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정 이지함 土亭 이지함
이지함의 풍모는 신장이 보통 사람보다 크고, 골격이 건장하였으며, 얼굴이 검고 둥글며 풍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패랭이(蔽 陽子)와 쇠로 만든 갓(鐵冠)을 쓰고, 짚신에 죽장을 짚고 다녔다는 기록이있다. 그가 태어난 보령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2일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당시 민중들은 그가 축지법을 쓰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식사 때는 한꺼번에 말밥을 먹고, 길 양식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아 그는 이인(異仁)으로 여겨졌다. 그는 고관대작이 있거나 말거나 언행동작이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며, 해학,기지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웃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지함의 화려한 家門
이지함은 오늘날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동의 한산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사대부 명문가이었다. 고려 말의 충신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과 이곡(李穀)을 비롯하여, 선조 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가 그의 조카이었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토정 이지함의 7대조가 된다.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은 고려말과 조선 초를 걸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색의 아들 종선(種善)은 종1품 좌찬성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후 이지함의 가문의 영예는 조금 퇴색하는데, 조부 장윤과 부치는 각각 현감과 현령 직에 머물렀다. 또 이산해는 이지함의 兄인 "백의 재상" 이지번(李之蕃)의 아들로 후에 北人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지함이 죽은지 100여 년이 지난 1686년 숙종이 화암서원(花巖書院)이라는 사액서원을 내렸을 만큼, 한산 이씨 가문은 후세에까지 명망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奇人 이지함
이러한 가문으로 보면 이지함은 성리학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대부로 살아야 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명문가 자제의 기품이 흘러야 했다.그러나 이지함은 기품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부러 관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는데, 포졸들이 아무리 끌어내려 해도 이지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행동도 예사롭지 않았지만 더 기이했던 것은 그의 행색이었다. 그는 나막신을 신고, 머리에 솥을 뒤집어쓴 채 돌아다녔다.
이런 행색을 하고 매맞기를 자청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지함이 이처럼 튀는 행동을 한 이유는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손가락질 하며 놀렸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지함 다시 보기
토정 이지함... 그는 그 인물의 역사적인 위상보다도 그의 저술로 알려진 "토정비결"에 관심이 집중되거나, 그의 奇人的인 풍모만이 野史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또한 임꺽정 등의 소설 속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대중들에게 친숙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지함에 대하여 대중적인 친숙성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은 실정이다. 그는 16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이며 思想家이었다.
그가 제시한 국부증진책과 민생 안정책 같은 사회경제사상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으며, 實學의 원류로까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주자 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면서 부강한 조선을 위하여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제시하고 실천하였던 실학자이었다.
점술이나 관상비기(觀象秘記)에 능했던 이지함의 사상적 성향,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후대에도 길이 기억되면서,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주인공으로 남았고, 현재까지 그 이름이 회자하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토정비결에 투영되고 있는 이지함의 이름 석 자는 백성의 편에 서서 살았던 한 지식인을 후대에까지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이지함이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野史類의 책에 그에 관한 기록이 풍부한 것에서도 발견된다.
대동기문(大東奇聞 ...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일화를 모은 책)에는 이지함이 스스로 상업행위에 종사한 일과 거지 아이에게 옷을 벗어 준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동패락송(東稗洛誦)에는 이지함이 괴상한 행동을 하다가 노인의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계집종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했다는 이야기, 음률(音律)을 아는 이인(異人)과 장도령을 만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는 모두 이지함이 민간에서 격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응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지함은 스스로에는 철저히 엄격하였으나, 일반 사람을 접하는 데는 매우 온화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질 또한 민중들을 쉽게 만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토정 이지함(土亭 李知함)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 시호는 문강(文康)이다.생애의 대부분을 麻浦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서 토정(土亭)이라는 號가 붙었다.고려 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北人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之士 .. 재야의 인물)로 이율곡에 의해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해 사직하였다.1578년 아산 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民生 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박순(朴淳), 이율곡, 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마포로 이지함을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였고, 鑛山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이지함은 朱子性理學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道家的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跡)"에도 소개되었다.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율곡은 "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奇人的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이지함, 시대적 배경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시기는 시대적으로 燕山君의 폭정에서 중중반정(中宗反正)으로 士林派가 중앙정계에 뿌리를 내리다가, 기묘사화(己卯史禍)로 조광조의 지치주의적 왕도정치 실현이 실패하여, 여기에 참여하거나 관련된 신진 사대부가 제거되고, 뜻있는 선비는 과거를 포기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이지함에게 기인(奇人)이라 불릴만한 개혁적인 행적을 남기게 하였는지 모른다.
이지함이 살던 조선 16세기 중반, 백성들의 생활고는 매우 심각하였다. 그동안 과전법 제도가 무너지면서 양반들은 마구잡이로 土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토지에서 내몰렸고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였다.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는 일에는 왕실도 앞장섰다.
임꺽정
어린 明宗을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왕실 소유의 토지를 늘려갔다. 땅을 잃은 농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양반들의 땅을 빌어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잇었지만, 제 손에 들어오는 돈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웠다.
