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카페에 오랫만에 방문하고 오랫만에 글을 올린다.
2021년3월5일 이시남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시남이 막내 외삼촌과 결혼을 했으니 외숙모가 된것이다.
시남이는 학생시절에도 얌전하고 말수가적었다.
이화영이와 친해서 화영이네 집에 놀러오는 모습을 간혹 봤었다.
우리집과 화영이네집은 바로옆집이어서 어린시절부터 화영이와는 동기간처럼 지냈고 지금도 여전히 화천을지키고 사는 든든한 친구다.
시남이는 간암선고를받고 지난5년동안 힘든 투병생활을하다가 국립 암센터에서 할수있는 치료방법을 모두동원해서 하다가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선고를받고 어린시절을보낸 화천에서 지내고싶다고 하여
화영이의 도움으로 딴산에 펜션을얻어 지긋지긋했던 요양병원을 벗어나 3월1일
화천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전갈을받고 다음날 밑반찬등을 챙겨 화천으로 달려갔다.
시남이의 모습은 차마 볼수가없이 변해있어서 가슴이
미어졌다.
코로나로인하여 요양병원은 면회가 자유롭지 못하여 참 오랫만에 보는 모습이 그저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도 햇빛과 물 나무 눈앞에 펼쳐진 자연과 오랜만에 의료진과 간병인의 감시없이 누릴수있는 자유에 행복해하며
얼른 회복해서 화영이와 함께 낚시질 하자는 약속을 하는 모습에 더 눈물이났다.
옛 친구를 위해 시간과 마음을 아낌없이 부어주는 화영이가 너무고마웠다.
내가 결혼하고 신혼때 삼촌집에 놀러온 시남이가 나를 향해 선뜻 호칭을 못 부르고 머뭇거려서 내가 외숙모라고 부르라고 다구쳤었다.
결국 집에가서 전화로 외숙모님을 세번 연거푸 부르고나서 이제됐지 하고는 전화를 끊었었다.
그 지난 옛날 얘기도하며 함께간 가족들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돌아설때 여기가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선뜻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하루에 몇번씩 전화로 상황체크를 했고 화영이는 수시로 들여다보며 살펴주었는데 결국 5일 밤을
못넘기고 화영이와 시남이 막내아들이 지켜보는가운데 70도 못채운 생을 마감했다.
웬만큼 움직이던 노인들도 요양원에 들어오면 두달이 못가서 와상환자가 되어버리고 간병인의 한마디면 수면제주사로 거의 하루에 깨어서 움직이는 환자가 별로없다는 요양원의 실태를 말해주던 시남이 모습이 눈에선하다
서울뉴타운 장례식장을 찾아준 명옥.화선.세환.친구들 너무고맙고 끝까지 든든하게 함께해준 화영이에게 너무 고맙다 시남이 큰아들이 살고있는 청주에 목련공원 209호실 86호에 안치시키는것으로 이땅에서 할일을 마쳤다.
부디 친구들 건강잘 챙기고 남은생을 보람있게 살아보자는 당부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