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우리말
임병식 rbs1144@hanmail.net
해드림 출판사 이승훈선생이 펴낸 <아름다운 예문과 함께하는 국어사전>을 보다가 정겨운 말을 발견했다. ‘건너뜸’이란 어휘인데 오랜만에 대하는 것이어서 여간 반갑지 않다. 선생은 이 사전에서 뜻풀이 뿐 아니라 연관 어까지 끌어다 짧은 글을 지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건너뜸의 활용어로는 아래뜸과 위뜸, 안뜸과 바깥뜸이 있단다. ‘뜸’은 한동네 안에서 몇 집 씩 따로 모여 있는 것을 이른다. 한편, 이 뜸을 생각해 볼 적에 그 함의는 ‘떨어지다’ 혹은 ‘간격이 벌어지다’를 포함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뜸들이다, 굼뜨다 할 적에 일정한 이격감(離隔感)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 ‘뜸’에 관하여 반색하면서 반가움을 느낀 것은 1963년도였다. 왜 그걸 기억하느냐하면 중학시절 은사였던 이석봉 선생님이 그해 동아일보 공모전에 소설을 응모하여 2등에 뽑힌 적이 있는데, 당시 당선작이 이규희 선생의 ‘속솔이 뜸의 댕이’였다. 거기서 낯익은 말을 발견하고서 기뻐했던 것이다.
‘낯익다 함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우리 마을에는 ‘건네뜸‘이라는 지명이 있어서였다.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말하기는 ’건네똥‘ 혹은 ’건너뜸‘이라고 했다. 그런데 소설제목에서 바로 그 뜸일 줄이야.
해서 나는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볼 마음도 없이 그냥 혼자서 예단하기를 ‘얼마쯤 떨어진 곳’을 이르는 말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마을의 건너뜸은 동네 한 테두리 안에 있기는 해도 그곳에 가려면 외움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정도로 다른 동네처럼 느껴진 곳이다.
이러한 내력이 있는 터에 그 어휘를 대하게 되었으니 반갑지 않을 수 않겠는가. 이렇듯 내가 한때는 그 ‘건네뜸’이란 말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듯이, 고향 지명 중에서 한동안 아리송하게 여겼던 지명이 있다. 다름 아닌, 핑경쟁이와 그럭재, 그리고 모롱개와 불무골이란 말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본래 이름이 따로 있는데 혹시 구개음화 현상이나 사투리가 가미되어서 그리 변형이 된 건 아닐까. 한동안 궁금히 여기던 중 의문을 풀게 되었다. 역사적인 사실과 사투리로 변형되기 이전의 원형을 추적한 끝에 알아내게 된 것이었다.
먼저 ‘핑갱쟁이’는 조선 중기에 그곳에 아홉 개의 정자가 있었음을 알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처마에 풍경이 매달려 미풍에 흔들릴 때마다 청아한 소리를 냈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풍경정(風磬亭)’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 아닌가. 그 풍경정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이 되다보니 핑갱정이 되고 마침내는 핑갱쟁이로 굳어졌을 것이 아닌가. 그리 추정해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또 하나 ‘그럭재’란 지명만 해도 그렇다. 기러기재가 그리 바뀐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바로 재 아래는 안치(雁峙)마을이 있는데, 이것이 기러기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치내'라는 지명은 까치내가 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자로 쓰면 까치 작(鵲)자을 넣어 작천(鵲川)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이다.
하나, 불무골은 좀 애매하다. 그러나 송강이 기생과 노닥이면서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 어쩌고 하며 추파를 보내자 기생 또한 ‘내게는 불무골 있으니’ 그것으로 녹여버리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짐작이 간다. 인체의 특정부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골짜기는 영락없이 여자의 음부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무골은 풀무질을 의미화 시킨 말이 아닌가.
한편, 모롱개는 어렵지 않게 유추가 가능하다. 모롱은 바로 모퉁이가 변한 말이고 개는 바다를 의미하니 모퉁이에 있는 바다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 오락프로에서 소음이 많은 기구를 끼고 여러 사람이 말 이어받기를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엉뚱한 말이 되고 마는데 마치 그런 경우라고나 할까.
오늘 노점상 옆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은 말이다. 대화 중에 손님이,
“ 요새 잠 잘라면 더워서 죽겠지랍”
“나는 암상토 안하요. 집이 몬당이라 잠만 잘 자요. 그나저나 장사가 통 안되어 죽것소”
“아따 죽는소리 그만 하시오. 돈 많이 벌어놨담시럼”
일쑤 농 짓거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우리 고향에서는 그걸 ‘몬댕이’이라고 하는데 같은 전라도 안에서도 쓰는 말이 이렇게 다른가 싶어 웃음을 실실 흘리고 지나갔다.
말은 통하면 그만이다. 일상어는 문장을 짓는 말이 아닌데 어떠랴. 사투리는 사투리대로 귀한 것이다. 한 지방의 혼과 정체성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의미만 통하면 되지 않겠는가.
무더운 날에 잊혀져가는 우리말, 그 뿌리를 더듬어 보다가 새삼 청량감에 사로잡힌다. 문득, 질펀한 고향의 정겨운 말투에 앞서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머니 목소리가 질펀하게 녹아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해 진다. 아마도 진한 그리움이 밀려 들어서 인지 모른다. (2018)
첫댓글 뜸을 만나니 반갑군요 꼬랑뜸 냇가뜸 웃뜸...여수사람들은 떰이라 하지요 지금도 살아있고 쓰이는 우리말이지요 그런데 뜸과 쌍벽을 이루는 첨은 어느결에 국어사전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아직도 엄연히 살아있는 말을 없애버린 겁니다 뒤첨 가운데첨 아래첨...책상머리에 앉아 되잖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원망스럽죠 그러면서 죽은 말은 살려서 쓰자고 하니 어이가 없어요
이승훈사장이 펴낸 국어사전을 보다가 건너뜸을 발견하고 반가운 나머지 글을 한편 써봤습니다 저는 첨은 좀 생소하네요 아무튼 아름다운 우리말 정겨운 방언은 묻어버리지 말고 활용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선 몬당이라 하는군요. 여기서는 먼당이라 해요.^^ 기러기재 휴게소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여행도 접고 살아서요.ㅋ
지역마다 방언도 조금씩 다른것 같습니다. 저도 기러기재에 휴게소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쉬어가기 좋은 곳이니 가게는 몰라도 쉬는 곳은 있을것 같습니다.
2018.수필세계 가을호에 발표
사투리가 정겹네요..좁은 땅에서 사투리가 이리도 많은지 육지 사투리는 알아듣겠는데 제주도 사투리는 도저히 못 알아듣겠더라구요..
사투리를 많이 듣고 활용하면 글을 보다 풍부하게 하고 맛깔스럽게 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