굶주림과 虐政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도적이 되었고, 이 도적떼는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명종 시절 조선을 혼란으로 몰아 넣었던 임꺽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백성들의 삶을 救하고자 했던 이지함, 그는 농사 지을 땅에만 의존하던 조선사회에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남기는 상업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徐敬德의 門下가 되다
이지함이 상업에 눈을 뜨면서 찾아갔던 곳이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이었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이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였던 개방적인 학풍을 견지한 지식인 그룹이었다. 이는 서경덕과 그 제자들이 開城 출신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되는데, 개성지역의 활발한 상업활동을 통해 이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개성사람들은 양반도 상업에 종사하던 상인이었고, 또 서경덕의 제자들 중에는 실제로 상인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어떤 사상은 상업에 대해서는 다른 유학자들에 비하여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또 더욱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는 농업에 근간을 두었고, 농업에서 생산된 것으로 국가재정을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門下에 들어가서, 농촌경제에만 한정되지 말고 상업이라든지, 수공업,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통한 전반적인 국가경제의 富를 창출하고 그 창출된 富의 혜택이 백성들의 생활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그런 사회를 구상하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보다 200년 먼저 주장한 國富論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스미스 ... 그는 국민들을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의 富를 키워야 한다는 이른바 "국부론(國富論)"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지함은 아담 스미스보다도 200년이나 더 앞서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다.
이지함은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기위해서는 해외 통상과 자원의 개발 같은 농업 이외의 경제정책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명분 중심의 성리학과 봉건적인 질서가 견고하였던 조선사회에서 이지함은 이처럼 선진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이지함의 선구자적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이지함의 생애
이지함은 1517년(중종 12) 9월20일, 외갓집인 충남 보령군 청나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이곳 장산리는 고래로부터 산자수명한 곳으로 광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유명했다.이곳은 이지함의 작은 외삼촌 김극성(金克成)이 중종반정 때 4등功臣이 되어 60結 ( 1結은 30석)의 땅을 功臣田으로 받아 생활이 윤택하였으므로 그의 집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토정은 부친 이치(李穉)가 41세에 낳은 막내로 귀염둥이로 자랐다. 토정은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16세에 모친을 잃었으며, 3년동안 형 이지번(李之蕃)과 같이 여막살이를 하였다. 이때 큰형 이지번이 家長이 되어 살림을 꾸려나간 것은 물론 토정에게 글을 가르쳐 주어 토정의 아버지와 스승 역할을 하였다. 兄 이지번은 토정보다 9살이 위이었다.
3년의 여막살이를 마친 토정은 형 이지번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지번은 외삼촌 김극성의 추천으로 노비를 관장하는 장예원(掌隸院)에 근무한다, 이때 이지번은 세자 (훗날 仁宗)을 만나는데, 세자는 이지번을 白衣宰相이라 칭찬하였다.
토정이 23세 되던 해인 1539년 큰아들 산두(山斗)가 태어난다. 부인은 모산수(毛山守) 정랑의 장녀이었다.이지함에게는 산두, 산휘, 산룡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산휘는 호랑이에 물려 죽었고, 셋째 산룡은 12살 때 역질로 죽었다. 그리고 이지함에게는 서자(庶子) 산겸(山謙)이 있었는데, 이 아들만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서 의병을 일으키고, 적군을 토벌하는 등 의병장으로 신망이 높았지만, 우성룡과 선조의 의심을 사서 역적 혐의로 몰리기도 하였다.
같은 해 큰형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李山海), 작은 형 이지무의 아들 산보(山甫)도 태어난다. 토정은 산해와 산보에게 5살 때부터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산해는 신동으로 명필이어서,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섰다고 한다. 이때 경원대군(후일, 明宗)은 이퇴계를 시켜 이산해의 글씨를 얻어오라고 하여 이때부터 이퇴계와 이지함, 이지번의 교유가 시작하게 된다.
이지함, 科擧를 포기하다
토정은 처음에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결혼 후 兄 이지번의 권고로 발분하여 침식을 잊는 열정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토정집(土亭集)"에는...
소년 때에 글을 배우지 않더니, 장성하여 그의 형 지번이 글 읽기를 권하니 곧 분발하여 부지런히 배워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오래지 않아서 글뜻을 능히 통하게 되었으나, 科擧는 보지 않았고.스스로 방일하기를 좋아 하였다. 이율곡과 더불어 서로 매우 친숙하게 알고 있었다. 이율곡이 성리학에 종사하기를 권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서 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 후 토정은 개성에 사는 서경덕의 제자가 되어, 이곳에서 동갑내기인 허엽(許曄 ..허균의 아버지로 후일 東人의 영수가 된다)과 동문수학하게 된다. 이때까지 토정은 과거에 급제할 실력은 충분하였으나, 스승과 같은 兄 이지번이 1546년(명종 2)에 나이 39세에 진사에 합격하자, 토정도 다음 식년시에 과거를 보기로 한다.
