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소설가 김성동이 수행했던 천축사 보살상 사진.>
우매한 중생 점안해준 본격 구도소설
“실천 없는 깨달음은 공염불일 뿐”
“종단은 외면…불자들은 전폭적 사랑"
소설가 김성동 씨가 승려의 신분으로 수행했던 곳 ‘천축사’를 찾았다. 북한산국립공원 입구는 술집이 빼곡이 자리하고 있어 대낮부터 한 판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산객들은 산(山)을 정복하고 내려왔다는 뿌듯함에 목을 축이고, 애초 등산을 포기한 사람들은 울긋불긋한 꽃들을 안주 삼아 잔을 돌렸다.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지점은 그렇게 서로를 버리고 하나가 되는 것일까. 두 볼이 진달래 빛으로 물든 남녀들이 술잔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기자는 《만다라》에서 지산(知山)이 주막 아낙에게 달뜬 수작을 거는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만 먹지 말고 나도 한 잔 주시우. 땡땡이 스니임.”
여자가 담배연기를 지산의 얼굴에 살짝 내뿜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지산이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오냐. 한 잔 주지. 한 생각 돌리면 삼계가 다 내 것인데 까짓 술 한 잔이 문제냐. 관세음보살.”
《만다라》의 발표는 한국문단뿐만 아니라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안겨줬다. 종단의 입장에서 보면 반승반인으로 살아가는 지산의 행태나 한국불교의 부조리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거침없이 폭로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많은 불교계 지도자들이 《만다라》를 읽으며 지산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관세음보살’을 되뇌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목탁조〉 발표로 승적을 박탈당한 당시 김성동 씨의 처참한 심정이 《만다라》의 내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다라》는 한국문단과 불교계에 한국불교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제시했다.
소설가 한승원 씨의 《아제아제바라아제》와 더불어 《만다라》는 근대사 이래 떳떳하게 자신의 종교를 밝히지 못했던 불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만다라》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몇 차례 수정된 바 있지만 구도와 민중불교라는 두 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먼저 구도소설적 측면에서 《만다라》를 살펴보면 법운의 ‘병 속의 새’라는 화두에 시선이 주목된다.
“영원히 날지 않을 것처럼 두 다리를 딛고 서서, 시간과 공간을 외면한 채, 날개를 파닥이길 거부하는 완강한 부동의 자세로, 날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고 있는” 병 속의 새는 어찌 보면 작가의 심경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법운이 지산의 다비를 거행하는 장면에서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순간, 나는 불더미 속으로부터 어떤 물체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한 마리의 조그만 새였다. 몸뚱이는 새의 그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머리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기이한 인두조(人頭鳥)는 불꽃 위에 앉았다. …(중략)…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나래를 펄럭이며, 시간을 가르고 공간을 뛰어넘어, 영원을 향하여,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법운은 지산의 다비식을 치르며 만다라를 봤다고 말한다.
“불길은 이제 맹렬한 속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칸 암자는 그대로 한송이의 만개(滿開)한 꽃송이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토만다라(淨土曼茶羅)였다.”
작가가 한낱 땡초의 죽음을 만다라로 승화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깨달음이라는 것도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작가의 불교사상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술을 마시고 여자와 음담패설을 예사로 나누는 지산을 보며 법운이 “내가 계율의 강 앞에 발이 묶여 협소한 소승(小乘)의 세계를 살면서 위선자가 되고 있을 때, 그는 계율의 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광활한 무애(無碍)의 대승(大乘) 세계를 살고 있는 자유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소설의 민중불교적 측면은 지산과 법운이 주고받는 대화와 지산의 잡기장에 잘 나타나고 있다. 지산의 잡기장에 메모된 글은 작가가 바라보는 불교관을 담고 있어 《만다라》를 해석하는 주요한 코드가 된다. 작가는 교단이 대중의 기복신앙적 심리를 이용해 수입 올리는 것을 이렇게 바라봤다.
“가난하고 병들고 부당하게 고통받는 중생 몇백 명 아니 몇천 명을 구제할 수 있는 막대한 금액으로 탑을 세워 타다 남은 뼈의 잔해를 사리라는 이름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을 그 대종사께서 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불타께서 당신의 형상을 만들어 번쩍이는 금칠을 해놓고 일신의 복락과 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돈 놓고 엎드려 비는 것을 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작가는 기복신앙에 대해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칼날같은 펜촉을 들이대고 있다.
