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를 보내며
계묘년(2023년)이 저물고 있다. 정월 초하루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2월 중순에 접어드니 세월이 정말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누가 세월을 전광석화(電光石火) 같다 했던가. 90이 내일 모래인 노년들에게는 흐르는 세월은 그저 빠르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주희(朱熹)의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암송하시며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연못가에 돋은 봄풀 꿈에서 깨기도 전에, 뜰 앞 오동잎 가을소리 나네)를 소리 내어 읊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돌이킬 수도 없고, 가는 세월 붙잡을 수는 더욱 없지 않은가.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기" 라도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고장도 멈춤도 없다 던가. 애꿎은 유행가 소리만 원망해 본다.
게다가 일주일 간격으로 다정했던 친구 둘을 저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나니 인생무상 이보다 더할수가 없다. 옆을보니 동문수학했던 벗들도 몇명 안남고 없다. 살아있어도 몇몇친구는 요양원 신세, 제주에서 치매를 앓다 행방불명인 동문은 2년이 넘도록 종무소식, 일찍이 세상을 뜬 김봉규 송동일 한상우 김진억 며칠전 타계한 이명섭 강신용, 대학동기 이형국 지병억 이진홍 모두 무엇이 그리 급한지 내앞에서 유명을 달리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 3년 4개월 대한언론인회에서 모시던 김은구 홍원기 제재형 세분의 회장과의 사별도 큰 슬픔이 아닐수 없다.
한편 올한해 돌이켜보니 나로선 유난히 바쁜 한해였다. 고산준령에 모셨던 선친묘소를 제천 개나리공원으로 이장해 가족묘원을 조성한 대역사에다 증조부 진재공 문집을 초역 출판 고유제를 올린 일은 내 일생일대의 숙원사업을 성취한 기쁨이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 증보판을 사비로 펴내 관계기관에 배포한 남다른 희열도 만끽했다. 언론계의 큰스승 ,장기봉선생평전,을 출판한데이어 윤임술 사장의 일대기를 ,언론계 거목들,에 실은 일도 감회가 새롭다.
누구는 세월 감을 말하면서 60세에는 해(年)마다 늙고 70세에는 달(月)마다 늙고 80세에는 날(日)마다 늙고 90세에는 분(分)마다 늙고 100세에는 시(時)마다 늙는다 했는데 벌서 분마다 늙어가는 나이가 되었으니 가는 세월 뉘라서 막겠는가. 누구는 50세까지는 여름이며, 75까지는 가을이고 남은 25년 즉 백세까지는 겨울에 비유하고 있다. 봄에 해당하는 25세까지는 눈트고 꽃피는 봄으로 인생의 시작이요 출발이라면 26세부터 50세까지는 뜻대로 계획하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인 여름에 해당되고 51세부터 75세에 이르면 계획하고 실천해서 결과물을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 그래서 가을을 결실의 계절이라 하는데 내 입장에서 그 가을을 얼마나 보람 있게 보냈는지 후회 막급이다.
하지만 나는 복 받은 사람 중의 하나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직은 살아있으니 그렇고 아들 딸 4남매 손자 손녀 모두 건강하고 저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사니 노후가 그런대로 복받은 인생, 하지만 황혼 길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복에 겨워 푸념한다 할지 모르나 마음 한구석은 항상 텅 빈 기분, 이 또한 늙는 징조인가. 오래 살겠다고 만보걷기에 동참하고 일주일에 두세번 편우회 모임으로 시간을 죽이며 대학동기 산악회에다 성삼회 월말회 양수회 종친회 사우회 각목회
향우회 유림연합 영화감상 모임에도 빠짐없이 얼굴을 내미니 닥아올 새해에도 살아 있긴 할모양인가 또 한해를
넘기는 소회 만리장서를 써도 모자랄것같다.
“한 세상 살다 가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거늘/재물, 명예 얻으려고 안간힘 쓰지 말게나/ 인생은 지극히 짧고 덧없는 것/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이라네/ 바람처럼 살다 아둥바둥 살지 말고 구름처럼 물처럼 유유히 살게나/ 가이 없는 사막을 걸어가노라면/그대 발자국이 남긴 하지만 바람 한 줄기 불면 흔적도 없다네/구름처럼 가세 봄이 오면 꽃 피고 가을엔 낙화 지듯/인생도 피고 지는 것이 한 평생/천하장사라도 가는 세월 못막네/그러니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히 살게” 문득 청석 지용우 선배가 생전에 남긴 시한수가 머리속을 맴돈다.
(정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