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날 때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보고, 배우고, 듣고, 생각하고 경험한 모든 것이 현재 나의 기준이 됩니다. 어떤 판단이든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내리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은 자신의 기준에서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적 기준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부 역사, 과학적 내용과 문장 표현은 자료 검색 및 AI의 도움을 참고하여 정리했습니다
공성의 첫걸음: 상대성으로 살펴보는 절대성의 착각
(출처: 회원게시판, https://cafe.daum.net/buddhology/UJdn/258을 바탕으로, 내용을 요약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의문: 방에 들어섰을 때 그 방이 '큰가, 작은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마다 판단이 다른 이유는 머릿속에 미리 염두에 둔 기준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분석: 방의 원래 크기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비대비소(非大非小)이며, 고정된 실체가 없이 비어 있는 '공(空)'의 상태입니다. '크다, 작다'라는 판단은 외부 세계가 아닌, 내 머릿속 기준에 의존하여 조건 따라 생겨난 '연기(緣起)'이자 '마음의 작용(일체유심조)'입니다.
결론: 이처럼 방의 크기라는 현상이 조건에 의해 나타나듯,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삶과 죽음, 천지와 만물 등 세상의 모든 개념 또한 고정된 실체 없이 오직 인연 따라 연기할 뿐입니다.
큐브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한 사람은 파란 면을 앞이라 하고
다른 이는 빨간 면을 앞이라 한다면
그 논쟁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바라보는 방향이
각자의 ‘앞’이기 때문입니다.
위는 김성철 교수님이 자주 하시는 비유로, 큰 방과 작은 방의 비교를 통해 '큰 것도 작은 것도 결국 연기(緣起)한 것이며 공(空)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아래는 제가 '앞면과 뒷면', 혹은 '큰 것과 작은 것' 자체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보탠 비유입니다.
지구는 둥근가 평평한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눈앞에 펼쳐진 대지를 보며 지구가 당연히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날마다 땅을 밟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적 기준'에서 지구는 의심할 여지 없이 평평한 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까요?
흔히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에 와서야 이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놀랍게도 그 시작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6세기경 피타고라스는 지구의 구형설을 주장했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 때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와 별자리의 변화를 근거로 지구가 둥글다는 관찰적 설명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에라토스테네스는 그림자의 차이를 이용해 지구 둘레까지 계산해 냈습니다. / AI
인간이 지상이라는 좁은 조건에 갇혀 있을 때는 '평평함'이 절대적인 진실이었지만, 한 걸음 물러나 더 넓은 인연(조건)을 관찰하자 비로소 '둥글다'는 새로운 진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둥근 것'은 진실이고 '평평한 것'은 거짓일까요? 왜 우리는 더 넓은 조건에서 얻어진 관점을 더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애초에 '둥글다'는 기준은 또 무엇입니까? 우리 우주에 절대적으로 완벽한 구형(球形) 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원형이든, 한쪽이 찌그러졌든, 납작하거나 울퉁불퉁하든 저마다의 조건에 따른 모양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지구가 본래부터 '절대적인 실체로서 둥근 것'이라면, 관찰자의 위치가 동서남북 어디든, 어떤 높이에서 바라보든 늘 똑같이 완벽하게 둥글어야 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는 끊임없이 변하고 위치마다 다르게 보입니다. 결국 '둥글다'는 것 또한 관찰자와의 관계(조건) 속에서만 임의로 성립하는 또 하나의 상대적 개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둥글다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이 글은 '지구가 둥글지 않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적 진실이라 믿는 인식조차도 관찰 조건과 개념 체계 속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세속적으로는 (현재의 기준에서는) 둥글다가 더 유효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호등의 질서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파란불이 켜지면 걷고, 빨간불이 켜지면 멈춥니다. 이 질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절대적인 사회적 규칙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신호등의 질서'는 본래부터 우주에 존재하던 절대적인 진실일까요? 빨간색에 대한 인간의 위험 의식과 사회적 약속, 그리고 안전의 필요성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연기적 결과물입니다. 결국 신호등의 질서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임의로 맺어진 사회적 약속이자 ‘가명(假名)’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를 절대적인 진실이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에는 색을 다르게 인지하는 색맹이나 색약인 사람들이 존재하며, 문화적 배경이나 개인의 트라우마에 따라 빨간색을 전혀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국 대다수의 인간이 공유하는 생리적 반응을 토대로 만든 신호등의 규칙조차도,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또 하나의 상대적인 기준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모두에게 예외 없이 절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호등은 다시 한번 증명해 줍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강의가 열풍이 불었습니다. 저는 이때 중론의 이해는 없었지만 상대적 관찰과 구성요소의 분석을 사유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보자마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정의란 인간 사회의 필요 속에서 형성된 규범이다.
