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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26)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1구간 (낙동→ 구미) ① [낙단보-월암서원]
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독보 28km]▶ 백파
☐ [상주]-[낙동 낙단보]→ 월암서원→ 도개→ 선산대교→ 구미보→ (도리사)—[금오서원]
* [상주]→ [영남제일로]→ [낙단보]-(관수루)→ [낙동강 東路 강변]→ 낙단대교(25국도) 교각)→ [낙동강대교](301고속도로) 교각 …좌전우강(左田右江) 장장제방로(長長堤防路)… 월암서원(구미시 도개면 월림리)→ [도개(면)](오복식당)→ 좌전우강(左田右江)→ 선산대교-일지교 교각 아래→ 장장제방로(長長堤防路)→ [구미보] → 해평 [도리사]→ 선산 [금오서원]→ [구미]
* [구미시 선산읍 원리] ← 서쪽에서 감천 합류(백두대간 삼도봉, 수도산에서 발원, 김천 경유)
☆… 9월에서 10월 초순까지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 팬데믹이 10월 중순 들어 조금 소강상태를 보여, 2020년 10월 14일 안동에서 낙동강 종주를 다시 시작했다. … 10월 14일 안동→풍산, 15일 풍산→삼강, 16일 삼강→상주보, 17일 상주보→낙단보까지 연 4일을 종주했다. 오늘은 낙동강 종주 제11구간 상주 낙동 ‘낙단보’에서 ‘구미보’-구미까지 가는 여정이다.
상주(尙州)
낙동강의 가을 나그네, 상주(尙州) 시내 모처에서 아침을 맞았다. … 오늘의 출발지 ‘낙단보’는 상주 도심(터미널)에서 약 20km 동쪽에 있다. 도심에서 병성천을 건너가는 영남제일로를 경유하여 헌신동에서 25번 도로(낙동대로)에 진입, 낙동(면) 낙단보로 향했다. 시내를 벗어나 낙동(면)으로 가는 넓은 도로에 고도 상주를 상징하는 장대하고 깔끔한 문(門)이 길 가운데 서 있다. …2019년 12월 18일에 준공한 ‘경상제일문(慶尙第一門)’이다.
국도 25호선 왕복 4차로에 세워진 경상제일문(慶尙第一門)은 상주목 설치 천 년(千年)을 기념하여, 역사문화 고도(古都)의 정체성 확립과 도시 이미지 쇄신을 위해 복룡동에 세운 상주의 상징문이다. 그 규모는 정면 11칸, 측면 1칸, 굴도리에 다포형식, 우진각 기와지붕에 용마루 양 끝에는 용두(龍頭)를 세웠고, 추녀마루 끝에도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얹어 위엄을 더했다. 전장 64m, 폭 7.4m, 높이 14m로 차량과 보행자 길이 구분되어 있다. 앞뒤로 상징문을 돋보이게 하는 ‘慶尙第一門’(경상제일문) 편액은 소파(小坡) 윤대영(尹大榮) 공의 글씨다. 여느 문(門)과는 달리 길을 건널 수 있어 육교 역할을 하는 것이 특징이며, 이곳에 올라 사방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 문은 상주의 상징문으로 조공제(趙公堤), 북천 벚꽃 길, 상주여자고등학교, 태평성대 경상감영, 국민체육센터, 다양한 조각들이 함께하는 삼백농업테마공원과 연계되어 지역의 랜드마크(landmark) 역할을 한다. 이에 상주시에서는 조선 시대 경상도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상징인 ‘경상감영’ 재현과 ‘경상제일문’이라는 현대적 연출을 통해 옛 경상도 수도(首都)로서 이미지를 확보하고, 상주의 위상과 자긍심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상주(尙州)는 삼국시대 사벌국(沙伐國)이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토호세력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며, 낙동강의 명명지(命名地)이고, 경상도(慶尙道)의 이름을 낳은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물길과 산길을 갈라놓은 곳으로써 우리나라의 중심지이다. 이러한 배경이 밑바탕이 되어 1392년(태조 원년) 경상감영이 상주목(尙州牧)에 개영(開營)된 이래 좌(경주) 우(상주)로 나뉜 적은 있었으나, 1593년(선조 26년) 성주(星州)로 옮기기 전까지 자그마치 200여 년간 경상 감영지(慶尙監營地)였었다. 지난 10월 31일 보물 제2039호로 지정된 ‘경상도영주제명기’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낙단보
