빈의 형제 강문성과 강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3월 15일 강빈을 사가로 내보내 사약을 내려 죽였으며 남편과 떨어져 강씨 문중 선산에 묻히고 말았다.
효종때 복위상소가 있었지만 무시당하고 숙종44년 1718년 민회빈으로 복위되어 무덤도 새로 정비되었다
민회묘에서 영회원이란 원호를 받은 것은 고종7년 1870년에 격상되었고 1991년 10월 25일 사적 357호로 지정되었다.
인적이 드문 적막감이 감도는 묘역을 철책따라 한바퀴 돌아보고 왔던길 되돌아 온신초교 정류장에 섰다.
태원이 검색하여 찾아낸 버스에 오르고 잠시후 다시 17번 버스로 갈아타고 광명동굴로 향하고 종점에서 내린다.
양일이 부지런히 앞장서서 매표소 앞에 가더니 일곱명 입장권을 구입한다.
경로 우대권이라 우리들은 신분증만 매표원에게 제시만 하고 되돌아 나온다.
광명동굴은 일제가 광물자원 수탈로 1912년 개발한 금광으로 1972년 홍수로 폐광되어
새우젓 숙성 보관 창고로 쓰이던 것을 2011년 광명시가 인수하여 동굴테마파크로 유료공개하여 자리잡아가고 있다.
일부만 공개하였는데도 포도주 시음부터 테마별로 전시한 것들을 둘러 보고 나오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갱도를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제외 하고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키기엔 역부족인 것 같다.
어쨌거나 관람객을 많이 불러모아 지자체의 수입원으로 그리고 일자리 창출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인공동굴을 도느라 계단을 오르내리고 점심 시간도 많이 지난시간이라 일부는 그냥 가자고 하였지만
이번 광명동굴을 찾은 것은 인류 최초의 회화예술(미술) 프랑스 라스꼬 동굴벽화를 보려함이다.
진섭이 보고 가자고 하여 나도 꼭 보아야 한다고 부지런히 라스꼬전시장 앞 매표소로 향하여 간다.
경로 우대도 없이 일인당 입장료 만원 진섭이 매표소에서 일곱명 표를 끊고 따라오란다.
컨테이너로 만든 전시장 안을 마치 동굴처럼 어두침침 하게 만들고 조명도 부분부분 다르게 하고
별도의 모니터로 상세하게 또 곳곳에 시청각 자료를 비치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선사인들의 그림은 대개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어 사냥 나갔을 때 많이 잡게 해 달라든가 또는 수호신으로
17000년 ~ 15000 수렵인들이 회화를 잘 그렸고 농경민들은 그림을 못 그렸다고 한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프랑스의 라스꼬 그림으로 잘 알려진 곳이고 신석기로 넘어오면서 회화는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 선사시대의 암각화를 보면 초등생 수준인 것을 보면 말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한 몇몇 암각화를 보면 정교하지 못한 것이 신석기시대여서 그런가...^^
평생 보지 못할 가장 오래된 인류 문화유산 구석기인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역동적인 동작이며 들소의 목덜미 터럭 말 갈기 등등 섬세함과 정교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17번 버스에 올라 철산역으로 나온다.
철산역 뒷편 먹자골목 쯤 되는 곳에서 직화 낙지집으로 찾아든다.
늦은 시간이라 맥주 소주에 낙지 볶음에 밥 비벼 허기진 배를 채운다.
뒷 풀이는 도서가 계산 한다 이번 답사는 버스카드만 들고 새로운 것만 보는 감동적인 날이였다.
도서 양일 진섭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읍니다.
이번 답사는 찾아가는 답사였는데 참으로 유익하고 감동적이였읍니다.
친구들과 함께 더불어 많이 웃고
즐거움 가득한 행복헌 하루였읍니다.
양일이 추천한 이문열의 들소 한번 읽어 봐야지...
친구들 자알 들어 갔겠지?
다음에 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낄낄대 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