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대서양 시대가 열리면서 서유럽의 패권이 확립되자 지중해의 중요성이 줄어들었고 오스만 제국도 계속 쇠퇴하면서 이 도시의 영광도 저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략적 역사성 중요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제3의 로마로서 동방정교의 총본산인 이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했다. 바로 나폴레옹 몰락 후 1차 대전 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유일한 장기전인 크리미아 전쟁이었다. 1차 대전 때는 오스만 제국이 독일 측에 서자 정반대로 영국과 프랑스는 갈리폴리에 대군을 상륙시켜 이 도시의 장악을 시도했지만 처참한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에서 패했고 제국의 폐허 위에 탄생한 신생 터키 공화국은 이 제국의 수도를 버리고 소아시아 내륙의 앙카라를 새로운 수도로 삼아 새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도 워낙 오랜 전통 때문에 도시 전체 인구의 1/3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서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만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 때문에 그리스와의 갈등이 다시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때 터키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터키계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자행되어 1960년 대 부터 그리스 인들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거주민의 0.01%만이 그리스계 일 정도로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현재의 이스탄불
현재 이스탄불은 아시아 쪽으로 도심지역을 확장하고 인구 1500만에 달하는 지중해 지역 최대의 도시로서 동로마와 오스만 두 제국 2천 년에 걸친 고도로서 여전히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이 도시가 장악하고 있는 보스포러스–마르마라 해 역시 정도만 덜해졌을 뿐 여전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수로이기도 하다. 지도자 하나의 결단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 하나가 세계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