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교정승 예문관 대제학 시문희 송암공 추모비명 병서 역문에서 - (5)
[*비서(秘書). 교서(校書-5품)를 지나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원 부사(密直院副使-정3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정3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종2품)로 전직되었다가
대제학(大提學-정2품)에 올라 *검교 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배(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니
*예빈(禮賓) 윤찬(尹瓚)의 녀(女)요,
예부상서 허수(許遂)의 외손이니 4남1녀를 두었다.
장남은 천(艸頭아래人+靑)이요, 호는 국당(菊堂)이니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시문효(諡文孝)요,
남원 어은사(南原漁隱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다음은 매(邁)이니 *부정(副正-종4품)이요,
다음은 과(艸頭아래過)이니 상서(尙書-정3품)요,
다음은 수(蓚)니 *사인(舍人)으로
고려가 망함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는데
*표절사(表節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딸은 사공상서(司空尙書-정3품) 해평(海平) *윤군정(尹君正)에게 시집갔다.]
- 벼슬은 비서. 교서를 지내고 밀직원 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중추부사. 대제학. 검교 정승에 이르렀다.
부인은 이천 서씨인데 예빈 관직을 가진 윤찬의 따님이고
예부상서 허수의 외손으로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의 휘는 천(艸頭아래 사람인변+靑)으로 호는 국당이고
벼슬은 문하시랑 동평장사. 예문관 대제학. 월성부원군으로 시호는 문효이다.
전남 남원 어은사에 배향(신주를 모심) 되었다.
차자의 휘는 매(邁)이니 벼슬이 부정이고
3자의 휘는 과(艸頭아래過)이며 벼슬은 상서이다.
4자의 휘는 수(蓚)이고 벼슬은 사인인데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건국됨에
고려에 충성하는 72명의 충신이 숨어사는 두문동에 들어가 살았다.
뒤에 개성부 성균관에 설치된 표절사에 배향 되었다.
딸은 사공상서 해평 윤군정에게 시집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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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秘書)
- 국가의 기밀문서를 관장하는 직책. 임금 수행. 어명 전달. 보좌 등
*교서(校書)
- 궁중에 소장된 도서 정리, 교감하는 일을 했던 비서성의 교서랑을 가리킴.
*봉익대부(奉翊大夫)
- 종2품 하(下)문관의 품계
*검교 정승(檢校政丞)
- 명예직. 임시직의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반열)
*예빈(禮賓)
- 손님이나 사신을 접대하는 관청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
- 중서 문하성의 정2품 관직. 문하시중 다음 자리.
문하시랑 ·문하평장사라고도 한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다음 자리로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와 같은 지위이다.
성종 때 처음 두었으며 1061년(문종 15) 정2품, 정원 1명으로 정하였다
*부정(副正)
- 고려시대 사(司)·시(寺) 등이 붙은 관아에 둔 종4품의 관직.
1308년(충렬왕 34) 전의시(典醫寺)에 1명,
1310년(충선왕 2) 서운관(書雲觀)에 1명, 내알사(內謁司)에 2명을 두었으며,
1362년(공민왕 11) 사복시(司僕寺) ·전농시(典農寺) 등에 각 1명의 부정을 두었는데
이들은 각 사·시의 차석 벼슬이고 소경(少卿)·부경(副卿)과 같은 급이다.
*사인(舍人)
- 930년(태조 13) 내의성(內議省)에 종4품 내의사인(內議舍人)을 두었으며,
성종 때는 내사사인(內史舍人), 문종 때는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고쳐 정원 1명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으로 개칭하면서 정4품으로 승격하였다.
공민왕 때는 다시 중서사인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품계도 종4품으로 내렸으며,
이후 내서사인·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또한 문종 때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종5품의 기거사인(起居舍人)을 두었는데,
공민왕 때 정5품으로 승격시켰다.
문종 때 각문(閣門)에 정7품 통사사인(通事舍人) 4명을 두었는데,
1308년 사인(舍人)으로 고쳐 정6품으로 승격시켜 2명을 두었으나,
공민왕 때 다시 통사사인으로 고치고 종6품으로 내렸다.
이 밖에 제비주부(諸妃主府)에도 사인을 두었는데 품계는 정7품이었다.
*두문동(杜門洞)
-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에 반대한 고려 유신이 모여 살던 곳으로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다
*표절사(表節祠)
- 72현의 이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두문동 72현’이란 고려가 망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조선의 개국 혁명 세력에 대하여 반대한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이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열사(忠臣烈士)를 지칭하는 말이다
*윤군정(尹君正)
-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해평(海平). 해평윤씨의 시조(始祖)이다.
1257년(고종 44) 원주에서 안열(安悅) 등이 고성(古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장군으로서 낭장 권찬(權贊)과 함께 파견되어
원흥창(元興倉)에서 적을 크게 파하고 난을 진정시켰다.
1269년(원종 10)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2년 후 좌복야로서
사공(司空) 전빈(田#빈01)과 함께
부위병(府衛兵)을 사열하고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였다.
1273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에 올랐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