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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숙의 반석
히브리서 5:12-14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 기자에 의하면, 신앙 생활을 한지 오래 되었으면 이제 선생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히브리 기자가 말하는 선생이란 단어 “디다스칼로스” ( dida,skaloj) 는 사실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선생의 의미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 또는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 지각을 사용하는 자, 연단을 받아서 강건한 자, 선악간에 분별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선생이 될 수 없는 자는 젖을 먹을 수는 있지만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없는 자,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자,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확실히 붙잡지 못한 자 등으로 요약됩니다. 즉, 히브리 기자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을 보면, 히브리 기자는 히브리서 5장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자들의 영적 수준과 상태를 고려하니 도무지 영적으로 너무 어려서 그리스도의 이 깊은 진리를 전혀 깨달을 수 없을 것을 알고 이들의 성장치 못한 영적 상태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씀드리면, 복음의 깊은 진리에 대하여 이제는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는 때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여전히 영적 미숙아의 어리석은 상태에 있으니 답답하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이제 히브리 기자는 그들이 선생이 되지 못한 이유, 곧 영적으로 성숙을 이루지 못한 이유를 정확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12절을 보기 바랍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
이들이 선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라는 말에 의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배우고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잊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의 초보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복음을 온전히 붙잡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 다시 믿음의 초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엉뚱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근본, 즉 십자가를 잃은 자들은 절대로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잃은 자들은 신앙 생활이 길어질수록 점점 아집과 판단과 고집은 세어지지만 반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놓치고 신앙 생활을 하면 일반적으로 신비주의 또는 율법주의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 당시에도 기독교의 가장 큰 원수는 이 두가지였습니다.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사실 현재 이 땅에 흥황하는 기독교의 이단의 모습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결국 율법주의의 변조 또는 신비주의가 변조된 것일 뿐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러한 이단들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들의 가르침들은 복음의 초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왜곡되거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전혀 복음적인 언급이 없거나 왜곡되면 이단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놓친 자들입니다. 그래서 엉뚱한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을 외칩니다. 그러나 복음의 초보인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자신들의 죄 속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비주의 같은 경우는 “성령의 내적 체험과 경험”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역사적 객관적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대하여 촛점을 잃어갑니다. 자신의 신비 체험이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그리스도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왜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는 체험 중심으로 자신의 영적 교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너 이런 체험했어? 와~ 그 집회에서 난 이러저러한 체험을 했다.”
그런데 신앙 체험은 했다 하는데, 삶의 아름다운 덕행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영적 감정을 만족시키려고 이곳저곳을 헤메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뭔가 남이 경험하지 못한 체험이 있으면 아주 영적으로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덕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기 보다는 이상하게 파당을 만들고 독선적이고,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아주 부담스럽고 비정상적인 광신자로 보이는 그런 모습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과 대화를 해 보면, 역사 속에서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능력에 대하여 올바른 언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 또는 바울 당시에도 바로 영지주의라는 신비주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도를 통하여 자신들만이 아는 어떤 영적 지식을 통하여 신비 체험을 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상당한 금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영지주의적 금욕주의적 배경 때문에 바울은 골로새서를 썼고,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를 쓰게 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골 2:8, 18-19, 2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1-2).
지금 요한일서 4장이 바로 영지주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바르게 알려주지 않으면 이는 성령이 아니라 사탄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탄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초보에 대해 바르게 선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짓 영을 받은 거짓 교사의 공통점은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서 십자가와 그 부활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과 십자가의 역사적 실제 사건을 왜곡하거나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인 십자가의 비밀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도는 성령의 조명하심과 깨닫게 하심이 없으면 알 수가 없는 복음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복음을 붙잡지 못하면, 건전한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고 신비주의로 흐르게 되는데, 이는 사실 기독교의 원수로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기독교의 원수로 행하면서 본인들은 아주 깊은 영적 성숙을 이루고 있다고 믿는 점입니다.
복음을 붙잡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또 다른 이단적 종교적 현상은 “율법주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종교가 율법주의였습니다. 얼마나 싫어 하셨는가 하면 이들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뱀들아. 마귀의 새끼들아”라고 호칭하셨습니다. 주께서 왜 이렇게 분노하셨을까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꾸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신에 아주 쪼졸하고 작은 것에 혈기를 부리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사람들에게 잘못 비추기 때문입니다. 특히, 십자가를 통한 은혜 보다는 끝없이 ‘이렇게 하여야 한다 저렇게 하여야 한다’ 하여, 믿는 자들의 자유를 점점 앗아가서 영적 자유를 상실케 하는 결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요, 영적인 참 자유를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율법주의는 오히려 반대로 자유를 빼앗고 사람을 다시 저주와 공포의 노예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복음을 붙잡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소위 법이라는 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괴롭히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주 무자비하게 드러내고, 이웃을 향하여 정죄하고 미워하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욥기는 율법주의에 속한 인물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율법이라는 것을 통하여 그것으로 몽둥이로 만들어서 가뜩이나 고통 당하는 비참한 욥의 뒤통수를 때립니다.
그 욥의 친구들의 뒤에는 누가 있습니까? 욥기 1장은 배경을 보여주는데 사탄의 목적이 나옵니다. 그의 목적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위해 사탄에게 처음 쓰임 받은 사람은 욥의 아내로서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욥이 결코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자 그 다음으로 사탄이 사용하는 것이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다 하는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하나님을 왜곡하여 하나님을 악하고 잔인한 분으로 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욥기 37장을 보면, 욥의 거의 하나님을 향하여 저주할 뻔합니다. 그러나, 그 때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심으로 욥의 죄악을 막아 주십니다.
