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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7 - 징기스칸 사후 오고타이칸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차지하다!
1220년에 칭기즈 칸은 150,000명의 군대로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으로 진격하니... 막내아들
툴루이와 함께 직접 본대를 이끌고 부하라를 공격했으며 나머지 3개 부대는 오트라르등
주요 도시를 공격해 무너뜨린 다음 수도 사마르칸트에 집결해 1231년에 최종적으로 멸망시킵니다.
서방에서는 1223년에 칼가강 전투에서 러시아 공국 연합군을 격파한 제베와 수부타이는 다음해 회군을
시작해 호라즘을 압박해 들어갔고, 칭기즈 칸은 동방에 대해 1223년에 죽은 무칼리의 후임으로
그의 아들 보로를 국왕에 임명해 서하와 금나라 정벌을 지속했으니.... 역사에 보기 힘든 양면 전쟁입니다.
호라즘 1차 정벌을 마치고 카라코룸으로 돌아온 칭기즈 칸은 1225년에 4명의 아들들
에게 제국을 분봉했으니 이것이 4대 칸국의 시작이며, 그해 가을에 서하
를 완전히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정을 감행하였으니 제6차 몽골의 서하 침공 입니다.
서하 8대 황제 신종이 칭기즈 칸의 물자지원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몽골 영토를 침입했기 때문
인데, 서하는 지속적인 몽골의 침공과 자연 재해(지진) 로 나라가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이렇게 어려운때 금나라에 몽골을 함께 막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성이나서 금나라를 공격합니다.
서하의 금나라 공격은 대실패였고 군사만 잃었는데 금나라도 남송에 비슷한 실수를 했으니....
몽골의 습격으로 제국이 황폐화 되어 가는 와중에 남송을 공격했으니, 공격은 당연히 모두
막혔고 서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군사만 잃었으니 두 나라 모두 어리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서하 원정이 한참이던 1226년에 칭기즈칸의 절친한 친구이자 어린 시절 부터 테무친을 따랐던
보르오초가 병으로 사망하고 곧바로 다음해 1227년 장남 주치가 러시아 원정 중에 역시 병사
했으니 아끼던 사람 둘이 잇따라 사망함으로써 고령이였던 칭기즈칸의 충격이 컸으리라 추측됩니다.
1227년 7월, 서하 원정중 칭기즈 칸은 11월에 아르보카에서 낙마 사고를 당했으며, 이후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사고를 당했을 당시 칭기즈 칸은 이미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낙마는 굉장히 치명적
이었을 수밖에 없었으니《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이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칭기즈칸은 낙마후 투병 중에 악몽을 꾸고는 건강이 악화되고 있어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않았음을 직감
하고는 3남 오고타이와 막내 툴루이를 소환하여 오고타이를 차기 대칸으로 지목하고, 또한 차남
차가타이에게도 유명을 전하라고 명령했는데 당시 차가타이는 원정을 떠나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칭기즈칸은 죽기 전에 서하 정벌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서둘렀으며 한편 멸망의 위기에 처한 서하는
7월 9대 헌종이 죽고, 10대 황제 이현(말제)이 즉위했으니... 투병 중이던 칭기즈 칸은
중원인 금나라 공략을 무칼리의 아들 보로에게 맡기고, 중국 북부지방을 공신들에게 분봉했습니다.
1227년 봄 칭기즈 칸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군대를 이끌고 친정에 나서 서하의 수도 중흥부를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서하 황제는 말제 이현이었고, 재상은 야사감푸였으니 서하군은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피해가 커지자 6월, 말제 이현이 항복을 청했고, 1개월 간의 유예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야사감푸는 칭기즈 칸 앞에 끌려오자 목숨을 구걸했으나 칭기즈 칸에 대해 모욕을 한적이 있어
처형당하게 되자 야사감푸는 죽는 순간까지 칭기즈 칸에게 소인배라고 욕했으나 칭기즈 칸은
웃으면서 무시했으며 죽음이 임박했던 칭기즈 칸은 계략을 부려 서하의 투항을 받아들인다고
말했으며..... 그는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서하 황제가 출성하면 모조리 죽이라고 유언합니다.