그러나 명종 즉위년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大尹 尹任)과 소윤 윤원형(小尹 尹元衡)의 반목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을사사화(乙巳史禍)가 일어났고, 여기서 명종 4년, 이지함의 죽마고우인 史官 안명세(安名世)가 이 을사사화가, 윤원형, 이기 등 소윤 일파가 억지로 죄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매질을 하여 만든 獄事라고 적어 놓은 것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자, 이지함은 과거를 포기한 채 떠돌게 된다.
이홍남(李洪南)의 고변 사건 .. 토정, 양반에서 천민으로
이렇듯 정치적 난국으로 큰 실의를 느낀 이지함이 장인과 처남의 운수를 짚어보니 불길한 기운이 있어, 그는 형에게 "내가 妻家를 관찰했더니 吉한 기운이 없습니다. 이에 피하지 않으면 禍가 장차 나에게까지 미칠 것이오"라고 말하며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곧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이른바 이홍남(李洪南)의 고변 사건 또는 청홍도 사건(1549. 명종 4)이다. 이는 형제인 이홍남과 이홍윤(李洪胤)의 감정 대립이 불러온 역모 고변사건이었다.
당시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이 사건의 전말을 보면, 이홍남은 동생 이홍윤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고변하게 되는데, 이 역모 사건의 수괴로 이지함의 丈人인 이정랑이 걸려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지함의 妻家는 풍비박산이 났고, 이지함도 연좌법에 의해 양반의 신분에서 賤民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후일 사면되었다.
이지함은 그의 절친한 친구 안명세와 장인의 죽음으로 삶이 바뀌게 된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종종 기괴하고 괴짜같은 모습으로 다니기를 좋아했고, 머리에 솥을 쓰고 다니며, 나막신을 신고 다니면서 관군들의 길을 막고 누워버려 매맏기를 자청하는 기괴한 행동을 보였다.
이지함의 이러한 괴이한 행동은 실록에도 기록될 정도이었다. 이후로 이지함은 기나긴 유람을 시작한다, 그럴만큼 당시는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지함은이 유랑기간 동안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뜻을 품는다.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죽마고우인 안명세(安明世. 1518~1548) 사건과 청홍도 사건은 이지함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지함은 이때부터 처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았다. 또 서해의 고향 앞바다 섬에 들어가 박(珀)을 심었다가 가을에 수확해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지함은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갓 대신 솥 비슷한 철모를 쓰고, 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포강가에 흙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市場이 최초로 만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로, 그는 여기서 마포의 상인들과 어울리며 장사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고향 앞바다의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재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이렇게 해서 수년 만에 수천 섬의 양곡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양곡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실학사상의 기초가 된 무역과 상업론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지함의 묘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이지함이 생전에 미리 터를 정해두었다고도 하고, 이지함의 3형제가 모친의 喪을 당하여 선영의 묘를 이장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명당임을알 알았다고 한다. 봉분 둘레 100m, 높이 1.5m로 묘소에는 비석과 문인석이 있다. 묘비는 화강암이며 직사각혀의 대좌와 비신이 있다. 비신은 높이 132cm, 너비 52cm, 두께 17.8cm이며, 낮은 산허리에 있다. 서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이다. 유언대로 碑文은 간략하고, 문인석은 치장이 거의 없는 매우 검소한 모양이다.
토정 이지함의 가족묘터는 1532년 어머니상을 당할 때 처음 정해졌다. 이때 2년 전 다른 곳에 모신 아버지묘를 이곳에 합장하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예언하였다. " 향후 우리 형제 (지영, 지번,지무)는 기해년 (1539년) 귀득자(貴得子) 하고 후손 중 일품직(一品職 .. 영의정)이 나올 것이다 " 라고 예언한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기해년에 형 이지번이 후일 영의정이 되는 이산해(1539~1609)를 낳고, 자신도 장남 이산두를 낳았다. 모두 크고 작은 벼슬을 하여 예언이 맞아떨어진다.
임진왜란을 예언하다
훗날 이지함의 행적을 모아 후학들이 남긴 책인 "토정유고(土亭遺稿)"... 이 책에는 이지함이 임진왜란을 예언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76년 이지함은 제자들을 만나 15년 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十五年後流血千里.... 전쟁에 대비하여 미리부터 준비하고 계획을 세울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16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마포구 토정동
19세기 서울지역을 그린 지도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이다. 당시 한강변의 마을 한 곳에서 이지함의 호를 따라서 붙인 토정(土亭)이라는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한강을 따라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 선 마포구 일대 이곳에는 아직도 토정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포대교 입구에서 상수동을 이어지는 이 길은 토정로(土亭路)라 불리고 있다.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집터이다.
