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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고목나무』
오래된 나무를 ‘고목나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크기는? 그것의 개념은 포괄적이고 애매하지만, ‘살아 있는 오래된 나무’를 말한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대략 수령은 100년 이상, 한 아름 이상의 크기를 기준으로하며, 주변에서 흔히 보는 고목나무를 제외하면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보호수’와 시·도지사 또는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기념물과 ‘천연기념물’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목나무 중에서 조선 궁궐 안에 있는 나무를 주로 다루는데, 저자는 그것들을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기도 하지만, 숙종 연간에 씌어진 궁궐도인 ‘동궐도’즉 창덕궁과 창경궁의 고목나무를 중심으로 살폈다고 한다. 정궁인 경복궁은 고종 때 대원군이 중건하였으나 고목나무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의 궁궐은 맨 처음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지은 10년 후 태종 5년(1405) 離宮으로 창덕궁을 짓고, 다시 80년 후 성종 15년(1484)에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창경궁은 일제가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꿔 동물원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벚꽃으로 유명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수학여행을 갔던 기억이 난다. 조선 시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체제로 이어오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광해군 7년(1615)부터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경희궁도 새로 지었으나, 경복궁만은 복원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종때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이 ‘東闕圖’인데, 경복궁은 서쪽에 있다 하여 서궐이라 했으나, 궁궐도가 남아 있지 않다. 동궐도는 200년 전쯤인 순조 연간(1824년 혹은 1830년)에 알려지지 않은 화공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고려대본과 동아대본이 남아 있고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나는 아직 그림들을 직접 보지 못했으나, 처음 접하면 크기에 놀란다고 한다. 가로 576㎝, 세로 273㎝라고 하니, 학교 칠판보다도 더 크다. 그 속에는 540여 채에 달하는 전각과 나무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는데, 나무는 많이 생략되었지만, 모두 4,075그루가 있다고 한다. 이중 바늘잎나무(침엽수)가 862그루, 넓은잎나무가 3,213그루(79%)고, 나무 중에 소나무가 19%, 787그루로 가장 많다고 한다.
(동궐도는 고려대본과 동아대본이 남아 있는데 원래 천지인 3본을 그렸으나 1본은 사라지고, 인에 해당하는 고려대본과 천 또는 지에 해당하는 동아대본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나라에는 보호수가 얼마나 될까? 2022년 말 기준 1만 3,868 그루가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느티나무가 7,249 그루로 전체의 반이 넘고, 소나무는 1,765그루로 12.7%, 이어 팽나무가 1338그루, 은행나무가 768그루, 버드나무 574그루, 회화나무 363그루, 향나무는 235그루, 기타 순으로 전체 보호수종은 156종이며, 이것은 전체 고목나무의 1/2∼1/3 만이 보호수라는 이름으로 관리를 받는 셈이다.
흔히 건물의 기둥이라면 소나무를 상상하기 쉬우나 사실은 느티나무가 훨씬 더 많다. 강도가 소나무보다 두 배 강하고 잘 썩지 않아서 빗물이 들이치는 바깥쪽 기둥으로는 느티나무가 제격이다.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16개와 합천 해인사 법보전 기둥 48개 모두가 느티나무다. 그밖에 탁자, 뒤주, 장롱, 궤짝 등 가구가 느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주 많다.
창덕궁의 터줏대감이랄 수 있는 나무는 규장각(이문원) 뒤 향나무인데,이 나무는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하기 훨씬 이전인 고려대장경이 만들어지던 무렵(1270년경)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받침목에 의지한 채 겨우 늙은 몸을 버티고 있다. 키는 약 6m,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남기 위해 몸을 한껏 낮춘 모습이다. 속살은 모두가 탐낸 때문인지 아예 가운데는 텅 비었다. 동궐도 모습 그대로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반긴다. 태종 4년 임금이 향교동에 이궁을 짓도록 명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는 여기에 향교가 있었고, 이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매화는 紅梅와 白梅로 나뉜다. 홍매 중에 꽃잎이 분홍이고 여러 겹인 것이 겹매화다. 꽃잎이 붉고 겹겹인 것을 ‘萬疊紅葉’이라 하는데, 며칠 전 화명수목원에서 처음 본 것이다. 그전에 어디서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이름을 모르고, 그냥 홍매라고만 생각했던 것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古梅가 250여 그루 있다. 그중 약 90그루가 홍매고 45그루가 겹매, 만첩홍엽은 더욱 귀하다. 광주 전남대에는 大明梅가 있는데, 임란 후에 書狀官으로 임명된 고경명의 손자 고부천이 명나라에 갔을 때 명 희종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 하나가 매화 화분이었고, 그것을 고향인 담양에 심었고, 후손이 전남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만첩홍엽과 모양과 색깔이 거의 같다. 내가 아는 고매로는 운문사 운문매가 있고, 통도사에도 매화가 있다. 산청 단속사지에는 ‘政堂梅’라는 아주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는데, 2010년 처음 찾았을 때 수령이 61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니, 지금은 626년이 되었다.
