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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시(尙州市)
○ 도남서원(道南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도남리 175번지
- 시 대 : 1606년(宣祖39 丙午)創建 1676년(肅宗2 丙辰)賜額.
- 제 향 : 정몽주(鄭夢周: 號圃隱 諡文忠 文廟配享).
김굉필(金宏弼: 號寒暄堂 佐郞 贈右議政 諡文敬 文廟配享).
정여창(鄭汝昌: 號一蠹 縣監 贈右議政 諡文獻 文廟配享).
이언적(李彦迪: 號晦齋 左贊成 贈領議政 諡文元 明宗廟 文廟配享).
이 황(李 滉: 號退溪 左贊成 贈領議政 諡文純 宣祖廟 文廟配享).
노수신(盧守愼: 號蘇齋 大提學 領議政 諡文懿 文簡).
유성룡(柳成龍: 號西厓 文衡 壬亂功臣 領議政兼都體察使 諡文忠
豊原府院君).
정경세(鄭經世: 號愚伏 吏判 贈左贊成 諡文莊).
도남서원은 상주시 도남리 175번지, 낙동강 무임포에 있다. 이 서원은 1606년(선조 39)에 창건하였고, 1676년(숙종2)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797년 (정조21)에 동서재를 세웠다. 이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871년(고종8)에는 국령으로 훼철되었으나 향토 유림에서 1992년 복원에 착수하여 4년간 역사 끝에 강당 등을 일부 복원하였다. 2002년부터 2년간은 유교문화권 정비사업으로 정허루 등이 복원되었다.
‘도남’이란, 정오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 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의 유학 전통은 바로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이 서원은 탄생하였다. 1605년 4월 22일, 전 주부 등 8인이 묘우를 세워 유현을 모시기로 발의하고 통문을 내었으며 5월 7일, 옥성서당에 모여 서원건립을 의결하였는데 회원은 60인이었다.
1606년 6월 25일, 연악서당 회의에서 낙동강 무임포에 서원 자리를 정한 후 12월 21일 상량시 오선생 위판을 봉안하였다. 사시 선생은 동방 유도를 재창하고 선창한 분들로,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선생 등이며 뒤에 추배되신 분으로는, 소재 노수신, 서애 류성룡, 우복 정경세 선생 등이 있다. 한 마디로, 도남서원은 영남의 으뜸 서원으로서 추로지향의 위상을 수백 년간 지켜주었다고 하겠다.
○ 흥암서원(興巖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702년(肅宗28 壬午)創建 1705년(肅宗31 乙酉)賜額
1716년(肅宗42 丙申)以御筆額.
- 제 향 : 송준길(宋浚吉: 號同春堂 左參贊 贈領議政 諡文正 文廟配享).
송준길 (宋浚吉)
1606∼1672(선조 39∼현종 13)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 어려서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업을 닦았다.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였던 그는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執義)로 기용되어 인조 말부터 권세를 잡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김자점(金自點)을 탄핵, 파면시키도록 하여 청서파가 집권하도록 하였다.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김자점이 청(淸)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좌절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여러 번 임관되었으나 계속 사퇴하다가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남인(南人) 윤휴·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제를 반대하여 기년제를 주장, 논란 끝에 승리하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665년 원자보양(元子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상소로 사퇴하였다. 뒤에 좌참찬 겸 좨주·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송시열과 학문적 경향이 같았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충현서원(忠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
- 지정번호 : 경북도 기념물 제52호(1984.12.19)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
- 시 대 : 1714년(肅宗40 甲午)創建 1789년(正祖13 己酉)賜額.
- 제 향 : 황 희(黃 喜: 號庬村 領議政 諡翼成).
김 식(金 湜: 號沙西 知中樞 諡忠簡).
옥동 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에 있는 서원으로 1984년 12월 1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
1518년(중종 13)에 방촌 황희(1363-1452) 정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백화서원(白華書院)으로 창건되었고, 1580년(선조13)에 현재의 서원에서 내를 건너 북쪽에 있는 신덕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해 봄, 가을로 향사를 지내왔다.
1714년(숙종40)에 사서(沙西) 전식(全湜 1563-1642)을 추가 배향함과 동시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으며, 1715년 경덕사(景德祠)와 강당을 짓고, 1783년(정조7)에 월헌(月軒)황맹헌(黃孟獻), 축옹(蓄翁) 황효헌(黃孝獻), 반간(槃澗) 황뉴(黃紐)를 추가 배향했다.
1789년(정조13)에 ‘옥동(玉洞)’이라 사액되었으며, 17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철폐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옥동서원은 상주의 백옥동 지명을 따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이라고도 한다.