당시 마포는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이었다. 해상 교통에 의존하던 조선시대, 바로 이 한강변의 나루터는 중요한 교통요지이었다. 그 중 마포는 수상 교통의 유통량이 가장 많은 물류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서울로 들여오는 쌀과 곡물, 해산물, 목재, 특산물 등이 이곳 마포나루로 직결되었고, 그만큼 상업의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해상무역의 교두보 같은 바로 그런 거점 지역이 마포의 토정이었던 것이다. 이지함이 이곳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해양 자원의 개발, 수산업, 배를 이용한 유통경제, 상업 활동 등 이러한 부분에 충분한 이해가 있었고 또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삶의 문제를 직접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살천하였던 이지함의 터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곳은 지대가 매우 낮고 물이 차있는 그런 쓸모 없는 땅이었다. 그 땅에다가 토정 이지함은 가난한 백성들을 모아서 그 땅을 흙으로 메우고 거기다가 집을 짓되 흙집을 짓고 이름을 토정(土亭)이라 한 것이다, 집이 아니라 흙정자인 셈이다.
그는 풍모만큼이나 사는 모습도 남달랐다. 스스로 척박한 땅에 들어와 보잘 것 없는 흙집 하나에 이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1549년 이지함의 나이 33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이지함은 그의 형을 찾아와 다급하게 말을 전한다. 이지함은 妻家에 닥칠 불길한 기운을 예감하고 피신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어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저에게 미칠 것 입니다.바로 그날 밤 이지함은 식솔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났다. 날이 밝으면 분명 위험한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서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이지함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이른바 이홍난의 고변이라 불리는 역모사건에 장인이 끌려가 무고한 죽음을 당한다.
이지함의 학문사상
이지함의 학문사상은 그 폭이 넒어 유학사상에 더하여 노장(老莊)적인 道家를 비롯하여 제자백가 사상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지함은 " 자신은 요성(妖星)을 오히려 서성(瑞星)으로 본다"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로 인해 人心과 세상의 道理가 쇄신되고 조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이지함은 당당한 명문가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반 민중 (四民 ..士農工商) 가운데 가장 천시 받던 商人의 직업을 취해 장사를 하면서 "나라도 못 구한다"는 민중들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애썼던 인물이다. 그는 먹을거리 양식과 관련하여 상소문에서 " 임금이 된 이는 민중으로써 하늘을 삼고, 먹는 밥으로써 하늘을 삼는다 "고 하는 "서경(書經)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서경"의 " 민중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말 그대로 상소문에 인용하면서 " 밖으로는 강적이 있고, 안으로는 원통한 민중이 많으니, 혹시나 위급한 일이 있게 된다면 능히 구제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한 것은 어쩌면 임진왜란의 예고처럼 들린다.
일찍이 공자가 말한 " 도(道)가 있는 세상에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道가 없는 세상에서 부귀한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이라고 하였는데, 토정 이지함은 " 의리와 이익은 사람에 따라 판단된다. 만약 흉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예법을 지키게 한다면 이른바 예법이라는 것도 다 의욕이 되는 것이다 " 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산현감 재직 시에 고을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양어장을 메운 다음 이를 폐해 버렸다. 당시 각 고을에는 토산품을 바치는 공물(貢物)의 폐해가 심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문제를 백성의 입장에서 과단성 있게 해결하는 모습을 실천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이지함의 선정비를 세우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부모가 죽은 것처럼 애통해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大同의 구현
토정 이지함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일화가 있다. 그가 신혼 때 처가에서 밖으로 외출하였다가 돌아왔는데, 저고릿바람이었다. 신랑의 도포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그의 아내와 집안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 거지 아이 셋이 추위에 얼어 병든 것을 보고, 띁어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왔다 "고 하였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효성과 우애가 깊어 형제간에 가난과 부유함을 서로 같이 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사유하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했으며, 남의 급한 일을 보면 힘써 구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지함의 성품에서 유교의 이상향인 대동(大同)사회를 희구하고 실천한 애민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지함은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를 실천하였는데, 서해의 고향 앞 바다에서 10여 년 동안 고기와 소금을 굽고(魚鹽), 손수 재배한 박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마포강변의 민중을 구제하였다.
포천 현감, 이지함
지금까지 기인(奇人)으로만 알려져 온 이지함.. 그런데 그에 관하여 전혀 뜻밖의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담은 대표적 저서인 북학의(北學義) ... 청나라의 문물 수용과 상공업의 개발을 주장하였던 박제가(朴濟家)가 지은 책이다. 바로 이 책에 토정 이지함의 이름이 등장한다. 해외 통상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지함..
이지함, 57세에 포천현감이 되다
벼슬을 하지 않고 在野에서 성리학 이외의 다양한 학식을 접한 그는 1573년(선조 6) , 57세가 되던 해에 宣祖의 등극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천거되어 청하(淸河 ..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다. 그의 나이 60세가 다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얻었다. 재야에서 학문을 얻고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며 이지함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 그 오랜 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려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중에서)
부임 첫날밤, 진수성찬으로 차려온 밥상을 받은 이지함은 衙前들을 꾸짖는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는데,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런 진수성찬을 먹는 것에 대해 탓하며 오곡밥과 나물국 한그릇만 담아 올리게 하였다.
