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유투버 검색을 하다가 노래가 잠시 들렸는데 귀가 솔깃해져서,
홍자라고 하는 여자 가수, 잠시 빠졌네요
간드러지지 않고 무대서 몸놀림이 가볍게 까불지 않고 참 듣기 좋았네.
6월 13일 영국 4일차 관광입니다
서펜타임 겔러리를 찾아서 고생 고생 했는데 , 2000년 부터 시작된 건축 프로젝트인 서펜타인 파빌리온으로 유명해졌다
한국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도 자하 하디드의 작품.
처음에는 특정 사람들을 위한 일회용 행사를 위해서 지어진 야외 천막이었는데 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게 되어서 겔러리는 행사용 건축물을 대중에게도 공개하게 되었다
이후 서펜타임 갤러리는 일 년에 한 번씩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공공 건축을 의뢰하는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고
새클러 갤러리의 더 레스토랑은 자하 하디스가 설계해서 그녀가 추구하는 건축 철학이 담겨 있는 레스토랑이다
나는 이 두 가지 겔러리를 구글이 잘 안먹혀서 모두 어렵게 찾았으나 시간이 일러 문을 아직 안열어!!
주변 공원만 싫컨 구경하고 걸으면서 도착한 곳이 앨버트 기념관이다
엘버트 공(1819-1861년) 기념 탑이다.
독일 연방 출신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데 여왕의 동갑내기 외사촌이다.
누구든지 미남미녀를 좋아했든 여왕은 즉위 3년만에 그를 만나고 얼마 지나 일기장에 이렇게 썻다.
푸른 눈에 아름다운 코, 하얀 치아, 온갖 미사여구를 다 늘어놓더니 미남 엘버트 공에게 직접 청혼한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의 빅토리아는 이 미남자가 청혼을 받아주자,
"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천사같은 앨버트에게 사랑받는 느낌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 라고 일기장에 썻단다
21살의 열정 가득찬 처녀의 목 안에 열기가 느껴지고 행복한 상상에 잠못 이루는 밤들이 이어졌으니.
그럴만도 하지.
그런데 부부생활은 고집 쎈 여왕에게 엘버트가 주로 양보하는 상황이었다.
처가살이 하는 데릴사위격이였지만 엘버트는 진중하고 이성적이었고 반면 그녀는 고집불통에 불같이 막가파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니 자연 바람잘날 없는 부부싸움 연속이다.
사소한 일에도 신경질적으로 자주 성을 내는 여왕으로 시작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전형적인 독일인답게 이성적이고 객관적 논리로 빅토리아의 잘못을 차분이 열거하며 가르치려 들거나 아니면 입 꾹다물어버리고 무심한 모습을 보이면,
여왕의 열은 점점 더 뻗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남편을 쫏아다니며 왕짜증을 쏟아 내고,
참다 못한 남편이 꽥 고함을 지르거나 뛰쳐 나가버리는 패턴.
여왕이 한 번 화가 났을때 부리는 성질은 일반인들의 왠만한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단다.
그나마 보살급 맨탈로 무장한 엘버트 쯤 되니 그 포악스런 성격 감당하고 산다는 것이 당대의 중론.
참 잘 만난 셩격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렇게 화가 나면 천장에 붙었다 벼룩방에 붙었다 길길이 뛰는 여왕이었지만 또 무슨 변태인지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잘못은 시인하고 사과하는 쪽도 여왕이었다.
대판 싸운 엘버트가 크게 삐져서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가버리고 개피하듯 할 때,
빅토리아가 문을 열것을 명령하며,
처음에 " 영국의 여왕이에요", 다음에는 "빅토리아입니다" 라고 해도 대꾸하지 않으니,
다시 노크하며 " 당신의 아내에요"
그 때서야 기쁘게 문을 열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렇게 코뚜레 하지 않은 숫망아지 불에 데인것 처럼 길길이 뛰는 빅토리아도 엘버트와의 결혼 기간이 길어지면서 차츰 남편을 깊히 신뢰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얌전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변해버린다.
비록 그녀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 결함 있는 성격임을 자각하고 이를 묵묵히 받아주며 보완해 주는 엘버트에게 감사와 신뢰를 갖게 된 것.
딸 빅토리아에게 보내는 편지에,
앨버트가 하지 말라고 하면 리본 하나라도 절대 함부로 매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썻다.
허지만 심리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이었고 자신의 의지대로 통치했다
엘버트는 영국에서 외국인이었기에 결혼 초기에 경계의 대상이 되어 매우 고독했다고 한다.
처음 여왕과의 약혼 발표가 있자 영국 대중들 사이에는,
"새신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뚱뚱한 영국 여왕의 두툼한 돈지갑을 노리고 왔노라" 며 엘버트를 조롱하는 발라드가 크게 유행했을 정도.
농담 좋아하고 재치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지나치게 진지하고 유머 감각도 없는 우울하기 까지 한 사람이었다.
사교생활을 즐기지 않아 영국 귀족들과 사귀는 것이 매우 느렸고 밤늦도록 호화파티에 춤추고 노는 영국 상류층의 습성을 경멸하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특급 범생.
그는 복도 청소를 하는 하녀 옆을 지나갈 때 조차 귀부인에게 하는 예로 모자를 벗고 " 방해 해서 미안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정중한 자세.
결혼 초부터 어둡고 우울하며 금욕적이든 그의 성격은 죽을 때 까지 변함이 없다
그의 덕망 있는 성품과 고결한 행실로 가족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당연히 영국 귀족들에게는 배척의 대상.
한 신문지상에서는 차가운 샌님, 사이비 현학자라고 평가절하 시키기도.
여왕과의 금슬이 좋아 9남매를 낳았는데 앨버트가 가장 사랑한 자녀는 첫째이자 장녀이면서 나중에 독일 황후가 되는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로 여왕이 내심 질투할 정도로 이 딸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럴 것이 그 아이는 6살에 프랑스 어를 완벽하게 익혔고 14살에는 정치, 외교, 사회, 다방면에서 막히는 데가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갗춘 여왕의 자녀들 중에 가장 탁월한 수재.
이런 딸의 성향과 재능이 교양수준 높고 지적 욕구가 대단했든 엘버트의 구미에 딱 맞아 떨어진 것.
여왕에게는 상당히 유능한 조언자로 때로 떨어져 있을 때도 자주 편지를 보내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남편도 그녀를 성실히 보좌했다고 한다, 특히 동인도 회사의 횡포로 인해 세포이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병석에 있음에도 하나 하나 편지로 조언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를 주도 했으며 성공적으로 치러지자 빅토리아는 남편의 성공에 입이 활짝
1861년 3월 엘버트는 위경련을 앓아 병상에 눞는다.
이 때 그는 형과 큰딸 빅토리아 공주에게 죽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1861년 빅토리아 여왕과 많은 갈등을 격었든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 부인이 사망한다.
여왕은 생전에 그 갈등으로 잘하지 못한 점 때문에 상심에 빠지고 엘버트는 위가 좋지 않음에도 슬픔에 빠진 여왕을 보좌했다
결국 12월 9일 장티푸스 판정을 받았고 14일에는 윈저 성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다섯 자녀가 지키는 가운데 사망한다.
주치의는 장티부스로 진단했지만 크론병이나 신부전증, 또는 위암이 사망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엘버트 사후 빅토리아는 죽을 때 까지 상복을 입고 남은 평생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남편이 망나니 아들을 훈계하러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사망했다고 믿었기에 죽는 날 까지 에드워드 7세를 용서하지 않았다.
고집은 그녀의 전유물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