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美軍慰安婦) 혹은 한국군 위안부(韓国軍慰安婦)는 주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했던 여성들을 말한다. 위안부, 정신대로도 불렸다.[1][2][3][4] 양공주, 양갈보, 양색시, 유엔마담, 히빠리, 주스걸 등의 멸칭으로도 불렸다.[5][6][7][3][8][9][10][11][12]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한국 매춘부 사회에서 최하층이었으며,[13] 불가촉천민과도 같았다고 전해진다.[14] “그녀들은 왜 일본은 안 돼서 미국이라면 좋을까”라고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에 호소했지만 듣지 못했다.
2013년 11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민주당 유승희 의원에 의해 이날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 결재한 '기지촌 정화대책'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제출받아 분석한 결과 박정희 정부가 외화를 벌기 위해 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을 직접 관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15]
미군정시기[편집]
1945~1946년 동안 운영된 요코스카의 주일미군을 위한 위안소
한국의 군정기,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 및 특수위안시설협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복 후 38선 이남 구 일본군 주둔지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구 일본군 주둔지 주위 기지촌 또한 지속됐다.[16] 기지 주변에는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소매업과 유흥업이 성행했고,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또한 번창했다. 당시 미군은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접객 여성 등록 검진 규정을 유지했고, 공창 및 사창 폐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17]
전후 한국과 함께 미군이 주둔한 일본에서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미군 위안부를 모집했다. 이는 애국심이 높은 일본 여성들에게 본인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여 다른 일본인 여성들의 정조를 지키자는 목적으로 시행된 모집이었다.[18] 모집은 도쿄에서만 여성 1,360명이 몰렸다.[19] 이후 사창가는 30여 곳으로 확대됐다.[19] 일본인 미군 위안부 중에는 하룻밤에 미군 47명을 상대한 여성도 있었다.[18] 미군의 상대를 한 일본 여성은 사무직도 포함하면 55,000명에 달했다.[18]
특수 위안대[편집]
1952년 (단기 4285년) 육군본부 후방 전사가 발표한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20]
채명신 육군 중장이 공개한 한국전쟁 위안부를 기록한 회고록.[21]
파주의 위안부 살인사건을 알린 1957년 5월 1일의 동아일보 기사
부산에서 미군 위안부 두 명이 신세를 비관해 자살했다는 1957년 7월 21일의 동아일보 기사
이담지서 주최한 위안부 교양강습에 대한 1961년 1월 31일 동아일보의 기사
한국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8년 공창 폐지령이 시행됐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공창제가 폐지됐고 성매매도 금지되었다.[22][23]
1951년 한국 정부는 한국 전쟁 와중에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했다.[24][25][21][23] 이 한국군 위안부는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했다.[26][6][27] 이 여성들은 특수 위안대, 제5종 보급품 등으로도 불렸다.[24][6] 한국군 위안부 중에는 여성 한 명씩 드럼통에 들어가 트럭을 타고 최전선에 투입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6] 차규헌 육군 대장과 채명신 육군 중장은 이때의 위안부 운영 사실을 증언했으며,[21] 1956년에 대한민국 육군본부가 작성한 책 '후방 전사'에도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23][28]
표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내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 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사감실 "후방전사 인사편", 1956년, 148쪽[6]
기지촌 여성[편집]명칭[편집]
오늘날 한국에서 위안부라는 단어는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뿐만이 아니라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모두를 일컫는 말이었다.[29][30]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도 90년대 초까지 주한미군과 매춘을 하는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공식 명칭으로 (군) 위안부라는 말을 사용했다.[6][30] 당시에는 정부뿐만 아니라 시, 군 공무원들도 한국 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윤락 여성과 구분해 그들을 '위안부'라고 불렀다.[3] 이들은 '애국자', '민간 외교관',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 '달러벌이 역군'이라고도 불렸다.[31][32][33][34][5][35][30][36] 민간에서는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유엔 마담', '산업의 역군'이라는 말로 불렸다.[6][7][5][3] 한국 정부와 미군은 미군 위안부들의 인적사항을 공유하며 이들에 대해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