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신(神)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45년 겨울, 10살이던 때이다. 그해 8월 15일에 해방이 된 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는데 일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가족들은 애를 태웠다.
그때는 전화나 편지, 전보 등의 모든 연락 수단이 끊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달리 알아볼 방법이 없었고 점을 쳐 보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라면 수단이었다. 어머니는 점 치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여러 일들로 가끔 점을 보곤 하셨다.
그해 겨울, 동네 아주머니 여럿이 의논해서 멀리 있는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우리 집에서 점을 친 적이 있었다. 동네의 한 청년이 일본 군대에 갔는데 소식이 없어서 점을 쳤는데 그 점쟁이의 입에서 청년의 음성이 그대로 나왔다.
그 점쟁이는 우리 동네에 처음 온 사람이라 그 청년을 알 리가 없다. 그리고 어떻게 여자의 입에서 남자의 음성이 나오며 말씨까지 그 청년의 것과 꼭 같을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점쟁이는 청년이 죽었다고 했고 방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울었다. 어른들은 죽은 청년의 혼이 점쟁이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고 했다. 나는 뒷전에 않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신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내가 13살이었을 때 나보다 10살 위인 형님이 결혼을 해서 형수가 들어왔다. 그런데 형수 방에는 늘 이상한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한글로 쓰인 책인데 많이 낡고 겉표지가 없었다. 한번 읽어 보았는데 ‘낳고 낳고’ 라는 말만 계속 나오고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없어 재미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책은 신약 성경이었다.
내가 15살이 되었을 때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 가족은 3개월 동안 피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17살이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에 교회가 들어왔다. 이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에서 기독교가 도입된 나라들은 다 잘 사는 선진국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좋은 것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생각했고 나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나도 그렇게 불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에 나도 그렇게 믿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고 하는데 왜 아들을 하나밖에 못 낳으셨을까, 하나님의 부인은 누굴까 하는 등 의문이 많았지만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물어 보지는 못했다.
교회가 들어오니 형수가 나보다 먼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유교에 철저하신 분이라 기독교를 오랑캐 종교라 하셨다. 그래도 형수가 워낙 행실이 올바르고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가도 그렇게 간섭하지는 않으셨다.
아마도 형수의 사람됨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형님도 교회를 다니다가 1952년에 군에 입대했고 하사관이 되어 장기 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치열한 때였다. 그래서 집에는 부모님과 형수,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게 되었다.
제사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고 새벽 기도까지 나가는 모범생이 되었다. 그러는 중 교회를 세웠던 목사님은 부산으로 가시고 후임으로 총각 전도사님이 오셨다. 그분은 율법에 철저하고 열심히 전도하며 성경도 가르치셨다.
나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가장 큰 고민은 제사 문제였다.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는 것은 별로 간섭하지 않으셨지만 제사만은 철저히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아버지께서 3대 종손이라 집안의 제사는 모두 우리 집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제사를 잘 모셔야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믿고 계셨다. 나는 꾀를 써서 피하려고 노력도 해 보고 꾀병을 앓기도 해 보았지만 그 많은 제사를 다 피할 수는 없었다. 4대 종손인 형님이 군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제사 지내는 심부름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아버지와 삼촌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제사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었다. 어른들이 왜 제사를 안 지내려고 하느냐고 꾸중하셔서 나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어른들은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냐고 하시며 조상을 잘 섬겨야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하셨다. 나는 이때다 싶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우리나라 역사 중에 조선왕조 500년 때보다 조상을 더 잘 섬긴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런데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를 점령할 때 조상들은 왜 그것을 막아주지 못했습니까? 후손들이 일본 전쟁에 끌려가서 죽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과 이름도 다 빼앗기고 일본식으로 바뀌었는데(창씨개명), 그때 대접 잘 받은 조상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일본 사람은 한국 사람만큼 야단스러운 제사를 안 한다고 합디다. 또 미국 사람은 제사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합디다. 그러면 그들의 조상은 다 굶어죽었을 텐데 어떻게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이렇게 말했더니 일본에 다녀 오신 삼촌이 껄껄 웃으시면서 내 말이 맞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용기가 나서 “성경에 보면 우상을 섬기면 자손의 삼사 대까지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종손집이 망하는 것은 벌을 받아서 망한 것 같습니다.