☆… 오전 9시 40분, 낙동의 낙단보에 도착, 오늘의 트레킹을 시작했다.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신선하고 쾌적한 낙동강의 아침공기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이었지만 몸 상태는 비교적 양호(良好)했다. … 낙단보는 낙동강 서안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사이에 세워진 보(湺)이다. 보의 위로는 길이 141.6m의 공도교가 설치되어 있다. 낙단보 네 개의 주탑(柱塔)은 그 강안에 있는 관수루(觀水樓) 지붕의 모습을 본 따서 시설한 것이라고 한다. …
☆… 상주 낙동에서 보(湺) 위의 공도교를 걸어서 의성 쪽으로 건너갔다. 오늘은 낙단보에서 구미까지 낙동강의 동로(東路)의 강변길을 따라서 걷는다. 보(洑)를 건너면 낙단보 통합관레센터가 있고 그 가까운 거리에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의성 생송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
생송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은 낙단보 통합관리센터를 만들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다. ‘마애불(磨崖佛)’은 암벽에 새긴 불상(佛像)을 말한다. 전체 바위의 높이가 2.13m, 불상의 높이는 1.64m이다. 가로 폭이 다소 넓은 바위에 얕게 ‘돌올새김[浮彫]’하였다. 머리에는 양쪽에 약간 벌어진 ‘세 개의 꽃잎이 피어나듯 생긴 모양의 관[三山形 蓮花寶冠]’을 썼다 오른 손으로 꽃을 잡고, 활짝 핀 연꽃자리[蓮花臺座] 위에 결과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다. 이 마애보살상에 보이는 삼산형 보관, 도드라지게 표현한 눈, 코, 입 등에서 보이는 개성 있는 모습, 뼈대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게 처리한 팔의 곡선, 의도된 듯 과감하게 생략한 복장형식, 그리고 평면적이면서도 형식적인 연꽃받침 등은 여러 지역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마애불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 보살상은 10세기 후반이나 11세기 초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송리 마애보살좌상은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용모와 형상이 원만하고 자비로운 보살의 이미지가 잘 표현된 고려 전기의 작품이다.
또 마애불은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고려시대 강(江)을 이용한 수운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곳은 오랜 시간 동안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삶의 터전인 강을 따라 펼쳐진 나지막한 구릉의 절벽은 당시 불교문화와 산악숭배 신앙이 융합된 장소로서 그 지역민들의 공덕 신앙을 표출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즉, 예로부터 신성시되던 이곳에 불상을 새겨 마을의 수호와 강을 건너 왕래하던 그들의 안전과 수명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관수루(觀水樓)
☆… 오전 9시 50분, 낙단보에서 조금 내려오면,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관수루(觀水樓)가 있다.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낙동강 언덕에 있는 관수루는, 이름 그대로 낙동강을 관망하기 좋은 2층의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낙동강 전체 풍경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요즘은 낙단보과 그 강안의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하류 쪽으로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교량이 한 눈에 들어온다.「觀水樓 沿革記」(관수루 연혁기)에 올린 글이 자못 풍류적이다.