칭기즈 칸은 1227년에 3남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임명하고는, 몽골로 귀환하던 중 쓰러졌고 7월 12일, 66세의
나이로 서하 부근의 영주 육반산의 군영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으며, 몽골군은 칭기즈 칸의 관을
들고 회군을 개시하여 초원으로 돌아와 대칸이 생전에 자신의 매장지로 선택한 부르칸 칼둔에
매장했는데, 몽골군은 운구 행렬 도중 조우하는 모든 생물을 죽여 칭기즈 칸의 매장지를 극비에 부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서하도 완전히 멸망하는데 서하의 마지막 황제 이현은 마침내 출성하여 칭기즈 칸의
게르 앞에서 알현 예식을 했고, 이후 대칸의 유언대로 모조리 학살당했으니 칭기즈 칸이
죽어가면서도 서하인들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탓에 현재까지도 그 후손이 없습니다.
살아남은 소수의 서하인들이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어 완전히 융화되었기 때문이니 원나라 건국후
적지 않은 서하인이 조정에 등용되었으며 요나라 유민인 거란족도 몽골제국의 지배를
거부한 이들은 서하인들과 다를바 없이 몽골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몽골 제국의
지배에 순응한 이들은 훗날 원나라 조정에 등용되었음을 감안하면 거란족과 비슷한 최후입니다.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아들들에게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
에서 공략하라" 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으니.....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과거 몽골에 침입해 몽골인들을 가혹하게 다스렸던 원한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은 아버지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 황하 이남의 개봉(현재 카이펑) 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
를 남송과 함께 양면에서 공격하였으며, 몽골군이 금을 공격하는 길을 빌리기 위해 흥원(한중)
일대에 다다랐을때 장선에 의해 수부칸이 죽자 분노하였고 몽골군의 공격에 남송은 수십만명이 죽습니다.
금나라는 남송에 구원을 요청하면서 '우리가 망하고 나면 다음은 너희들이다!' 라고 주장했지만 남송정권에
금나라는 옛 원한 때문에 몽골 보다 더 증오하는 나라였고, 결국 금나라 사신은 쫓겨나고 말았는데
금나라 입장에서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니 금나라는 하루빨리 남송을 정복하여 남송의 자원
을 바탕으로 몽골에 저항할 생각을 가졌으니 남송의 입장에서는 몽골이나 금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송도 북송 시절에 거란의 요나라가 휘청일 때 금나라에 길을 빌려주어 요나라를 멸망
시켰고(해상의 맹) 이후 금나라에 다시 밀려난 형국을 그대로 재현한 것과 마찬가지
였으니 결국 금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말제 완안승린이 금나라 애종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지 한나절 만에 몽골군에 잡혀 목숨을 잃음으로써 1234년에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몽골이라는 거대한 신흥 세력의 침공을 받으면서 서로 연합해야 했음에도
서하와 금나라 그리고 남송은 과거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서로 전쟁을
하다가 지쳐서 결국에는 몽골에 모두 다 망하니.... 그럼 몽골은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라?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1211년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의 10만
병력을 총동원했으니, 금나라 첫번째 방어선인 오사보를 공격했는데 수적으로는 금군이 훨씬
우세했으나 제베가 우회해 후방을 기습했고 여러 요충지에 분산 배치된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합니다.
오사보를 뚫은 몽골군은 완안승유 군대와 야호령 전투를 벌였는데 무칼리 별동군이 우회해 금군의 후위
를 위협하여 승리를 거둔후 회하보 전투에서 또 승리를 거두니 금나라는 세 전투에서 병력 35만명
을 상실했는데, 금군의 동원 병력이 90만명 정도가 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무려 1/3 이상을 날린 것입니다?
몽골군은 만리장성의 관문 거용관에 도착했는데 수도 중도 대흥부(베이징)에서 50km 떨어진 최후의 관문
이었기에 금나라에는 최전방이었고, 금군은 거용관 근처 100리에 마름쇠를 깔아놨지만 몽골군이
샛길로 우회해 거용관을 뚫었고, 수도 중도 부근까지 도착했지만 구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퇴각합니다.
