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慕情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때로는 영화보다 음악이 더 인상 깊을 수 있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It's the April rose that only grows in the early spring.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에요. 이른 봄 4월의 장미 같은 것이에요.) 소년 때 큰 고목나무가 있던 언덕에 올라가 이 노래를 부르면, 눈앞에 제니퍼 존스와 어떤 소녀의 얼굴이 오버랩되곤 했다. 그렇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우리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황금의 보관이다.
'모정(慕情)'의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나 애절하게 가슴을 후벼파고드는 이 노래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Best original song 상을 수상했다. 곡은 알프레드 뉴먼(Alfred Newman)이 작곡하고, 폴 후랜시스 웹스터(Paul Francis Webster)가 시를 썼다. 냇 킹 콜, 앤디 윌리엄스,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코니 프랜시스, 닐 세데카가 불렀고, 한국에서는 패티 김과 많은 가수들이 불렀다.
1955년 20세기 폭스사 작품으로 헨리 킹이 감독한 이 영화는 영국 식민지 홍콩을 배경으로, 특파원 마크 엘리엇(월리엄 홀덴)과 혼혈 의사 한수인(제니퍼 존스)의 사랑을 감명 깊게 그리고 있다.
의사인 한수인은 빅토리아 병원 파티에서 미국 특파원 마크를 만난다. '딕슨이 의사인 당신을 만나라고 편지에 썼던데, 안경쟁이 노처녀겠지 생각하였소'. 마크는 한수인이 놓고 간 부채를 건네주며 수작을 건다. '같이 식사나 하시죠. 나 괜찮은 사람이오.' '그러시겠죠. 하지만 저 당직이에요.' '언제가 비번인가요?' '중경에 계시는 숙부님이 처음 만난 외국인과 식사는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반은 영국인 이라면서요? 영국 여성으로서 재고해주시죠.' '그럼 병원으로 전화 주세요.' 수인은 동료 의사에게 엘리엇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자, '잘은 몰라도 기혼자라던데 왜 물어요?' 하고 대답한다. '그가 식사에 초대했어요.'
수인이 집에 오자 마크의 전화가 온다. '수요일도 당직인가요?' '오후엔 비번이에요.' '잘 됐군요 달맞이 축제에 갑시다.' '그럼 6시에 병원 앞에 오세요.' 이렇게 두 사람은 마크의 롤스로이스를 타고 부두로 가서, 밀짚모자 중국 여인이 젓는 정크를 타고 식당으로 간다. '북경에 가본 적 있어요?' '북경의 달이 세계에서 제일 크죠.' '북경은 언제 갔었소?' '1939년 북경대학을 다녔어요.' '난 그때 영국에 있었소. 이듬해엔 어디 계셨소?' '말레이.' '나는 이태리에 있었소.' '선생님과 나는 절대 만날 운명이 아니었군요.' '아니오, 우리 사이엔 운명 같은 게 느껴져요.'
요리를 시키고 창가에 앉아 달을 감상하는데 배들이 요란하게 폭죽을 터트린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소?' 마크가 묻고 '구름이 달을 가리지 못하도록 겁을 줘서 멀리 쫒는 거예요.' 수인이 대답한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마크는 '난 우리 사이에 운명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고 말하고, 수인은 '전 오직 의학에만 관심이 있어요. 남편은 국민당 장군이었는데 총살당했어요. 전 이제 여자가 아니라 의사예요' 하고 대답한다. '당신은 혼자만의 성을 쌓지만, 성은 높을수록 벼락을 맞기 쉬우니까.' '엘리엇 씨 전 벼락 안 맞아요. 보름달과 귀한 생선 고마워요.' 수인이 인사 후 헤어지려는데,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나는 기혼자요.' 마크가 말하고, '알아요.' 수인이 대답한다. '그러면서 초대에 응했소?' 묻자, '가정이 원만하면 문제가 안될 테고, 아니라면 상관이 없을 테니까요.' 수인이 대답한다. '또 만나 주겠소?' '아마 안될 거예요. 데이트는 한 번이면 족해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홍콩 바닥은 좁아요. 할 일 없는 여자들 입에 오르내리긴 싫어요.' '수요일에 전화하겠소.' 그러고 엘리엇이 수요일에 전화한다. '오늘 전화해서 식사나 함께 할까 했는데, 싱가포르에 갔다가 다음 주 돌아와요. 오면 전화해도 되겠지요?'