우리 집도 내 대에 내려오면 4대니까 망할지도 모릅니다.” 라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안 그래도 옛날부터 4대 넘어가는 종손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고 하셨다. 그 후로 나는 제사에서 해방이 되었다.
불태워 버린 우상단지들 (1) |
그 후 몇 달이 지난 겨울에 어머니가 편찮으셨다. 전에도 그랬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늘 비슷했다. 며칠을 앓고 심해지면 졸도를 하셨다. 그러면 어른들은 침구사를 불러서 침을 놓거나 그래도 안 되면 마을의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 그러면 깨어나실 때도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증세였다.
어머니가 자리에 누우신 지 삼사일 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출타를 하셨다. 내가 평소에 늘 생각하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윗대부터 내려오던 우상단지를 치우자는 것이었다. 큰방 구석 시렁 위에 하나, 부엌 구석에 하나, 마루에 하나, 이렇게 세 개가 있었는데 명절이 되면 어머니는 거기에 음식을 차려 놓고 빌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작은 단지들이었다. 그날, 아버지까지 출타하신 기회를 타서 형수와 의논하여 그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마귀를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삼 일 후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어 졸도하셨다. 침구사가 와서 침을 놓아도 안 되고 무당이 와서 푸닥거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시골이라 병원도 없고 어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께 교회 사람들을 불러 기도하겠다고 제안했더니 허락하셨다.
저녁에 교인들이 한 방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도 하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느라 집안이 떠들썩했다. 이때 앞집에 살고 있는 삼촌이 오셔서 이 광경을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시다가 형수 방 쪽으로 가셨는데 갑자기 ‘으악!’ 소리를 크게 지르며 우리 방 쪽으로 뛰어오시더니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우리는 크게 당황하여 삼촌에게 매달려 주무르고 기도하고 난리 법석이 났다. 얼마쯤 지났을까, 졸도하셨던 어머니가 깨어나서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하셨다. 어머니가 깨어났으니 다행이었지만 이제는 삼촌이 문제였다. 몸을 주무르고 흔들기를 한참 한 후에 삼촌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셨는데 솜바지저고리가 땀으로 다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한숨을 크게 쉬시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나보고 형수 방에 가 보라는 것이다. 나는 섬뜩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가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등잔불은 켜져 벽에 걸려 있고 방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더라고 했더니 삼촌은 화를 내시면서 자세히 보았느냐고 하셨다. 내가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삼촌은 담배를 다 태우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졸도한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와서 보니, 교인들이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담배나 피우려고 형수 방으로 가셨단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짚 거적때기로 돌려 싼 송장 같은 것들이 벽에 둘러 앉아 있는데 문 옆에 있던 것이 벌떡 일어서면서 ‘이놈’ 하며 삼촌의 뺨을 후려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으로 뛰어온 것은 기억이 없다고 하셨다. 그 후로 삼촌은 1년 가까이 대낮에 우리 집에 오셔도 형수 방 근처는 가지 않으셨다.
불태워 버린 우상단지들 (2) |
교인들이 모두 돌아간 뒤 그날 밤 큰방에서는 어머니와 형수가 주무시고 아버지와 나는 형수 방에서 자기로 했다. 자리를 펴고 잠이 들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벌떡 일어나서 “어머니, 부르셨어요?” 물었더니 형수가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히 두 번이나 불렀는데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대로 누웠다. 다시 잠이 들려는 차에 어머니가 두 번 불렀다.
