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세기 서구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마르셀 프루스트(Valentin Louis Georges Eug?ne Marcel Proust 1871-1922)의 삶과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는 인상주의 예술, 아르누보 운동, 만국박람회 등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를 살았던 작가다. 철학, 미술, 음악, 미술, 심리학 등이 하나의 언어로 말하고 서로 교섭하는 유일한 책을 쓰려고 작가는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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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명 이상의 인물 등장하는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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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의사였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로부터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천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부모 덕분에 어려서부터 문인, 음악가, 화가 등 예술인들과 많은 교분을 쌓을 수 있었으며 일찍이 글쓰기를 시작했다.
북이탈리아를 동경하고 베네치아, 파도바 등지를 여행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관한 폭넓은 견문을 쌓았다. 19세기 영국의 수공예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의 스승 존 러스킨에 심취하여 「깨와 백합」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루스트 문학의 백미는 전 7권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1919년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두 번째 책인 『젊은 소녀의 그늘』로 공쿠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 쓰기에 매진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 1922년 지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0명 이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하소설로서 시간과 기억, 그리고 예술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다. 흘러가 버린 과거의 시간 안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회상 형식으로 묘사되고, 스완의 사랑과 질투, 동성애 등 다양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잃어버린 시간’은 가공의 인물,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주인공 마르셀을 내세워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고 있다.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류층 인물들의 모습과 삶에 대한 그들의 경멸과 매혹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작가 프루스트 자신이 경험했던 인물들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으며 이들에 대한 묘사는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와 그림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과 일상 위에 교차되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예리하게 관찰하였으며 부단히 변화하고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도 영원한 그 무엇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작가는 어둠의 바닷속에 좌초된 잃어버린 시간을 탐험하면서 진정하게 의미 있는 것들만 낚아 올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다.
소설은 어린 시절이라는 옛 ‘고향’에로의 초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춰주는 삶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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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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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논픽션이 아니라 허구적 서사로 엮어진다. 그렇다면 허구적 이야기가 삶의 진실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삶의 진실 가운데 핵심 주제는 시간과 기억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무한히 흘러가는 세월을 포착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절규한다. 과거의 시간은 흘러가버렸고 미래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의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가고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이며, 시간을 포착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스완의 집 쪽으로』는 어머니의 입맞춤을 애타게 기다리던 주인공 마르셀이 허구적인 이야기로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지도다. 어머니가 읽어주던 작가 조르주 상드의 프랑수아 샹피, 침대에서의 어머니 입맞춤의 기다림 등은 추억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엄마가 상드의 책을 읽어주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추억이 그 제목을 보는 순간 되살아났다. (…)
그것은 내가 즉시 깨닫지 못하였으나,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나의 추억이 부드럽게 섞여 있는 인상이었다. 처음 순간, 나는 화를 내며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상한 이것이 무엇인지 자문하였다.
이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책을 되살아나게 한 것은 어린 시절의 나였다. 그 책이 그 어린아이를 즉시 불러온 것은 나만이 그 소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되찾은 시간』
고독, 고통, 혼돈의 세계에 한 가닥 빛을 던져주는 것은 추억이고, 추억은 구원처럼 다가와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추억은 흔들리고 불안정한 공간을 고정시키고 견고하게 만든다.
추억은 다름 아닌 텅 빈 공간 속에 나타난 사건들의 기억이므로, 주인공 마르셀은 자신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추억의 공간들을 의식의 표면 위에 떠올려야 한다.
프루스트 문학에서 과거라는 시간은 죽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 있다가 우연히 부르면 즉시 대답한다.
모든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영혼불멸과 윤회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콩브레의 추억은 프루스트 미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우울했던 하루와 내일도 슬픈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린 나는 기계적으로 입에 한 모금 가져갔고 나는 차와 함께 마들렌느 과자 한 조각을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게 놔두었다. 그러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와 차가 함께 녹아 입천장을 건드리는 순간, 나는 전율했고 내 안에 기막힌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쾌감이 이유 없이 내게 다가와서 나를 고립시켰다. 곧 그 쾌감은 나로 하여금 일상적인 삶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끔찍한 것들이 비공격적이 되었으며, 짧은 삶 자체가 하찮아 보였다.
