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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시 8:1-9
성경본문: 시편 8:1-9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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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태환목사(캠브리지한인교회)
This Is My Father’s World
시편 8편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이 시 속에 뭔가 우리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시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시편은 첫 절과 마지막 절이 같은 같은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LORD, our Lord,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Your glory is higher than the heavens (오 주님, 주님의 위대한 이름이 온 땅에 가득 찼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더 높습니다).” (1절) “O LORD, our Lord,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9절)
이 시편을 어떻게 읽어야 제 맛이 날까요?
쉬운 성경에는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이라고 나와 있고요.
“지휘자를 따라 기쁜 곡조로 부른 노래”라고 나와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A psalm of David, to be accompanied by a stringed instrument”라고 나와 있습니다. 줄이 달린 악기라면 하프나, 수금 같은 악기를 말합니다. 다윗은 본래 수금 연주의 천재였습니다. 수금은 오늘날 하프(harp)와 같은 악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다윗을 처음 소개할 때 성경에 보면 이렇게 소개합니다.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수금 (하프)을 타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수금을 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며 말도 잘하고 잘생겼습니다. 게다가 여호와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16:18)
요즘에 music therapy (음악치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음악치료의 원조가 아닌가 합니다.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했던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정신분열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울은 다윗이 연주하는 하프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나쁜 영이 사울에게 들어와 괴롭힐 때마다 다윗은 자기의 수금을 타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쁜 영이 사울에게서 나갔으며, 그 때마다 사울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사무엘상 16:23)
아마도 다윗은 이 시편을 썼을 때 하프 연주를 하면서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이 시편을 수금이 아니라 깃딧 (gittith)에 맞춰서 부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이 깃딧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깃딧이 발전해서 오늘날 기타 (guitar)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시편 8편은 기타 반주에 맞춰서 부르거나, 하프 같은 악기에 맞춰서 불러야 제 맛이 나는 시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시편 8편 말씀을 소개하면서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참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이렇게 고백했을 때, 이 시편을 쓴 다윗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속에서 그것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새벽기도에서 시편 말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편 27편 10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품 속에 그 작가의 혼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신성 (神性)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로마서 1:20)”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을 한번 둘러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아시지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옷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느냐? 하늘에 있는 새를 보아라.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 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새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해서 자기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 너희는 왜 옷에 대해 걱정하느냐? 들에 피는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백합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마태복음 6:25-28, 30)
예수님은 들에 피어 있는 백합꽃의 영광을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위대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들에 피어 있는 백합꽃이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칭찬하신 것은 그것들이 창조주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냥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해서 사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영광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의 영광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478장 가사가 그런 것이 잖아요?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 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 해와 저녁놀 밤 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 듯 하도다.”
곡조도 아름답고 가사도 아름답지만, 저는 이 찬송가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This is my father’s world”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내 아버지께서 지으신 세계” 이렇게 번역할까요?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과 뜻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의 삶이 들에 피어 있는 백합꽃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내 삶은 아름다움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다워집니다.
둘째로, 오늘 시편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대답이 4-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지요?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우셨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들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t you made man a little lower than Elohim.” “Elohim (엘로힘)”이란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엘로힘”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도나이 (주님)”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무심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야!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래?”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보세요. 다윗이 이 시편을 쓰면서 발견한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워 주신 존재입니다 (5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You gave them charge of everything you made (6절)”라고 했습니다.
“charge”라는 말은 우두머리, 보스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계속해서 아름답게 돌보라는 책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오직 사람을 지으실 때만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습니다. 자기와 닮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소통하기 위해서 인간을 자기와 닮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LORD, our Lord,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우리 주님, 주님의 위대하신 이름이 온 땅에 충만합니다)!”
한번 여러분의 입으로 고백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번 사방을 둘러 보세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자존감 (自尊感)을 상실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착각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능력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성경적인 자존감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결코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워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우리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되고,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자연 속에서 힘껏 외쳐 보시지요. “나는 대단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