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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우진 신부 |
살레시오회 돈보스코 청소년 영성사목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노우진 신부를 만났다.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청소년사목에 대한 물꼬를 여는데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다.
노우진 신부는 지난 수년간 필리핀 산토 토마스 대학에서 사목신학을 전공하고 왔는데, 살레시오회의 카리스마에 충실하기 위해 청소년 사목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양한 매체와 논문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의 청소년 문제를 짚어보면서 일종의 절망감 같은 것에 휩싸였다.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서도 여러 차례 청소년사목에 대해 진단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는 세미나와 연구발표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정말 청소년들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반사회와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청소년사목이란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아이들도 체험하게 하는 것
대부분 청소년사목에 관해 논하자면, 먼저 사목자들의 관심이 부족하니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재정을 더 투자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식으로 도식화된 결론만 내어놓는다. 그리고 청소년사목이 위기에 봉착한 이유는 잘못된 경쟁적 입시제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노우진 신부는 "표피적 이해"라고 단정짓는다. 그리고 교회전통과 신앙 안에서 청소년사목에 대한 개념 자체를 다시 점검할 것을 주문했다.
한국사회 안에서 가톨릭신자들의 비율이 워낙 적고, 가톨릭신자들조차 사실 불교나 민간신앙 등 전통종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가톨릭신자로서 특별히 다른 점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게 노우진 신부의 판단이다. 다종교적 심성을 갖는 것은 잘 통합하면 우리 신앙을 풍요롭게 하지만, 사실상 조금만 잘못하면 가톨릭정신과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사목을 이끌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제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가톨릭적인 정서와 가치 위에서 청소년사목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청소년 사목에 대한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교회에서 청소년사목은 그저 '대상'만 청소년일뿐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나온 <사목헌장>의 사목 개념에 대한 이해가 배어들지 않았다고 본다. 이를테면 청소년사목을 "아이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으니, 그 아이들을 얼마나 많이 다시 성당에 나오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숫자 늘이기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제나 수녀나 교리교사들도 마찬가지여서 숫자가 늘지 않으면 지원도 줄고 사목이 실패했다고 보는 게 잘못이라는 것이다.
노우진 신부는 "청소년사목이란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아이들도 체험하게 하는 것이며, 내가 그 아이들과 동반해서 그리스도에게로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과 동반했듯이, 그들이 빵을 쪼개어 나누어 먹으면서 그리스도를 알아 보았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길을 걷겠다는 의지라고 한다. 결국 청소년사목의 목표는 "예수의 인격을 아이들이 받아들이고 그 삶을 살도록 돕는것"이며, "우리 안에 신성이 있듯이, 나와 나 자신, 나와 이웃, 나와 자연, 나와 하느님이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일학교 어린이와 청소년'으로 제한하면 안 돼...지역 청소년에 관심 가져야
한편 청소년사목의 대상 역시 '주일학교 어린이와 청소년'으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성당에 다니든 안 다니든 본당이 위치한 지역에 사는 모든 어린이 청소년들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지역 안에 있는 소외된 아이들 모두에게 교회가 할 일을 찾는 게 사목인 까닭이다. 그래서 청소년사목자는 자기 삶의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청소년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아이들은 봉헌금을 몇푼 내지 않지만 교회의 미래이며 세상의 미래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를테면 미사 전후에 어른신자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악수를 나누고 꼬마에게도 반가운 미소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레서 아이들이 그 사목자를 만나서 하느님의 사업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느끼게 해야 한다.
그리고 본당중심의 청소년 사목이 지역과 교구, 전국차원으로 이어져 서로 다른 지역과 본당에 사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본당마다 사정이 달라서 프로그램이나 교사의 질도 다르다. 그래서 자기 본당의 자원을 어려운 본당과 지역에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실 속 교리교육 중심의 사목 벗어나야..
또한 아이들이 처한 (교육) 상황 이면에는 정치적 구조적 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고, 그 아이들을 둘러싼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구원이 필요함을 절감해야 한다"고 노우진 신부는 말한다.
나우진 신부는 "청소년사목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그건 투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아이들은 누가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자기들이 알아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프로그램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자칫하면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고민하다보면, 그들과 동반하려는 마음자체 없이 그저 기존의 공교육이나 사교육이 갖는 문제를 닮아간다. 처음부터 무조건 뭔가 가르치려고 하고, 모든 걸 교리교육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아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해줄 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교리교육보다 더 좋은 것은 어린이 미사 등에서 행하는 강론과 전례적 활동이라고 나 신부는 말하는데, 전례야 말로 가장 완전한 교리교육이라는 것이다. 사제나 사목자들이 성체성사나 다른 준성사, 성체강복, 십자가의 길 등을 아이들과 함께 바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들이 책상 앞에서만 배우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노 신부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듯이 밖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용산참사 현장 같은 곳에 데려가거나, 좋은 영화를 함께 보고, 촛불집회에도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회교리에도 접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믿을 교리도 중요하지만 사회교리는 아이들의 실제적인 생각과 생활을 복음적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별도의 봉사활동을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고 이 모든 세상과 만나는 활동이 다 교리교육의 범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여길 것을 주문했다.
물론 대구교구나 부산교구에서 청소년 교재를 만들고, "주교회의에서 <청년교리서>를 만드는 일은 고무적인 일이 틀림없지만, 교실에서 쓰는 교재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대안이 될 수 없다"며, 교실 밖으로 나간 아이들을 다시 교실로 데려오는 것보다, 교회와 사목자가 그들이 있는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사이버 공간에 있으면 사목자들도 사이버공간으로 들어가야 하며, 동네 공터에 있으면 그리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촛불집회에 가 있으면 사목자도 그리로 가야한다.
