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 중에도 신념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독처무자기(獨處無自欺)’를 말한다. <해동소학>에 나오는 말인데, 홀로 있을 때 더욱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뜻이다. 신독(愼獨)과 유사한 뜻으로 사용된다. 신독은 유교적인 삶의 이상으로 꼽히는 태도이다. 이것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즉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삼간다는 뜻이다. 남이 보지 않는다 해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삼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데, 중용(中庸)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타난다.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戒愼乎 其所不睹),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한다(恐懼乎 其所不聞)”.
신독은 유학에서 군자의 태도로 꼽힐 정도로 개인 수양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최고 단계이다.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갖춰야 할 것들이나, 비록 타인이 부재한다 해도 하늘과의 관계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최고로 여긴 것이다. 공자는 나이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 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았지만, 하늘의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는 함이다. 오랜 수양 끝에 이른 군자의 경지이며,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유자재로 살아도 하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누릴 수 있다. 얼마나 고귀한 경지이며 얼마나 무애한 삶이며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독처무자기 혹은 신독에 해당하는 말을 기독교에서 찾는다면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일 것이다. 영어적인 표현으로는 ‘in the presence of God’이나 ‘before the face of God’이다. 이 말을 풀어서 보면, 마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남들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상관없이 일관된 삶 혹은 표리부동하지 않는 삶을 가리킨다. 이것의 반대말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일 텐데, 이것은 외식하는 삶 혹은 교만한 삶 혹은 죄를 범하거나 악을 행하는 삶을 가리킨다. 이 말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사람 앞에서 혹은 세상 앞에서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살지만,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를 그것들에 두지 않는 삶을 말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정직하고 진실하며 성실한 삶을 가리켜 말할 때 사용된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산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염두에 두고 산다. 그래서 대개 겉으로 드러나는 공적인 영역과 드러나지 않은 사적인 영역에서 처신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렇다고 굳이 이중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개인적인 이유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소위 ‘사생활’은 타자와의 관계 혹은 사회생활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부분이다. 드러내는 일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의 관계에서 이중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 싶은 인간은 사생활이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해놓았다. 범죄를 밝히기 위한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누구도 허락 없이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없다.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더는 타인이라 볼 수 없다.
코람데오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의미한다고 해서 비밀이 없는 삶을 말한 진 않는다. ‘코람 데오’는 설령 비밀이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삶을 말한다. 설령 흠이 있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백된 것이며, 경우에 따라선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다 해도 혹은 하나님에게 드러난 사안이라 해도 굳이 타인에게까지 밝히지 않는 것은 오직 개인적인 이유에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일로 관계가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고 싶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모습 그대로 타인이 인정해주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주님이요 참 하나님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또한 경건한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게 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경건을 가리켜 말하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라고 했다.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그분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어느 곳에 있든지 또 언제든지 곧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지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인간이 모든 일에서 이런 태도로 살아야 한다면 신경쇠약에 걸릴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자기 뜻대로 살기를 고집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온전히 굴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결코 선한 삶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독 혹은 독처무자기가 가치 있는 덕목이긴 해도 기독교 구원론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비록 힘든 여정이라도 할 수 있는 한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을 가리켜 칼뱅은 경건이라 말했다. 경건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해도 인간은 경건한 삶을 통해서 구원받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오래 참음과 용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죄인이다. 그래서 칼뱅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용서를 강조했다.
(이하 스포일러 있음)
영화 <완벽한 타인>은 그동안 사생활로 보호받던 것들이 게임을 매개로 풀어졌을 때 관계자들에게 일어나는 각종 웃기고도 슬픈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매우 무겁고 또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나가 영화를 보는 내내 업 다운을 거듭하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건 분명 원작이 갖고 있는 힘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 리메이킹을 시도하면서도 새롭게 각색하여 연출한 감독과 배우들의 뛰어난 기량에 힘입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타인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로 지내는 40년 지기 네 명의 고향 친구들이 서울에 새로 집을 구입하여 이사한 친구 집에서 파티를 하고 있다. 한 명만 제외하고 다른 친구들은 파트너를 동반하였는데 모두 7명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다. 남자들 중심으로 모였으나 40년 지기 우정이 말해주듯이 비록 남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만큼은 못 된다 해도 아내들도 서로를 잘 알고 지내는 편이다. 그들 역시 겉보기에 결코 남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영화는 바로 이들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진행되는 게임을 내용으로 하는데, 게임의 내용은 이렇다. 식사하는 동안에 오는 휴대폰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자는 것이다. 전화통화는 물론이고 카톡과 문자 그리고 메일까지 공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루 저녁에 참여한 사람들의 은밀한 비밀이 다 드러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겠지만, 영화는 바로 이런 우연의 계기를 코믹하게 설정해놓았다.
