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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행운의 법칙 스크랩 신약 배경사(H. 야거스마 지음 / 배용덕 옮김)
김박사 추천 0 조회 182 08.05.05 09: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약 배경사(H. 야거스마 지음 / 배용덕 옮김) 

 

 신약 배경사(H. 야거스마 지음 / 배용덕 옮김)


성경배경사의 시기와 자료

B.C.330년부터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틴에서 사라진 A.D.135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한 내용이 '신약배경사'이다. 이 시기에는 객관적인 자료 수집이 어려워 '추측'해서 재구성하는 부분이 있다. 자료들로는 ① 구약성경 ② 마카비 1,2서 ③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④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⑤ 헬라 및 라틴 저자들 ⑥ 사해사본 ⑦ 신약성경 ⑧ 랍비문헌 ⑨ 고고학의 증거 등이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기록연대가 B.C.165년경으로 추정되는 다니엘서가 가장 중요하다(저자의 입장). 마카비 1,2서는 하스모니아 왕조에 대해서, 유대철학자였던 필로(B.C.20-A.D.50년경)는 아그립바 1세에 대해서 자료를 제공하며,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는 B.C.330-.A.D.135년 사이의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할 때 귀중한 자료이다. 사해사본은 주후 시작 전 마지막 세기부터 A.D.135년까지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 랍비 문헌은 A.D.70년 이후에 나타났는데, 그 중에 미쉬나(200년경)는 구약에서 이끌어낸 율법선집, 규례들, 결의법 등이다. 토세프타(A.D.500년경 최종편집)는 미쉬나에 대한 하나의 보충 자료이다. 미쉬나에 대한 해석과 주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게마라'라는 문헌을 기록했는데, 미쉬나와 게마라를 결합시킨 것이 탈무드(A.D.500년경 최종편집)이다. 미드라쉬는 구약성경에 대한 고대의 랍비주석으로 추정된다.


헬레니즘과 이스라엘

B.C.4세기부터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변 열강의 구도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인 모습을 형성해 나갔다. 먼저 헬레니즘의 시작과 함께 일어난 국제, 국내 상황이 어떻게 성경의 배경을 형성해 갔는지 살펴보자. 헬레니즘은 알렉산더대제(B.C.333-323)가 고대 근동지역을 정복한 이후, 헬라어 및 헬라문화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결과로서 문화적 운동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용어이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냐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한 왕국, 한 민족으로 만들려고 했다. 알렉산더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폈기 때문에 예루살렘 종교공동체는 변화를 겪지는 않았다. 열강들의 전쟁도 유대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기에 구약성경은 알렉산더의 발흥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알렉산더가 이집트에 있는 동안 반역하였고, 알렉산더는 사마리아 거주민들을 포로로 끌려갔고 대신 마케도니아인들을 정착시켰다. 이 후에 세겜성이 재건되고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설이 있다. 세겜을 재건하여 그리심 산에 '사마리아' 성전을 재건하였고, B.C.3-2세기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던 유대인들과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던 사마리아인들 간의 불화가 생기게 된다.


알렉산더 계승자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B.C.323-301년경)

자식이 없이 알렉산더가 죽은 후(BC323), 디아도키(알렉산더가 죽은 후 마케도니아-페르시아 세계제국의 통치권을 이어받은 장군들)에게 실제적인 권력이 주어졌다. 디오도키 중에서 세 왕국이 살아남았는데, ① 이집트의 프톨레미왕국, ② 시리아-팔레스틴의 셀루시드왕국, ③ 알렉산더의 이전 제국 중 유럽지역의 안티고니드왕국이다. 안티고니드왕국-프톨레미, 프톨레미-셀루시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팔레스틴은 길고도 쓰라린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 당시 유대와 예루살렘의 정부는 산헤드린(로마시대에서만 이렇게 부름)이라는 70인 장로회에 의해 다스려졌다. 헬라화된 도시들이 증가하여 데가볼리를 형성한 곳이 생겨났다.