제도에서 자유로운, 교사들의 자발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청소년사목이 깊어지려면, 제도화되지 않은 교사들의 자발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삼삼오오 뜻이 맞는 교사들끼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그룹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항상 본당사제나 수도자가 관리하는 단체들만 선호한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발적인 소그룹들이 활동하도록 해야 하며, 제도권이 이를 통제하려고 막아서면 안 된다" 나우진 신부는 "뭐든지 교사학교니 뭐니 해서 제도권이 앞장서서 통제하고 규율하는 공부는 성과가 적다. 너무 제도가 자발적인 노력들을 압도해 버리면 모든 게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으로 남아서 창조성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돈보스코 성인도 제도적 마인드 문제 삼아
노 신부에 따르면, 돈보스코 성인은 '제도적 마인드'를 강력히 문제삼았다고 한다. 돈보스코 성인은 시간표와 규칙, 서열 등은 교육을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경고하면서, 교육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지꼴이 되어 집에 돌아온 탕자를 앙말 없이 끌어안은 아버지처럼,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지 않고 다 자랄 때가지 기다려주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위주의는 권한을 이용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함으로써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게 하지 못 할뿐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교육도 베어버린다"면서 권위주의에 빠진 사목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다 교회를 위해 하는것"이라거나 "다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라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과 청소년들의 인권은 당연히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목자의 태도가 중요한데, 이는 사목자의 인간적 성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청소년사목을 위해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자하고, 청소년들이 혹할만한 이벤트를 만들어 가수를 부르고, 술 사주고 해도, 청소년들을 잠시 교회로 불러들일 수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게 정말 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울지는 의문이다."라며 일회성 행사 위주의 사목관행을 비판했다.
노우진 신부는 "마음이 있는 사람부터 먼저 아이들과 함께 지내려고 하고, 아이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절실하다"며, 우리 사회의 아이들의 얼마나 불쌍한지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청소년들을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철 없는 것들'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 그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음을 알아채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4.19학생혁명 대도, 5.19광주항쟁 때도 항거의 주축이었으며, 광우병 사태로 인한 촛불집회를 촉발시킨 것도 그들이었고, 월드컵응원을 위해 시청광장에 모인 사람들도 그 중심에 아이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사목자들은 '우리 곁에 아이들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는 가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인디고서점 등에서 배워야
노우진 신부는 <정세청세>,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등의 책을 보여주면서, '인디고서점'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인문학 강좌를 열고, <인디고+ing>라는 잡지를 만들어 아이들이 생각하고 쓰고 행동하게 만든다면서 교회가 이런 노력들을 따라 배울 것을 요구했다. 아이들은 좋은 교사를 만나면 얼마든지 배우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가 좋은 교사가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아마도 교회 안에서 성령이 움직이신다면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한편 요즘 사목자들 가운데, '또래사목'이라는 이름으로 똑똑한 아이들을 골라서 또래집단의 지도자로 양성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았는데, 사목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아이가 바로 내가 하느님께 데려가야 할 그 아이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또래집단에서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이들도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즉, 시스템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좋은 역할을 수행하는 아이들이 나오길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사목자 자신이 프로그램이 되어야
물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사목자가 절실하다. 노우진 신부는 결국 "사목자 자신이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앙은 삶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므로 사목자 자신이 어떤 신앙의 상태에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도 단순히 입시문제 때문이 아니라, 우리교회의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 아이들이 성당에 가고 안 가고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입시를 신앙보다 우선하면 당연히 아이들의 신앙을 입시를 위해 쉽게 희생시키는 법이다.
결국 사목자 자신이 '매체'가 된다는것, 나를 하느님께서 쓰고 계시며, 그게 아이들에게 전달될 때 신앙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목자 자신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깨진 독 같은 사목자 자신을 받아주고 기다려주고 사랑했음을 아이들이 알게 한다면, 아이들 역시 자신이 부족한 그대로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노우진 신부는 사목자는 하느님다와야 하는데, 그것은 곧 '자비로와야 한다'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목자나 교사 '윤리도덕적 모델'이 되는 게 아니라,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 충실히 머물고 있는' (faithful)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프로그램을 돌리거나 교육을 해야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노 신부는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정해체와 개인화 경향을 위기이면서 기회라고 말한다. 이 상황에서 옛 위계질서가 깨졌고, 가정 안에서 가족구성원들 사이가 평등해졌다고 보면서, 우리 교회 역시 아이들을 '나이 어린 것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가족이 가족같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는 더욱 '가족같은 분위기'를 가져야 한다며, 현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부모는 부모끼리 전례에 참석하지만, 가족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함을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노우진 신부는 돈보스코 성인의 오라토리오(Oratorio)를 설명하면서, 물리적 환경에서나 내 자신의 심리적 차원에서나 집-학교-운동장-본당의 네 가지 요소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을 하더라도 편안하고, 뛰어놀 수 있으며, 배우고, 기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내면적으로도 감싸주고, 자기 나름의 규칙도 있어야 하며, 자유롭고,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현대의 사목자는 '치유자'의 역할도 수행해야 함을 덧붙였다.
결국 노우진 신부는 청소년사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를 스스로 양성하는 사목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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