… ‘태백산·일월산·팔공산과 낙동강·위수강!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정령기맥이 모여드는 낙동강 푸른 물, 층암절벽, 동서남북을 왕래하는 큰 길목에 자리한 관수루는, 고려 중엽 처음 창건할 때는 강의 서안(西岸)에 위치하였는데, 조선 초기 수해를 입어 이곳 강의 동안(東岸)으로 이건(移建)하는 등 중수(重修)와 중건(重建)이 있었다. 고종 때 1874년 갑술년에 유실되어 버렸으나, 1990년 지역민이 힘을 모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요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예로부터 내왕객이 끊임없던 낙동 나루터, 태백 황지에서 시발하여 수백 리를 쉼 없이 흘러온 낙동강물이 머물다 가는 곳. 자연의 청정절경이 내려다보이는 격조 높은 누대(樓臺)에 올라 그 옛날 선현(先賢)의 지혜를 강물 깊이 새겨보며, 의(義)와 예(禮)의 고장에서 잠시 묵객이 되어 바쁜 세상사를 관조(觀照)하는 기상을 배우게 한다.’
① 낙단보에서 구미시 도개까지
오전 10시 정각, 낙동(면)에서 넘어오는 다리[영남제일로]를 지나 본격적인 트레킹에 돌입했다. 이 다리는 옛날 ‘낙동강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화창한 날씨, 생송리 제방의 바이크 로드는 환하게 열려있었다. 간간이 한두 명의 바이커들이 지나갈 뿐, 길은 백주(白晝) 텅빈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시야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묵직한 다리를 옮겨가는 발걸음이 쾌적하다. 낙동강을 벗하여 호젓하게 걷는, 이 거리낌없는, 넉넉한 기분이 아주 좋다!
낙동강은 둔치의 저 너머에서 흐른다. 약 10분 정도 내려오면, 머리 위에서 상주 낙동면에서 구미시 도개(면)으로 가는 25번 국도의 ‘낙단대교’와 그 아래 상주-영천간 고속도로(301번)의 ‘낙동강대교’가 가로 질러 간다. 바이크로드는 교각 아래를 지난다. 따뜻한 날씨, 몸이 후끈거리기 시작하여 교각 아래 그늘에서 행장을 가볍게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은 직선으로 뻗어 있다.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제방 길이다. 길의 왼쪽은 의성의 들판이요, 오른쪽은 낙동강 강안의 둔치, 펑화스러운 풍경이다.
오전 10시 19분, 낙단보에서 약 30분 정도 내려온 지점, 구미시 도개면 영역에 들어가는 이정표가 있다. 거기서 길은 왼쪽으로 완만하게 굽이를 돈다. 그리고 정남(正南)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직선의 제방 길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득하다! 길의 오른쪽은 낙동강물이 둔지 너머에 흐르고 좌측으로는 가을의 활금 들판, 누렇게 익은 벼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좌전우강(左田右江) 장장제방로(長長堤防路)
오전 10시 51분, ‘구미보까지 15km’를 남겨놓은 지점, 이정표를 지났다. 지금부터는 구미시 도개면 영역이다. 제방 길은 아주 널찍하다. 2차로의 바이크로드 바닥에 ‘국토종주’를 쓴 보도(步道)가 따로 시설되어 있다. … 도개면 가산리 배수펌프장을 지났다. 강안은 넓은 둔치의 평원에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주 완만하게 휘어지는 구비가 있으나 거의 직선의 길이 아득하게 이어진다. 가산리 제방 길은 길고 길었다. 가도 가도 아득하다. 주변의 풍경은 거의 변화가 없다. 왼쪽은 가산리 들판이요, 낙동강 강물은 저 멀리 호수처럼 고여 있다. 강안의 너른 둔치에 가을 햇살을 받은 억새꽃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시야에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길목 오른쪽에 이정표[↑낙동강하구둑 278km ↓안동댐 107km]가 있다.
조금 내려오니, 강둑 가까이, 조경이 아주 잘된, 아주 너른 잔디정원을 갖춘 2층 집이 있다. 근방에 아주 규모가 큰 축사(畜舍)를 갖추고 있었다. 오랜 만에 사람이 사는 집을 보니 반가웠다. 그러나 집 주변 어디에도 인적은 없었다.