칭기즈 칸은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를 시켜 대동 인근의 도시를 초토화시켰고, 목초지를 급습해
군마를 모두 빼앗는 바람에 이후 금나라는 보병 위주로 군사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는데....
금나라는 요동에도 목초지가 있었으니 거란족과 사이가 좋았다면 기병을 양성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금나라는 요동이나 화북 지역의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고, 거란족이 몽골과 손을 잡는다는 소식을
들은 위소왕이 거란족의 부족장을 죽이고 백성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 탄압정책을 시행했기에
요나라 황족의 후손인 야율유가를 필두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동요를 세우는 바람에 실패합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금나라는 60만 대군을 일으켜 포선만노로 하여금 진압하게 했지만, 보병 위주인
금군은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야율유가의 부대에게 참패했으며 몽골군은 다음해인 1212년 다시
금나라를 침공했는데, 칭기즈 칸의 본대는 대동을 포위해 구원하러 온 금군을 격파했으며,
제베의 부대는 동경요양부를 함락시켰지만 칭기즈 칸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으니 변경으로 후퇴합니다.
1213년 7월, 몽골군은 재침공했는데, 이전에 한번 뚫린 탓에 철벽 방어를 갖춘 거용관을 피해 다른
관문인 자형관을 뚫은 뒤 수도에서 온 구원군을 격파했고, 별동대를 보내 후방에서
거용관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금나라 수도인 중도를 포위했고, 화북 지역의 성들을 초토화시킵니다.
중도 포위가 1214년까지 계속되자 금 선종은 막대한 세폐 및 자신의 딸과 부인을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했고 몽골군은 철수하자.... 금 선종은 고려가 항복후 강화도로 천도했듯 6월에
수도를 중도에서 방어가 용이한 남쪽의남경 개봉부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면서 중도도
지키도록 하니 칭기즈 칸은 중도를 포위했고, 무칼리에게 대정 부근의 요하 일대를 공략하도록 합니다.
1215년 무칼리는 20만명의 금군을 격파하고 대정을 점령했으며, 요하지역을 초토화시켰으니 이전에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포선만노는 반란 세력이자 동요를 건국한 야율유가에게 2번이나
패퇴한데다가 금나라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화북 지역과 만주 지역으로 영토가 나누어져
본국과 연락이 끊어지니 독립해 천왕이라 칭하며 대진을 세웠고, 칭기즈 칸은 중도를 함락시킵니다.
한편 동요를 세운 거란족 야율유가는 몽골에 정식으로 복속을 선언했지만, 자신만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길 원했던 동생 야율시불을 위시한 일부 거란족들은 불만을 갖고 야율유가를 축출한뒤
남쪽으로 내려가서 후요를 세웠으며 몽골을 등에 업은 야율유가가 압박을 가하자 고려를 침공합니다.
칭기즈 칸은 1216년에 서요, 1219년 호라즘 왕국을 침공하면서 몽골 주력군은 서방 전역으로 차출되고 중국
에는 무칼리가 이끄는 소규모 몽골군만이 남았는데, 2만명의 몽골인과 5만명의 타민족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무칼리는 1218년 산동과 대정 일대를 점령했으며, 동하 및 고려와 연대해서 후요를 궤멸시킵니다.
한편 금나라는 오래전 400년에 전진에 수도(베이징)를 뺏긴 후연이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를 침공
했듯 30여년간 휴전상태에 있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국력만
낭비했고, 남송의 적개심만 키웠을뿐만 아니라 그동안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막대한
세폐가 끊기면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는 중에 또한 서하도 금나라를 공격해 오니 사면초가 라?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오고타이칸은 금나라에 화평 사절을 보냈으나,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하니 격노한 오고타이 칸은 금을 침공하기로 결정하는데, 당시 황하 북부의 대부분은
몽골에 넘어가 있었고, 금나라의 영역은 서쪽의 시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의 낙양과 남경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길고 넓은 띠 모양으로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황하 연안과 수도 남경(개봉) 근처의 금나라 영토는 강과 수로, 요새들이 겹겹히 있어서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이 마음대로 활동하기 힘들었으며, 금나라의 남쪽 국경은 상대적으로
기병이 활동하기 수월했지만 몽골이 그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통로는,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
한 뒤에 그물 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인 남경(개봉)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서쪽으로 움직여서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금나라는 낙양에서 남경(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 공격에 대비했으니, 금나라의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했고,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한명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명군
의 자질이 있었던 애종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오고타이 칸은 장안에서 시작하는 두번째
루트를 선택했는데, 이를 위해 몽골의 명장인 수부타이에게 동관을 공략하라고 명령
하니, 금나라의 장수 완안진화상은 감옥에 18개월간 갇혀 있었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금 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해 몽골군에 맞서 싸우는 선봉으로 내세웁니다.