사랑의 효과처럼 쾌감은 나를 중요한 것으로 가득 채웠다. 아니 이 요체는 내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보잘것없고 우연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님을 느꼈다. "
― 『스완의 집 쪽으로』
프루스트 문학의 백미인 이 대목은 그의 소설이 근본적으로 물질과 감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 존재, 영원 등 형이상학적 주제들도 감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감각적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찰나 속에서 불변하는 ‘그 무엇’을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 내가 그 자체가 됨으로써 영원성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 우연의 왕국은 순간적으로 영원성을 맛보는 영역이기도 하며, 우연히 맛본 차와 과자가 말로 형언하기 힘든 환희를 느끼게 한다.
"이 커다란 힘을 가진 환희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나는 커다란 기쁨이 차와 과자의 멋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환희는 차와 과자의 맛을 훨씬 뛰어넘어 다른 성질의 것이 되었다. 환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
― 『스완의 집 쪽으로』
주인공 마르셀은 ‘일상적 질서를 넘어가는 그 어떤 것’이 내면의 심층으로부터 의식의 표면까지 떠오르고자 하는 줄기찬 시도와 미지의 그 무엇이 내 안에 저항하고 수많은 시간들을 거쳐 온 ‘끊임없이 웅얼대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회상의 목소리다.
회상의 목소리는 “사물들이 파괴된 후 어떤 것도 과거의 과거 속에 살아남는 것이 없을 때도 냄새와 맛은 남아 있다. 냄새와 달콤한 맛은 연약하더라도 생생하고 비물질이고, 지속적이며, 충직하게 영혼처럼 오랫동안 남아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한다.”
(『스완의 집 쪽으로』)
프루스트의 문학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진 후에도 냄새, 맛 등의 감각적인 것들은 죽은 시간의 무덤에서 부활을 꿈꾸는 파수꾼들이다. 시간의 공동묘지 속에서 감각적인 것들은 약하지만, 시간에 줄기차게 저항하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가장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영원성을 지닐 수 있다는 진리는 허구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함으로써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
과거로 되돌아감은 물리적인 되돌아감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예술을 경유해서만’ 되돌아갈 수 있다.
과거로의 여행은 과거 시간들이 인상으로만 회상되는 순간 과거는 현재로 되살아나게 해 준다.
과거의 회상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지극히 감각적인 것의 부활이다.
프루스트의 회상은 지난 과거의 경험이 구체적인 감각과 생생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며 허구적 이야기만이 그것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고,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글 김동윤
1953년 서울 생. 건국대 문과대 학장.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 대학원 박사. 한국영상문화학회, 한국기호학회 등에서 학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메를리 뽕띠, 하버마스 등의 연구를 통해 인문학적 지평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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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① 생애 “파리 교외 오퇴유에서 저명한 파리 의과대학 교수 아드리앵 프루스트와 유대인 출신 부유한 증권업자의 딸 잔 베유 사이에서 태어났다. 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명문 콩도르세 중고등학교를 거쳐 파리 대학에서 법학사와 문학사를 공부했고 아버지의 성화에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지만 한 번도 근무하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포부르생제르맹 귀족들의 살롱에서 보냈다.
그러나 1905년 어머니의 죽음은 이런 딜레탕트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그리하여 어머니가 모르는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유명 백화점들이 밀집된,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오스만 거리 102번지에서....낮에는 자고 밤에는 글을 쓰는 긴 칩거 생활로 들어갔다. 이런 칩거 생활의 결실이 ‘20세기 최대의 문학적 사건’으로 기록되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김희영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411쪽)
1913-1929 사이에 쓰인 7부 15권으로 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외에도 단편집『기쁨과 세월 Les Plaisirs et les Jours』(1896), 유고 장편『장 상퇴유Jean Santeuil』(1952년 간행), 1900년 경부터 10여년간 주로 피가로 지에 발표된 글을 수록한『모작과 혼합물Pastiches et M?langes』(1919) 등의 작품이 있다.