그가 고을현감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문책하는 일이었다.그는 관료들을 문책하는 방법도 남달랐다. 나이에 상관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게 하였다. 德이 부족하여 아이만 하지 못하니 스스로 느끼고 뉘우치라는 의미에서였다.
토정 이지함이 목격한 백성들의 삶은 기막힘 그 자체이었다. 포천은 토지가 척박하여 기본적으로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하였다. 고민 끝에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포천현의 가난을 구제할 방도를 적은 것이다. 은, 옥, 물고기, 소금 등 자원을 개발하여 우선 빈민구제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조선 사회의 이념이지만, 재물과 이익도 좋은 마음으로 사용하면 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義와 利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 나쁜 사람이 악용을 하면 욕심을 채우는 것이 되지만, 선한 사람이 사용한다면 재물과 이익도 모두 덕이 될 것입니다.
義와 利를 대립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국가와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정치를 펼 수 있다는 생각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을 직접적으로 현감직을 맡으면서 실천하려고 했다는 점, 이러한 점에서 이지함은 아주 뛰어난 학자적 관료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 이상 뜻을 펼칠 수 없자 이지함은 부임 1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청하현감 부임 직후 그는 백성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고자 당시 왕실 외척 및 중앙조정의 훈구파들과 결탁한 지방관리들에 의한 부정부패로 백성들이 굶주려 배고픔이 참을 수 없는 지경임을 사실적으로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상소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자 이규경(이규경) 또한 이런 이지함의 선구자적 면모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지함은 포천현감 재직 당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왕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王者以民爲天 民以食爲天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
이지함은 당시 포천현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포천현의 형편은 이를테면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五腸)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
1574년, 抱川縣監 時 上疎文
산과 들에 헛되이 버려져 있는 銀은 무엇이 아까워서 주조를 못하게 하며, 玉은 무엇이 아까워서 채굴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바다 속에 무궁무진한 물고기는 무엇이 아까워서 잡지 못하게 하며, 갯벌에 무궁무진한 소금은 무엇이 아까워서 굽지 못하게 하십니까?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간수해 둔 창고입니다. 이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실물이니 이것을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진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이 자원의 창고를 열 수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限이 없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전라도 만경현에 섬이 하나 있습니다. 소금에 대해서는 황해도 풍천부 근처에 섬도 있습니다. 이 섬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소속된 적이 없다고 하니 포천현에 임시로 빌려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이것들을 팔아 곡식을 마련한다면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산물을 오직 그 고을에서 취하여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을 취용(取用)하지못하게 하니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타도나 타관일지라도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는데, 바다가 없는 포천이 海物을 다른 고을의 경계 안에서 채취하는 것은어찌 불가하다고 합니까? 전라도 만경현 (현, 김제) 양초주(洋草洲)와 황해도 풍천 초도정(椒島井)을 포천이 빌려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곡식과 교환한다면 생재(生財)의 방편이 될 것 입니다.
이지함은 1574년 왕에게 올린 위의 상소문에서 육지와 바다의 資源을 개발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돕자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하여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가 나서서 자원을 개발하고 이 자원들을 通商하여 이용하자는 이지함의 주장은 농업 이외에 商業을 천시하면서도 그 이득만큼은 독점하였던 지배층에게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제왕의 세 가지 창고
이지함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수있는 방책으로 크게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지함은 제왕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人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 인재를 뽑는 창고인 吏曺와 兵曺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中策), 그리고 백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하책(下策)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이 중점을 둔 것은 下策```이었다. 즉 당면한 현실에서 상책과 중책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하책을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지함이 하책을 강조한 것은 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의(義.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와 이(利. 실용과 이익)를 대립시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절충하려는 개방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또한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조선사회의 미덕이지만, 재물과 이익도 좋은 마음으로 쓰면 덕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의(義)와 이(利)를 대립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진보적인 정책으로 펼 수 있다는 생각들.. 이런 생각을 현감직을 맡으면서 실천하려 했다는 것에서 그는 아주 뛰어난 관료이었다.