벌떡 일어나서 “어머니, 불렀어요?” 했더니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시면서 왜 그러느냐고 하셨다. 형수는 역시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이상했지만 그대로 잠이 들었다. 50여 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날 밤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 후로 나는 가끔씩 그 일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다. 삼촌이 본 송장의 수와 우리 집에서 지내는 제사의 수가 비슷했고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 불사르고 깨트린 우상 단지들이 생각나면서, 우리 집에 옛날부터 터를 잡고 살던 귀신이 있을 곳이 없어 떠나면서 그런 일들을 벌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 23절을 보면, 구원받기 전에도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한다고 했으니 그때 내 형편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 사건 후로 어머니의 병세도 회복되셨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는데 한 반 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셨다.
허무한 인생사 (1) |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장로교회에 다녔다. 그때는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고민했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일 것이므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목사님의 말도 맞는 것 같고 학교 선생님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한번은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뽑아 여자를 만들었으므로 남자는 갈비뼈가 하나 없다고 설교하셨다. 그 후 학교에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을 일이 있었는데 갈비뼈가 다 있었다. 그래서 진화론이 맞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1년 선배가 아담은 갈비뼈가 하나 없지만 그 자손은 다 있다고 해서 의문이 풀렸다. 또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면 지금 원숭이는 왜 사람이 안 되느냐는 이야기를 듣고는 진화론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고, 다시 교회에 나가기로 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형수가 결핵으로 돌아가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교회(성결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을 초청해서 부흥회를 했는데, 수요일 저녁 설교 끝에 죄 있는 사람은 내일 새벽 기도에 나와서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 예배 때 한 사람씩 강단에 올라가서 목사님에게 죄를 고백하는데, 나는 세 번째로 올라가서 기억나는 내 모든 죄를 울면서 숨김없이 고백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목사님도 울었다. 목사님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소자야 안심하라. 너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셨다.
나는 기뻤다. 주의 종이 안수하며 죄사함 받았다고 했으니 내 죄는 없어진 것 같았다. 냇가에 와서 세수를 하면서 내 죄는 이 물과 같이 떠내려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1957년 7월)
훈련을 마치고 미군 부대로 발령이 나서 서울 구파발에 있는 미군 공병대대에 근무하면서 부대 밖 마을에 있는 감리교회를 다녔다. 군인 친구들과 함께 기독 청년회를 만들어 2년 반 동안 봉사하며 목사님이 출타하시면 가끔 설교도 했다.
2년 반 후에 한국군으로 전속되어 갔는데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나는 한 달 후에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른들의 주선으로 서둘러 결혼을 했는데 아버지가 부대에 보내온 사진 한 장만 보고 결혼을 했다.
제대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내게 안수해 주셨던 목사님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후 선거 자금으로 빚만 잔뜩 진 채 잠적해 버린 상태였다. 다른 목사님들은 주의 종이 무슨 권력이 탐나서 국회의원에 출마를 하며, 그는 남의 돈을 떼먹고 도망갔으니 처음부터 주의 종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때 내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입대하기 전에 그 목사님에게 고백한 죄는 다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주의 종이 아니라고 하니 목사님 앞에 고백한 그 죄가 하나님 앞에는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군인 생활 3년 동안 지은 죄는 훨씬 더 많으니, 이제는 두 보따리의 죄가 어깨를 짓눌렀다.
허무한 인생사 (2) |
그런 고민 중에 살다가 급성늑막염에 걸렸다. 병원에 가서 늑막에 고인 물을 링거 병으로 두 병을 빼냈는데 의사는 며칠만 늦었으면 죽었을 것이라 했다. 늑막염은 일을 하면 재발할 수도 있어 아버지께서 집에서 4km 정도 떨어진 절에서 서너 달 동안 휴양을 하라셨다. 그때 그 절의 주지스님으로부터 불교를 조금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두 친구가 절에 찾아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따르던 선배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충격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컸다. 그 선배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은데 날 때부터 한 마을에 살았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선배는 내가 교회에 다니다가 실망해서 그만 다니려고 할 때마다 내 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학교에서도 내내 수석만 하던 천재였다. 나를 가장 사랑했고, 나도 가장 좋아하는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공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때 내 나이 26세였다. 나는 항상 그 선배가 걷던 길을 1년 뒤에 따라갔으니 나의 죽음도 1년 후라고 생각되었다. 건강하던 그도 죽었는데 지금의 나는 병이 든 몸이잖은가.
