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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김천 총무 정성천입니다. 카페에서는 이름을 ddangbbee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이름을 사용하는지 동문회원님들에게 알려주고 싶던 차에 12년전 김천여고 근무할 때 제 별명 땡삐(ddangbbee)에 대한 수필이 생각나서 다시 찾아 올려 봅니다.
땡삐(ddangbbee)
교무주임 정 성 천
몇 년 전의 일이다. 아주 어려운 손님을 만나서 저녁식사를 함께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침 그날 나의 차가 고장으로 인해 정비공장에 들어가 있어 차를 운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손님을 잘 아는 고등학교 동기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손님을 모시고 퇴근시간에 맞추어 나를 데리러 오기로 약속을 했다. 그 손님은 여성이었으며 나에게 아주 중요한 손님이었고 내가 만나기를 그렇게 고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날이 그녀와의 첫 대면이었기에 나는 첫인상을 좋게 심어주고 싶었다. 적어도 오늘만은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중년의 점잖은 그리고 멋진 영어선생님으로 그녀에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따라 덥다고 잘 입지 않던 양복을 꺼내 입었다. 그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양복 중에서 가장 잘 어울린다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멋진 걸로 골라 매고 출근했었다.
이상한 흥분감 마저 느끼면서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퇴근시간이 되었고 이윽고 친구의 차가 운동장에 도착했다. 나는 아주 정중한 걸음걸이로 운동장으로 내려가서 차에서 내리는 친구와 아름답고 멋지게 정장을 한 그녀를 맞이했고 친구의 소개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공을 가르며 나의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있었으니 “때-ㅇ 삐!”라는 합창 소리였다.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태연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 이상 그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하느님께 빌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의 기도는 또 한 번의 단말마와 같은 날카로운 “때-ㅇ 삐!”라는 소리로 여지없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와 인사하던 그녀도 이제는 그 소리의 목적지가 우리 쪽인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고 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어쩔 수 없어 그쪽을 쳐다보았다. 2층 3학년 교실 창문 쪽에 많은 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이쪽을 보고 “땡삐! 땡삐!”를 연호하고 있지를 않는가?(그 당시 나는 3학년 1반 담임이었고 3학년 영어수업을 맡고 있었다, 학생들은 야간자율학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친구가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하였더니 그러지 않아도 어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따분해 하던 장난기 심한 여학생들은 마구 신이 나서 “땡삐! 땡삐!”를 학교가 떠나갈 정도로 합창하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손을 들어 답례를 하였지만 황당하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스러웠다. 점잖은 체면에 땡삐가 웬 말이냐? 그것도 처음 만나 잘 보이고 싶은 그녀 앞에 나의 치부를 드러내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눈치 없는 학생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 나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그 녀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정선생님!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좋군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눈치라곤 눈꼽 반만큼도 없는 얄미운 친구가 운전을 하면서 능청스럽게 묻는다. “너는 우짜다가 그 독하기 짝이 없는 땡삐가 다 됐노? 애들 무척 괴롭히는가 보네” 그 손님이 위로의 말을 다시 건넨다. “아닙니다. 참으로 좋은 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땡삐는 벌인데 벌은 부지런하고 성실하지 않습니까?”
"으이구 오늘 모든 게 망치는 구나." 눈치가 없어 얄미운 친구에게 원망의 눈을 홀긴다.
나의 별명 땡삐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 같다.
1978년도 3월에 군복무를 마치고 경북 북부지방 오지인 봉화중학교에 복직을 했다. 봉화중학교에 재직하면서 열정적으로 시골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무척 노력했었다. 좀 뒤떨어지는 학생들에게는 오후 나머지 공부도 시키고 게으른 학생들에게는 따끔하게 종아리도 때리면서까지 젊은 패기 하나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이런 악착같은 성격과 나의 체구가 자그마한 것, 따끔따끔하게 종아리를 잘 때리는 점 등을 모아서 추출해 낸 이미지가 바로 땡삐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탄생한 땡삐는 1978년부터 1983년 2월까지 봉화중학교에서 윙윙거리면서 열심히 날아다녔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작은 소망을 따라 울릉종고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울릉도 들어가는 뱃머리에서 혼자서 다짐을 했다. “ 아무도 나의 별명을 모르는 낯설고도 생소한 장소에서 처음대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이제 그 점잖지 못한 별명은 털어버리고 다른 멋진 별명하나 얻어야지. 울릉종고는 남녀공학 학교가 아닌가? 여태 가르쳐보지 못했던 여학생들도 가르치게 되었으니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자상하고 좀 더 멋지게 보이도록 노력해야지”하고 수많은 다짐을 했다.
울릉종고에서의 처음 한 학기는 참으로 평온한 세월이었다.
나의 별명에 대한 혐오감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세월이었고 땡삐처럼 완벽하고 악착같이 해내야 한다는 내 나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하고도 자유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2학기가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되었던 어느 날 오후 나른한 5교시, 2학년 1반에서 한참 영어 수업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는 도중에 언제 날아왔는지 벌 한 마리가 나의 얼굴 앞에서 윙윙거리면서 떠날 줄을 모른다. 나의 얼굴에 발랐던 스킨냄새를 꽃냄새로 착각을 했는지 아무튼 내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나를 따라 다닌다. 쏘일까봐 걱정도 되었지만 도무지 성가셔서 수업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앞 쪽에 앉아있는 학생의 노트를 살며시 말아 쥐고서 기회를 포착하여 일격에 그 벌을 잡아버렸다. 학생들의 “와우-”하는 자그마한 술렁임이 있었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 다음날 그 학반에 들어갔을 때 나는 칠판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글을 보고서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땡삐가 땡삐를 죽이다! 오- 동족상잔의 비극이여!” 문장의 뜻으로 봐서 내가 분명히 땡삐인 것이다. 먼 봉화에다 두고 왔던 나의 별명이 어떻게 해서 악령처럼 이곳에서 다시 되살아났는지, 그렇게도 멀고 먼 바다를 어떻게 건너서 심해선 밖 한 점 울릉도까지 날라 오게 되었는지 아니면 천성적으로 나에게 땡삐 기질이 있어 자연발생적으로 붙여졌는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그래서 면밀히 조사를 해 본 결과 지난 6월 달의 학도체전이 문제였다.
