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시누님 댁에 갔을 때, 인심 좋고 넉넉한 시누님은 유명 브랜드의 여성 소품들을 이것저것 챙겨 주셨다. 여행용 가방까지 주시며 담아 가라고 하셨다. 누운 팔자 모양의 구찌 가방은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브랜드다. 모양만 봐도 어지럼이 일 정도였으니까.
친정식구들과 함께 갔던 베트남 여행은 남부지방인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여행이었다. 동생이 베트남지사에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근무기간을 마치기 전에 가족들을 초대한 것이다. 여섯 가족이 모이려면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 구정 연휴를 이용하면 좋겠는데 유학자이신 아버지를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출발 전에 차례를 모시고 여행을 나서는 선에서 협상을 타결하신 분은 엄마셨다. 대학에 다니는 조카들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학기가 시작되고 취업 공부 등 어려울 수 있어서 가급적 함께 갈 수 있도록 참여를 독려했다. 큰올케가 고3인 딸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20명이 넘는 일행이 베트남 호찌민으로 향했다.
호찌민의 원래 이름은 사이공이다.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호찌민의 이름을 딴 베트남의 경제 중심지로 최대 도시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찌민은 베트남의 국부로 통한다. 189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응에안주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조세 반대 시위를 벌이다 퇴학당하면서 혁명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스물한 살에 조국을 떠나 세계 각국을 유랑한다. 중국 대혁명을 체험하고,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했다.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가 박헌영도 만났다. 박헌영이 선물한 [목민심서]를 평생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1930년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고, 1941년 베트남에 돌아와 공산당과 민족 부르주아의 연합전선인 베트남독립동맹을 결성한다. 일본, 프랑스,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그는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라밖에서는 미국을 격파한 강철 같은 의지의 지도자, 탁월한 전략가, 냉철한 혁명가였지만, 베트남 인들에게는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국가 원수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호찌민처럼 민중의 사랑을 받은 이는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호찌민 평전]을 쓴 윌리엄 듀이커는 그를 일러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라고 했다. - 다음 백과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청아출판사)에서 편집했습니다.
5박 6일 동안 쉴 틈 없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학생들이 많기도 했고, 베트남 남부 쪽은 처음이라 공부 삼아 다녔던 여행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아니, 압도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은 구찌 터널이다. 아픈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실제로 구찌 터널에 들어갔을 때의 공포가 글을 쓰려는 이 순간에도 몰려온다.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기나긴 통로, 구불구불한 모양과 깊이였다. 어둡고 숨쉬기 어려워서 내가 폐쇄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체격이 보통 수준이 넘는 두 아들은 무사히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도 공포였고, 내가 살아서 끝이 없을 것 같은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막막한 심정이었다. 누가 이토록 무서운 땅속으로 그들을 내몰았을까?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지만,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거대한 나라를 물리쳤다. 큰 자부심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며, 땅이라는 것을 정말 뼛속까지 깨닫게 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을 상대로 한 베트남인들의 저항정신과 게릴라전에 대비해 베트남인들이 직접 판 땅굴이다. 구찌 터널은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전쟁준비도 했다고 한다. 한국어 더빙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호찌민에 살고 있는 둘째 동생네서 숙박을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그 대식구를 여행 기간 동안 늘 환한 웃음으로 대접하고 안내해 준 둘째 올케도 진심으로 예쁘고 고마웠다. 하나라도 더 구경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자유여행을 선택했으면서도 따로 봉고차를 빌리고, 가이드를 요청해서 베트남에 대한 역사시간을 방불케 하는 여행이었다. 학구파인 조카들이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듣던 모습이 생각난다.
베트남은 설날 연휴에 오랜 기간 쉰다고 한다. 재래시장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데 닫힌 곳이 많았다. 그래도 몇 군데 열린 곳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짝퉁천국이라는 가게도 재미있었다. 올케네 가족들은 영어는 물론, 베트남어까지 필수 대화언어를 습득해서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아 보여서 부러웠다. 섬에 들어가 베트남 섬마을을 돌아보고 열대과일들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좁은 수로에서 배를 타고 오래 들어갔다. 베트콩들이 숨어서 전쟁을 치렀던 통로라고 하니, 그곳 또한 구찌 터널을 방불케 하는 소름이 돋았다. 양쪽의 숲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도 같고, 무서운 물고기가 물에서 올라올 것도 같았다.
그 밖에도 호찌민광장, 중앙우체국, 노트르담 성당, 전쟁박물관 등 체험형 여행으로 설계해 준 깊은 배려심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포장하고, 너를 위한 것이라고 쥐어 주려고 해도 받는 사람은 진심을 안다. 깊숙이 땅굴을 파고서라도 속임수로 억지로 주는 것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