②『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성과 내용
스완네 집 쪽으로(2권)
(유년기) 화자인 어린 소년(마르셀)은 가족과 함께 콩브레의 레오니 고모님 댁에서 휴가를 보낸다. 어린 시절을 보낸 콩브레의 묘사. 두 개의 산책로 : 스완네 쪽과 게르망트네 쪽 [스완의 사랑과 그의 아내의 배신] 스완의 딸 질베르트와 친구가 됨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3권)
파리에 있는 스완네 집에 드나들면서 대문호 베르고트를 만남. 질베르트와의 불화 노르망디 해안 발베크 여행 바닷가의 젊은 아가씨들을 만남 화가 엘스티르와 사귀게 됨 젊은 아가씨들 중 알베르틴을 만남
게르망트 쪽(2권)
I. 파리 게르망트 저택으로 이사.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연모. 군복무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옴. II. 1. 할머니의 임종과 죽음
2. 알베르틴이 찾아오고 둘이 사귀게 됨
소돔과 고모라(3권)
I. 샤를뤼스의 동성애 II. 1.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야회, 다시 발베크. 문득 할머니의 죽음을 실감.
2. 알베르틴과의 연애하나 그녀를 의심
3. 애정이 깊어가나 절교할 생각도 있다
4. 알베르틴의 동성애를 눈치채게 됨
갇힌 여인(2권)
알베르틴을 파리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 알베르틴의 동성애에 대한 의혹 및 두려움 결국 질투가 가라앉고 사랑도 식음
사라진 여인(1권)
알베르틴이 사라짐. 다시 데려오려고 했으나 실패.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더욱 생생하게 회상하게 됨
되찾은 시간(2권)
스스로 문학에 대한 소질이 없다고 생각 게르망트 대송 부인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 들어서다 포석에 부딪힘.
이 감각을 통해 결부되었던 기억이 소생. 초대를 받아 모인 사람들을 보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지나온 자신의 삶을 예술의 형태로 승화할 소설을 쓰는 데 남은 시간을 바칠 것을 결심
③ “일종의 소설”
프루스트는 “고전적인 소설과는 전혀 닮은 데가 없는 한 권의 책을 독자들이 받아들여주도록 해줄 의향이 있는 출판사를 찾는다”고 쓴 적이 있다. 그는 “‘기억의 우발성’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매우 엄격한 구성’을 갖추었으므로 ‘소설’이라고 칭하기는 하지만 자신도 정확하게 그 장르를 규정할 능력은 없다고 말했다.
1913년에 그는 새로 나올 그의 책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중요한 저작은 이를테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프루스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작업이 특이한 것임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즉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거나 어떤 일정한 주제를 다루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것을 모두 다 말하고 싶어했다. 그의 책은 삶의 총결산이었다. 그는 경험의 총체를 보고하듯이 쓰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전통적인 소설의 테두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프루스트의 새로움은 1인칭을 사용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1인칭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었다.”(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현대문학, 308쪽)
“프루스트 자신은 그의 모든 작품이 다 완성되어 발표될 때까지 기다려본 다음에 그 전체에 대한 판단을 내려줄 것은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큰 관심거리는 바로 작품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문제였었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분명히 말했다. 그는 그 구성이 “거대한 척도에 따라 전개되어가는” 것이며 “복합적”이며 “비록 은폐되어 있긴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엄격성을 지닌”구성임을 강조했는데 그것으로서 그는 자신의 구성방식이 어떤 모험적 이야기의 전개나 어떤 성격의 강조와는 다른 그 무엇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다는 시실을 충분히 말한 것”(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현대문학, 326쪽)이다.