맑은 가을 햇살 아래, 걷고 걷다보니 바이커 쉼터에 이르렀다. 쉼터는 나무테크로 널찍하게 공간을 만들고 한쪽에 하얀색의 차양천막을 드리우고, 강안의 가장 자리에는 몇 개의 벤치를 설치해 놓았다. 일군의 남녀 바이커들이 왁자지껄 이야기를 하다가 떠나고, 나는 혼자서 빈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중년의 바이커 한 분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혼자서 가는 길을 묻길래 낙동강 종주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출발에 앞서 그는 나의 스냅사진을 찍어주었다.
낙동강 지킴이
오전 11시 40분, 가산리 제방 길이 끝나는 지점, 오른쪽의 낙동강은 강물이 제방 가까이 다가와 있다. 강물은 호수처럼 고요하게 고여 있어 맑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구미보의 담수로 인해 물은 흐름을 거의 멈추고 있는 상태이다. 저 삼강에서부터 비슷한 간격으로 상주보, 낙단보에 이어, 저 아래의 구미보가 건설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둑의 길이 도로와 만난다. 왼쪽의 산이 강안에 절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마을 도로와 바이크로드가 겹치는 구간이다. 호수 같은 강물이 강안을 가득 채우며 한낮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어떤 분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 하얀색 점퍼 차림에 노란색 안전모를 썼다.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나를 보고 가까이 다가와 멈추어 섰다. 혼자서 걷고 있는 모습이 남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잠시 낙동강 종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 성함은 ‘손명환’, 지금 구미에 살고 있는데, 공직에서 은퇴한 후 ‘낙동강 지킴이’가 되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 저것 묻는 말에, 그는 매우 친절하게 응답해 주었다. 가까운 데, 어디 점심 식사할 곳을 물었더니, ‘여기서 조금 내려가면 도개(면)이 있는데, 거기에 식당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구미보와 다음 여정인 칠곡보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명찰에 적힌 전화번호(010-4501-8270)도 보여주어서 확인하고 서로 연락처를 나누었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나 역시 낙동강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낙동강을 아끼고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순정한 봉사, 자신의 생애 후반을 낙동강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구미 월암서원(月巖書院)
절벽 아래의 도로는 길지 않았다. 커브를 돌아 나오면 도개면 월림리, 거기 바로 산록의 높은 언덕에 ‘월암서원(月巖書院)’이 있다. 상주시 낙동 낙단보에서 8km 내려온 지점, 구미보에서는 16km 상류에 위치해 있다. 여기는 내가 지나온 가산리 구수봉(龜首峰)이 남으로 뻗어오다가 이곳 강안에서 절벽을 이루고 있는 곳, 바로 그 옆 산록에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서원이 있는 자리는 거북이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사원을 찾아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 평지에 있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층위가 있다. 월암서원 외삼문 앞에 서서, 노거송(老巨松)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호수 같은 낙동강의 풍경, 유장한 강물이 흐름을 멈춘 재 묵연히 세월을 삼키고 있었다.
월암서원(月巖書院)은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월림리, 낙동강변에 있는 서원이다. 1630년(인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 지역 출신으로, 절의를 지킨 고려 말의 충신 김주(金澍)를 비롯하여, 하위지(河緯地), 이맹전(李孟專), 명종 때의 학자 박운(朴雲) 등의 학문과 절의(節義)를 숭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1637년(인조 15)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하위지(河緯地)를 추가 배향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月巖’(월암)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같은 해 이맹전(李孟專)을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신문(神門)·강당(講堂)·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奠祀廳)·주소(厨所) 등이 있었다.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2010년에 복원되었다.
생애와 목숨을 건 절의(節義)
▶ 김주(金澍)는 고려말 충신(忠臣)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一善)으로, 호가 농암(籠巖)이다. 이곳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 출신으로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를 지냈다.
