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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1 장
아나데마 (3)
[주: 로마서 101장 강해 노트를 인터넷에 텍스트로 올라온 자료와 책을 대조하면서 정리하고 있는데 인터넷 자료에는 책으로 인쇄된 내용과 상반되게 적어놓은 부분도 더러 있고, 오류가 꽤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 유튜브의 음성 설교를 들으면 그런 오류는 없을 거라 생각될 수도 있는데 오디오로는 한쪽 귀로 듣고 저쪽 귀로 빠져나가 버리는 내용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필자는 김성수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동영상으로 여러 번 들었다. 초기에 김목사의 성경해석 체계를 접했을 때는 그의 교리 신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 줄줄이 설사(?)한 것으로 회고되는데, 그걸 여러 번 듣고, 이제 그의 신학체계가 상당한 수준 시계 범위 안에 들어오고 이해가 되는 단계에 들어섰다. / 구구절절이 내용을 음미하면서, 또 인터넷 여기저기서 원어를 뒤지고, 원문 단어를 보충 삽입하면서 로마서 강해 노트를 정리하는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서 느끼는 것은 역시 필자가 내용을 이해하면서 손으로 직접 문구를 다듬고 고치면서, 그리고 김목사의 문장과 어투를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게 고치고 다듬으면서, 조금이나마 격조 있는 강해 내용이 되도록 문장을 고쳐가는 작업 과정에서 그의 신학 해석이 더욱 명료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이아몬드 보석 같은 그의 신학적 가르침이 흙먼지 속에 굴러다니는 것 같은 원문을 격조 있고 깔끔하게 다시 정리된 글로 전해드리고자 애를 썼다. 그러한 일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강해노트를 정리하면 할수록 그런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열심을 부어주셔서 이제 막바지 강해설교를 정리하는 시점에 다가서고 있다. 처음부터 필자가 하고 싶어서 열심을 낸 것도 아닌데 해나갈수록 더욱더 열심을 내게 하신 것은 주님의 손길이라 여겨진다.]
(요일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아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 ‘아브, אָב’ = ‘아버지, 성전’ / 내 안에 그 진리를 갖고 있으면 그게 아버지이다. 그 진리가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 내가 그 진리를 누군가에게 전해줘서 그가 아들로 탄생되면 나는 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가 되고 아버지와 아들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요일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처음부터 들은 것 = 아버지의 그 일곱 언약. (처음부터 = ‘아르케, ἀρχή’, ‘베레쉬트, בראשית’) / 그 일곱 언약을 너희 안에 마음으로 가져라. = “율법, 성경을 마음으로 가져라, 간직해라.” 그걸 그냥 행위로 도덕과 윤리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것은 [‘아파르, עָפָר, 티끌’]이다.)
(요일2:25-27)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그 진리가 약속이고, 그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걸 가지고 있으면 산 것이다. 그게 영원한 생명이다. / ‘기름 부음’ = [‘크리스마, Χρισμα’]. / ‘크리스토스, Χριστός’가 되면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된다. / 그 기름 부음이 내 안에 거하면 (내 안에 거하는 것이 그리스도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인.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27절) -> 내가 그걸 가지면 아무도 우리를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다. 그걸 마음으로 가지면 그때부터 구약 레위기의 수많은 율법 조항이라든지, 이해도 안 되던 묵시서의 내용들이 그냥 진리로 이해된다. 그게 내 안에 있어서 이제 보는 눈이 생겼다. 내 안에 안경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그것은 이거야!’라고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 -> ‘더 이상 성경 말씀 안 읽어도 된다. 설교를 안 들어도 된다.’ 이런 말이 아니라, 더 이상 ‘이게 진리이다.’라고 입증할 과정을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 / 진리를 이야기해 주면 ‘당연히 그런 거죠. 마땅히 그렇죠.’ 하고 내 안에 있는 그 印이, 그 기름 부음이 나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印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기름 부음이다. 그게 그리스도이다. 그 그리스도는 진리이다. 말씀에서 ‘그 진리가 우리를 가르친다’고 한다. / 인과 지팡이를 내가 담보물로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성령, 그 진리를 내가 내 안에 마음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면 산다는 말이다.
아들을 시인한다는 것은 아들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게 [‘아르네오마이, ἀρνέομαι, 부인하다’]라는 말이다. / 아들의 말을 그냥 율법으로 이야기해버리면 그게 아들과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다. / 두 증인은 아버지와 아들인데 그 둘이 한 말을 해야 올바른 증인이 된다. 율법과 신약의 진리는 하나이다. / 아버지의 말과 신약의 말이 다르면 증인이 될 수 없다. 엇갈린 증인이 되면 그게 적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17장 -> “왜 아버지와 아들을 둘로 나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인데.”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가 전부 그 내용이다. / 아버지와 나는 하나, 너희와 나도 하나, 아버지와 너희도 하나이다. / 두 증인은 항상 같은 말을 해야 한다. 위의 것과 아래의 것은 항상 하나로 연합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게 진리이고, 복음이다.
성경은 그 ‘기름부음’을 ‘처음부터 들은 아버지의 말’이라 하고, 그게 곧 말씀이다. 일곱 말 = 생명. / 그것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것이 지팡이가 되어 다음부터는 일일이 안 가르쳐줘도 된다. 대단한 성경 지식이나, 무슨 조직신학적 이해 그런 것 없어도 된다. 알맹이만 안에 갖고 있으면 된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사람의 말이고 껍데기이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성경 또한 아래의 말로 써준 것이다. 성경은 모음도 없이 쓴 것이니 소리내어 읽으라고 준 것도 아니다. 소리를 내면 그 즉시 진리가 아니다. / 아래의 말로 가르치는 내용을 여러분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헬라어, 히브리어, 수메르어, 라틴어, 아람어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진리는 올바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런 것에 욕심을 부리는 것을 지적 허영이라고 한다.