1987년 청월루(淸越樓), 1991년 경덕사(景德祠)와 온휘당(蘊輝堂)을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경덕사, 학문 강론이나 유림의 모임과 행사장소인 강당, 향사 때 제수를 장만해두는 전사청(典祀廳),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雇直)과 화직(火直), 묘직(廟直)이 거처하는 고사, 화직사, 묘직사, 누각인 팔각정 등이 있다. 황희 정승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고 《갈천문집(葛川文集)》 등의 귀중한 필사본과 목판본을 소장하고 있다. 해마다 3월과 9월 상정(上丁:첫째번 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 옥성서원(玉城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632년(仁祖10 壬申)創建.
- 제 향 : 김득배(金得培: 高麗 政堂文學 諡文忠).
신 잠(申 潛: 號靈川子 高麗 牧使).
김 범(金 範: 縣監).
이 전(李 전: 縣監).
이 준(李 埈: 전弟 副提學).
김범(金範)
1512∼1566(중종 7∼명종 21) 조선 중기 학자. 자는 덕용(德容), 호는 후계(后溪)·동계(桐溪). 본관은 상주(尙州). 10세 때 시를 잘 지어 이름이 알려졌으며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나 사퇴했으며 그 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다. 이 해 조식(曺植)과 함께 조정에 들어가 학문·정치에 관해 진언한 바 있다. 성품이 고애하고 수양을 많이 쌓았으며 특히 주자학(朱子學)에 전력해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인조 때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고 상주(尙州)의 옥성서원(玉成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후계집(后溪集)》이 있다.
이전(李전)
1558(명종 13)∼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磵). 수인(壽仁)의 아들이고, 준(埈)의 형이다.
동생 준과 함께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퇴도(退陶)의 학설을 배워 주자서(朱子書)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병($이02病)한 그가 동생을 데리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급난도 急難圖〉라 이름하니, 당시의 명공·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歌詠)하였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 세마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때에는 지례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준(李埈)
1560년(명종 15)∼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수인(壽人)의 아들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천명을 모집하여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위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의 국정운영에서의 잘못 등으로 인하여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하여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를 베풀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하였으며, 그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각각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집권 서인세력이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의 일원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하여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당시의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속수서원(涑水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의성군 단밀면 속암리)
- 시 대 : 1657년(孝宗8 丁酉)創建.
- 제 향 : 신 우(申 祐: 號退齋 高麗 按廉使).
손중돈(孫仲暾: 號愚齋 右參贊 諡景節 淸白吏).
김우굉(金宇宏: 提學).
조 정(趙 靖: 奉常正).
○ 근암서원(近巖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689년(顯宗15 乙巳)創建.
- 제 향 : 홍언충(洪彦忠: 號寓菴 校理).
이덕형(李德馨: 號漢蔭 領議政 諡文翼).
김홍민(金弘敏: 典翰).
홍여하(洪汝河: 司諫).
○ 효곡서원(孝谷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 시 대 : 1685년(肅宗11 乙丑)創建.
- 제 향 : 김 충(金 冲: 號西臺 司成).
송 량(宋 亮: 號愚谷 主簿).
고인계(高仁繼: 司藝).
김광두(金光斗)
김충(金冲)
1513(중종 8)∼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화길(和吉), 호는 서대(西臺). 아버지는 전적 옹이다.
1551년(명종 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에 임명된 뒤, 태상주부·형조좌랑·감찰·춘추관·기주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54년 청홍도사(淸洪都事)가 되었으며, 1556년 함흥부판관이 되었다. 이어 직강·호조정랑·교감 등을 거쳐, 1561년 평택현령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곳에 작은 초막을 짓고 서대초당이라 이름하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67년 다시 호조정랑으로 관직에 나가 봉상시첨정·사예를 거치고, 이듬해 초계군수·사성 등을 역임하고, 1571년(선조 4) 선공감정이 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간소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 권력 있는 자들에게 이부(移赴)하지 않았다. 상주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대이문록 西臺異聞錄》이 있다.
고인계(高仁繼)
1564∼1647(명종 19∼인조 25) 조선시대 문신. 자는 선승(善承), 호는 월봉(月峰). 본관은 개성(開城). 예문관직제학 거(距)의 6세손. 1605년(선조 38)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枓)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박사(博士)를 지냈다. 동인(東人)으로 북인(北人)에 가담하기를 거절했다가 연서찰방(延曙察訪)으로 좌천되어 얼마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정랑(刑曹正郎)·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예안현감(禮安縣監) 등을 거쳐 45년(인조 23) 용양위부호군에 올랐다. 상주(尙州)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김광두(金光斗)
1562(명종 17)∼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 자는 여우(汝遇), 호는 일묵재(一默齋).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정경세(鄭經世)·이전(李#전09)·이준(李埈)·전식(全湜)·조정(趙靖) 등과 같이 함창(咸昌)·황령(黃嶺) 등지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 왜군과 맞서 싸웠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되었다.
○ 화암서원(花巖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682년(肅宗8 壬戌)創建.
