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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㉚ 우리가 신을 만나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집트의 파라오는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 백성을 풀어주지 않겠다고 했다. 신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이렇게 경고했다.
이집트 땅에서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 죽을 것이다. 왕의 처음 태어난 아들부터 노예의 처음 태어난 아들까지, 그리고 가축의 처음 태어난 새끼까지 다 죽을 것이다. 그때에 이집트 온 땅에서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파라오는 모세의 경고를 무시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문틀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다. ‘죽음’은 유대인의 집을 비껴갔다. 그 외에는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파라오의 첫째 아들도 죽음을 맞았다. 이날이 1월 14일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사는 정통파 유대교인이 유대 성전이 있던 자리인 통곡의 벽에 와서 기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이곳에 다시 세워질 유대 성전을 소망한다. 백성호 기자
유대인들은 그날을 ‘파스카(Pascha)’라 부른다. 넘을 ‘유(逾)’, 건널 ‘월(越)’ 자를 써서 ‘유월절(逾越節)’이다. 유대인에게는 아주 큰 절기다. 이 사건은 이집트에서 유대인이 해방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나는 예루살렘의 시장으로 갔다. 좁다란 골목 양옆으로 온갖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옷이며 음식이며 각종 기념품 등을 팔고 있었다. 손으로 직접 기계를 눌러서 짜는 석류 주스와 오렌지 주스가 먹음직스러웠다. 방탄복을 입고 자동소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섰을 때도 유월절을 앞둔 시기였다. 양력으로 따지면 4월 즈음이다.
이날 유대인들은 양을 잡는다. 우리가 추석 때 명절 음식을 준비하듯이 말이다. 예수가 예루살렘 도성에 있을 때도 그런 분위기였다. 집집마다 1월 10일까지 한 살 된 흠이 없는 어린 수컷 양을 준비해야 한다. 양을 잡는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집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집은 염소로 대신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14일(유월절) 해 질 무렵에 양을 잡았다. 그런 뒤 양의 피를 우슬초라는 풀에 적셔 집 문틀에 발랐다. 양의 고기는 삶지 않고 반드시 구워서 먹었다. 유대인의 유월절 풍습에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랜 갈망이 담겨 있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걸어서 나올 때였다. 제자들이 웅장한 성전 건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마르코 복음서 13장 1절)
예수 당시 유대교 성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교 성전이 세워져 있다. 이슬람교는 이곳이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라 여기며, 이슬람교 3대 성지 중 하나로 꼽는다. 유대교인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교도의 성전이 자리한 셈이다. 백성호 기자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4장 1~2절)
예수의 말은 파격적이다. 유대교의 눈으로 보면 신성 모독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신을 만나는 장소였다. 단순한 상징적 의미의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기도해야 신에게 전달된다고 믿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을 찾는다. 예전에 그 자리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그들은 이곳을 신을 만나는 장소라고 여긴다. 그런 신성한 성전을 향해 예수는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예수의 예언으로 본다. 예수 사후에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의 공격을 받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됐다. 처참한 살육이 자행되고 성전도 파괴되었다.
예수는 그 일을 예견한 것일까. 예수의 어록을 다시 읽어 보았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예루살렘 성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을까.
성전은 돌로 쌓았다. 돌은 물질이다. 불교에서는 물질과 감정을 모두 합쳐 ‘색(色)’이라고 부른다. 모든 색은 소멸한다. 소멸하지 않는 색은 없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다. 색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 해도 결국 돌들의 결합체다.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예루살렘 성전의 광경. 성벽 뒤편의 언덕에는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골고다 언덕이 있다. 백성호 기자
굳이 시간에 기대지 않아도 그렇다. 현대 과학은 ‘색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돌은 돌이 아니라 파동이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파동이다. 그들의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불교는 이를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표현한다. ‘색’의 정체가 ‘공(空)’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지적은 이런 이치를 관통한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물음이 하나 피어난다. “그렇다면 신을 만나는 장소는 어디인가?” 어쩌면 예수는 이것을 되물은 것이 아닐까. 성전은 돌들을 쌓은 것이고 결국은 허물어진다. ‘그럼 네가 진정으로 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예수는 그런 물음을 우리에게 다시 던진 게 아닐까. 그것이 ‘나의 밖’인지, 아니면 ‘나의 안’인지 말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성전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신을 만나는 곳. 거기가 어디인지 예수는 거듭해서 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과연 나의 바깥인지, 아니면 나의 내면인지 말이다.
짧은 생각
1300년 전쯤이었습니다.
중국의 남악(南岳)에
회양(懷讓) 선사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조 혜능 대사의
깨달음을 이은
선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남악 회양”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마조(馬祖)라는 스님이
남악의 전법원에
회양 선사를 찾아가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조 스님은
앞만 보고 수행하는
‘직진형 수도자’였습니다.
좌선에 몰두하면
누가 와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서 맞이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하루는 회양 선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마조 스님은
평소처럼
가만히 좌선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회양 선사는
벽돌을 하나 가져와
말없이 갈기 시작했습니다.
‘쓱싹쓱싹’.
자꾸만 소리가 나자
마조 스님이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회양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회양 선사가 답했습니다.
“아,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네.”
이 말을 들은 마조는
기가 찼습니다.
“아니, 스님.
아무리 벽돌을 간다 한들
어떻게 거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회양 선사가
한마디 날렸습니다.
“그러는 너는
좌선만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려고 하느냐?”
마조는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습니다.
“스님,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회양 선사가 답했습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바퀴를 때려야 하느냐.
아니면
소를 때려야 하느냐.”
이어서
회양 선사가 제자를
꾸짖었습니다.
“너는 좌선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앉아서
부처의 흉내를 내는 것이냐.
선(禪)은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니 무주법(無住法)에 대해서
취사(取捨·취하고 버림)를 하지 말라.”
모든 종교의 시작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종교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늘과 땅의 이치를 관통하는
메시지만 있었습니다.
그 메시지가 너무도 소중해
그걸 문자로 기록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 사이에 규율이 생기고,
이들이 생활하는 건물도 생기고,
그렇게 조직이 생겨나고,
그 조직에 종교라는
이름이 붙게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사람들이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알맹이와 포장지가
엄연히 다른데도,
알맹이와 포장지가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하늘과 땅을 관통하는
이치를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걸 통해
내 삶이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걸 둘러싼
종교적 포장지를 움켜쥐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교회에 몇 차례 출석했느냐,
십일조는 얼마나 냈느냐,
지금껏 몇 명을 전도했느냐,
불교 명상을 하며
몇 시간이나 앉아 있었느냐.
이런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도
참 대단하다 하며
칭찬하고 손뼉을 칩니다.
그런데 정작
종교를 창시한 사람이
내놓은 메시지,
그 메시지에 담긴
깊은 통찰을 깨닫는 일에는
진지하게 힘을 쓰지 않습니다.
마조 스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질적인 깨달음을 위해
나아가야
수레가 굴러갈 텐데,
앉아서 형식만 움켜쥐고 있으니
수레가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러한 오류를 범하는
성직자와 신앙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신앙의 채찍으로
바퀴를 때리고 있는지,
아니면
소를 때리고 있는지 말입니다.
내 마음의 수레,
내 영성의 수레는
굴러가고 있는지,
아니면
녹슬어 멈추어 있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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