2. “상징주의 세대의 소설”
① 리얼리즘 비판
“잃어버린... 는 그 중요성으로 인해 그 앞세기에 있어서 “인간희극”이, 그리고 그보다 한층 더 “루공 마카르”가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과 맞먹는 소설적 대집성을 이룬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발자크와 졸라가 마음속에 품었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야심에 부응하고 있다.... 이 작품은 리얼리스트 문학에 맞선 거대한 반작용적 운동에 그 맥이 닿아있다.... 발자크에서 졸라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헌들을 쌓아둔 창고”였다. 그러나 상징주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받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호적부와 경쟁을 해보겠다는 야심은 헛된 것으로 보였다... 작자는 누구나 사는 평범한 삶에 대한 지식들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소 희귀한 어떤 인상의 질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계층’이라든가 돌아가는 세상 형편이라든가, 돈이라든가, 삶의 물질적이고 범속한 조건 따위에는 거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336쪽)
② 이데올로기 비판
프루스트는 소설 작품 속에 담겨있는 이데올로기를 배격한다. 그는 “소설은 현실의 사진이어도 안 되고 어떤 이상의 표현이어도 안 되는 것이었다. 프루스트의 독창성과 위대함은 개별성과 일반성, 현실성과 사상성을 통합하고자 한 데 있다. 작품은 미리부터 구상한 어떤 사상으로부터 생겨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 프루스트는 리얼리즘과 상징주의를 동시에 배격했다....
그는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에 더욱 심오한 예술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다시 한 번 더 상징주의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의 우발성’을 무시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영원한 진실들만을 보여주겠다고 자처하면서 상징주의는 또 다른 한 가지 생명법칙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 혹은 영원한 것을 실현하되 그것을 개인들의 삶속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법칙을 말이다. 순전히 상징적이기만 한 작품들은 그러므로 생명이 결여되고, 그리하여 깊이가 결여될 위험이 있다.”
(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338-339쪽)
3. 마들렌 일화 읽기
① 잊힌 기억을 되찾기
어느 추운 겨울날, 우연히 어머니의 권유로 마들렌 과자를 맛보았을 때, 소설의 화자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기억이 솟아오르는 경험을 한다. 사실 마들렌 과자 이야기는 작품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일화에 불과하며, 소설 내내 몇 가지 에피소드(『되찾은 시간』에서 포석 위에 넘어질 뻔했던 경험, 접시에 수저가 부딪혀 내는 소리, 냅킨의 감촉 등)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자의 경험은 단지 어떤 이유에서인가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기억과는 구분되는 자연발생적으로 솟아오르는 “비의지적”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의식의 힘 때문에 편향된 우리 몸의 균형을 새롭게 잡아가는 일이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일견 ‘평범하기 짝이 없고’ ‘우발적’인 경험이지만, 바로 그 경험이 우리가 적응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나 있는 그 ‘기억’의 세계, ‘잊힌 시간’을 되찾는 것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
② 사소한 것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기
우울하고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과, 그 일상에서 우연히 내 앞에 놓인 차와 마들렌 과자가 무미건조한 삶을 뒤흔들고, 흔한 기억과 뻔한 일상 너머로 나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마들렌 과자는 언제든 먹기만 하면 잊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사물이 아니라, 몸의 감각이 예술적 감수성으로 상승하도록 해주는 ‘특별한’ 그리고 ‘유일한’ 계기이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소설에 수많은 작가, 화가, 음악가가 등장하고, 작가 자신이 깊은 예술적 성찰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진부하고 관습적인 표현 대신, 내가 새로 찾은 그 ‘기억’에 가장 합당하고 적합한 말을 찾아 나가는 것,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이며, 따분한 사회를 벗어나 ‘이상’의 세계로 나가가는 것이며, 무기력한 삶에서 ‘승화’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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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재현적 “감각존재”의 구축-2
들뢰즈 문학론의 중심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놓여 있다.