아무튼 욥기에서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바로 붙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도구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율법으로 이미 고난 받는 욥을 두들겨 패는데 신나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한가지 더 예로,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자기 딴에는 종교적 열심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소위 하나님을 위한다하여 서슬이 퍼렇게 되어서 예수님을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율법에는 얽매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붙잡게 되고, 그 이후에야 율법의 의미도 다시 알게 되면서 더욱 깊은 복음의 비밀들을 계시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곧 복음의 초보에서 떠날 때, 그 어떤 신자도 바르게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오히려 종교적 열심을 낼 수록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로 행할 뿐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기초가 잘못 되었으므로, 더욱 깊은 복음의 진리를 붙잡을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라고 말하는데 “할 처지”는 “크레이아”라는 단어로서 “반드시” “강제로라도” 가르침을 다시 받아야 함을 말합니다. 곧, 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배울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을 통해서 우리가 정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복음의 기초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시간이 수십년 지나도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복음의 기초를 확인해 봅시다.
복음의 핵심은 삼위 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를 구속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중심에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알아야 하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대속(Atonement), 속죄, 속량입니다. 즉,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 15:1-2).
바울이 복음을 요약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즉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부활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나누어 주십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친히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그 마음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옛 자아는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새생명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 생활인 것입니다. 이는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라 예수 생명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복음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이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히브리 기자는 놀라운 영적 분석도 함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의 초보를 떠나는지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5:11절을 자세히 연구하여 보면,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에서 떠나게 되는 자들의 삶의 스타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둔하다(노쓰로스)”는 “게을리 하다. 신경을 쓰지 않다. 의도적으로 멀리하다. 지긋지긋해 하다.”라는 뜻입니다. “듣는 것(아코에이)”은 그냥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을 포함한 설교를 의미합니다. 즉, “설교 듣기를 게을리 하다. 신경써서 듣지 않다. 설교 듣는 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관심을 잃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히브리서 5:11 절은 히브리서 2:1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이는, 주의 사도를 통하여 주신 복음의 말씀을 꼭 붙잡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을 통하여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복음의 음성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듣는 것에 둔한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성경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먼저 말씀을 전하는 자의 책임입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성령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자로서의 책임은 성령 안에서 복음을 귀히 들어야 할 책임입니다. 성경에 보면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 밭에 대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비유에서는 씨뿌리는 자가 복음을 뿌리는 자입니다. 만일 씨 뿌리는 자가 복음을 뿌리는 자가 아니라면 옥토도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옥토에 잡초 씨가 뿌려지면 더 무성한 잡초가 올라옵니다.
따라서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만나야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비율은 1/4입니다.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자와 옥토 밭이 만나는 조건이 되어야 열매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디모데후서 3:7절처럼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배우고 노력하지만 구원을 이르는 지식도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에도 이르지 못하는 헛수고의 가르침과 배움입니다. 타종교들이 이와 같으며 이단들이 이와 같고, 바른 복음을 외쳐도 들을 귀가 없을 때 마찬가지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복음을 뿌리는 자와, 성령 안에서 복음을 듣는 자가 만나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따라서 성도들의 가장 큰 축복은 주의 복음을 바로 전하는 참된 주의 종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이 하는 복음의 설교를 성령 안에서 정성을 다하여 들어야 복이 됩니다. 그래야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를 단단히 붙잡게 되고 그리고 점점 나아가 복음의 깊은 진리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핵심을 붙잡으셔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을 바로 붙잡지 않고는 결코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으며,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니 영적 성숙은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앞으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더욱 더 세상은 혼미하고, 교회마다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과 선지자들이 날 뛸 것입니다. 거짓 목사들이 수도없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러한 때 너무나 중요한 성도들은 영적으로 깊게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지닌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영적 분별력은 영적 성숙의 싸인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영적 분별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복음을 확실히 깨닫고 있으면 영적 분별력이 생겨서 이단적 복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위조 지폐를 누가 가장 잘 알아냅니까? 조폐 공사에서 매일 돈을 찍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워낙 진짜 조폐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기에 위조 지폐가 그 조폐 검사관의 눈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정확히 붙들고 알면, 저절로 분별력이 생겨서 거짓 교사와 가짜 복음들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은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사회에서 고통과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비신앙적인 삶과 타협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연단을 피하였습니다. 이러할 경우는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잘 생각하여서 “지각을 사용함으로”, 즉 말씀에 따라 생각함으로 모든 사건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의 뜻을 따라 순종할 때 영적 분별력을 소유할 정도록 영적 성숙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성숙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각을 사용하면서” 모든 일들 속에서 연단을 받아 믿음이 자라나야 그때야 우리의 삶에 영적 분별력이 생기면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까지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그의 신앙 연단과, 인격의 성숙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함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 때야만 모든 환경 속에서 연단을 통하여 믿음이 성장하며, 믿음이 성장한 자는 인격에 있어서 온전한 가운데 더욱 깊은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가면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성숙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성숙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며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들만이 누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존귀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락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성숙의 자리까지는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자기 훈련과 연습과 땀과 연단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연단, 기도의 연단, 듣는 훈련이 잘 되어야 신앙의 성숙이 되는 것입니다.
폴리캅이라는 속사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는 말씀을 위한 수고와 희생을 치루어야 한다.” 그 수고와 희생이 무엇이겠습니까?
(1)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을 포함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2) 귀로 들은 그 말씀을 기도를 통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 성숙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7). 귀로 듣고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말씀을 체험하게 되면서 영적 분별력, 곧 영적 성숙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영적 성숙을 위하여 성령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3).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들마다 분별력과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면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나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성령 안에서 복음의 가르침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시는 복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