수인이 출근하자, '마크가 싱가포르에 간 이유를 알아요?' 동료 의사가 묻는다. '신문사 출장 이래요.' 하자, '그 참 편리한 이야기네. 싱가포르에 그의 아내가 있는 건 알아요?' 한다. 수인이 병실을 나오다가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마크를 만난다. '비번인 줄 아니까 오후에 같이 수영하러 가겠소?' 마크가 묻고, 수인은 해변가 친구 집 방문할 계획을 말한다. 그때 복도에서 병원 이사 부인을 만난다. '마크 엘리엇! 여긴 웬일이에요?' '저는 안 다니는 데가 없지요.' '싱가포르에서 부인 만나 반가웠겠어요. 오후에 차 마시러 오시겠어요? 나 벌레에게 물린 거 알아요?' '벌레 물린 건 몰랐어요. 죄송하지만 일이 있어서요.' '그럼 다음에 만나요.'
두 사람이 롤스로이스 오픈카에서 내린 곳은 기암괴석과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곳이다. 둘이 바위 뒤에서 탈의를 하고 나온다. '아내 일을 설명하고 싶소. 6년 전 아내는 내 꼴도 보기 싫다고 했고, 지금도 그대로요. 당신은 신중한 여인이니까 마음 정하는 건 천천히 하세요' 마크는 이렇게 말하고, '난 고독하다고 실수를 하진 않아요. 나에게는 일과 삶이 있어요. 제 친구 집이 저 건너에 있어요. 헤엄쳐서 건너갈까요?' 수인이 말한다.
두 사람이 바다를 건너 저택에 도착 친구를 만난다. '저 남자 누구야? 앙큼한 것, 시치미 떼지 마.' '좋은 사람이야. 싫은 사람과 같이 다니진 않지. 지성인의 인간적 교제를 꼭 그런 식으로 보아야 해?' 그때 '동서양이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크가 수인에게 춤을 청한다. 그 후 달빛 어린 바다를 보트 타고 건너오며,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소' 마크가 고백하고, '당신이 싫은 건 아니에요. 잠자는 호랑이를 깨우지 말라는 중국 속담이 있어요. 지금은 뭔가 아슬아슬해요.' 수인이 대답한다. 배가 백사장에 닿자 둘이 옷 갈아입으려고 바위 뒤로 갔는데 수인이 나오지 않는다. 마크가 가니, '생각 좀 하고 있어요. 제게 흐르는 동서양의 피가 싸우고 있어요. 담배 하나 주시겠어요?' 수인이 담배불을 붙인 후, '결심했어요. 당신은 친절해요. 당신을 따르기로 했어요' 하고 말한다. 마크가 헤어지며 '내일 어디서 만나겠소?' 묻자, '병원 뒤 언덕 위에 느티나무가 있어요. 거기서 5시에 만나요.' 수인이 대답한다.
다음 장면은 수인이 종종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늦었어요. 안계시기에 가버린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산맥이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간다. '홍콩은 보석처럼 아름답죠?' 치파오를 입은 수인이 풀밭에 누워 마크를 바라본다. 그때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와 마크의 옷에 앉는다. '당신 어깨에 나비가 앉아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마크가 고개를 돌리자 나비가 날아간다. '왜 그래요 좋은 징조였는데...' '의사도 미신을 믿어요?' '중국에서는 아들을 낳아도 여자 이름을 붙이지요. 풍년이 와도 논바닥에서 들어 누워 흉년이다 흉년이다 하면서 울지요. 신이 질투해서 행운을 뺏을까 봐 신을 속이는 거예요. 저도 지금 그런 심정이에요. 저도 신을 속이고 싶어요. 신이 제 행복을 보면 질투할 거예요' 수인이 대답한다.
다음 화면에서 '무슨 일로 전화했소?' 마크가 수인에게 묻는다. '내일 중경에 다녀오겠어요. 삼촌이 전보를 쳤어요.' '안 가면 안 되오?' '동생 수첸이 일이 생겼어요.' '안 가는 방법은 없소?' '부모님 돌아가신 후 한 번도 못 가봤고, 변해진 중국 모습도 보고 싶고, 잠시 당신과 떨어질 필요도 있고요.' '왜 떨어져요?' '현실을 직시해야죠. 착각하긴 싫어요. 내가 문란한 혼혈인가 자꾸 의혹이 들어요.' '마음이 변한 거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걸 몰라요?' 그러면서 마크는 '굳이 날 잊기 위해 중경까지 갈 필요 없소. 사라져 줄테니까' 화를 내며 문을 차고 나가버린다. 그러나 수인이 중경 삼촌집에 가자 마크가 나타난다. '당신을 영영 잊을까 봐 여기까지 따라왔소. 나와 결혼해줄 수 있겠소?' 청혼을 하고, '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하겠어요' 수인이 수락한다. 두 사람은 삼촌에게 허락을 구하고, 가족은 허락의 의미로 각각 몸에 지녀 분신이 된 옥을 선물한다.