“소위 신도라고 하는 이들도 면전에서는 스님 스님 하다가 돌아서서는 중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게 한국불교의 현실이야. …(중략)… 그런 자들은 대개 일신(一身)·일가(一家)의 복이나 달라고 엎드려 빌 줄밖에 모르는 추악한 이기주의자들이니까.”
작가는 지산이 무당절에 모신 부처님을 점안하고 내뱉는 말을 통해 불교는 자력신앙이라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절하는 대상물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지극히 사무치게 간절한 마음이 가 닿았을 때, 그 때 돌맹이도 나무토막도 심지어 똥덩어리까지도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교란 ‘자신의 눈은 자신이 점안하는 것’이라는 것.
작가는 또한 당시 불교계의 부조리(어느 부분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에 대한 대안으로 지산의 잡기장을 빌어 “불교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곳이 아닌 유명무실한 사찰들을 폐사시키고, 승려들을 이판과 사판, 즉 순수 수도승과 행정·교화승으로 분리하고, 처음 입산한 자는 세간과의 접촉을 일체 단절시키고, 사부대중으로 사찰관리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사찰의 재산과 행정, 기타 모든 물리적인 것을 전담케 하라”고 강조했다.
작가가 승려의 신분으로 있을 때 넘나들었던 산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천축사였다. 선원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여서 흔적이 없었고, 대웅전 불사를 하느라 사찰은 어수선했다.
천축사를 친견한 후 기자는 하산길을 서둘렀다. 하산해서 바라본 북한산은 더욱 신묘하게 느껴졌다. 기자는 지산이 넋두리처럼 내뱉는 대사를 떠올렸다.
“산을 안다? 산을 어찌 알아? 산을 알면 생(生)을 알게? 산은 비밀이야. 영원한 비밀… 어쩌면 비밀이기 때문에 산에 사는 건지도 모르지만…”
몸은 비록 산을 떠났지만 마음은 영원히 산 속에 머물고 있는 작가. 작가는 어쩌면 반승반인의 작가 ‘김성동’이 아니라 성속일여의 승려 ‘정각’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응오 기자
작가에게 듣는다
‘수행’에 역점 개작 발표
승적 박탈은 종단이기
불교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남긴 《만다라》는 초판본 발간 22년만인 2001년 전격 개작돼 다시 출간됐다. 작가에게 개작경위와 의미 등을 물어봤다.
△개작하면서 가장 염두했던 부분은.
“초판본에서는 법운이 반야행 차표를 찢으며 사람들 속으로 힘껏 달려가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를 두고 독자와 평자들이 ‘하산’과 ‘하화중생’의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나중 생각해보니 지산과 법운의 세납과 법랍이 무엇을 알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사람들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차표를 들여다보았다. 피안이라고 찍혀 있었다. 입선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부모미생지전(父母未生之前)에 시심마(是甚)오? 나는 정거장 쪽으로 힘껏 달려갔다’로 고쳤습니다.”
△스님의 수행장면 묘사에서 문장밀도가 보다 촘촘해졌는데 이유는.
“《만다라》를 개작하면서 불교개혁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상대적으로 축소하는 대신 구도소설적 성격을 강화했습니다. 소설의 결말도 새로운 입선의 의지를 표명하고자 한 의도로 쓰여진 것입니다.”
△지난해 현대불교문학상 시상식에서 ‘승적복원’을 희망했는데 그 마음은 여전한가.
“〈목탁조〉를 발표한 후 불교위상을 추락시켰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습니다. 환경문제나 인권문제에 선두에 서는 등 우리 불교계의 의식도 많이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창작을 이유로 승적을 박탈한다는 것은 얼마나 편협한 논리입니까. 종단에 승적복원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소설에 드러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징은.
“작가의 체험을 토대로 소설이 완성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개인사적인 부분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평론가들이 보는 대로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어머니는 이 시대의 어머니를 대변하는 동시에 종교구원적 의미도 지닙니다.”
유응오 기자
주간불교신문 751호 200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