- 제 향 : 김안절(金安節: 號洛涯 進士).
○ 연옥서원(淵嶽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702년(肅宗28 壬午)創建.
- 제 향 : 박언성(朴彦誠: 號樂志亭 進士 贈監察).
김언건(金彦健: 進士 贈監察).
강응철(姜應哲: 察訪).
○ 봉산서원(鳳山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 시 대 : 1708년(肅宗34 戊子)創建.
- 제 향 : 노수신(盧守愼: 號蘇齋 領議政 諡文懿 文簡).
심희수(沈喜壽: 號一松 左議政 諡文貞).
성윤해(成允諧: 縣監).
○ 운계서원(雲谿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711년(肅宗37 辛卯)創建.
- 제 향 : 신석번(申碩蕃: 號百源 掌令 贈吏叅).
신석번(申碩蕃)
1596(선조 29)∼1675(숙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연(仲衍), 호는 백원(百源). 선무랑 근(謹)의 아들이다. 상주출신. 정경세(鄭經世)의 문인.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41년에 대군사부(大君師傅), 1644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역임하고 효종 때 유일(遺逸)로서 천거를 받아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현종 때에도 사복시주부·공조정랑·상운도찰방(尙雲道察訪)·종부시주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1668년(현종 9) 이후로 진선(進善)·장령·사업(司業)의 벼슬에도 부임하지 않았고, 숙종 즉위년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79세로 병까지 들었으므로 역시 사퇴하였다.
이듬해 당상관에 올랐으나 교지가 도착하기 전 죽었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흠모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경학(經學)에 밝았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백원문집》이 있다.
○ 서산서원(西山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713년(肅宗39 癸巳)創建.
- 제 향 : 김상용(金尙容: 號仙源 右相 諡文忠).
김상헌(金尙憲: 號淸陰 左相 諡文正)
김상용
김상용(1561-1637)은 인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좌의정을 지냈던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는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조 작품에 〈오륜가(五倫歌)〉와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본관은 안동(安東).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교리(校理)·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나,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로 인해 한때 파직되었다. 서인(西人)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우두머리로 다시 등용되었다. 대사간·도승지(都承旨)·대사헌·대사성·대제학 등을 거쳐 예조·공조·형조·이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판서로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는데 화의를 극력반대하고 끝내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했다. 그로 말미암아 선양〔瀋陽〕에 잡혀가 3년간이나 있었는데 심문에도 끝내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귀국 후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를 잘 썼는데, 그의 서체는 동기창체(董其昌體)로, 그 필적은 《향천군정은묘갈(香泉君貞恩墓碣)》에 남아 있다. 시조 4수와 함께 《청음집(淸陰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
○ 충렬사우(忠烈祠宇)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 시 대 : 1709년(肅宗35 己丑)創建.
- 제 향 : 권 길(權 吉: 尙州判官).
정기룡(鄭起龍: 號梅憲 兵馬統道使 諡忠毅).
김종무(金宗武: 察訪).
- 別 祠 : 1708년(肅宗34 戊子)創建.
박 걸(朴 傑: 本州戶長).
○ 임호서원(臨湖書院)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함창읍
- 시 대 : 1693년(肅宗19 癸酉)創建.
- 제 향 : 표연말(表沿沫: 號?溪 大司諫).
홍귀달(洪貴達: 號虛白堂 左參贊 贈吏判 諡文匡).
채 수(蔡 壽: 號懶齋 大司憲 仁川君 諡襄靖).
권달수(權達手: 號桐溪 校理 贈都承旨).
채무일(蔡無逸: 號逸溪 獻納).
○ 청암사우(淸巖祠宇)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함창읍
- 시 대 : 1752년(英祖28 壬申)創建 合享 道溪 雅谷 兩精舍位版.
- 제 향 : 류 포(柳 砲: 縣令).
류달존(柳達尊: 縣監).
박 눌(朴 訥: 察訪).
이 겸(李 謙: 進士).
류종인(柳宗仁)
홍약창(洪約昌: 進士).
남 영(南 嶸: 郡守 贈左參贊).
정윤해(鄭允諧: 叅奉).
박성민(朴成敏)
이영갑(李英甲: 平安都事).
남근명(南近明: 縣監 贈吏判).
첫댓글 제춘님. 잘 정리된다면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국의 서원을 모아 보시지요~~.
현우님의 도움이 필요할텐테....좀 도와주소
류현우 님 고맙습니다. 아직 보완중에 있으며, 현재 전국을 비롯한 북한지역까지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주에 송준길을 모신 서원이 있다는게 특이하군요. 상주는 율우(율곡과성혼)의 문묘 배향 반대시 찬성했던 진사 신석정의 집을 헐고 고장에서 쫓아버릴 정도로 노론에 대한 반감이 대단 했었는데 말입니다..아마 정경세의 막내 사위란점이 많이 작용한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