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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경외/예배
제목 : 경외함을 잃지 않는 예배자
성경 : 삼상 6:13~21
찬송 : 338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609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삼상 6: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삼상 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삼상 6: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삼상 6: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삼상 6: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삼상 6: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삼상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삼상 6: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삼상 6: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우리는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한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모습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지나친 신비주의적 하나님 이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초자연적인 신비 현상으로만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지니면 성경을 대할 때, 초자연적인 사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됩니다. 평범한 신앙생황을 무시하고, 안정적인 가정생활이나 일상적인 사회관계에 소홀하게 됩니다.
√둘째, ‘지나친 인본주의적 하나님 이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로 성경을 대하면, 신비하거나 초월적인 내용을 일반 사회나 역사에서 상식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기준으로 해석합니다.
√셋째, ‘종교 혼합적, 종교 통합적 하나님 이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다른 종교나 과학적 지식과 비교 해석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이해를 일반화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의 요청에 의해서만 신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또한 이런 태도를 지닌 이들은 신들이 서로뿐만 아니라 인간 세계와도 소통하는 가운데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편파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가던 무렵 엘리가 대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을 때, 아벡에서 일어난 블레셋과의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군사 4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합니다. 이에 실로의 성막에 있던 언약궤를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하던 에벤에셀로 가져와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투에 나갑니다(삼상 4:1~4). 그러나 블레셋과의 2차 전투에서도 이스라엘 보병 3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하고 맙니다. 그뿐 아니라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언약궤와 함께했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모두 죽습니다. 이 전쟁은 주전 1100년경에 있었던 사건이며, 광야 생활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으로 성막과 언약궤가 분리된 크나큰 사건입니다. 언약궤를 차지한 블레셋은 그 궤를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유익이 있으리라 확신하며 아스돗의 다곤 신전으로 언약궤를 옮깁니다. 하지만 이 일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불행의 시작이 됩니다. 다곤 신상이 무너지는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 신의 궤’를 두려워하게 된 그들은 궤를 가드로, 에그론으로 이동시키지만,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이 가증될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언약궤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준비해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블레셋 성읍을 떠돌던 여호와의 궤는 마침내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공로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마땅히 임하셔야 할 곳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감격적인 상황 중에도 사람들의 방심과 교만은 또 다른 큰 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는 부담스럽게 여겨야 할 존재일까요? 기쁘게 맞아 가까이해야 할 존재일까요?
√ 기쁨으로 제사한 사람들(13~15절)
√삼상 6: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삼상 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삼상 6: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블레셋에 빼앗긴 언약궤가 약 4 개월 만에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 귀환 가정을 친히 주도하시는 가운데 언약궤가 홀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궤 귀환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이스라엘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언약궤를 실은 암소들이 벧세메스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모두 기뻐합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하나님께 번제와 다른 제사(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블레셋에서 온 암소를 번제로 드린 것이 제사의 정석은 아닙니다. 번제물로는 주로 흠 없는 수소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이 전심을 다한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들이 밀 추수철의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곁으로 와 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영과 진리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해 오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드러나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 일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나의 자원이 아무리 빈약하더라도 하나님은 스스로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그분의 성실하심과 전능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실패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질병과 고난과 대적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께 피해야 합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요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절대 좌표이신 하나님께 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시 72:18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시 72: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제사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16~18절)
√삼상 6: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까지 운반되는 과정과 그곳 사람들이 제사 드리는 것을 보고 에그론으로 돌아갑니다. 그동안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 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법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보니까 다곤이 여호와의 괘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아있었습니다. 한 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연거푸 이런 일이 일어나니 블레셋 사람들은 속으로 깜짝 놀랬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에게 엄중히 임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 때 독종 재앙으로 애굽인들을 치신 것과 같은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스돗 사람들이 법궤를 가드로 옮겨갔습니다. 가드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 하셨습니다.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나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궤를 어디로 보냅니까?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에그론에 독종 재앙만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망의 환난이 임하였고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된 것입니다. 돌려보내면서도 그들은 그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끌게 하였습니다. 새끼가 딸린 젖 나는 두 암소는 뒤로 돌아다 보지도 않고 벧세메스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 암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린 것까지 목격하고 그들은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증언했을 것입니다.
(√블레셋지도)
삼상 6: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삼상 6: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준비한 속건제물은 금독종과 금쥐입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에 손실을 입혔을 때 그 값에 5분의 1일 더해 배상하는 제사입니다(레 5:15~19). 금독종의 수가 다섯인 까닭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을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앞선 5장에서는 아스돗, 가드, 에그론에서 일어난 일만 서술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섯 성읍이(아스글론, 가사 포함) 다 들어간 까닭은 아마도 이 부연 단위에서 여호와께서 블레셋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금쥐는 블레셋의 5개 주요 도시와 이를 중심으로 하는 블레셋 전체 성읍과 거민을 가리킵니다. 이는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이 모든 사실을 목격하고도 다시 에그론을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곳, 우상 숭배가 만연한 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 앞에 그대로 엎드려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보았어도 믿지 못하고 과거 죄악 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교만과 아집을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경솔함으로 행한 사람들(19~21절)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에 돌아왔지만, 너무나 큰 고통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옵니다. 언약궤가 자리를 잡자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언약궤의 덮개를 열고 맙니다.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하는 것에 율법은 이를 엄격히 금합니다.
√민 4:20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일반 백성은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호기심으로 언약궤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삼상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이 일로 죽은 사람이 맛소라 사본에서 ‘백성들 가운데 70명, 50,000명’이라고 전하는데, 이는 70인역의 대부분 필사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 중세 필사본들 가운데는 더러 ‘50,000명’이 없는 본문도 있습니다. 추측하건대 이 본문은 전승 초기부터 두 수가 나란히 전해졌을 것이지만, 둘 가운데 하나는 후대에서 추가된 본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70명이 더 합리적인 수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엄청난 사건 앞에 슬피 울었습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신속히 옮겨 가도록 간청합니다.
√삼상 6: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삼상 6: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삼상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기럇여아림 주민들이 언약궤를 옮겨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둡니다. 기럇여아림은 ‘바알레유다’로도 불립니다(삼하 6:2). 아벡 전투로 인해 실로 성소가 파괴되었기에 다윗이 다윗성으로 옮겨가지 전까지 언약궤는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게 됩니다. 아비나답은 레위 가문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예배 때 하나님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좋지 않은 예배 습관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에게 합당하지 않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의심하는 생각’입니다.
진화론을 기반으로 하는 인본주의를 삶의 중심에 놓고 믿음 생활을 이어가면 결국 의심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예배하는 태도’입니다.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지나친 두려움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지나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합니다.
√넷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를 전체적으로 확대해 해석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자신의 수준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이 전부인 듯 믿으며, 자신에게 맞추어 예배 흐름을 주도하는 고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전파하며 믿는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나에게 이런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과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실패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나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나의 자원이 빈약하더라도 하나님은 스스로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 삼아 자신의 태도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알고 전하며, 그분을 바르게 예배하는 경외함을 잃지 않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