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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수, 한국 연극 영화계 원로
글/ 김형근
한재수 씨는 미국 내 불교신자로는 보기 드믈게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 오랜 동안 활동한 이 분야의 원로이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한때는 한국에서 연극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 또 L.A.에서는 1992년도에 ‘미주불교예술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3년 9월에 본지 김형근 발행인이 만나 나눈 이야기를 인텨뷰 형식으로 싣는다.
김: 한선생님의 태어나신 연도와 장소, 그리고 집안 분위기 같은 것도 좀 말씀해 주세요.
한: 예... 1926년 7월 21일이 생일입니다. 함흥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씨들이 많아요. 거기에서는 함흥 한씨라 그러지요.
김: 거기서 태어나시고 그 다음에 성장부터 학력등도 말씀해 주시죠.
한: 제가 어릴 적 적 부터 우리 할머니가 아주 열렬한 불교신자입니다. 풍허리에서 절에 가려면 30 리도 더 됩니다. 저 높은데 가는데... 거 왜 노래 있지요. 함경도 어랑가에 나오는 그 절입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30 리를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깔개요, 방석은 내가 들고 우리 할머니는 함지, 함지 라는게 뭔가 하면 그 안에 음식이라든가 여러 가지 과일도 잔뜩 넣은 것을 이고 그렇게 걸어가요. 아침 새벽에 저는 따라가는 거지요. 할머니가 참 정성스런 분이었어요. 우리 큰아버지가 일정시대에 효자상을 받은 분입니다. 그러니 집안이 대개 그래요. 우리 할아버지가 아프셨을 때 그 병을 고칠려면 살을 떼야 됩니다. 큰아버지 살을 뜯어서 할아버지 살에 붙이는 거지요. 그래서 효자 상을 받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철저히 불교집안인데, 그 밑바닥에는 늘 한국 불교가 똑같은 문제가 있듯이 유교가 쫙 깔려있는 거지요. 유교하고 불교하고 혼합되어있는 거지요. 유교하고 불교하고 어떤 점에서는 맞지 않는 데가 많습니다. 불교는 해방을 얘기하지만 유교는 예속을 얘기하고 충성, 일편단심이거든요.
김: 거기서 성장을 하시고 서울엔 언제 내려오셨나요?
한: 서울에는 46년 정월달에 왔어요. 46년 1월이에요. 대학에 오기 위해서 그때는 피해 다닐 때에요. 그때는 다 그렇지요. 일본 군대 안갈려고 학교가도 군대에 끌려가니까, 그렇게 피하고 다니다가 해방 이후 공산당이 들어와서 도저히 나로선 그 사람들하고 앉아 얘기 할 수도 없고 해서 또 종교는 아편이라고 해서 일체 가지도 못하게 하잖아요. 우리 삼촌, 한오협씨라고 있었습니다. 일정시대에 동아일보에 기자를 하다가 동아일보 마라톤 사건에 걸려서 그만 두고 고아원을 했습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공산당에 있는 보안대에서 와 우리 삼촌을 잡아서 형무소에 넣어 버렸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는 고아원이라는게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한 1주일 있다가 풀려 나왔는데 “나하고 같이 서울로 가자” 그러데요. 그래서 같이 서울로 왔습니다. 기차타고 원산까지 와서 원산서 부터 걸어서 서울까지 온 것입니다. 그때 혼난 것은 말도 못하지요.
김: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 동국대학교에 가셨나요?
한: 그해 동국대학교에 들어갔지요. 그게 46년도 일거예요. 그 해 일거예요. 그때는 9월에 시작했거든요. 뚝섬에 가면 유명한 절이 있습니다.봉은사, 그 절에 내가 정식으로 신도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김: 동국대학 불교학과 졸업하셨어요?
한: 불교학과가 아니고 국문학과에서 한국문학을 했는데, 옛 글, 고려향가, 신라향가를 전공했어요.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고원씨가 대학 동기입니다. 이 친구하고는 로이터통신사에서 같이 근무하였습니다. 대학시절 불교개론은 박동근선생님, 불교각론은 권상로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김: 학교졸업하고 뭘 하셨어요?