뽕나무는 고목인 경우가 잘 없지만, 창덕궁 후원에 천년기념물 제471호인 늙은 뽕나무가 있다. 둘레가 한 아름 반이나 되고 키가 12m며, 나이는 400살로 알려져 있다. 뽕나무는 궁궐에서 親蠶禮를 행한 흔적으로, 세종 5년(1423) 창덕궁에 1천여 그루 뽕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친잠례는 왕비가 직접 참여하는 의식으로 후원에 ‘採桑壇’이란 단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채상단의 규모는 둘레가 2장 3척, 높이가 2척 7촌으로 성종 8년(1477), 처음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잠은 농업과 함께 ‘農桑’이라고 하여 누에치기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던 것인데, 우리나라의 양잠은 삼한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동명왕, 백제 온조왕, 신라 박혁거세 때도 누에치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려와 조선도 비단의 수요가 늘자 생산을 늘려야 했는데 신흥 귀족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비단 수요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태종 때에는 집집마다 뽕나무를 심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창덕궁에는 채상단 만 있지 않고 ‘大報壇’이라는 단도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00년도 더 지난 숙종 30년(1704), 명나라가 원나라에 망했음에도 명나라 신종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시설이었다니 쉽게 이해가 가지가 않는다. 숙종 이후 영조, 정조와 후대까지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대보단 사방에는 낮은 담장을 두르고 남쪽에 冽泉門과 拱北門을 두었다. 공북문 안쪽에 창덕궁의 더줏대감이랄 수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위엄있게 서 있는데, 수령이 400년은 족히 되었다고 한다.
〈고려가사〉에 ‘머루랑 다래랑’이라고 할 때 그 다래나무가 대보단 북쪽에 있는 萬世誦恩(대보단에서 제사 지낼 때 임금이 머문 곳)이라는 아담한 건물의 담장을 따라서 천연기념물 제251호인 다래나무가 한 그루 있다. 다래나무는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때부터 있던 나무로 보인다고 하는데, 옮겨 심은 것인지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600년이 넘었다. 태종이 다래를 따 먹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연산군은 이를 좋아했던지 ‘서리 맞은 다래를 따서 들이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괴팍한 성격만큼이나 좋은 것을 찾기도 했던 모양이다. 완전히 익은 다래는 그 맛이 일품이며, 날로 먹기도 하지만 과일주로 널리 이용되고 꿀에 넣은 다래 정과는 우리나라 전통 과자로 지체 높은 분들이나 맛볼 수 있는 간식거리였다.
다음은 이 책 【2장】이랄 수 있는 昌慶宮의 나무 이야기다.
창경궁은 조선 9대 성종이 즉위하면서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궐로 성종은 세 분의 대비를 모셨는데, 7대 세조의 비 정희왕후(할머니)와 세조의 장남이었으나, 일찍 죽은 형 덕종의 비 소혜왕후(큰어머니), 8대 예종이 일찍 죽었으므로 형수 인순왕후 등이었다. 그러나 선조 때 다른 궁궐과 함께 불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일부가 불타기도 했으나, 복원과 중수를 거듭하다 1910년 한일합방 다음해 일제에 의해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동물원으로 이용되다 1983년에 복원되었다. 한때 2천 그루가 넘는 벚꽃 나무가 있었으며, 현재의 창경궁은 22만 2,000㎢에 11만 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중 키큰나무가 100여 종 6,000여 그루고, 작은키나무는 80여 종 5만여 그루에 이른다. 또 3만여 그루가 철쭉과 산철쭉이며, 고목나무는 9종 35그루인데, 버드나무가 10그루, 소나무가 9그루, 회화나무, 느티나무, 백송 순이다. 뽕나무와 돌배나무, 주목, 향나무 등도 있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1983년 우리 손으로 창경궁을 복원할 때 벚나무를 베어 내고 심은 매화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복사, 앵두 등이 즐비하지만, 그리 오래된 나무는 아니다.