그동안 사생활 보호를 명목으로 아내에게까지 감추어도 아무 문제로 여겨지지 않던 것들이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을 때 그 파장은 심각했다. 설령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무 문제로 여겨지지 않던 것들이라도 파트너에게 알려지고 폭로되는 과정에서 관계는 심각한 위기를 겪는다. 비밀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공유해왔던 친구들이라도 게이 성향의 한 친구는 예외였다. 그는 사람들의 편견이 두려워 40년 지기 친구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성적 취향을 밝히지 못했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친구들 사이의 불화도 사실은 그동안 곪아온 것들이 터진 것일 뿐이다. 폭로와 오해와 편견으로 파티는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영화는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완벽한 타인이 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가족이고 또 가족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가족까지는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가까운 사이라고 여겼는데, 갑자기 타인이 된 듯한 느낌을 주고 또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가 되면 심한 경우엔 서로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잘 보여주었다.
갑자기 완벽한 타인으로 전락하는 순간을 연출하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라 생각하다. 하나는 인간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완벽한 타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친구에게까지도 감추고 싶은 것이 있어서 스스로 타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철저하게 숨김으로써 그렇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또 신뢰했던 친구 혹은 아내를 하루아침에 완벽한 타인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핸드폰의 위상과 그것이 갖는 의미이다. 통신기기의 발달로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졌지만, 컴퓨터 이상의 기능을 갖춘 핸드폰은 더는 단순한 소통을 위한 기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 정보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대용으로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것은 단지 정보소통 차원을 넘어 감정까지도 담을 수 있음을 입증한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일부 기능을 수행하는 인공지능까지도 탑재한 상태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비밀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만큼 핸드폰을 현대인의 마음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마지막 하나는 침해된 인격적인 관계의 현실을 꼬집는다. 핸드폰의 내용은 서로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부부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오해하는 빌미가 된다. 핸드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부부가 서로 인격적인 소통에서 단절되어 있는 것이 문제임을 폭로한다.
이런 핸드폰을 타인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꼭꼭 관계의 현실을 폭로하고 또 숨겨둔 마음을 드러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핸드폰 공개 게임은 특히 조금이라도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이고 또 위험한 것이다. 오해를 극복할 만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해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핸드폰 공개는 단순히 사생활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것은 인격적인 정보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내밀한 비밀까지도 드러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에서 예외는 없을까?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사생활은 어떠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얼마나 인격적인가? 핸드폰을 공개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관계일까? 공개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을까?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떳떳하게 산다고 해서 인간관계에서 비밀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달라서 비밀을 알고 나면 용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으로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꿈꾸며 살았다. 달리 말하면 코람 데오의 삶을 말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까지 비밀이 없는 삶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밀이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숨기는 것은 지나친 결벽 증세이지만 그렇지 않은 삶의 내밀한 부분 곧 비밀은 나를 보호할 뿐 아니라 또한 타자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또 진실하게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고백하며 산다 해도 인간에게까지 비밀이 전혀 없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중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다. 이중적인 것과 비밀이 있는 삶은 다르다. 이중적이라 함은 겉으로 드러내는 자신과 비교해볼 때 실제 자신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의도적으로 숨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파악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오인하게 만드는 행동을 가리켜 이중적이라 한다. 만일 공개된 삶이 의도적으로 사생활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면 이중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밀이 있는 삶 자체를 가리켜 이중적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건강한 인격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굳이 타인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설령 알게 된다 해도 알고 있다고 알려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 관건은 인격적이고 친밀하며 상호 신뢰하는 관계이다. 이것이 확실하면 오해와 편견은 진실을 밝힘으로써 극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이것에 문제가 생길 때는 오해와 편견은 더 큰 오해와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