한: 학교있을 적에 연극을 했습니다. 이북에서도 연극을 했습니다. 학교 입학 전 1946년까지 함흥에 있을 적에 정민씨라고. 스님이면서 연극을 하는 분 있었습니다. TV배우도 하고 ... 정민씨가 어떻게 함흥에 와서 연극을 했습니다. 그때는 말하자면 피해 다니다가 연극을 했는데 그때 내가 조금 도와줬고 그러다 보니까 저도 연극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정민씨 하고 관계는 아주 깊었어요. 정민씨가 서울에 와서 작가 함세덕씨와 함께 <대중극회>를 만들어 주로 불교연극을 많이 하였습니다. 매번 가서 도와 드렸고, 그분이 날 또 좋아했어요. 이상하게.... ‘원효대사’도 같이 글을 쓰고 그랬습니다. ‘동승’이라는 연극도 했습니다. 저는 학교 졸업하고 부산에 가서 <예술소극장>을 만들어 독일의 표현주의 연극을 많이 올렸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신커만’(상이군인이라는 뜻)이라는 작품이었는데 부산극장에서 공연하였습니다. 1951년까지 있다가 1952년에 로이터 통신에 들어갔습니다.
김: 그러니까 연극활동을 하신 거예요?
한: 예, 연극 연출을 주로 많이 했어요.
김: 대중적인 연출 작품이 있나요?
한: 많지요. 입센의 ‘유령’도 했고, 미국의 유명한 작가 킹슬리의 ‘형사 이야기’라는것도 했고... 많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것도 했고 고도를 기다리며’ 아주 좋았습니다. 프랑스영사관에서도 와서 보고 아주 격찬하고 갔습니다. 동아일보에도 누가 글을 써주고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런 연극을 했지요.또 ‘꽃과 십자가와 여자의 공원’도 크게 성공을 거둔 연극입니다.
김: 선생님 직업은요?
한: 내가 학원을 했습니다.. 학원을 설립을 해서 운영을 했지요.. 또 연기도 가르치고...
김: 연예학원이네요?
한: 연예학원도 되고 영어도 가르치고 양쪽으로... 근데 난 영어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가르치질 않고 그냥 일상회화로서 가르쳤어요. 내가 6.25 사변때는 미국 CAC라고 있습니다. 경제부흥단이라고 거기서 사람을 모집하대요. 통역관을, 그래서 그때 시험을 쳤더니 세 명이 합격을 했어요. 6.25사변때는요. 그때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가 어떻게 영어를 할 줄 알아서 거기서 고용이 되서 Senior Translater 하는데 있습니다. 고급번역관이지요. 그걸 오래 했어요. 그 후에 종군도 하고,...
김: 다양한 활동을 하셨네요.
한: 예 그렇지요.
김: 학원 설립도 하셨고, 연극도 하셨고, 통역도 하셨고, 기자도 하셨고.... 주요 직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한: 그러니까 6.25 사변 때는 나는 고생을 하나도 안했습니다. 사람들 모두 굶고 그랬는데 나는 고급번역가로 있으니까 월급이 그때 100만원 이상입니다. 집한채 사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6.25사변 때는 고생을 하나도 안했습니다. 사변 끝난 후 학원을 설립했지요. 그렇게 해가지고 죽 계속해서 했습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 주로 학원을 했지요.
김: 말하자면 연기지도?
한: 예, 연기지도.
김: 거기서 배출한 사람 중에 유명한 사람은?
한: 문희를 들 수 있죠. 한국일보 사장부인이 된 사람이지요. 희곡작가 최청이라는 사람도 거기 출신입니다. 그 외에 많습니다. 내가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지금도 TV를 보면 나옵니다. 이젠 그 친구들도 늙었어요. 40, 50되어서 이제 사장으로도 나오고, 아버지로도 나오고 그러데요.
김: 남자 배우들도 있어요?
한: 남자배우도 많이 있지요. 신성일도 제가 조금 가르쳤습니다. 여기 와서도 신성일이가 나를 그렇게 좋아하잖아요. L.A.에서 만났을때 껴안고 나를 선생님이라 그러지 않아요.
김: 친구들은요?
한: 후배로는 최불암이 같이 연극을 좀 했지요. 김기영 감독, 유현목 감독, 박암 등이 친구입니다.
