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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학년도 수시 1학기 논술 예상 문제
고려대학교ㆍ이화여자대학교ㆍ서강대학교ㆍ성균관대학교ㆍ한양대학교ㆍ경희대학교ㆍ중앙대학교
예상 문제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출제자 김동석
논제 1> 제시문 2)은 기업들의 마케팅 활동에 관한 글이다. 제시문 1)과 관련하여 이 광고가 노리고 있는 전략은 무엇인지 서술하라.
(서론 없이 바로 시작할 것, 400자 내외)
제시문 1)
‘먹고 살만해지니까’라는 말도 있지만 인간의 욕구는 변하게 마련이고, 그리고 바로 변하기 때문에 인류의 발전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마슬로우(Maslow)교수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 욕구 5단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은 생존 욕구가 채워지면 남들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으려는 안전 욕구로 변화하고 그 다음엔 소속 욕구, 승인 욕구, 자기실현 욕구로 점차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제시문 2)
손해 사정인 양성 교육을 하는 모 학원은 ‘당국에 손해사정인 교육을 받을 수준이 되는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보내 준 명단에 귀하가 포함돼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모 영어 학원은 ‘특별 영어 가이드를 육성하고 있는데 관광 공사에서 귀하를 추천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당국과 관광 공사를 빙자한 것이다.
최근 청소년이나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 광고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만의 것’, ‘남들이 뭐래도 좋다.’, ‘신세대 자기주장’ 등의 말들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VIP라고 박힌 상표나 골드 신용카드를 소지하기를 좋아하고, 대학원의 최고 경영자 과정, 각종 사회 활동 클럽 등에 참여하기를 즐긴다.
논제 2>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약 50년 전, 캐나다의 한 만화 영화에서 지구를 찾아온 두 외계인이 나왔는데, 그들의 임무는 지구를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었다.2주 후, 외계인들은 지구에는 바퀴가 네 개 달린 자동차라는 것이 살고 있으며, 각각의 자동차는 다리가 둘 달린 인간이라는 노예를 적어도 한 명 이상 데리고 다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매일 아침 시끄러운 소리가 인간을 깨워 자동차를 사교 클럽(주차장)으로 데려가게 만들고, 인간들이 자동차를 먹여 살리려고 건물에 들어가 일하는 동안 자동차는 그 곳에서 다른 차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논다고 했다. - 통큰논술 제시문 -
1. 제시문에 드러나는 인간의 생활양식에 대한 외계인의 관점을 쓰시오
2. 외계인의 관점으로 볼 때 제시문에 드러나는 현대 인간의 생활양식을 비판하는 글을 300자 내외로 쓰시오.
논제 3>
1. 주어진 제시문을 통해 인간의 삶은 물질적 조건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400자 내외)
2. 제시문 2) ~ 제시문 4)를 통해 제시문 1)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공동체
주의적 공동체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라. (600자~700자)
3. 제시문 3)와 제시문 4)를 통해 제시문 5)에 나타난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400자 내외)
제시문 1)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사상사에 있어서 공동체주의적 흐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 공동체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노선과 정책이 다르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를 공동체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공동체주의적인 동기와 지향을 가지고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의 여러 부분에서 공동체주의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대체로 공동체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몇 가지 심각한 오류,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급투쟁론의 오류 때문에 현실적인 적용 실험에서 실패했고 우리에게는 공산당 일당독재와 잔혹한 숙청, 관료주의, 인권탄압 등의 이미지가 앞서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로 존재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공동체주의의 사상사에서 배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방법에 오류가 있었다고 해서 공동체주의적인 지향이나 성향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공동체주의 사상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주의 사상, 특히 우리가 제기하는 공동체주의와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공동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차이는 첫째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보는 인식이나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주장 등을 우리가 강력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독재 혹은 공산당독재가 공동체사회로의 이행에서 필요하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민의 자주성을 심히 억압해서 사회를 침체에 빠뜨리는 주된 원인이었다. 셋째 경제결정론적 경향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결정론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논리를 종합적으로 본다면 경제결정론적 경향이 대단히 강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우리는 전근대사회에서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정치적 변화가 경제와 상당히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를 과도하게 설정하고 있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공동체사회로의 이행에서는 과거 사회발전에서보다 경제의 중요성이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구조나 소유관계가 바뀌면 사람들의 의식도 공동체주의적으로 바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잘못된 실천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넷째 우리는 공동체사회로의 이행에서 국유제 중심의 소유제도나 협동농장 식의 공유제가 별 필요가 없다고 본다. 다섯째 우리는 박정희 정부 때처럼 초기 개발과정에서 부분적인 계획경제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전면적인 계획경제는 필요도 없고 비효율적이며 그 비효율성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더욱 커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공동체사회로의 이행과 계획경제냐 시장경제냐 하는 문제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고 있다. 여섯째 원시공동체사회-노예제사회-봉건제사회-자본주의사회-공산주의사회로 되어 있는 인류역사발전 5단계설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계승하거나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첫째 사회발전에서 이성과 이념의 주도적 역할이다. 우리는 동구사회주의 몰락 이후 사회발전에서 이성의 중심적 역할을 폐기하려는 모든 사상적 경향에 대해 반대하며 사회가 복잡해지면 질수록 사회발전에서 이성의 지위와 역할은 중요해질 것이라고 본다. 둘째 공동체주의적 지향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공동체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었지만 일당독재와 급진주의, 기타 방법적 오류들 때문에 많은 상처만 남기고 실패했던 것 때문에 공동체주의적 지향 자체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거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공동체주의적 지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런 희망과 이상 자체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존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국제주의이다. 현재 세계화가 급속하게 발전되고 있는 조건에서 국제주의 혹은 Globalism은 광범하게 지지를 받고 있지만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국제주의는 생소한 것이었는데 그 시대에 선구적으로 국제주의를 내건 것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한다.