프톨레미 통치와 이스라엘(B.C.301-246 / B.C.246-198)

이집트에서 프톨레미왕들의 통치는 바로들의 통치가 연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톨레미왕조는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하고 버려진 도시들을 재건하여 팔레스틴의 인구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코헬렛(전도서)이 이 시기 사회, 경제적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호소하기 위해 쓴 책으로, 이런 배경 때문에 귀족사회와 평민들 사이에 반목이 증가해져 이 반목이 마침내 마카비 시대에 가서 무장충돌을 야기시켰다고 본다(저자 입장). B.C.246-198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두고 프톨레미왕조와 셀루시드 왕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안티오쿠스 3세는 20세인 B.C.223년에 셀루시드의 왕이 되었다. 프톨레미 4세는 B.C.217년에 라파에서 안티오쿠스를 이기고 평화롭게 물러가도록 했지만, B.C.201년에 안티오쿠스는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침공하여 팔레스틴을 장악했다. 제5차 시리아 전쟁으로 팔레스틴은 안티오쿠스 3세의 손에 들어갔다.

셀루시드 통치와 이스라엘(B.C.198-175)

프톨레미 왕조를 몰아낸 셀루시드 왕국의 안티오쿠스 3세는 셀루시드제국을 북쪽과 서쪽까지 확대해 갔다. 안티오쿠스 3세는 프톨레미와의 전쟁에서 자기를 도와 준 유대인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의 재건작업을 격려했다. 예루살렘에는 부정한 동물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환영받는 일이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BC 175-164)과 마카비 투쟁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로마에 볼모로 가 있는 동안 헬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아 종교정책에 있어서 헬라식을 따랐다. 이 때, '야손'이 나타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안디옥으로 간 후, 에피파네스에게서 영구적인 대제사장 지위를 얻었다. 야손은 예루살렘에서 헬라주의자들을 보호하려 했다가 유대인의 반감을 샀다. 에피파네스의 평판이 좋지 않아졌고 야손은 트랜스요르단 지역으로 도망했다. 야손은 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시도했고 예루살렘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야손은 '하시딤'과 셀루시드 군대를 피했다는 견해도 있다. 야손의 반란에 대해 에피파네스는 유대가 일으킨 반란으로 해석하고는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성전을 강탈했다(B.C.168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를 붕괴시킨 로마 세력과 국경지대 역할을 하던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고, 유대가 셀루시드의 법과 질서를 따라 관습을 포기하도록 했다. 예루살렘의 헬레니즘 지지자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여 유대교의 특별한 지위를 없애려 했다. 종교적 갈등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지지자들과 나머지 백성들 간의 사회 경제적 격차가 심했다. 백성들이 가난과 세금으로 고통하자, 제사장 마타디아서의 아들인 유다가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마카비(망치라는 뜻)라는 별명을 가졌고 하스모니안으로 알려진 유다가 반란을 주도했다. 하시디안(헬) 또는 하시딤(히; '경건하다')이 마카비를 도왔다. 일부 하시디안은 안식일에 싸우지 않다 학살을 당했다. 유다는 게릴라 작전을 폈고, 뤼시아스 사령관이 이끄는 군대도 패하게 되자, 뤼시아스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안티오쿠스 5세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 헬라화 정책이 심했던 시기에 '비밀을 밝히다'를 의미를 가진 '묵시' 문학이 대두했다. 묵시문학의 목적은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결국 하나님의 나라(구원)가 나타날 것을 강조하고 격려하는 데 있다. 묵시를 통해 과거를 살피고 시대의 표적을 깨달아 미래를 맞이하게 했다.