김: 같이 연극했던 분들 중에 지금 활동하는 분 있어요?
한: 예, 많죠. 그 누구야 이름 하나도 기억 못하겠네.. 기억회복 하는 약을 먹고 있습니다.
김: 요즘에 무인시대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니죠?
한: TV를 잘 보질 못해서
김: 연기지도를 많이 하셨네요. 그러다가 영화에도 관련하셨어요?
한: 한국연극사에 <판토마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처음 한국에 소개하고 가르치고 했습니다. 영화는 평론을 주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영화 평론가 협회의 정회원이지요.
김: 이런 활동을 하시다가 미국에는 몇 년도에 무슨 연유로 오셨습니까?
한: 1979년에는 업무차 왔고 1982년에 다시 왔다가 살게되었습니다. 1979년에 영화진흥공사 일로 영화제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여기 Film Makes라고 있습니다. International Film Exposition 이라고 그럽니다. 아주 굉장했습니다. 그때, 지금 없어져 버렸는데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에사떼라는 사람이 죽어서 없어졌는데, 매년 그 행사가 LA에서는 굉장했습니다. 그러니까 Festival이 아니고 상영회지요. 길에 깃발이 죽 붙어있고 그랬어요. 근데 요즘 그게 없어졌어요. 그 사람이 세상을 뜬 다음부터, 그때 거기 파견되어서, 영화진흥공사에서 가보라고 해서 그때 왔었습니다. 그게 계기가 되가지고 여기 있게 됬습니다. 내가 미국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가라 할 적에도 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영국이나 가면 가고, 프랑스나 가면 가지, 근데 할 수 없이 가라고 해서 그냥 왔습니다. 왔는데, 내가 여기 있게 되는 원인이 있습니다. 어느 미국 여자분 때문에 있게 됐습니다. 당시 UCLA에 쇼올리 클락 이라고 세계적인 여류감독입니다. UCLA에서 전위 영화를 가르쳤습니다. 그 여자를 무슨 일이 있어도 인터뷰를 하고 가야겠다고 해서 UCLA를 찾아갔습니다. 나까무라라는 일본교수가 있었습니다. 근데 3세가 되서 일본말을 못하는데, 그분의 안내로 쇼올리 클락이라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져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그 여자가 저 뒤에서 달려오데요. 그러더니 서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I love you 라고 하는 거예요. 나보고, 세 번 그래요. 그러면서 나를 오래요. 그래서 갔어요. 그러면서 자기 스승 중에 한 사람이 위대한 한국사람인 백남준씨가 자기 선생이래요. 그러면서 나보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Morning Calm Country’에서 온 사람인데 질문하는 것이 이때까지 자기가 인터뷰한 것 중에서 자기가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대요. 참 훌륭한 질문을 해서 자기가 마음에 든데요. 사랑한다 하면서 Kiss를 하대요. 그러면서 자주 오래요. 그 여자 분하고 자주 만나서 그것이 나를 미국에 있게 만든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1982년에 국제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왔습니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이 분이 한국에 가지 말고 여기 살으라고 권했습니다. 근데 그 여자가 텍사스에서 병에 걸려 죽었어요. 영화감독 하다가 죽었어요. 1982년 미국에 다시 왔을 때는 ‘후레이드 크레이머’라는 사람이 초청장을 보내주어서 왔습니다. <20세기 폭스사>의 특수효과를 하는 사람인데 ‘Deer Hunte’r의 폭파하는 것 부터 ‘킬링필드’도 그 분이 하고 ‘타워링 인페르노’도 그 사람이 전부 다 했습니다. 그 사람이 1970년대에 한국에 영화 만들러 왔는데 제가 도와주고 난 후 친구가 되어 그렇게 친합니다. 그 사람이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오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친구일 좀 도와줬지요. 미국에서는 영화사 일을 돕기가 힘듭니다. 왜 힘드냐하면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되는데 그때 내가 영주권도 없고 해서 이 사람이 재정지원하면서 자기를 도우라고 그랬거든요. 참 운이 좋은 거지요.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3시면 그 친구는 퇴근을 합니다. Bar에 가서 그 친구랑 앉아서 얘기하고, 영화 얘기하고 그랬습니다. 죽 그렇게 생활을 해 왔었죠. 그러면서 아다시피 직장은 동양건재한약방에 있었죠. 지금은 없어진 수도사 한계정스님이 나를 좋아해었요. 수도사에 나보고 나오라고 하고... 내가 미국에서 처음 나간 절이 고려사입니다. 고려사가 어디 있었느냐 하면 ‘윌톤.WILTON’인가 어딘가에 옛날에 있었습니다. 한 20년 전에요. 제가 사는 곳이 윌톤에서 두 블록 인가 떨어져 있는데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청년 중에 이유기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통역대학교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유기를 밀어가지고 청년불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LA에서 ‘청년 불교회’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유기씨가 회장이고 제가 고문으로 있었습니다 30명 이상 청년회원들이 있었는데 몇 년 하다가 없어지고 말았지요. 그 후 이사를 갔는데 수도사가 가까워 수도사 계정스님을 만나서 수도사를 다닌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사 할 때마다 가까운 절에 다니게 되었는데 반야사, 금강사도 다닌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주로 관음사에 나가고 한 달에 두 번 세리토스 연화사에 나가 설법을 합니다.