지난 150여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는 공동체주의적인 다양한 흐름 중에서 그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일반인들은 공동체주의라고 하면 먼저 마르크스주의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은 그러한 이미지를 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공동체주의’를 비이념적인 용어처럼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현재 ‘공동체’라는 말이 각종 사회단체나 종교단체 등에서 비이념적인 용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공동체주의’를 이러한 것들과 뚜렷이 구분시키지 않는다면 이념으로서의 생명력과 구심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되 그 이미지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와의 차별성을 무리하게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이미지의 차별성은 당장 아무런 정치적 효용성도 없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와의 이미지에서의 차별성 같은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말고 ‘공동체주의’를 ‘정치이념’으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현 단계에서는 훨씬 낫다고 본다. - 공동체주의와 공동체 사회 -
제시문 2)
전통사회에서 정절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를 순결로 규정했다. 그런데 정절의 대가로 열녀와 그 가문에 내리는 신분 상승 등의 보상이 가문 구성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순결은 가문의 관심사이자 감시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정절 이데올로기는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는 반면, 여성의 외모가 관심의 대상이 돼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일상적인 인사말처럼 돼 버렸다. 또한, 약점에 대해서까지도 서슴없이 언급하고 감시하고 질책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 주는 일을 예사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몸을 순결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했던 반면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성은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저주를 받았고, 야화에서 남자 '잡아먹는'여자로 낙인찍히거나, 한밤에 100년 묵은 여우로 변신하는 여성은 한결같이 미인으로 묘사돼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는 팔자가 세거나 사악한 존재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낭만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결혼이 강조되면서 이성간에 성적인 매력은 중요한 자원이 됐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도 필요하게 됐다. 이와 더불어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도 혁명적으로 바뀌어 아름다움은 좋은 것으로 순진함이나 덕성이 함께 따르는 것이고 못생긴 여자는 외모의 열등감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진 파괴적 존재로 간주되게 됐다. - 중앙일보 오피니언스 -
제시문 3)
현대사회는 흔히 '소비사회'라고 불린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동화된 포드주의 생산체계가 도입되면서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가 가능하게 됨에 따라 생겨난 사회현상이다. 그런데 대량생산 체계는 상품의 양적 팽창뿐만 아니라 상품의 질적인 발전을 가져 왔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소득증대를 가져와 상품에 대한 유효수요를 증대시켰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필요에 의한 소비'가 '즐김을 위한 소비'로 전환되는 기반이 되었다. 소비사회에서 상품들은 단지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를 넘어서 이미지와 상징, 개성과 자유, 쾌락과 환상으로 포장되어 있다. 현대인들의 소비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지향한다.
하우크(W. F. Haug)는 '상품미학'을 통해 이러한 상품의 의미 변화를 해부하고 있는데, 자본주의에서의 상품미학의 발전은 상품의 외적인 포장과 광고를 통해 상품과 미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의 감성을 자아낸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끊임없이 상품의 유혹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억압에 순응하게 만든다(하우크). 보드리야르 역시 개인 주체가 사물과 관련을 맺고 사물을 사용하면서 사물과 기호에 의해 지배되는 소비사회에서는, 사회체계가 변화를 통합해버림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비판적 의식 형성과 혁명이 어려워진다고 본다.
이처럼 소비사회에서의 소비는 단순히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된다. 말하자면 소비는 현대인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중요한 생활양식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소비와 문화의 결합', 즉 소비가 하나의 문화적 삶이며 문화적 실천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문화상품들을 소비할 뿐만 아니라 상품들을 문화적으로 소비한다. 백화점이나 상가거리에서 상품들을 구입하는 것은 화려하고 진열된 다양한 상품들 중에서 자신에게 상징적, 정서적 만족을 주는 것들을 고르는 문화적 행위가 된 것이다.
