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대구시조문학상 수상작
안면도/ 윤경희
비바람 할퀴고 간 서해는 자우룩하다
충혈된 눈 흘기며 길게 숨을 내뿜는
산발한 염천의 힘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가마솥까지 내걸고 장작불을 지피는
웃옷도 벗어던진 태안의 매운 더위
한바탕 칼춤을 추며 여우비까지 뿌려댄다
세상사 그렁그렁 눈앞을 비껴가도
딱지가 아물기 전 밀물은 밀려오고
주소도 없는 섬들이 어스름을 닫는 저녁
삶은 그리 견디며 이겨내는 거라던
겉과 속 한결같은 녹녹한 개펄 위에
속내를 접어둔 채로 잠 못 든 하루를 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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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망설/ 문무학
무엇을 할까 말까
어디로 갈까 말까
웃을까
울어버릴까
이래 볼까
저래 볼까
까와 까
사이 오가며
그네 타고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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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대구의작가상 수상작
개인정보의 배반/ 조명선
한 차례 헐떡이며
파도가 휩쓸고 간
도대체 어떻게
소중히 지킨다더니
어쩌다 그 입술에 걸려
못 믿을 진심이다
이력도 모르는 채 거품 묻은 입술 위로
건조한 계단을 올라 서둘러 나간다
바람의 음률에 맞춰 꺾이는 게 부끄러운지
얼굴은 가렸으나
지금도 줄줄 새고
여기저기 약을 쳐도
슬그머니 풀려나서
파국이 끓어 넘치는
속수무책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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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나무/ 박화남
옷가게 간판 가려 목이 잘린 가로수와
가게를 점령하고 바꿔달라 떼쓰는 손님
부끄럼 땅에 떨어져
뿌리째 흔들린다
얼굴 없는 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몸이 없는 얼굴은 입만 살아남아서
우리는 서로를 몰라
발목 잡고 서 있다
이파리 팔랑여도 비바람을 모른다
나무는 팔을 내려 아래로 휘어지는데
사람 위 사람이 많아
몸들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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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김미정
한없이 울다 말다 누군가 떠난 자리
꿈결은 현실 밖의 흐릿한 가시거리
쉽사리 잡히지 않는 우두커니, 멍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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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쓸다/ 민병도
조명을 뒤로하고
무대를 내려온,
시든 꽃잎 쓸다
쓸려 가는 나를 보네
관객이 되기 전까진
쳐다보지 못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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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척경비/ 송의호
왕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그대 이제 신라 백성
불편한 건 없는지
왔으니 돌 하나 세워 남깁시다, 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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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광동 사과나무/ 이솔희
평광동 과수원에
오래된 나무 있지
긴 세월 애태우며
수많은 사과 키운
꺼멓게 속이 타도록
인내하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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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지기/ 이숙경
걸어온 두 인생 당신과의 발자국이
언제부턴가 외롭게도 한 쌍만 걷고 있네
몰랐어 옆지기 그땐 나를 업고 걸었음을
이제야 밀려드는 후회 더미 타는 속을
가슴으로 삭혀왔던 소리 없는 흔들림을
눈물로 품어 주었네 그대 작은 어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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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속도/ 이정환
물을 따라잡기에는
항시 역부족이다
장령산 치유의 숲
계곡 따라 내려오며
좇다가 멈추어 서서
호흡 가다듬는다
더는 뒤좇지 말라
바람이 속삭인다
너는 너의 걸음
있지 않느냐 하며
소리쳐 흐르는 물이
물보라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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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이종문
초속 십칠 미터 돌풍이 지나가도 원두막이 요지부동 까딱도 앖는 것
은 달마가 가부좌 틀고 딱 버티고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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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최재남
수풀에 가려있는 하얀 들꽃 한 무더기
저를 드러내려 발돋움한 적 없지만
벌 나비 다 모여들어 향기 파종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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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허남호
해명하면 할수록
늪 또한 깊어졌다
반복된 말 바꾸기
의혹만 번져가고
특검범 반대 자리엔
천 길 깊은 늪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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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둥오리 활공법/ 황삼연
한 마리가 무리를 이끄는 게 아니다
무리가 한 마리를 떠밀며 가는 거다
제대로 먼 길 가려면 그래야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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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함께 가는 길
대구시조 제28호/ 대구시조시인협회/ 2024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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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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