본래 자연 세계에는 '정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개인이 지켜야 할 규칙을 넘어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고,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정의'라는 개념의 쓰임과 필요가 생겨난 것뿐입니다. '정의'라는 단어는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과거 마녀사냥이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듯 항상 정의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째, 정의란 사람(관점)에 따라 변화한다.
흔한 비유로, 진보 성향의 판사와 보수 성향의 판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기에 같은 사건을 두고도 내리는 판결이 다릅니다. 누구의 기준이냐에 따라 정의의 얼굴은 바뀝니다.
셋째, 정의란 시간(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과거 미국에서는 술을 금지하는 '금주법'이 정의이자 법이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으며, 미래에 또다시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법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정의란 본래부터 우주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기보다, 인간 사회의 필요와 조건 속에서 형성된 연기적 개념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왜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가?
절대적인 것이 없는 우리의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이나 작은 부족 단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인류는 가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국가와 세계화의 단계를 거쳐, 이제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그 규모를 확장하며 변화해 왔습니다. 문명이 이토록 거대해진 만큼, 이를 지탱할 질서가 무너졌을 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성의 크기 또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비대해졌습니다. 방을 청소하지 않으면 고작 그 방 하나만 더러워질 뿐이지만, 모든 것이 촘촘하게 연결된 세계화 속에서 질서가 사라진다면 그 혼란의 크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입니다. 비록 우리가 만든 수많은 질서와 정의가 본래부터 우주에 존재했던 절대적인 진실도 아니고 완벽할 수도 없겠지만, 그 질서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질서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절대적인 것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만들어갈 질서와 정의의 기준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모두가 완벽하게 동의하는 절대적인 규칙을 만들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세상의 질서를 세워야 합니까? 그 답은 바로 '연기(緣起)의 관점'에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신호등의 규칙이 좋은 예시입니다. 빨간불에 멈추자는 약속은 우주 본래의 절대적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가야 하는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조건을 고려해 만들어진 것이 신호등의 질서입니다. 즉 그것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 연기적 질서입니다.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방의 크기'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큰 것과 작은 것을 절대 기준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조건과 필요에 맞게 조율하는 유연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연기적 관점의 질서입니다.
하지만 연기적 질서는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연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연기에서 비롯되는 질서의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자비가 놓이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를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줄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질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질서란, 절대적 기준을 강요하는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건과 관계 속에서 서로의 삶과 고통을 함께 고려하며 조율해 가는 관계의 질서에 가까울 것입니다.
첫댓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쓴 관점은 마이클 샌델 교수님의 관점을 벗어난 해체 위주의 관점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님이 던진 질문들은 "이런 딜레마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라는 '현상 내에서의 가치 판단과 선택'을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제가 생각한 사유는 "그 가치 판단을 유도하는 '정의'라는 개념 틀 자체가 어떻게 조작되고 구성된 것인가?"를 파고든 '구조적 해체'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강의 도중 어느 학생도 이와 비슷한 층위의 질문을 하였고 교수님은 매우 당황하셨고, 그 질문은 나의 강의 주제를 벗어나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수님은 '게임의 규칙' 안에서 플레이하며 주어진 상황에 따른 개인적 견해를 밝히고 토론하기를 바랐던 것인데, 그 질문은 '게임판 자체의 구조'를 묻고 해체하려는 방향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샌델 교수님의 강의 방식은 고정된 관념을 흔들고 스스로 사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론의 문제 제기 방식과 닮아 있다고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