유대의 중요한 집단들

<사두개파>는 부유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류층에 속했고, 고위성직자 및 귀족계층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헬레니즘지지자들처럼 정치, 사회, 경제적 안정에 관심이 많았다. '분리'의 뜻을 가진 <바리새파>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다. 그들은 마카비와 나란히 싸웠던 하시딤과 자주 교제를 했다. 바리새파는 하위계급의 제사장들, 숙련공, 소규모의 농사를 짓는 농부들과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평민들도 바리새파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바리새파는 토라와 구전을 중요하게 여겼고 부활, 천사, 영의 존재를 믿었다. 바리새파에서 열심당 관련 단체를 창설한 사람들이 나왔다. 주로 시골에 거주하며 농사 짓고 기술 숙련공으로 있던 <에세네파>는 하시딤의 영적인 후손들로 간주되었다.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공동소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을 진정한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예루살렘 제사장을 원수로 여겼다. 공동체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3년의 시험 기간을 거쳐야 했다.


제사장-통치자들인 하스모니아 왕조시대와 그 몰락

셀루시드 왕국이 시들해지고, 로마가 그것을 유도해 나가는 틈을 타서, 마카비 반란군의 지도자였던 시몬은 셀루시드왕에게 조세 해방을 요청했다. 조세에서의 해방은 마카비 반란의 성공을 상징했다. 이후 대제사장이 국가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대제사장이었던 시몬이 대제사장,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시몬 이후 그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의 시대가 이어졌다. 히르카누스가 죽은 후 맏아들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하스모니아 왕조의 첫 왕이 되었다. 그가 갑자기 죽은 후(B.C.103)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이 되었지만 27년 동안 끊이 없이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얀네우스는 트랜스요르단에서 전투를 벌여 가다라와 그 외 성읍들을 정복했다. 얀네우스에 대해 바리새파를 비롯하여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많아, 얀네우스가 나바태아 왕에게 패하여 예루살렘으로 도피했을 때, 내전이 일어나 5만 명이 죽었다. 셀루시드 왕조가 얀네우스를 돕자, 유대인들은 셀루시드 보다는 차라리 하스모니안 왕조의 지배를 받고자 했다. 얀네우스 후에 그의 아내 알렉산드리아, 아리스토불루스 2세로 이어졌다. 그러나 죽은 여왕의 합법적인 계승자는 이미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히르카누스 2세였기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헤롯대제의 아버지인 안티파터가 정치 무대에 들어와 히르카누스를 지지하였고, 두 왕은 로마에 서로 지원을 요청했다. 로마의 폼페이 장군은 제사장의 통치를 원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을 반영하여 히르카누스를 지원했고,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개입하여 하스모니아 왕조 및 독립 유대 국가의 종말이 왔다. 폼페이는 성전까지 장악했다. B.C.40년에는 헤롯이 로마 원로원의 허락을 받아 유대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헤롯은 로마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제외한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했다가, 헤롯과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에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 시기 열심당(Zeolots)의 활동이 일어났다. '열심당'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열심당운동의 가장 큰 목표는 이스라엘의 해방이었다. 그들은 외국 통치자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순교자로 죽고자 했다. A.D.73년 마사다(Masada)에서 멸망하는 사건에서 이 정신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스모니아 왕조가 통치하던 시대에 '메시야주의'가 등장했다. 하나님께서 최종 목적을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와 같은 사람을 통해 이루신다는 기대를 그들은 갖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기대를 했기 때문에 메시야주의는 민족 해방 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갈릴리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위축된 시골 주민들에게는 메시야의 도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헤롯대왕의 통치시간(BC 37-4)와 아그립바 1세의 통치 기간(B.C.4년경-A.D.41년)