창경궁 觀德亭 뒤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단풍나무가 아주 많은데, 일찍이 숙종은 〈觀德楓林〉이란 시에서 ‘하늘은 높고 서리 내리는 늦가을이 되니 눈에 띄는 단풍나무 숲은 비단에 수를 놓은 듯하구나’하고,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요즘은 중국단풍 나무도 곳곳에서 볼 수 있기도 한데 어째 영 아니다 싶기도 하지만, 단풍나무는 단풍나무, 당단풍나무, 신나무, 고로쇠나무, 복자기 등을 아울러서 말하는 것이다. 신나무는 잎이 셋으로 갈라져 길고, 복자기는 잎이 삼출 겹잎으로 잎 모양이 단풍나무 잎과는 전혀 다르다. 고로쇠나무 잎은 개구리 발모양이고, 단풍과 당단풍은 잎이 갈라지는 특징이 있고, 손가락 수보다 많고 가늘고 길다.
백송은 밀양출신 동문의 상징이기도 한 백송, 창경원에는 고목인 백송이 3그루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 어느 교사가 기증했다고 전해지는데 임업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1935년경에 심어진 것이란다. 백송은 어릴 때는 껍질이 청록색이다가 나이가 들면서 하얗게 된다. 사람과 닮았다고 할까. 백송은 원래 중국 북서부가 원산지라고 한다. 어느 사신이 가져온 것일 것이다. 백송은 흔하지 않다.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안, 서울 수송동 조계사 경내, 경기 고양과 충남 예산, 경기 이천 등에 고목 5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느티나무는 홀로 자랄 때는 시골(내 고향 알개실도 마찬가지) 당산에서 보듯이 가지를 옆으로 뻗어 樹冠을 넓히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금곡동 청소년 수련관 앞에는 여러 그루라 모두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다산은 〈槐蔭鞦遷(괴음추천)〉이라는 시를 남겼다.
느티나무 큰 가지 방초 언덕에 가로로 누워라
그넷줄을 드리우니 두 가닥이 가지런한데
바위 사이로 번개처럼 스처가는 게 두렵고
하늘 밖의 푸른 구름 나직함도 언뜻 보이네
혜원 신윤복의 〈추천도〉를 보고 지은 시일 것이다. 槐는 회화나무를 말하기도 하지만 비스듬히 누워있다면 느티나무로 봐야 한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창경궁은 대비를 모시기 위한 궁전이지만 歡慶殿만은 왕과 세자를 위한 공간이다. 11대 중종과 비운의 소현세자(효종의 형으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와 독살설로 죽은)가 이곳 환경전에서 죽었다. 중종은 대장금을 조선 시대 의녀 중에서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맡겼다. 환경전 뒤 뜰에는 봄에는 화사하게 꽃이 피우고, 여름에 열매를 맺는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다. 1983년 창경궁을 복원하며 심었겠지만 대장금의 간절한 바람을 기리고 있다. 살구씨는 예부터 약재를 썼기 때문이다.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 왕은 세자를 불렀다. 처음엔 아비인 임금을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자결을 명했다. 신하들의 간절한 만류로 실현하지 못하자 뒤주를 가져오게 해 그 속에 가두었다. 야사에는 영조가 자기손으로 뒤주에 못을 박았다고 하며 그 위에 풀을 두껍게 바르게 했다. 초여름 무더위에 27살의 청년 사도세자도 버티기 어려웠다. 결국 8일만에 세자는 죽었다. 뒤주를 놓았던 장소가 문정전 앞, 선인문 안, 승정원 등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정황으로 봐사 선인문 안쪽에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당시의 현장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벌써 한 줌의 흙이 되었으나 묵묵히 아직도 현장을 지키는 나무가 있다. 선인문 팡 금천에 걸친 작은 돌다시 곁의 늙은 회화나무다. 나이 300살이 넘은 나무지만 당시는 50살 남짓했던 이 나무는 〈동궐도〉에도 생생히 살아 있다.
원래 회화나무는 20m이상 자라지만 4m 남짓한 이 나무의 속은 완전히 썩어버려 지팡이에 의지한 채 구부정한 허리를 겨우 버티고 있다. 속이 썩으면서 몸통은 3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 줄기의 같은 나무다. ‘속이 새까맣게 탄’것일 게다. 다만 거기서 50m 쯤 떨어진 명전전 앞 회화나무는 역시 300년이 되었음에도 곳곳하게 차늘로 치솟아 있다.
