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섬 마을 외나무 다리에서
거센 물살이 어지러워 외나무 다리를 건너보지 못했다.
희방폭포에서
이른 아침 소수서원 가는 길
죽계천 징검다리
단발머리 여고 단짝 영미와
선비촌 고샅길 원두막에서
고샅길에서
'해우당' 고택 한옥체험 숙박지/안방과 건넌방을 썼다.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낙풍의 가옥.
무섬 마을에도 '해우당'(그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있었다.
대청에 앉으면 한여름에도 시원하겠다.
부석사 올라가는 길, 은행 가로수
희방사 올라가는 길의 초록 숲에서
8월 11일 - 12일, 여고 친구들 여행.
이번 여행지는 영주 일원이다.
총무 미경이의 꼼꼼한 준비로 100점 만점에 100점인 알찬 여행이었다.
맛과 멋이 어우러진!
수도리 무섬마을의 강둑, 모래톱, 그 모래톱에 반짝이던 햇빛,
하늘 파아래 더욱 흰 뭉게구름, 산들바람 그리고 350년 전통의 마을...
무섬마을은 처음 가본 곳인데 고향에 든 듯 반가웠다.
자긍심 있는 마을 사람들이 개발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지켜낸 덕분이리라.
물돌이 마을이라 강둑 아래 마을이 있었다.
강둑을 아주 좋아하는 나는 강둑 거닌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여름 방학식 하는 날 쫓아내려가면 개학 전날이 되어서야 올라왔던 내 고향 오산리 177번지.
식전, 오전, 오후 하루 세 번씩 소를 먹이던 곳이 낙동강변 강둑이었다.
강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을 참 좋아하는 것은 고향의 그 정서 때문이리라.
외나무다리의 정겨움, 우리들에겐 정겨움이겠지만 30년전,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진
물돌이 마을안에서 외부로의 유일한 통로, 절체절명의 삶의 연결 고리였으리라.
끝까지 건너가보고 싶었지만 거센 물살이 어지러워 관두었다.
점심은 마을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었는데 정갈한 손맛이 느껴졌다.
소백산 희방사는 우리 아이들 어릴적 연달래 축제 때와 15년 전 근무지 항구초등 직원여행
갔던 곳이다.
풍기에서 출발하여 희방사로 넘어왔던 산행이었는데 희방사 사하촌에 도착하니
달빛이 교교했다. 직원 중 한 사람이 발목을 삐어 길이 더디었던 기억이 난다.
달빛 산행, 콧노래 흥얼거리며 걸었던 추억의 소백산. 옛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희방폭포는 장엄했다.
초록숲 속의 흰 폭포줄기는 승천하는 용인 듯. 외경심으로 그 앞에 섰다.
희방사 경내는 적막하리만치 고요했다. 여러 번 째인데도 처음 처럼 낯설었다.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고 콸콸거리는 계곡을 끼고 내려왔다.
말로만 듣던 영주 한우 구이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그런 맛은 난생 처음이다.
가족들 생각이 났다. 돌아가는 길에 어머님께 꼭 사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주 선비촌 한옥체험 숙박지는 특별했다. 난생 처음 경험한 한옥 체험...
'해우당' 의금부도사를 지냈다는 김낙풍의 저택이라고 한다.
대청마루에 앉은 우리들은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안방마님이 되었다.
안방과 건넌방 두 칸을 빌렸다. 인견의 고장 답게 침구류가 전부 인견이다.
새벽 2시 30분에 깨어 바라보았던 장독대에 내려 앉던 달빛이란!
이른 아침, 소수서원의 성리학 향기, 아침 햇살에 물비늘 반짝이던 죽계천,
남자라면 갓낫애까지 도륙을 냈다는 정축지변, 그후 230년이 지나서야 다시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는 순흥은 충절의 땅이었다.
부석사 오르는 은행 가로수 길과 무량수전, 선묘낭자의 전설이 깃든 '부석',
배흘림 기둥, 무량수전의 서방정토를 향한 아미타불, 무량수전에서 조망한 경내 풍경...
6년 전 여름에 아이들과 함께 왔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 그 자리에서 사진을 담았다.
'친구는 내 등의 짐을 함께 지고 가는 자'라는 인디언들의 말을 자주 생각한다.
1박 2일간 여고 벗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한 순간에 고정되었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차 속이 그득했다. 인견 제품과 쇠고기, 버섯, 고구맘 파이, 영주 사과 등
푸짐한 선물 꾸러미가 마음 더욱 넉넉하게 했던 여행이었다.
대구 효성여고는 3년간 단발머리에 자주색 가방 그리고 앞부분에 고무가 있는 검정 운동화가
특징이었다. .
점심시간이면 구름다리 밑의 연못에서 방송반원들이 틀어주던 팝송을 들으며
애상에 젖곤 했다.
가을이면 국화향기가 가득하던 교정에서 문집전을 열었다.
남학교의 인기투표에 종종 우리 학교가 상위로 올랐던 것은 문집전에 몰려드는
남학생들의 수를 보면 알수 있었다.
나의 문집 '한조(겨울새,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뒷장에 방명록을 남겼던
어느 남학생의 수줍은 필체를 기억한다.
청소시간이면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했던, 가을이면 나나무스쿠리의 노래를 들으며 우람한
꿀밤나무 아래서 꿀밤을 주웠던 아름다운 교정... 이젠 그 자리엔 아파트 숲이 자리하고 있다.
고3때 야간수업에 지친 우리들은 저녁 먹고 잔디밭에 모여앉거나 교정의 숲을 거닐면서
수다를 떨곤 했다. 여덟은 모두 3학년 4반이었다.
당시 유행어 '효고교장홍교장' 빠르게 말하기는 암만 연습해도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고 1때였다. 강당에 우리들 1학년을 모아놓고 눈물로 학력향상을 호소 하셨다.
당시 효고는 2류였었기에 연합고사 1회인 우리들의 학력에 교장님은 많은 기대를 하셨다.
아주 작은 키의 홍승항 교장님, 단상을 치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분의 손짓과 억양이 선하다.
여고시절 3년간 정들었던 자주색 가방을 추억하며 이 노래를 듣는다.
첫댓글 자운영만한 자유분방형 자유방임형이 있을까나? 아무데도 걸림이 없는 행운유수처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