내가 집에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는데 아내는 관심이 없다. 구약 성경 전체를 노트에다가 한 줄, 한 줄 붙여서 개인 주석을 만들고 있다. 한 자, 한 자 파자해서 관련 성구도 찾아 넣어 나중에 그것만 갖고 다니면 되게 만들고 있다. (주: 이건 엄청난 자산이다. 가보로 소장되고 있을 것이다. 이게 공개되는 날이 오면 그때에는 기독교계에 큰 센세이션이 불어닥칠 것이다.) / 그런데 혼자 하기가 힘들어서 히브리어 한 절씩 프린트해서 아내에게 노트에 붙여달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까 거꾸로 뒤집어서 붙여놓았다. 히브리어를 잘 몰라서 그런 건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모르면 어때? 내 말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 상관없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지금 히브리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사람 중에 몇 %가 예수를 믿는가? 헬라어를 국어로 쓰고 있는 그리스 사람 중에 기독교인이 몇 %인가? 그게 왜 중요한가?
다말이 뱃속에 씨를 잉태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묻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말 못하면 죽는다! 그것도 불에 태워서 죽인다.” 그때 다말이 시아버지의 도장과 지팡이를 내놓는다. 그랬더니 시아버지가 심판을 못 한다. -> 심판(審判)이 지나간 것이다.
만일 다말이 시아버지가 보낸 염소를 맡아 놓았다가 시아버지가 와서 물었을 때 그 염소를 내놓으면서 “이게 당신이 나에게 준 것입니다.” 했다면 다말은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염소는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다. 그건 희생 제사의 제물이다. 그런데 도장과 지팡이는 그 주인의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준 게 이거잖아요? 이것밖에 없어요.” 하고 내놓으면 시아버지는 다말을 심판할 수가 없다. 자신이 준 씨가 맞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다들 내 안에 진리의 씨를 담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내 안에 진리가 있다. 나는 복음을 이해했다.” / 그런데 그 씨는 율법의 씨일 수도 있고, 진리의 씨일 수도 있다. 여러분 안에 담고 있는 씨가 율법의 씨라면 여러분은 그 남편에게 염소 새끼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열심히 희생 제사만 드리는 자기애적, 자기 헌신의 열정 같은 것이다. 그게 성전 안에서 드리는 희생 제사. 염소이다.
주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자기 왼편의 염소들에게 “너희들은 밖으로 나가서 슬퍼하며 이를 갈아라.” 그러자 염소들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를 모른다고 하십니까?” 하고 따진다. 하지만 주님은 “그래, 그게 희생제물 아니냐? 그게 염소잖아? 나는 너희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 하신다.
양들에게는 뭐라고 하시는가? 그 양들이 주님에게 “주님,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하고 물으니, 주님은 “너희들이 저 불쌍한 소자(小子) 하나에게, 진리를 알지 못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소자에게 네 안에 있는 그걸 (주: 진리의 씨를) 줬으면 그게 나에게 한 거야!”라고 하신다. 그게 인(印)과 지팡이를 가진 사람들이다. 어줍잖게 염소라는 제물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 그분의 것, 그분이 나에게 준 것을 내놓는 사람들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나머지 하나 남은 빵, 목숨, 이런 것을 내놓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짜 살릴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그 사람 대신 가스실에 들어간다고 그 사람이 안 죽는가? 곧 죽는다. 그 과정에서 생긴 것은 먼저 죽은 사람의 가치, 만족밖에 없다. 인간들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 하나님은 그걸 주라고 한 게 아니다. 네 목숨 백 개 주어도 그것은 내가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가 진짜 살 수 있는 것을 줘야지” 말씀하신다. 그게 바로 ‘아나데마’의 삶이다. / 겉만 번지르르하게 자기 평판 챙기고, 칭찬 챙기는 그런 것 하지 말라. 진짜 진리가 되어서 하는 그런 일이 위대한 것이다. 그것도 모르면서 그냥 일만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서신서에 그 담보물이 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옛날 것이 나쁜 게 아니다. 거짓은 거짓을 새것으로 볼 수 있으면 그게 진리이다. /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생명이 죽을 것을 삼키면 된다.
(고후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보증으로” -> 담보물 = 인과 지팡이. 그게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인’이 성령이 맞다. 그걸 진리의 말씀, 복음이라고 한다. 그것은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율법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신 것은 참 지혜로운 것이다. /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 명령을 행해버리고,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 명령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심판은 거기서 일어난다.
(엡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증(保證): 印, 성령, 말씀 /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지혜로운 처녀들이 기름, 印, 보증을 준비하고 있었다. / 신랑이 왔다. ‘너, 내가 가지고 있으라는 거 가지고 있어?’ 기름을 내놓았더니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버렸다. 열 처녀? 성경에서 처녀는 굉장히 부정한 것이다. 남자를 알지 못하면 그 존재는 여자로 죽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자이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 그리스도, 어린 양을 내 남자로 맞아 신부(新婦)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집 안으로 들어가서 신부가 되고, 나머지는 처녀가 되어 남자가 누군지를 모르고 그냥 죽는다. / 그런데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남편, 그 기름, 그 인, 그 담보물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이 준 담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