완안진화상은 대창원에서 400명 병사로 20배에 달하는 8,000여 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격파했으니...
몽골군이 1221년에 벌어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였는데,
파르완 전투가 6만명 병력이 소수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큰 대승리 였습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가 충효군(忠孝軍) 이니 금나라 말기의 정예부대로,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부, 강족, 위구르족, 기타 거란족, 여진족 등까지 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 전력이 부족했던 말기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습니다.
충효군은 전투력이 강해도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는데, 완안진화상은 부대의 규율을
바로잡고, 민간인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도 막았는데, 다음해인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공세를 개시했으니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고 했습니다.
동쪽에는 한인 출신 장군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에 남아있던 금나라
영토인 위주(衛州)를 공격했는데..... 이러한 몽골군의 양동 공격에 대응하여 금나라는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 가 지휘하는 일군을 서쪽으로 보내 경양을 구원
하는 한편,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명의 대군을 파견해 위주를 돕게 합니다.
금군은 또 대창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했으며, 이랄포아는 위주로 이동하여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했으니, 동쪽의 금군은 수적 우세에 힘입어 서전에서 몽골군을 격파할수
있었는데, 패배한 몽골군은 북쪽으로 물러가면서 일부 군대를 금군의 배후로 은밀히 이동시켰으니
금군의 후방을 급습하는 동시에.... 후퇴하던 몽골군이 역습을 가해 금군은 크게 패했고, 위주를 뺏깁니다.
서쪽 전선에서는 이랄포아가 위주를 구원하러 이동한뒤 몽골군이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 대창원
을 함락시켰고, 당황한 금군은 장안을 포기한후, 모든 인구를 동쪽으로 피신시켰는데
금나라는 장안의 동쪽 동관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완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1,000명 병력은 도회곡에서, 수부타이가 이끄는 동관을 우회한 10만명의 몽골군을 격파합니다.
동관의 서부를 장악한 몽골군은 여름을 보낸 뒤, 툴루이 제안으로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금나라의 수도
남경(개봉)을 공격했는데,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은 황하를 도하하거나 산악지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니 이를 타개하기 위해 툴루이가 지휘하는 서군은 금군이 집결해 있는 동관을 크게 우회합니다.
툴루이는 한중을 돌파해 남송의 영토를 통과한 뒤,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부터 남경을 급습하기로
했는데, 그동안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북군은 낙양과 남경(개봉) 사이 몽골 영토에 대기하다가
금군의 관심이 서남쪽의 툴루이에게 쏠리는 사이에 안전하게 황하를 도하할 기회를 엿보기로 합니다.
툴루이가 한수를 건너자 완안진화상은 동관 수비병을 제외한 금나라 정예병 20만명을 이끌고 몽골군
을 격파하려고 했으니.... 금군은 한수 건너에서 벌어진 몇차례의 전투에서 격렬하게 싸운 끝에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몽골군의 기동력 때문에 잠시 시간을 늦췄을 뿐 이었습니다.
한수(漢水)를 건너는데 성공한 툴루이는 금군이 주둔한 곳을 우회해 남경(개봉)으로 진격하니 금군도 남경을
향해 진군했지만, 몽골군이 인근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기습전략을 펼쳐서 금군이 남경까지 휴식없는
강행군을 하게 만들었고..... 또 거센 비와 폭설까지 내리는 바람에 금군은 굶주리고 서서히 지치기 시작합니다.