개혁을 넘어 혁명
당시 조선사회는 땅과 바다의 자원을 백성들과 함께 공유한다는 큰 원칙이 있었다. 즉 누구든지 직접 개발하기만 하면 그것은 생산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분일 뿐이었고, 자원개발의 실질적인 혜택은 소수의 힘있는 권력층의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생산해 내면 그 생산물을 갖가지 이유를 핑계로 관리들이 착취하였다. 이 때문에 자원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자원이 소금이었다. 당시 막대한 이윤을 내었던 소금도 이러한 방식으로 대부분 지배층의 손에 넘어갔다.이지함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되고, 소수의 권력층에게만 이득이 돌아가는 자원들을 국가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通商에까지 이용하여 빈민들을 구하자는 선구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보수적인 전통 성리학자이었던 송시열(宋時烈)조차 이러한 이지함의 선구적인 면모에 대하여 감탄과 존경의 뜻을 다음과 같이 표한다....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서 토정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했으나, 선배들에게 그 풍모와 명성을 듣고서는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러한 이지함의 발상은 굉장한 개혁이었다. 개혁이라기 보다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구조적으로 제도화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이미 존재하였다. 통치자 그리고 권력층의 입장에서는 이지함의 주장은 위험한 발상이고, 선구자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지함, 포천현감을 스스로 사직하다 .. 그리고 아산현감
이러한 이지함의 파격적인 주장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이러한 절실한 개혁방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지함은 벼슬을 스스로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은 3년 후, 1578년(선조 11)에 다시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아산에 부임하고 그가 처음한 일도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산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아 왕에게 바치고 있었는데, 이지함은 물고길르 잡던 못을 메워 버렸다. "물고기를 기르던 연못이 있었는데, 그 못을 메워 없애 버렸다 (有養魚池 其池永絶). 토정유고. 이 연못에서는 숭어를 기르고 잡아서 진상하였던 곳이다. 관리가 왕이 먹을 음식을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해 버린 것이다. 백성을 위해서 자기가 죽을 각오로 메워 비린 것, 공물로 바치는 숭어장을 메워버려 진상을 못하게 했다는 것은 죽을 각오 아니면 못 할 일이었다.
걸인청 乞人廳
그는 현대적 개념의 빈민 구제기관인 걸인청(乞人廳)을 설립하였다. 걸인청은 걸인들에게 단지 먹고 잘 곳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그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여 노약자와 굶주린 사람들을 구호하였다. 그리고 직접 걸인들을 데리고 나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적인 재활기관을 만든 것이다.
당시 아산의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왕에게 받치고 있었는데, 이지함은 물고기를 기르던 연못을 매워 버렸다. 백성들이 임금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 것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임의로 연못을 매워버린 것이었다. 왕에 대한 대역죄가 될 수도 있는 일...
이지함, 돌연 죽다
하지만 이지함은 아산현감 부임 3개월만에 돌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나이 62세에 역질에 걸려 죽은 것이다. 그의 정치는 백성 사랑을 위주로 하고,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였다. 한창 기반을 갖추어 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선조수정실록) 가난한 백성을 단순히 먹이고 재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가르쳤던 21세기형 복지가, 이것이 토정이지함의 참모습이었다. 200년 후의 실학자들에게서도 높이 평가받았을 만큼 혁신적이고 선구자적인 실학 사상을 펼쳤던 토정 이지함, 그는 조선 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던 奇人이었다.
이지함은 매우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였으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격의 없이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지함은 전국을 유람하며 현지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 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 능력을 키울 것을 강조하였다.
또 가난한 주민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고르게 분배하여 주었으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만 개를 수확하여 바가지를 만들어 곡물 수천 석과 교환하여 빈민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토정유고"를 비롯하여 "연려실기술"이나 "어우야담" 등의 기록에 나오는 이지함에 관한 일화들은 백성들 편에 섰던 이지함의 치밀한 계획과 적극적인 실천 모습이 나타나 있다. 명문가 출신의 선비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말업으로 치부되던 수공업, 상업, 수산업에 직접 종사하였던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어우야담"의 다음 기록은 이지함의 행적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묵한 길에 흙을 쌓아 가운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되는 흙집을 짓고 이름을 토정이라 하였다. 밤에는 집 아래에서 자고 낮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거처하였다. 또 솥을 지고 다니기가 싫어 쇠로 관(鐵冠)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밥을 지어먹고 씻어서 冠으로 쓰고 다녔다. 八道를 두루 유람하면서도 탈 것을 빌리는 일이 없었다.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몸소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노라고 여겼는데, 심지어 남에게 매 맞기를 자청하여 시험해 보려 하였다.
이지함, 퇴계와 율곡을 비웃다
옛날에는 영의정 3명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1명의 대제학(大提學)이고, 3명의 대제학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이 1명의 처사(處士 .. 왕의 소명이 있어도 벼슬에 나가지 않는 재야의 선비)이며, 3명의 처사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1명의 선생(先生 .. 진정한 학문사상과 출처에 있어, 그리고 많은 제자를 올바르게 길러 후세에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는 말이 있다.
토정 이지함은 당시 정국의 혼란과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혼탁하고 부패한 명종 시대가 끝난 후 정국이 쇄신되고 사림파가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던 시기인 선조 6년(1573년) 5월에 " 명경행수(明經行修 .. 유교경전에 해박하고 행동이 빼어남)의 탁행지사(卓行之士 .. 탁월한 행동의 선비)로 추천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학문사상과 그 인품에 있어 당대에 한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지함은 宣祖 7년 8월, 55세의 나이로 포천현감으로 나아가, 선조 11년 7월에는 아산현감을 지내다가 59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죽었다. 조헌(趙憲)이 宣祖에게 고하기를, "자신의 선생은 세 사람이 있으니 이지함, 율곡 이이(李珥) 그리고 성혼(成渾)이다 "고 하였다. 이지함의 제자로는 조헌을 비롯하여 그의 조카로 신동으로 불리었던 당대의 명필이자 당쟁에서 北人의 영수이었던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판서를 역임한 이산보(李山甫), 서기(徐起) 그리고 박지화(朴枝華) 등 선조와 공해군 당시 개혁적 진보적 사상을 피력하였던 조정 재야의 뛰어난 학문사상가들이 많았다.
