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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화엄사(華嚴寺)로 갈뻔했다.
전남 구례 화엄사는 봄이면 가장 빨리 찾아오는 홍매화로 유명한 고찰이지만 내가 가고자 한 곳은 전북 완주 화암사(花岩寺)다. 화암사보다 화엄사가 귀에 익숙하다보니 네비게이션을 잘못 찍은 것이다. 화암사는 그만큼 낮 설은 절이다.
이 절을 찾아 떠난 것은 시인 안도현의 ‘잘 늙은 절, 화암사’라는 글에 혹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화암사 한번 가보라고, 숨어 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 이라고...”썼다. 정말 반하게 될까.
그 화암사를 찾아 길을 나섰다.
일기예보와 달리 비 대신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따가운 햇살이 쏟아진 휴일이었다.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중턱에 아늑하게 터를 잡은 산지가람(山地伽藍)이다. 하지만 의외로 굵은 나이테를 지닌 고풍스런 절이다. 신라시대에 창건해 원효와 의상이 이 절에서 수도했고 고려 충렬왕 때 중창했다고 하니 천년 풍상을 버틴 절이다.
이 절은 그 자체도 독특한 정취를 풍기지만 올라가는 길이 거칠고 험하며 재밌다. '계곡이 길이고 길이 계곡'이다. 15세기에 지은 ‘화암사 중창기’에는 절로 올라가는 길이 “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려운 절”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 옛날엔 화암사 승려들은 마을에 한번 내려오려면 단단히 각오했을 것이다.
화암사 초입엔 발음이 부드러운 싱그랭이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엔 남도지방 장꾼들, 한양 가는 선비들이 잠시 쉬어가는 유서깊은 마을이었다. 지금은 500년 묵은 느티나무와 유럽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온실인 에코정원이 한갓진 전원풍경을 더욱 풍성하게 한 스토리가 있는 마을이다.
넓고 깨끗하게 단장된 사찰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불명산(428m)숲속으로 들어섰다. 안내판에는 사찰까지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짧은 거리에 험하면 얼마나 험하다고 옛 사람들은 그리도 호들갑을 떨었을까.
녹음이 짙은 오솔길로 접어들자 마치 영화관 안으로 들어선 것처럼 어두운 숲속엔 산 새 울음소리가 명징하게 들리고 물기를 머금어 알싸하고 그윽한 숲 향이 스멀스멀 코끝에 감돌았다.
나무다리를 건너자 숲이 우거진 원시적인 골짜기에 폭포수가 흘러내리고 가파른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에 개봉된 화제의 공포영화 '랑종'에 나올법한 의시시한 분위기다. 폭염에 걸으면 더위가 달아날 것이다.
절로 올라가는 오솔길은 따로 없다. 물길이 미치지 않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전날 비가 와서 수위가 높아진 계류위에 흩어진 돌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야 하는데 자칫하면 미끄러질 수 있어 스릴이 넘친다. 계곡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지만 바위벼랑이 다가오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산 위에서 내려 꽃이는 3단 폭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지계곡에서나 볼 수 있는 비경이다.
그리고 폭포 옆의 수십 길 바위벼랑에 철제계단을 설치해놓았다.
숲속을 제 집처럼 헤집고 다니는 사냥꾼들도 이르기 어렵다는 선인들의 말을 이제야 알겠다.
철제계단이 없었던 그 옛날엔 수직으로 세운 성벽을 오르듯 그 높은 낭떠러지를 거의 기어 올라가야 절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산속에 땅거미가 지면 길 눈 밝은 스님들도 이 길을 오르는 것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147개의 계단을 다 오르면 그제야 전설 속에 등장하는 수도원처럼 산 중턱에 터를 잡은 화암사 우화루(雨花樓)가 보인다. 고즈넉한 돌길을 올라가면 절 치고는 작고 암자치고는 큰 ㅁ자 형태의 고색창연하고 아담한 사찰과 마주하게 된다.
‘화암사 중창기’에 기록된대로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곳‘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공감이 간다.
불명산이 품에 안은듯 아늑한 터에 자리잡은 사찰은 함부로 범접하기 힘드니 수도에 정진하는 선승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땅이 없을 터다.
나그네가 처음 만난 우화루는 ‘꽃비 내리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중국 목조건축의 전형인 하앙식(下昻式)구조를 갖고 있다.
누각을 경사면에 석축을 쌓고 기둥을 세운다음 그 위에 마루를 내어 마당을 확장한 구조다.
화암사를 널리 알린 건축양식이기도 하다.
우화루엔 천년세월이 켜켜이 쌓인 목어(木魚)도 걸려있다.
목어는 절에서 독경이나 의식에 쓰이는 법구다. 물고기는 잠을 잘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고 한다.
수행하는 사람도 밤낮으로 쉬지않고 정진하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처마가 닿을 듯 극락전, 우화루, 적묵당, 불명암등 네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암사는 주름은 깊게 패였지만 품격을 잃지않은 노인처럼 곱게 늙었다. 이 곳에선 마치 조선시대로 회귀한 듯, 시간이 정지된 듯 하다.
그리 넓지 않은 사찰을 둘러보는 동안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사찰 뒤 곁엔 장독대도 정갈하게 놓여 있는데 스님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국가지정문화재라 이젠 관리인만 두고 있는 것일까.
화암사 답사를 마치고 다시 철제계단을 거쳐 계곡길로 내려왔다.
폭포를 지나치기가 아쉬워 잠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여유를 누렸다.
거칠고 투박한 계류는 고적한 분위기를 자아내 태고의 자연미가 물씬하다.
화암사 가는 길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첫댓글 계곡이 길이고 길이 계곡 같은 곳을 다녀오셨군요.
보기만해도 시원한 계곡 물줄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