이제부터는 【경복궁】【덕수궁】【종묘】의 나무들을 살펴볼 차례다.
당초 경복궁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를 연지 3년만인 1395년 완공한 궁궐이다. 조선의 正宮이며, 法宮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200년이 지난 1592년 다른 궁궐과 함께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270년 후인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에 의해 330동 720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중건하면서 정문인 광화문, 홍례문. 근정전,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 자장전 등에 나무를 심지는 않았다. 자객이 숨을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반면 고종이 따로 거쳐했던 건천궁과 서재인 집옥재, 휴식 공간인 향원정,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연회를 열었던 慶會樓, 제례에 쓰인 태원전 등에는 나무를 심어 지금도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재건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나무들로 기초공사 작업 편의를 위해 모두 베어냈으니 안타까움을 더한다. 또한 일제가 1929년 조선물산공진회 이름으로 조선박람회까지 열면서 전각 중건 때 심었던 나무들도 거의 다 베어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경복궁에는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들이 여럿 있지만,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심었거나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복원하면서 심은 나무들이다. 현재 키큰나무가 76종 2,600그루, 키작은 나무는 40종 4000여 종이 있다.
세종 5년(1423)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 “뽕나무는 경복궁에 3,590그루, 창덕궁에 1천 그루, 밤섬에 8,280그루 있으니 누에 종자 2근 10량을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내용이 있다. 경복궁 전체 면적이 43만 3천㎡이니, 121㎡마다 뽕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던 셈이다. 전각과 공간을 빼고는 빈터마다 뽕나무를 심었다. 영조 때에 뽕나무를 재건하고자 했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경복궁 복원 뒤로 재건을 미룬 것으로 볼 때 그렇게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경회루 연못 둘레에는 버드나무가 있고 영추문 쪽에는 왕버들도 있다. 키 20m, 줄기 둘레 4.2m로 경회루 서쪽 금천에 자라는 버드나무는 경복궁에서 가장 굵지만, 수령은 고작 100년 남짓이다.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심은 나무라면 지금 600년이 넘겠지만, 지금 경복궁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나무라야 향원지 서쪽 집옥재 앞 빈터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고작 130년 정도밖에 안 된다. 키 12m로 두 아름 넘는 이 느티나무는 주변을 압도하면서 잘 자라고 있다.
지난해 연말 이재명 대통령은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청와대에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명당으로 친다. 또 청와대에는 경복궁에서 가장 오래된 주목 1그루가 있다. 이것은 1280년경 심어졌다고 하니 나이가 740살이 넘는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세 번이나 오늘날 서울인 南京에 행차했다고 하고, 청와대 일대가 남경의 행궁이 있었다고 추정되므로 충렬왕 행차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경복궁 후원이 청와대로 사용되면서 청와대 지형은 수없이 변했으나, 청와대 뒷산인 북악 일대는 원래부터 화강암이 많았고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인 화강편마암까지 바위가 많다.
청와대 한가운데 푸른 잔디가 깔린 곳의 넓이가 약 3,300㎡로 고종 때 궁궐수비대가 훈련하고 과거 시험을 보던 광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 가축사육장과 온실부지로 이용되다가, 1968년 잔디를 깔고 각종 야외행사를 하는 장소로 조성되었다. 이 녹지원에는 키 15m, 줄기 8개인 반원형 모양의 盤松 1그루와 그 옆에 소나무 4그루가 있는데, 이들이 녹지원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반송은 헌종 10년(1844)경 심어진 것으로 짐작되고 나이가 대략 180년에 이른다.
이제부턴 덕수궁과 종묘에 있는 나무들을 살펴본다. 德壽宮은 광해군이 즉위식을 가진 곳으로, 한 때 慶運宮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5년 건천궁에서 민비시해사건이 터지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른바 俄館播遷을 단행했다. 경운궁을 재건해 1897년 2월 정식궁궐로 삼고 대한제국을 여기서 선포했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13년 뒤 제국은 망했다. 덕수궁에는 현재 큰키나무 45종 1,300여 그루, 키작은 나무와 넝쿨나무가 50여 종 있다. 덕수궁은 9만㎡에 불과해 다른 궁궐에 비해 면적도 적고 나무도 많지 않다.