1392년(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東)으로 향하여 통곡하며 … 부인 유씨에게 편지를 띄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 둘 곳이 없다. 서신을 보낸 날을 기일로 삼고, 부인이 죽으면 내가 보낸 관복과 신발을 함께 묻고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하지 말라’고 전한 후 머나먼 이국땅에서 여생을 보냈다.
후손들은 조복 등 유품을 보낸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자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은 김주(金澍)에게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므로 평생 동안 그에 해당하는 녹(祿)을 주었다고 한다. 김주는 중국의 형초(刑楚)에 살았다고 전한다. 1597년(선조 30) 일본으로 파견된 사행(使行)의 막하관으로 수행한 허유성(許惟誠)이 김주의 외손이라고 전하며, 명나라 고공(高拱)이 엮은 『병탑유언(炳搨遺言)』에는 김주의 자손이 대대로 통주(通州)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농암일고(籠巖逸稿)』 1책이 있다.
고려 유신(遺臣)의 은거지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정조 20년에 시호를 내리고 정조가 직접 제문을 지어 예관을 보내 치제했다. 구미시 도개면 궁기동에 부조묘와 제청인 충렬당과 신도비, 유허비가 있으며, 안동 고죽서원, 해평(지금의 도개)의 월암서원, 고창 운곡서원, 양주 송산서원, 곡성 동진사, 춘천 문암서원, 장성 경현사, 장흥 도산사에서 충절을 기려 향사한다.
▶ 하위지(河緯地, 1412년(태종 12)~1456년(세조 2))는 본관이 진주(晉州)이며, 호는 단계(丹溪)·연풍(延風)이고, 이곳 선산(善山, 지금의 구미) 출신으로,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분이다.
어릴 때부터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역대병요(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양대군이 나서서 이 일을 처리하는 데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직되었으나,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다시 고향 선산(善山)에 물러났다.
수양대군이 왕위(王位)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端宗)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推鞫)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는데, 국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거열형은 죄인의 팔과 다리를 4방향으로 우마에 묶어 동시에 우마를 몰아 그냥 찢어 죽인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河琥)와 하박(河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묘(墓)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하위지 [河緯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맹전(李孟專, 1392년(태조 1)~1480년(성종 11)은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이며 선산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도원수 이희경(李希慶)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이며, 어머니는 공부전서(工部典書) 여극승(呂克勝)의 딸이다.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다. 승문원정자를 거쳐 1436년 정언에 임명되고, 얼마 뒤 거창현감이 되었는데,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여 시국이 소란해지자, 이듬해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소경이라 핑계하고는 문을 닫고 은둔하여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년이나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쪽으로 배좌(拜坐)하였고 북쪽인 한양 쪽으로는 향하지도 앉지도 않았다. 또 매월 삭망(朔望)에는 영월을 바라보며 향배(向拜)하였으니 집안사람들이 물으면 신병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다. 부인 김씨(金氏)와 90세까지 해로하였는데 집안에는 한 끼의 양식도 비축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저술이 있었다고 하나 병화로 소진하고 없다.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彌石山) 재궁동(齋宮洞)에 있다.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가끔 찾아 배알을 청하면, 문을 닫은 채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훗날 점필재가 『이준록(彛尊錄)』에 참뜻을 기록하여 세상에서 알게 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묘갈(墓碣)을 지었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사적을 전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1781년(정조 5)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선산 월암서원(月岩書院), 함양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조려(趙旅)·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으로 제향되었고, 또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는 김주(金澍)·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제향되었다. , 영천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은선생유허비각(耕隱先生遺墟碑閣)이 경상북도 구미시 형곡동 댓샘 옆에 세워졌으나 현재 구미시립중앙도서관으로 이전되었다.