토정 이지함이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을 비웃은 이유는 .. 유학(儒學)의 선비는 <수기치인. 修己治人> 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나아가 민중을 구제하고, 올바른 정치를 펴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유학을 공부한 자가 "출처(出處)"에 분명하지 않으면 선비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명치 않은 경우, 정통성이 미약한 왕과 조정에 학자의 양심과 명예를 팔아먹기 십상이고, 나아가 민중과 세상을 외면한 채 비리와 악의 무리에 동조하는 경우가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율곡 이이가 당쟁으로 조정이 시끄러운가운데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낙향하려 하자, 이를 본 토정 이지함이 율곡에게 " 옛 성현의 소위가 後弊를 많이 만들었다 "고 하였다. 이에 율곡이 " 무슨기담(奇談)이십니까? 나는 존장께서 책을 하나 지어 장자(장자)에 대등하기를 원합니다 "고 하니 토정 이지함은 웃으면서 " 공자가 병이 없으면서 병을 칭탁하고 유비(孺悲)를 보지 않았으며, 맹자도 병을 핑계로 제나라 선왕 (齊 宣王)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의 선비들이 흔히 병이 없으면서 병이 있다고 칭탁하게 된 것이니, 대저 병을 핑계하여 사람을 속이는 것은 사람의 집에 게으른 종이나 말 안 듣는 머슴의 행위와 같은 것인데, 선비된 자가 차마 이런 짓을 하면서 이것을 공자와 맹자에게다 칭탁하니 성현의 소위가 뒷 사람의 폐단을 지은 것이 아니냐.."고 율곡을 질타하였다.
당시 朝野에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널리 명성이 자자하였던 율곡과 퇴계 이황이 온전히 조정의 신하 노릇도, 그리고 재야의 선비 노릇도 아니면서, 미묘한 때나 난처한 때를 당하면 병을 핑계로 낙향하고, 다음에 왕이 부르면 나아가는 일을 반복하였는데, 이지함이 이를 비웃으면서 병을 핑계하고 그것이 성현(聖賢)이 하던 바라 하면서, 성현을 가탁(假托)하는 행동의 가소로움과 이중성을 질타한 것이다.
한라산에 오른 이지함
김석익(김석익)의 "심재집(心齋集)"의 기록에 의하면 .. "이지함은 온 나라 안을 돌아다녔다. 그는 제주도 한라산을 세 번 올랐으나 당시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고청(徐孤靑)이 토정 이지함을 따라 한라산에 들어갔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조카 李山海가 지은 토정 이지함이 묘갈명(墓碣銘)에는 " 이지함은 배 타기를 좋아하고 바다를 마치 평지퍼럼 밟고 다녔다. 구내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평소에 자식과 조카를 가르칠 때 女色을 가장 경계하라 "고 하였다.
또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이지함의 제주도에서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지함은 諸家의 雜術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조그만 배 네 귀에 큰 박을 달고서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으나 풍랑의 위험을 겪지않았다. 제주에 온 토정은 관원들이 익히 그를 알아보았다. 관원들은 그를 객관으로 맞아들이고는 기생을 불러 잠자리를 모시도록 하고, 기생더러 창고를 가리키면서 " 만약 이지함의 사랑을 얻는다면 한 창고를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니, 기생은 갖은 아양을 떨었으나 이지함의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제주의 관원들은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토정 이지함과 함께 한라산에 올라간 사람은 서기(徐起)이다. 서기의 자는 대가(待可)이고,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이다. 심재가 말한 서고청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서기는 나이 20세에 토정 이지함을 만나 유학이 바르고 정대함을 알고는 전에 배운 것을 다 버리고 이지함을 좇았다. 이지함과 함께 한라산에 올랐다가 돌아와 이지함이 이소재, 이중호를 소개하니 그의 문하에서 3년간 배워 고향 홍주로 돌아왔지만, 그 고을의 풍속이 나쁜 것을 알고 고향을 떠나 계룡산 고청봉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
토정비결 土亭秘結
이지함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지 이지함의 號인 土亭의 이름을 가탁(假托)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 이유로는 이지함이 비록 술서(術書)에 능통하고, 복서(卜筮)를 잘하여 앞 일을 내다보는 데 유별난 재주가 있었다고는하지만, 본디 그의 학문적 바탕이나 경향으로 보아 이러한 복서(卜筮)를 남길 이유가 없다는 점 등이다. 이 토정비결이 널리 세시풍속으로 정착된 것이 19세기 純祖 以後였다는 점을 들어 이지함이 살았던 때부다 훨씬 뒤라 이지함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토정비결과 周易
새해가 되면 누구나 관심을 갖게되는 " 토정비결(土亭秘訣) " .. 믿든 말든 한 해 자신의 운수를 점쳐보면서 새해를 계획해보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풍습으로 굳어졌다. 대부분 오래된 우리의 전통으로 할고 있지만, 토정비결은 정작 조선시대의 새해 풍습 목록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토정비결의 저자가 조선시대의 학자 이지함(1517~1578)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이지함의 저작이니 당연히 16세기부터 유행한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 즉 이지함의 이름을 빌린 저작이라는 견해가 정설처럼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지함의 이름을 빌린 것일까? 토정비결과 이지함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러한 의문을 풀어 볼 필요가 있다.