6월 달에 경북학도체전이 점촌시에서 거행되었는데 그때 울릉종고에서 넓이 뛰기 선수 1명이 참가를 했었다. 하늘의 장난인지, 운명인지 그 선수가 투숙한 여관에 나에게 배웠던 봉화고등학교 육상선수들도 공교롭게 함께 투숙하였던 것이다. 서로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의 별명을 알게 되었고 그 넓이 뛰기 선수가 울릉종고 학생들에게 차츰 알리게 된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알게 모르게 땡삐라는 나의 별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악착같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버릇이 나쁜 학생에게는 따끔하게 종아리도 때렸다. 그랬더니 나만 땡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내에게도 “땡모” 나의 아들에게는 “땡돌이” 나의 딸아이에게는 “땡순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뿐 아니라 교실 벽에도, 칠판에도 화장실벽에도 “땡삐를 죽이자”. “땡삐를 밟아 뭉게 죽이자” 등 듣기만 하여도 섬직한 표현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악착같이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을 했다. 그렇게 땡삐를 죽이겠다던 그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나면 땡삐가 좋다고 바다에서 갓 잡아온 오징어를 들고 사택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5년 동안 땡삐는 모진 해풍을 받으면서도 울릉종고에서 잘 날라 다녔다. 울릉종고 근무를 마치고 고향인 김천으로 오게 되었다. 10년 동안 객지 타향에서 생활하다가 처음으로 고향에서 고향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기에 가슴이 설레고 한껏 부푼 마음으로 김천중앙고등학교로 부임하였다. 이제 내 일생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할 고향에 왔으니 땡삐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이제 내 아들과 딸도 곧 고등학생이 될 텐데 아버지가 땡삐라고 불려 진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좀 더 점잖은 별명이 아니면 아예 별명이 없는 것이 어떨까? 별명이 없는 선생님들도 많기만 하지 않는가? 그런데 김천중앙고등학교에 전근 온 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울릉종고를 졸업하고 김천전문대에 진학한 몇 명의 학생들이 인사차 학교로 찾아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중앙고등학교에도 땡삐가 날라 다니기 시작하지 않는가? 정말로 모질고도 질긴 땡삐였다. 그 먼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중앙고등학교 근무를 마치고 김천여고로 전근을 올 때에는 나의 별명을 내입으로 이실직고하였다. 그렇게 먼 바다를 건너서까지도 따라다니던 별명인데 엎어지면 코도 아니고 배꼽이 닿을 거리인 중앙고등학교에서 김천여고로 날라 오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역공으로 내가 먼저 이실직고(以實直告)하는 편이 더 나을 게 아닌가 하는 나의 속셈이었다.
그래서 김천여고부임하고 처음 맞이한 수업시간에 나를 소개할 때 나의 이름과 함께 별명을 알려주고 땡삐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땅벌에서 음운의 변화인 경음화와 이모음 역행동화로 땡삐가 되었으니 땅=土, 벌=蜂으로 젊잖게 土蜂(토봉)선생님으로 불러달라고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아무래도 토봉선생님은 호 같기도 하고 옛날 서당의 훈장 선생님 같은 맛이 있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지 않아 土蜂(토봉)은 온데 간 데 없고 땡삐만 무수히 날아다닌다. 한 학생에게 물어봤더니 “소주”보다 "쐬주“가 더 맛있는 것처럼 土蜂(토봉)보다 땡삐가 더 재미있단다. "아! 이일을 어찌 할 것인가?"
지난 여름방학 때 울릉도에 단체 직원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몇몇 여선생님들의 울릉도 안내를 부탁 받고 여선생님들과 택시를 탔더니 택시기사가 ”아니 땡삐선생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넙죽 인사를 한다. 나이가 서른 살이 다된 울릉종고 출신 제자란다. 나의 이름을 아는지 물어 보았더니 이름은 몰라도 땡삐라는 별명은 알고 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별명 땡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고 나의 별명은 나의 제자들이 붙여준 이름이 아닌가? 부모님이 중요하듯이 제자들도 중요하지 않은가? 적어도 20년 이상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면서도 나를 따라다닌 별명은 또 다른 내 색깔에 맞는 나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또 다른 나의 이름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말고 애착을 갖자. 그리고 그 이름에 충실해지자. 자칫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기기 쉬운 나태함, 적당주의, 안일함 등을 땡삐의 속성으로 물리치자. 그리고 학생들에게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심어주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땡삐의 모습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자.
지난 스승의 날에는 꿀 한 병을 선물로 받았다. 선물과 함께 동봉된 편지에는 “선생님 일년 양식입니다. 아껴서 드십시오.”라고 적혀있었다. 선생님들에게는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이 선생님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참 양식이 아니겠는가? 나에게 땡삐라고 불러주는 학생들이 있는 한 나는 외롭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젊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벌침도 다 빠지고 날개에 힘도 많이 떨어져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만 이름만은 그대로 사용하고 싶은 건 젊었을 때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의 한 표현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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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교육자를 동기생으로 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내 생애의 마지막 젊은 날입니다^^*
하나라도 더 가르칠려는 모습 눈에 선하네, 종고는 실업계 학교라서 대충대충해도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