- 소비사회와 문화 -
제시문 4)
“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 나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현대사회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결코 더 행복하지 않다.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 그리고 피로는 가중된다. 그들은 물질적 가치에 집착하고 과도한 경쟁에 휩싸이며 과다소비에 빠진다. 이러한 과다소비는 현대사회의 다른 문제인 환경오염을 악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 명품에 집착하는, 소위 명품족도 이러한 현상의 하나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이러한 현대 산업사회 문제의 근본에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산업사회는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것’에 의해 평가한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나 집은 물론이고 그의 직업, 위치, 경력이 그를 규정짓는다. 이런 소유적 모드의 세계에서는 더 많이 갖는 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평가받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소유적 모드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프롬은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오히려 ‘소유(Haben)’가 아닌 자신의 ‘존재(Sein)’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롬은 ‘존재’적 모드가 지배하는 사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새로운 사회는 무한성장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적 성장을 지향한다. 둘째, 물질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한다. 쾌락이나 다른 사람의 인정(認定)이 아닌 진정한 내면적 깨달음에 삶의 중심이 있다. 셋째, 사람들은 기본적인 삶의 안정을 보장받으며 관료제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삶을 살아간다. - 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제시문 5)
호박범벅을 만들면서 어머니가 신바람을 내셨으면 좋으련만, 영주는 좀 망연해진다. 어머니는 아직도 호박범벅을 만드실 수가 있을까. 이까짓 호박 따위로 어머니를 시험하려들지 말아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푸성귀를 다듬어 반찬을 만들고, 생선 비늘을 긁어 절이거나 조리고, 국이나 찌개 간을 보는 일을 반백년이 넘게 허구헌날 되풀이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신바람이 나서 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 일에 진력이 나서 매사를 시들해하는 걸 이상한 눈으로 볼 게 뭐였을까. 영주는 챙기던 짐을 스르르 밀어놓고 핸들에다 이마를 얹었다. 망연한 불안은 그러나 어머니보다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보따리장사 육 년 만에 학위 딴 지 삼 년만에 얻은 전임자리였다. 수도권 대학은 아니었으나 찬밥 더운밥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밥줄을 매단 처지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허둥댄 것은 아마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전까지 출퇴근을 한다는 것은 쉬운 노릇은 아니었으나 불가능하지는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전솜씨도 능숙의 도를 넘어 노숙했고, 중고차만 물려받다가 이 년 전 처음으로 만져본 새 차는 지금 그녀의 몸의 일부분처럼 길들여져 있는 것도 원거리 출퇴근을 겁내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마흔 고개 마루 턱에 와 있었다. 쉰까지는 미끄럼 타듯 신속할 터였다. 그 나이에 그것도 여자가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건, 그 바닥의 사정에 아무 무식한 사람만 아니라면 감지덕지할 행운으로 여겨 마땅했다. 영주도 처음 한 학기 동안은 마침내 해냈다는 성취감이 도취해서 힘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요새 그녀는 박사나 교수 값이 그 동안 너무 싸진 걸 자기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차츰 열없어지고 있었다.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을까. 진작만 알았어도 그런 고생은 안 했을 걸, 싶다가도 이런 게 바로 공부한답시고 날치던 여자의 한계인 것도 같아 혐오스러워지곤 했다. 싸도 너무 싸졌다고 느끼는 게 그 동안 들인 공과 시간에 비해 보수가 너무 낮다는 경제성보다는 존경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지방대학 가려고 뼛골 빠지게 박사를 했냐?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 너 따위가 아는 지식의 값이란 평생 서울에 붙어먹고 살면서, 적당히 즐기고, 품위 유지할 수 있는 자격과 같은 것일 테니까, 이렇게 치지도외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래지지가 않았다. 앙심까지 품어지도록 속이 아렸던 것은 바로 자격지심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가르치는 일, 지식을 풀어먹는 일은 생각보다 보람 있지 않았다. 그 재미없음의 핑계를 학생들의 질이나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돌릴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지식이라는 것을 통틀어서 비하하느라 허탈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니꼽기 짝이 없는 정서불안증이었다.
영주가 학위논문으로 허난설헌의 시 연구를 택한 것은 허난설헌의 시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허난설헌에 감동하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했던 건 아니다. 그 시대 배경이나 집안 환경에 대해서도 보통사람 수준의 상식이 전부였다. 물론 그녀의 한문 실력으로 난설헌의 한시와 직관적으로 만나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가 매혹당한 것은 시 자체의 뛰어남보다는 한 뛰어난 여자를 못 알아보고 기어코 요절토록 한 시대적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논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출처가 분명하고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충동질한 지도교수는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경계했다. 영주가 제일 자주 들은 듣기 싫은 충고는 논문을 쓰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녀는 박사학위에 걸맞는, 난설헌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 연구라는 걸 하는 동안 난설헌에 대한 매혹과 감동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난설헌이라면 넌더리가 났다. 난설헌에 대한 감동을 잃은 대신 얻은 것은 난설헌을 그럴듯하게 본뜬 수많은 제웅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한무더기의 검부락지와 그리고 학위였다. - 환각의 나비 / 박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