B.C.37-4년경의 로마제국은 안토니와 옥타비안이 서로 대립하다가, 악티움전투에서 안토니가 패한 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유대의 헤롯은 유대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외교정책은 로마와의 우호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헤롯은 큰 건물들을 지었는데, 그의 가장 중요한 계획 사업들 중의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및 확장이었다. 헤롯의 지지자들이었던 귀족들이 세금의 책임을 맡았고, 그들은 세리제도의 사용을 특별히 좋아했다. 동정심이 부족한 것이 헤롯 인생의 특징이었다. 그는 가족들과 백성들에 대해 가혹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여 권위를 유지했다. 당시 헤롯당은 헤롯 왕조의 지지자들로, 로마에 우호적인 사람들이었다.
아그립바 때에 가장 유명한 총독은 빌라도였고 당시에는 싸움이 많았다. 예루살렘 궁에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방패를 세우는 문제로 유대인들과 싸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로마군대의 군복무를 면제받았다. 국내 정치에 있어서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통솔을 맡았다. 산헤드린은 로마총독의 감독하에 직접세를 징수할 책임이 있었다.
농민들은 높은 세금과 가뭄 등으로 토지를 팔고 일용노동자로 전락했다. 노예들의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워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 빚을 갚을 형편이 되지 못하면 스스로 노예의 길을 찾았다. 시골에 상당히 많은 거지들이 있었다(눅 16:20). 성전은 종교적 목적 외에 재정 확보나 은행 역할을 했다. 성전 뜰에서 환전상들과 장사꾼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은(막 11:15-17)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목적이 상실된 성전의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회당의 기원을 바벨론이나 이집트 디아스포라에서 찾고 있는데, 가장 가능성 있는 시기를 B.C.3세기나 2세기일 것으로 본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회당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당시에 평민들은 성전일과에 참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세 큰 절기에도 대부분 여행에 참여할 처지가 못되었다. 영적인 지도자들 중에서, 헤롯대왕 이후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정치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산헤드린의 의장이었고 예루살렘의 유력한 귀족가문 중에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물에서 이익을 얻었고 낮은 계급의 제사장들은 시골에 살았으며 수공업에 종사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서기관(소페림)은 책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많은 서기관들이 바리새인이었지만 그들 모두 바리새인은 아니었다. 70년 이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랍비 집단을 형성했다. 70년 이전에는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와 진보적인 힐렐 학파가 있었다. 사두개파는 소수를 형성하였으나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또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강력한 귀족계급이었다.


아그립바 1세부터 제1차 유대전쟁까지의 기간(A.D.41-66)

헤롯대왕과는 대조적으로 아그립바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후손으로 알려져 팔레스틴내에서 어느 정도 호감을 얻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설득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특권을 부여하도록 했고, 로마 제국내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런 정책을 펴도록 요청했다. 41년 이후에 경제적 상황은 점자 악화되었다. 이것도 정권이 탐욕과 타락에 기초했던 대부분 총독들의 악한 통치에 기인한다. 그들의 정책은 반감을 유발했고 소요가 일어났다. 당시 예루살렘은 가장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이며 번창한 경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대와 갈릴리의 교두보 역할을 한 사마리아는 성전 문제로 유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로마에 대항할 때는 유대와 연대했다. 갈릴리는 유대전쟁 이전 마지막 비교적 번창했고, 반로마운동의 요람이기도 했다. 베레아는 전형적으로 헬레니즘의 도시였다. 최초의 그리스도교회를 보면, 여전히 유대교 신앙에 충실하게 남아 있었으며 대체로 유대교 내의 한 집단으로 간주되었고, 성전예배에 참여했다. 예루살렘이 중요한 도시로 인식되면서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누가는 일곱 사람이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의 집단에서부터 집사로 어떻게 임명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행 6:3). 야고보는 대제사장 안나스 2세의 명령으로 산헤드린 앞에 소환되어 돌에 맞아 죽게 되는데, 온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어 아그립바 2세에 의해 제사장직에서 면직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직전인 66년에 트랜스요르단에 있는 펠라로 어떻게 도망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제1차 유대전쟁(66-74년)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섞여 살던 그곳에서 헬라주민들이 한 회당 옆에 정원을 건설하여 회당이 부분적으로 막혔을 때 두 집단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당시 총독 플로루스는 성전금고에서 17달란트를 빼내도록 명령하여 주민들은 반감을 가졌다. 열심당과 같은 집단은 숫자적으로 증가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고 유대와 갈릴리의 대다수 주민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이두매인들과 함께 67년에 참여했다. 열심당과 동조자들은 토지를 재분배하여 예루살렘 부자들과 시골 백성들 간의 불평등을 해소해 나갔다. 마사다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정복했다. 아그립바 2세는 3천명의 군사를 징벌대로 보냈지만 실패했다. 안토니아 요새가 점령되고 도시 전체가 로마로부터 해방되었다. 로마의 시리아 총독 갈루스는 66년 가을에 팔레스틴 원정을 했으나 얼마후 퇴각했고 퇴각하던 중 전멸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반란군에 참여했다. 68년 네로가 죽은 후, 장군 베스파시안이 69년에 로마 황제가 되어 아들 디도가 팔레스타인에서 로마 군대를 지휘했다. 70년 초에 디도는 유월절 몇주 전에 예루살렘을 포위 한 후, 유대인과 협상을 거부하고 성전을 불태웠다. 성전이 파괴된 것은 종교적, 민족적인 중심지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한편, 쿰란과 같은 공동체의 존재가 보여주는 것은 오랫동안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성전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성전을 잃어버리자 희생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리새파가 사두개파 제사장들이 권력을 되찾는 것을 반대했으며 로마가 다른 대제사장을 임명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와의 두 번째 전쟁 사이의 기간(74-132년)