그때부터 내 노래는 완전히 바뀌었다. 찬송가는 사라지고 허사가, 사의 찬미, 황성옛터, 불효자는 웁니다, 타향살이, 짝사랑 같은 노래만 불렀다. 고시 공부하는 학생이 주지스님에게 고발해서 하마터면 쫓겨날 뻔했다.
감격스러운 기도 (1) |
휴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해 겨울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장로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유명세를 타서 인근 교회의 목사, 전도사, 장로들 15명 정도가 은혜 받으러 왔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그 손님들이 한 방에 모여 있는데 들어가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내가 읽어 본 성경과 목사님들의 설교가 맞지 않은 것이 많은데 성경 기록이 잘못된 것입니까, 목사님들의 설교가 잘못된 것입니까?
저는 아직도 천국에 갈 자신도 없고 간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있습니까?” 그때 연로하신 목사님이 “우리도 다 천국에 갈 자신은 없습니다. 누가 감히 자신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는데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하여 좌우를 돌아보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교회에서의 내 직분은 집사였다. 옆에 앉아 있던 전도사님이 “이 교회 큰일 났네. 김 집사가 이렇게 말하니 다른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집사님,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기에 성경이 잘못되었거나 설교가 잘못되었다고 합니까?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특별히 은혜 받은 것 뭐 없습니까?” 하고 나를 다그쳤다. 그래서 나는 입대하기 전에 목사님 앞에서 죄를 고백했던 그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에 말했더니 그 전도사님이 내 무릎을 치면서 “집사님, 그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아무나 그런 경험 잘 못합니다.” 하셨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 ‘기독교는 이런 것이구나. 목사가 되든 장로가 되든 천국에 관한 문제는 확신도, 증거도 없고 긴가민가 하는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생각하며 한 평생을 살다가 가는 것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 교회에서 시무하던 교역자도 마음에 들지 않고 해서 교회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교회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 친구를 사귀고 유행가를 부르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런 생활이 3, 4년 지나갔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니 몸이 점점 축났다. 이럴 바엔 진리가 없어도 교회를 다니는 것이 몸에는 좋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서는 대 환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에 어머니께서 편찮을 때 고생하셨던 전도사님이 처갓집 마을의 교회에 와서 시무하는데, 이단에 걸려서 정신이 좀 이상하다는 소문이 들렸다. 1967년 12월 하순 쯤 처갓집에 볼일이 생겨서 갔는데 ‘그분이 어쩌다가 이단에 걸렸을까? 내가 고쳐 주어야지.’ 하고 생각하고는 교회 사택에 찾아갔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정신이 어떻게 되었을까 의심도 되었다. 눈치를 보며 대화를 하려고 하는데 그분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감격스러운 기도 (2) |
옛날에 우리 교회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솔직하고 숨김이 없었다. 어느 교역자에게서도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아, 이래서 돌았다는 소문이 났구나.’ 생각하고는,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의심나는 것을 물어보면 그분은 설명을 하지 않고 성경을 찾아서 보여 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동안 내가 잘못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내가 재수 없게 걸렸다고도 생각했다. 또 요즘 이단들은 성경을 조금씩 고쳐서 사람을 유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성경책을 가지고 가지 않았었다.
그분이 화장실을 간 사이 그의 성경책을 펴서 조사해 보았다. 출판사도 확인해 보고 내가 아는 성경 구절을 찾아보아도 내 성경책과 다른 곳이 전혀 없었다. 안 본 척하고 다시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다시 토론이 시작되었다. 내가 지기만 했다. 그 전부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해석을 잘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이 펴 주는 성경을 읽어 보니 해석할 것도 없고 사실 그대로이니 대항할 거리도 없었다. 그때부터 기가 죽어 그분의 설명을 듣기만 했다.