의리(義理)의 장렬(壯烈)함
나는 오늘 구미의 낙동강 월암서원에서 고려 말의 충신 농암(聾巖) 김주(金澍) 공을 만나고 사육신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공을 만나고, 생육신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공을 만났다. 월암서원 외삼문 앞 노거송 아래에서 유장한 낙동강을 바라보며 세 분의 절의를 추모하며 인간의 의리(義理)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부조리한 현실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다. …
월암서원은 지금까지 보아온, 순정한 학덕(學德)을 지니신 선현을 추모하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철천(徹天)의 비장(悲壯)함으로 불의에 맞선 분들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이 분들이 모두 이곳 선산(善山) 출신이라는 같은 연고가 있기도 하지만, 하나 같이 의리(義理)를 위하여 자신의 생애나 목숨을 내놓은 분들이다. 선산(善山)은 의기가 강하고 부조리한 시대와 맞서는 매서운 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명리(名利)를 거부하고 의리(義理)를 지켜 낙향한 곳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38세의 야은이 왕조의 절대 권력자인 이방원[太宗]의 요구를 거절하고 산림처사로 물러난 것은 의리(義理)를 지키려는 가열(苛烈)한 정신이었다. 야은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농암 김주 또한 나라의 패망에 즈음하여 자신의 안락한 생애를 포기한 비장(悲壯)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왕위을 탈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특히 문종에 이어 어린 단종을 보위하여 나라를 받치던 황보인과 김종서를 주살하고. 12살의 어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절해고도와 같은 영월 청령포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죽였다. 그리고 개인의 사사로운 권력욕에 사로잡혀, 패륜과 포악한 살상을 무수히 자행했다. 선대 세종의 신임을 받은, 학덕이 높은 고절한 선비들이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단종복위’를 꾀하는 결사를 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동참했던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선비들이 사지가 찢기는 처절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삼족이 멸하는 참화(慘禍)를 입었다. 그분들이 사육신(死六臣)이요, 단계 하위지는 그 사육신의 한 분이다. 그리고 또 차마 시퍼런 목숨 어찌할 수 없이 살기는 했지만 평생 절의(節義)를 지키면서 불의에 항거하였던 분들이 생육신(生六臣)이다. 바로 이곳 출신 경은 이맹전이 그중의 한 분이다. … 어찌 이들 뿐이었겠는가.
▶ 단국대 서민 교수는, 비열한 정치권력에 굴하지 않고, 결연히 의리(義理)를 지킨 사례로 윤석열 검찰총장을 꼽았다.
(전략) … 2019년 7월 검찰총장이 된 윤석열은 조국 당시 법무장관 후보자의 비리를 수사했다는 이유로 정권의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정권 측은 윤 총장의 장모와 아내 등 가족을 괴롭혔으며, 그와 함께 조국을 수사했던 검사를 죄다 좌천시켜 버린다. 웬만한 독재 정권이라면 이 정도 하고 말았겠지만, 문재인 정권의 집요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은 윤 총장의 측근인 한동훈 검사장을 권언 유착으로 엮으려 했고, 순전히 모욕을 가할 목적으로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권을 발동했다. 윤석열이 계속 버티자 그들은 검찰총장을 직무에서 배제하는 명령을 내렸고, 얼마 전에는 자기들끼리 징계 위원회를 구성해 정직 2개월 징계를 먹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윤 총장은 지난 1년여 동안 대통령을 등에 업은 추미애 법무장관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을 뿐, 현 정권에 이렇다 할 반격을 가하지 못했다. …(중략)
일방적 폭력을 당하던 1년여 동안 윤 총장은 사표를 던지지 않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수십 번 사표를 던졌겠지만, 윤 총장은 그 굴욕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국감에 끌려나가 곧 장관이 될 박범계에게 “똑바로 앉으라”는 말을 듣고, 김남국 같은 이한테는 “공부 하나도 안 해왔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윤 총장은 참고 또 참았다. 왜? 자신이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저들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인내는 현 정권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 줬다. 조선 사람들이 김구를 보면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진 것처럼, 지금 국민은 윤석열을 보면서 언젠가는 정의가 구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 (2021.01.09. 주말칼럼 서민의 문파타파)
불의(不義)가 판치는 시대
☆… 사실, 지도자의 말과 행위가 사뭇 다르고, 그 권력의 표리부동한 행태를 보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사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지도자의 무능(無能)은 국가를 위기로 몰아가고, 지도자의 불의(不義)는 국기를 문란하게 하고 국민을 분노하게 한다.