김:미국에서는 쭉 캘리포니아에서만 살았나요?
한: 뉴욕에서 1990년대 초에 유명 영화배우들 만나서 인텨뷰 하느라고 플러싱에서 6개월인가 7개월인가 살았어요.. 그리고 New York 유현목 감독이 만드는 영화를 도와주었지요.
김: 무슨 영화요?
한: 한국 고아의 얘깁니다. 흑인으로 있다가 한국에서 자라다가 미국으로 건너온 아이의 얘기입니다. 근데 그 아이가 마약도 하고... 그걸 사람으로 만드는 얘기입니다.
김: 절에서는 그렇게 활동을 하셨습니다만 절 외에, 불교예술 단체내에서 회장을 하셨죠? 이에 관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한: 예, <미주불교예술인협회>입니다. 진각종 장지현 정사가 저와 도안스님을 설득하여1992년 10월 18일 L.A. 관음사에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은 시인을 초청하여 미주불교인예술인협회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도안스님을 고문에 저를 회장에 추대하여 창립행사를 가졌는데 제가 고은씨 옆에 앉혀놓고 고은 시 해설하고 낭독하였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부터 고은씨와는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또 L.A.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송년행사를 가졌는데 강서회관에서 1992년 12월 27일에 남가주불교사원연합회가 주최하고 미주불교예술인협회가 주관한 '1992년 남가주불교인 송년의 밤'행사가 그것입니다. 이때 약 300여명이 참석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저와 지현정사가 불교인들 가게 많이 돌아다녀서 텔레비젼을 비롯하여 많은 경품 만들었습니다. 이 단체에서는 창립 직후부터 불광심인당에서 저와 지현정사가 시에 관한 강연을 하고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을 하였습니다. 이 모임은 지현 정사가 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몇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또 연극도 하였는데 1993년 11월 27일 관음사내에 있는 만다라 소극장에서 영어로 '엠티네스(공)'공연을 하였습니다. 원래는 제목이 ‘보디사트바’로 했는데 미국사람들이 이 말을 모른다고 엠티네스로 바꾸라고 해서 바꾸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저와 이태리 계열의 미국인 제 처 둘이 출연하였습니다. 관람권을 $20에 팔았는데 미국인들 관람객들이 꽤 많이 왔습니다. 관객동원에서 성공하였는데 아는 미국친구들이 미국 언론에 홍보를 해주었습니다.
이 불교예술인협회외에도 내가 개인적으로 영화하는 젊은이들을 모아서 ‘젊은이 영화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될 수 있으면 한국동네에 머물러서 뭘 하기 보다도 미국사회에 진출하게끔 자꾸 자극을 하여 지금 많이 나갔습니다. 내가 미국 영화인들을 많이 압니다. 사장도 알고 부장도 알고 전부 소개해주고... UCLA나 USC 대학에 들어갈 적에도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데려다가 친구한테 추천서 쓰게 해서 학교에 들어가게 하고 그런 일 많이 했습니다. 또 미국에 와서 한 20년을 내가 영화 평론가로 일을 했습니다. 미국 영화인 협회가 보증하는 영화 평론가로서 제가 등록이 되있습니다. 한국사람으로 저 혼자 꽤 오래 했습니다. 요즘에는 한, 두 사람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 10년을 저 혼자서만 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많고 중국사람도 많은데 한국 사람은 없었습니다. 원고를 써서 신문에도 보내고 영화 잡지에도 보내고 그랬죠.