그날은 둘 다 점심도 먹지 않았고 어느덧 해질 무렵이 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성경을 읽을 때, 나는 바로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그분은 많은 설명을 한 후 요한복음 5장 24절을 펴며, 예수님이 당신에게 하는 말씀이라 생각하고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읽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하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얻었고?’ 이미 다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외쳤다. “아, 다 되어 있네요. 괜히 헛걱정 했네요. 지금까지 내가 바보였네요.” 하니 그분이 그렇다고 했다.
아무것도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그 무거운 죄 짐이 순식간에 다 사라졌다. 그분이 “기도합시다.” 하는데 내 평생에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기도는 없었다. 그리고 “찬송가를 부릅시다.” 하고는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를 부르는데 나도 울고 그분도 울었다. 그 날이 1967년 12월 22일이었다.
그런데 찬송가를 부를 때 어디 있다가 나타났는지 어떤 한 사람이 함께 불렀다. 아침에 내가 들어갔을 때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하루 종일 어디 있었는지 나는 기억이 없다. 수개월 후 우리가 친해졌을 때 그날 어디 있다가 나타났느냐고 물어 보았다.
하루 종일 그 방구석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무슨 기도를 하루 종일 했느냐고 하니 마지못해 하는 말이 당신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했다. 나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나를 위해 점심도 굶고 하루 종일 기도를 하다니!
그 후 나는 내가 다니던 교회에 복음을 전하며 강사를 초청해서 집회를 했고 교회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았다. 아버지와 형님, 그리고 귀신에 놀란 삼촌도 그 후 구원받으셨고 지금은 모두 낙원으로 가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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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태님 간증은 언제 들어도 재미있어요 ㅎㅎ 우리 큰할머니(내가 어렸을때 큰집에 제일 나이 많으신 할머니) 께서도 일제 시대때 이십리(?) 교회길을 날마다 새벽기도를 나가실 정도로 열심이셨던 분이신데 집에있던 신주단지(아마 신위를 모신단지)를 불사르고 냇가에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날 밤에 귀신들이 난리를 피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이야기가 무서 웠는데 ...
무거운 죄짐이 순식간에 다 시라졌다
글소리 에서 봤는데 재미있어 또 읽어도 재미가 있네요
김태님 간증을 읽으며 영화의 한장면처럼 그 동네 깊숙히 들어가서 함께 했던것처럼 --우리가 받은 이복을 온 천하에 전하라 하신 말씀대로 이 생명 다하도록 해야 되겠다는 각오가 새롭습니다/ 혼자서가 아닌 우리함께라면 --
정말 잘 읽었습니다
김태님 간증 저도 글소리에서 읽었고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대 선배님이 계셔서 이렇게 또 든든히 푯대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 강연때 한문에 대해 많이 설명해 주시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된것같습니다. 한문에도 많은 숨은 성경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니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구원받게 해달라하는 어떤사람이 마치 중보자로 써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제 블로그로 스크랩합니다. 재미있고, 확실하고, 생각의 각도가 반듯하여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간증 감사합니다.
언제나 한문으로 심오한 성경을 풀어 주시는 님의 간증 자세히 읽었습니다
잘 읽었씀니다. 귀한간증 올려주셨네요 한문으로 풀어주시는 심오함이 느껴짐니다
김 태님의 지혜와 용기가 돋보입니다. 기회는 용기있는 자가 잡는 가봅니다. 전도 집회 강연회에서 들려 주신 한문 풀이하실 때저도 감동받고 다른 외인을 만나서 대화 중에 저도 좀 써 먹어 보기도 했읍니다. 귀한 간증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태 형제님 존경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지요! 옮겨 갑니다.
김태 형제님의 간증은 몇번을 읽어도 그때마다 감동됩니다 거듭났을때의 감동이 진하게 몰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