화명수목원에도 많지만 가로수와 정원수로 널리 심는 칠엽수는 일본이 원산지인 것과 유럽이 원산지로 흔히 마로니에라고 부르는 가시칠엽수가 있다. 둘은 수만 리 떨어져 있지만, 커다란 잎이 7개씩 달리는 모양은 비슷하다. 다만 열매의 표면이 매끄러운 것은 일본칠엽수, 성게마냥 가시가 숭숭한 것은 유럽칠엽수로 구분할 수 있다. 동성로 마로니에 공원 나무도 일본칠엽수다. 유럽칠엽수가 덕수궁에서 자라는 데는 사연이 있다. 현재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쓰이는 덕수궁 석조전은 10여 년 공사 끝에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1910년 완공되었다. 이때 조경공사에 써달라고 네덜란드 공사가 묘목을 전해 준 것이라고 하나, 당시는 네덜란드 공사는 부임해 있지도 않았지만, 이미 그 전 1907년에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는 등 네덜란드와 교류했던 것에서 조선에 대한 연민으로 유럽 나무를 선물해 주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쇼군의 문양을 사용했으나, 우리는 아직 문양이 없었는데, 19세기 말 우리말로 이름을 정할 때 문양을 도입했다. 이때는 오얏이 아닌 紫桃였다. 자도가 변한 것이 자두다. 한자음 李花는 배꽃인 梨花와 혼동하여 대한제국 문양을 배꽃이라고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오얏꽃은 꽃잎 다섯 장이 서로 떨어져 있으나 배꽃은 다섯 장이 서로 붙어 있다. 따라서 덕수궁에서는 이 둘이 혼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덕수궁의 역사로 본다면 100년이 넘는 오얏나무 1그루 정도는 있어야 할텐데, 없고 다만 심은 지 10년 남짓한 오얏나무 3그루가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 등나무다. 화명초등학교 운동장에는 1945년 개교하면서 심은 등나무가 있고, 가덕도 지양곡 휴게소에도 등나무 그늘이 있다. 범어사 계곡은 전국에서도 유명한 등나무 군락지다. 전통과 현대의 서양식 건물이 뒤섞인 덕수궁에도 등나무가 있는데, 등나무는 궁궐과 어울리는 나무가 아니다. 조선 시대는 등나무나 담쟁이덩쿨로 대표되는 藤蘿(등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바람에 굽히지 않는 대나무와 잎이 늘푸른 소나무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 한결같다는 상징으로 여기 두 나무를 君子라고 한 반면에 남에게 의지하는 등나무는 멸시의 대상인 소인배로 보았다. 덕수궁 이외 궁궐에서 등나무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덕수궁 석조전 앞 등나무는 넓다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요즘은 분홍색 꽃이 한창일 터이다.
宗廟는 넓이가 18만㎡가 넘는다. 1395년 남북으로 긴 타원형으로 조성되었을 때 氣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남쪽을 조산했으며, 음택으로서는 최고의 명당이라고 한다.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는 국가무형문화유산 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자랑거리다. 조성 당시에는 소나무가 주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소나무 대신에 잣나무와 갈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지금 자라는 나무는 87종 1만 3,349그루에 이르는데 큰키나무는 3,028그루 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키작은 나무들이다.
종묘에는 전나무가 810그루, 갈참나무가 780그루가 있는데, 갈참나무는 줄기 둘레 3m가 넘는 아름드리가 있는가 하며 2m넘는 것이 60여 그루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심은 것들로 ‘가을참나무’라고 부른 것이 변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넓은 잎나무가 많고 소나무가 사라진 데는 이유가 있다. 넓은 잎나무를 지속적으로 제거해주지 않으면 소나무는 광합성을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사라지게 된다. 종묘의 숲은 혼란스런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과 같이 소나무가 거의 없는 숲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외대문)을 들어서면 방형의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 가운데 ‘종묘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望廟樓가 있다. 연못 가운데 동그란 작은 섬이 있고, 그 가운데 향나무 고목 1그루가 다소곳 자리잡고 있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나무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속살은 이미 오래전에 섞어버렸지만, 줄기 둘레가 한 아름이 넘으며 키가 10m가 넘고 비교적 건강해 보인다. 논란은 있지만 이 향나무는 광해군 즉위년(1608) 궁궐을 복원할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되므로 수령 400년이 넘었다.
처음에 소개하지 못 했으나 이 책의 저자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1963년 서울대 임업과를 졸업하고, 산림과학원 연구원, 경북대·전남대 교수를 거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나무에 관한 여러 저서를 냈으나 다 읽지는 못했고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는 애들이 사줘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 표지에는 김해박물관 가야학 아카데미에 나가 수강할 때 박상진 교수로부터 직접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