"토정비결"은 주역(周易)의 이치를 응용하여 한 해의 운수를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그러나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주역의 기본 괘(卦)는 64개인데, 토정비결에는 48개의 卦만이 사용되고 있다. 卦를 짓는 방법도 달라서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연(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시대의 특성과 백성들에 대한 편의를 고려하였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 다르게 되었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의 괘가 있을 뿐이다. 주역보다 간편하다고 할까, 아니면 괘가 적은 만큼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할까?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 총 6480句로 구성되었으며, <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 <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 하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이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이다. 항목마다 길흉(吉凶)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되어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이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것에 중점이 있다기 보다는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러넣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70% 이상이 행운의 괘로 이루어져있다.
토정비결과 이지함
토정비결에 대하여는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 숙종 때 이지함의 현손인 이정익(李楨翊)이 이지함이 유고를 모은 문집인 "토정유고(土亭遺稿)"를 간행할 때 "토정비결"이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재 유행하고 있는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작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망 직후에 유행한것이 아니라 300여년 후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正祖 시절,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조선 후기 풍속 전반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데, 정월의 경우 세배하거나 세찬(歲饌), 떡국 먹기 등의 새해 풍습과 함께 새해의 운수를 보는 점으로 오행점(五行占)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유득공)이 서울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저술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새해의 풍속 중 " 윷을 던져 길흉을 점친다 " 는 기록이 있는 반면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이다. 만약 토정비결이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다면,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에 틀림없이 소개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결국 토정비결이 빨라야 19세기 이후에 유행하였다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토정비결은 16세기를 살았던 이지함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누군가가 이지함의 명성을 빌려 쓴 책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성 있다.
그런데 토정비결에 담긴 뜻과 이지함의 사상은 토정비결을 이지함이 저술하였다고 할 만큼 서로 통하는 면이 많다. 토정비결에는 주역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상수학(象輸學)적인 사고가 많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지함은 스승인 徐敬德으로 부터 상수학을 배웠으며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서경덕을 비롯한 16세기 당시 주역이나 상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들은 대개 氣에 주목하여 당시의 사회를 安定보다는 變化가 필요한 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이지함이었던 만큼 주역 사상에 내포된 새로운 변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점에서 토정비결에 담겨 있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이지함의 사상과 연결할 수 있다. 이덕형이 이지함을 두고 말하기를 " 세상이 풍수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李氏 집안에서 시작되었다 "고 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맥락이 닿는다.
인유사원(人有四願)하니 내원영강(內願靈强)하고 외원부귀(外願富貴)하나니
부막부어불탐(富莫富於不貪)이요, 귀막귀어부작(貴莫貴於不爵)이요
강막강어부쟁(强莫强於不爭)이요, 영막영어부지(靈莫靈於不知)라.
사람마다 네 가지 소원이 있으니 / 안으로는 신령하고 굳세기를 바라고 / 밖으로는 부자가 되고 귀인이 되려한다 / 부자는 욕심 안 내는 것이 제일 부자요 / 귀인은 벼슬 안 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이요 / 강한 것은 다투지않는 것이 제일 강한것이요 / 신령한 것은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제일 신령한 것이다.
연이(然而),
그러나
부지이불령(不知而不靈)은 혼우자(昏愚者) 유지(有之)하고
부쟁이불강(不爭而不强)은 유약자(濡弱者) 유지(有之)하고
불탐이불부(不貪而不富)는 빈궁자(貧窮者) 유지(有之)하고
부작이불귀(不爵而不貴)는 미천자(微賤者) 유지(有之)하니
알지도 못하고 신령하지도 못한 것은 어리석은자가 가지고 있고 / 다툼질도 하지 않고, 강하지도 못한 것은 나약한 사람이 가지고 있고 / 욕심도 안 내고 부자도 못 되는 것은 빈궁한 인간이 가지고 있고 / 벼슬도 하지 않고 귀하지도 못한 것은 미천한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
부작이능귀(不爵而能貴)하며, 불탐이능부(不貪而能富)하며
부쟁이능강(不爭而能强)하며, 부지이능령(不知而能靈)은
유대인(惟大人)이라야 능하니라.
벼슬도 하지 않고 능히 귀하며 / 욕심을 안 내고도 능히 부유하며 / 다투지 않고도 능히 강하며 /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능히 신령한 것은 / 오직 대인이라야 능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