금군이 남경(개봉)에서 120km 떨어진 균주성 삼봉산(三峰山)까지 도달했을때 몽골군이 금군을 포위했으니
균주 방향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많은 금군이 탈영해 균주성 방향으로 흩어지자 몽골군은 기습
했으니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명장 완안진화상도 몽골군에게 스스로 찾아가 죽음을 당합니다.
황하 이북이 무주공산이 되자 북쪽에서 대기하던 오고타이 칸은 황하가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친위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남쪽으로 진군하여 툴루이와 합류하니,
몽골군의 군세는 5만명까지 불어났고 마침내 몽골군은 남경을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1232년에 남경(개봉) 에 도착한 몽골군은 주변 참호를 메꿔서 장애물 을 없애고,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돗토리성으로 피난민들을 몰아넣읐듯 당시 남경은 피난민
까지 합쳐져서 인구가 막대하게 불어났고..... 양식이 떨어지는 속도는 이전 보다 더 빨라졌습니다.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등 화약무기로 몽골군에 거세게 저항해 전투가 장기화되어 피해가 커진 수부타이는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렸는데, 몽골군은 물러갔지만 양식이 부족해졌고, 100만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굶어죽어갔으며.... 식인을 하는 행위가 벌어지는등 생지옥이 펼쳐집니다.
금나라에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응해 명장 맹공을 필두로 한 3만명의 군대와 30만섬의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하면서 전쟁은 금나라에게 완전히 불리해졌으니,애종은 남경(개봉)을
버리고 채주로 피신하자,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남경성을 포위했고, 황제마저 떠난 남경은
저항력을 상실하여 최립이라는 장수가 남경성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몽골군에게 함락되고 맙니다.
채주도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무선이 남송의 사천 지역을 빼앗아 그곳을
거점으로 재기하려고 했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전군이 복멸되고, 무선은
도망치니 몽골군은 채주까지 진격했고, 맹공의 남송군 까지 합류해 채주성을 포위합니다.
연강과 시담호 두개의 물줄기를 점령한후 채주 쪽으로 돌리자 채주는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하여 생지옥이
되었으니, 1234년 애종은 황족 완안승린에게 제위를 양위했고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린후, 공격해 올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니 금나라는 1234년에 멸망합니다.
칭기즈 칸이 죽은지 7년만에 유언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는 1227년 여름 서하를 공격하던중
항복 직전에 죽은후 시신을 고향으로 운반하는 40일 동안 마주치는 사람은 다 죽였으며
매장한후 800명의 기병이 땅 주변을 여러번 밟아 흔적을 없앴고 저 800명은 누설하지
못하도록 다른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수백제곱킬로미터 땅은 폐쇄해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칭기스칸은 4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주치와 손자 바투는 러시아를 공격해서 킵차크한국을 세웠고
차남 차가타이는 차가타이한국을 거쳐 후손은 인도로 들어가 무굴제국을 세웠으며 3남 우구데이의
후손은 오고타이칸국 그리고 막내 툴루이의 아들인 쿠빌라이는 중국을 점령해 원나라를 세웠고
쿠빌라이의 동생 훌레구는 이란에 일한국을 세웠으며 막내 아릭부케는 몽골초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몽골인들은 도시나 성벽의 건설은 우습게 보았지만 강에 다리는 많이 놓았으며 독일의 공부들을 중국
으로 데려오고 중국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데려갔으며, 가는곳 마다 양탄자를 퍼뜨리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식했으며 국수, 카드, 차(茶)를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파리의 금속세공 장인들을 데려와 몽골 초원에 분수를 만들었으며 영국의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하고, 지문을 찍는 중국 관행을 페르시아에 옮겼으며 중국에 기독교 교회를 건립하고
페르시아에 절과 탑을 만들었으며 러시아에서 쿠란을 가르치는 이슬람 신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습니다.
중국과 페르시아 및 유럽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중국의 화약과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시킨후 유럽 교회의 종 주조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무기 대포가 탄생했으니,
권총에서 미사일 까지 방대한 근대 무기의 발전이 몽골인 으로 부터 시작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