김: 봉사활동으로 통역이나 서류 같은 것도 많이 도와주시고 그랬죠? 관음사 부설 한미불교봉사회에서
한: 도안스님을 약 2년 정도 내가 도와드렸을 거예요. Down Town에 찾아가서 집 없는 사람들 소위 Skid row라고 부르기도하는데 Homeless죠, 그런 사람들 점심도 먹여주고, 가서 좋은 얘기도 해주고 그랬죠. 불교 얘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가 가서 불교 얘기 안 할 수 있습니까? 가서 불교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 번 갔었습니다. 닭고기 사가지고 주로 갔지요.
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중간 평가를 하다면 그러면 나는 이런 점에서는 보람을 느꼈다. 이런 점에서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런 말씀 듣고 싶습니다.
한: 그런데 그런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뭐랄까요? 마음이 편하고 뭐 부딪치는게 없어요. 난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늘 편하고 그래요. 목사하고 만납니다. 여자목사인데, 나를 만나는 이유가 있어요. 나를 만나면 그렇게 편하데요. 편하고 걸림이 없고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를 줘서 자주 만나요. 그래서 내가 불교 얘기도 많이 하지요. 뭐 걸림이 없습니다. 후회되는 것도 없고 그대로 조용히 가면 되는 겁니다.
김: 하시고 싶은 일은? 앞으로.
한: 하고 싶은 일은, 만약에 가능하다면 영화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김: 제작하고 싶다는 거예요?
한: 감독을 한번 하고 싶어요. 먼저 한번 했어요. 미국에서 하나 했어요. 전부 미국 배우에다가 미국 카메라맨에다 나 혼자 한국사람이고, 내밑에 있는 조수가 한국청년이예요.
김: 영화제목은요?
한: Troubled Sister, 말썽 많은 누이동생이라는 뜻이죠.
김: 정리하면 영화와 연극이 한 선생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야였습니다?
한: 불교하고 연극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어떤 표현을 통해서 부딪쳐가는 세계로 좋다고 봅니다. 불교연극에 많이 관여를 했습니다. 원효대사 할 때도 그랬고...
김: 앞으로 희망을 말씀해 주십시요?
한: 영어로 많은 시를 써 가지고 미국 잡지에 실어 보고 싶습니다. 희망이 불교 희곡을 하나 더 쓰는 것이고 그것을 무대에 상연하는 것이고 그리고 시를 발표하는 겁니다. 불교에 관한 시지요. 표현양식을 통해서 불교를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현재 불교가 부딪혀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잖습니까? 부처님 제자들을 보면 전부 브라만의 귀족 출신들 아닙니까? 그러지 않으면 부처님의 깊은 지혜를 이해 할 수도 없거니와 그 제자 분들이 다 수준이 높은 분들이 되어서 대중속으로 많이 전달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대승불교가 보살도를 내세워가지고 상구보리에서 하화중생으로 이렇게 넘어가는 것 아닙니까? 근데 불교가 잘 알다시피 또 한가지 참 재미있는게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색수상행식>로 다섯 가지로 분석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분석적입니다. 오온이라는 건 종합해서 말했을는지 몰라도 <색수상행식> 하면 이건 상당히 분석적입니다. 2500 년 전에 이런 분석적인 걸 얘기하신 분은 없습니다. 어떤 철학가도 없습니다. <색수상행식>이니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런 것 다 분석입니다. 감각기관을 일일이 분석한 것이지요. 이러니까 그 당시로는 상당히 분석적이고 어려웠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불교가 그런데 부딪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알기쉽게 전달하려면 연극, 영화, 시, 소설, 이런걸 통해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게 내 희망입니다. 그게 내 목적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조용히 가면 되는 겁니다.
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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