홍콩으로 돌아오자, '공항에 온 김에 이혼 문제 해결하기 위해 싱가포르 다녀오겠소' 하고 마크가 떠난다. 그리고 '이젠 손톱을 안 물어 뜯게 됐소' 하는 전보를 보낸다. 마크는 스트레스 받을 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막상 공항에서 만난 마크의 표정이 어둡다. '전보 칠 때만 해도 좋았는데, 그녀의 맘이 변했소' 한다.
며칠 뒤 만난 마크는 '취재차 일주일 마카오에 가야 하는데,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을 수 없소. 같이 가줄 수 있겠소? 하고 묻고, 수인은 '예' 하고 대답한다. 두 사람이 외식을 하고 호텔에 오니 전보가 와있다. 마크는 전보를 보더니 '홍콩 가는 배 언제 있소? 예약해주시오' 라운지에 부탁하고, 수인에게 '짐을 빨리 싸요 북한군이 남침했소' 한다. '전쟁이 오래갈까요?' '2~3주?'
마크는 신문사로 가고 수인은 병원에서 마크의 전화를 받는다. '이제 막 항공편이 결정됐소. 만나줄 수 있겠소?' 수인이 '공항으로 나갈게요' 하자, '싫소 거기서 헤어질 순 없소. 30분 후 언덕에서 만납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언덕 위 나무 아래에서 만난다. 마크의 품에 안긴 수인은 공중의 새를 보며 '이 언덕이 최고예요. 다음 생엔 우리 새로 태어나요. 나는 당신 앞에서 바보가 될 거예요' '이제 가봐야죠?' 묻는다. '벌써 10분 지났소. 비행기가 날 기다려주진 않으니까. 선물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소. 슬퍼하진 말아요. 함께 내려가진 맙시다. 뒤돌아 보았을 때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소' 마크가 말하고, '돌아올 땐 여기 있을게요. 약속해요' 수인이 대답한다. 키스와 포옹이 끝난 남자는 총총히 언덕을 내려가고, 언덕에 홀로 남은 여인은 손을 흔든다.
'마크는 한국으로 떠났고, 난 병원에서 쫓겨났어. 잠시 너네 집에 지낼 수 있겠어?' 수인은 입양한 수양딸과 함께 친구 집에 몸을 의탁한다. 거기서 마크의 편지를 읽는다. '8번 편지 받았소. 달빛 아래 당신 편지를 읽었소. 밤이면 달이 멋져요.' 흙먼지 가득한 전선 모습도 보인다. '내일은 서울행이오. 길이 억망이라 엉덩이가 멍 투성이오.' 마크가 나무 밑에서 타이프로 이런 글을 쓰는데, 나비가 날아와 타이프라이터에 앉아 날개를 퍼득이다 날아간다. 그 순간 요란한 공습 사이렌이 울리며 적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수인이 마크를 위해 축수 기도문 쓰던 먹물 통이 떨어져 마루를 적신다. 데리고 왔던 수양딸이 통을 건드린 것이다.
이때 친구 앤이 신문을 들고 들어오다가 수인을 보자 신문지를 뒤로 감춘다. '무슨 일이야? 신문에 뭐가 났어?' '마크 애기야.' '죽었어? 포로가 됐어?' '죽었어.' '이건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수인은 신문을 든 채 밖으로 달려 나간다. 인파를 헤치고 언덕을 향해서 정신없이 달려간다. 언덕 아래 도착해 위를 바라보니, 거기 언덕의 나무 옆에 마크가 나타나 손을 흔들고 사라진다. 수인이 나무 옆으로 뛰어올라가 얼굴을 가리고 엎드려 오열하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가 나무에 잠시 앉았다가 사라진다. 이때 자막과 함께 '사랑은 아름다워라. 이른 봄 4월의 장미 같은 것이에요' 음악이 흐르면서 영화는 끝난다.
‘모정(慕情)’을 쓴 한수인은 1917년 9월 중국 허난(河南) 성에서 중국인 철도 엔지니어 아버지와 벨기에 귀족 가문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저우광후(周光瑚)이고 필명 한수인은 중국어 ‘한속영(漢屬英)’을 음역한 것인데, 뜻은 ‘중국인이 영국인이 됐다’라는 의미다. 그는 옌칭대(베이징대와 통합)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브뤼셀과 런던에서 공부했다. 논픽션과 소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썼는데, 본편은 호주 출신 기자인 남편을 한국전쟁에서 잃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작품이다.
(지구문학 2022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