성전 파괴는 미래를 위한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중심지를 잃은 것을 의미한다.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다. 상당한 경제적 기능을 수행한 재정기구를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와의 전쟁 후 다양한 종교 집단이 생겼다. 바리새파는 70년 이후 점차 사라지고 대신 '나의 선생'이란 의미를 가진 <랍비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대부분 바리새파에서 나왔다. 랍비들은 토라의 전승을 따라 행하고 또한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강조했다. <야브네(얌니아)>는 베스파시안 황제에게서 토라를 연구할 학교를 시작할 것을 허락받아 135년까지 랍비유대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으며, 후계자 가말리엘 2세의 지도하에 랍비 유대교의 기초를 마련했다. 성전 파괴 후 회당이 영적인 삶의 중심지였다.


바르 코흐바의 반란(132-135년)

팔레스틴에서 큰 문제들 중의 하나는 유대 주민과 헬라 주민들 사이의 관계였다. 130년경 하드리안이 팔레스틴을 방문한 후 예루살렘을 그레코-로만 도시로 재건하려고 했고 할례를 금지했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 특히 '별의 아들'의 뜻을 지닌 바르 코흐바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대다수 랍비들은 '거짓의 아들'이라고 본 것과 달리,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흐바를 민 24:17에 근거하여 기대되고 있는 '다윗의 별'로 생각했다. 132년 초에 반란이 일어나 여러 요새를 점령했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줄리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진멸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전투에서 죽었고 헤브론 시장에서 유대인 노예 한 사람이 말 한 필 보다 낮은 가격에 팔릴 정도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는 이름 하에 완전히 이방도시가 되어 성전 터 위에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다. 할례, 안식일 준수 및 토라를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조국을 잃은 유대인들은 토라를 서로를 결합시키는 끈으로 삼았고, 그 끈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해져 갔다.


[신약배경사]를 읽으면서...

[신약배경사]에서 전승되어온 율법과 전통을 따라 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신념을 보게 된다.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반란도 불사했다. 저항이 심해질수록 고통도 심해졌고, 그들은 메시야를 더욱 갈망하게 된다. 백성들 역시 강대국의 압제와 국내에 들어온 헬레니즘 지지자들과의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를 원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희망했다. 그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고 구체적인 도움이 되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러한 유대의 배경 위에 오셨기 때문에, 유대주의를 위해 반란과 혁명을 불사했던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헬라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권력층을 이루었던 기득권 세력의 눈에는 또다른 저항세력으로 비취었기에 예수님에 대한 반대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열심당', '묵시', 여러 종파의 사상은 포로기 이후 강대국들 사이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삶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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