사실 저들이 말하는 ‘검찰개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권력의 비리(非理)를 수사하는 검찰을 겁박하고 무력화시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표적인 윤석열 검찰총장을 찍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문 정권은 그것을 무슨 역사적 과업인 양 내세운다. ‘천지 지지 아지 자지(天知地知我知子知)’,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너무나 후안무치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말을, 저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큰소리 친다. 반드시 ‘검찰개혁’(?)을 이루겠다고 집요하게 겁박하고 있다. 유체이탈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다. 지난 한 해, 권력의 충견이 된 법무장관 조국-추미애가 보여준 행위는 참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다. 저들에게 이미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보라. 권력의 시녀가 된 국회 ―, 국회의장을 비롯한 거대 여당의 횡포(橫暴)는 극에 달했다. 국회 18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하고 공수처법을 입맛대로 고쳐 단독 처리했다. 국가 기본틀이 되는 법안을 맘대로 고쳤다. 야당에 내역도 보여주지 않고 예산을 넘겼다. 장관 청문회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가장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국기(國基)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정치 행태를 바라보면 ‘더불어 민주당’이라는 당명이 무색하다. 너무나 위선적이다. 말로는 ‘더불어’ 하면서 다수 의석의 완력(腕力)으로 독선과 독점, 비민주적으로 국회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우리 법’ 위주의 대법원 또한 정권의 혓바닥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국가 유지’의 근본이 되는, 마지막 보루가 사법부가 아닌가. 어느 나라든 사법부의 정의(正義)와 공정성(公正性)이 퇴색하면, 소금이 짠 맛을 잃은 것처럼, … 결국 나라가 썩는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의리(義理)는 불의에 맞서는 ‘의롭고 참다운 인간의 도리(道理)’를 말한다. 그것은 법(法) 이전의 인간성(人間性)의 문제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인간성이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념이나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
어떤 시대이든, 인간의 의리(義理)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지도리[樞機]이며, 시대의 희망이다. 의리(義理)의 근본은 양심(良心)이다. 유학에서 말하는 인·의·예·지의 마음이다. 인(仁)은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惻隱之心]이요, 의(義)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羞惡之心]이며, 예(禮)는 남과의 따뜻한 조화를 이루는 마음[辭讓之心]이고, 지(智)는 인간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각하는 마음[是非之心]이다. 이 인간의 본성(本性)이 실현될 때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있다. 맹자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이것을 지니고 있다'[人性本善]고 했다. …
그런데 사람이 욕심(慾心)이 앞세우다 보니, 이러한 참다운 본성이 가려지고 버려진다. 그러므로 오직 명리(名利)와 권력(權力)만을 탐욕하는 자들이 판치는 세상은 무도하고 비열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정권의 추악상(醜惡狀)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아직, 갖은 핍박에도 원전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에 과한 정권의 비리를 밝히고자 하는, 자기 직분에 충실한 최재형 감사원장 같은 분도 있고, 또 법무장관 추미애의 탈법적인 행태에 대한 올바른 사법적 판단을 내린 판사들도 있다. 그분들은 검찰총장의 직무 배제나 정직(停職) 등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용인(容認)하는 판결을 내렸다. … 하늘의 뜻을 따르면 살고, 하늘을 거역하면 망한다.(順天者存 逆天者亡)고 했다. … 사악한 것은 언젠가 망하고 만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사필귀정(事必歸正)! 그것이 오직 목숨 같은 희망(希望)인 것을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