들뢰즈는 <철학의 사유>에서 감각 존재를 창안하는 자를 예술가라고 말하며
프루스트를 그 예로 들고 있다.
3.감각 존재를 창안하는 방법론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3-1. 재현을 폐기하는 감각적 인상
들뢰즈는 “감각 존재를 창안한 자”(QP.240)로서 프루스트를 언급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감각의 논리』에서도 언급되는데, 여기서도 그는 “프루스트는 사실 너무 ‘지적인’ 추상적 문학을 원하지 않았고, 더욱이 어떤 스토리를 전개하기에 적합한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문학도 원하지 않았다”(LS.81)고 말하며 재현적인 것들과 단절하기 위한 자신의 방법론을 구축한 자로서 제시된다. 그렇다면 프루스트는 어떻게 스스로 서는 감각 존재를 창안했는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에는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에 대한 유명한 구절이 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감겨서 ‘잠드는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잠드는 과정이 30페이지 가량 펼쳐지고 있는 이 부분을 당시 출판업자는 이해할 수 없어했다. 하지만 꿈은 인상들이 산란하게 얽혀있는 기억이며,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와 상응한다.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는 이완과 수축의 리듬을 형성한다. 꿈, 혹은 가수면 상태에서 지성은 휴식을 하고 이완된 신체를 뚫고 인상들이 스며든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신체는 고정된 사물들에 의해 수축된다. 화자의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찾아지는 거대한 순환적 리듬이기도 하다.
신체는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고정된 코드들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 형성되기를 강요받는다. 이러한 질서화된 코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베르뒤랭, 오데뜨, 빌파리지 부인, 게르망트 공작 부인 등의 계열로 이어지는 살롱이다. 이들 살롱에서 인물들은 부르주아지, 귀족, 예술가, 학자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속물근성을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살롱 내의 소통체계인 일정한 코드를 학습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에게서 예절이란 코드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의 예절이란 상황이나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각각의 상황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가문의 습관으로서 그들은 상황과 대상에 관계없이 살롱의 코드인 예절을 방사한다. 특히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에서 게르망트 공작의 태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마르셀의 집에서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기를, 그래서 마르셀이 그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는 마르셀이 슬픔에 빠진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소개하지 않자 그들을 예절 따위를 습득하지 않은 괴이한 자로 판명한다.
마르셀 역시 코드화된 미적 관념에 실제를 등치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스완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스완은 오데트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만해도 그녀를 육체적 염오의 정을 일으키는 여인, 관능이 요구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타입의 여인으로 느낀다. 그가 오데트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두 볼에서 장밋빛 도는 산뜻한 광대뼈 언저리만을 떼어 마음속으로 그려야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오데트의 집에서 “풀어헤친 머리채가 볼을 따라 흐르듯 늘어지게 내버려둔 채, 활기를 띠지 않았을 때에는 지치고 침울해 보이는 그 커다란 눈으로, 머리를 숙여 판화를 들여다보려고 힘들이지 않고 몸을 기울이기 위해서, 가볍게 춤을 추는 듯한 자세로 다리 하나를 구부리는 그녀의 모습”(RTP(2).56)이 시스티나 성당 벽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제트로의 딸 십보라의 모습과 동일함을 본다. 스완은 실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미적 관념을 실제에게 부착한다. 이는 오데트라는 실제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의 재현으로 오데트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만 실현될 뿐인 미적 관념이 실제에 부착되지 않을 경우 끊임없이 실망한다. 마르셀에게 라 베르마가 그러하다. 그는 라 베르마의 연극 무대에 관한 책들, 기사들을 통해 먼저 미적 관념을 선취한다. 하지만 연극 무대에 선 라 베르마를 보자마자 그는 실망한다. 관념과 실재는 언제나 이렇듯 어긋난다.
사실 이런 구상적인, 코드화된 세계와 어떻게 단절할 것이가 하는 문제가 프루스트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이 첫 번째 문제는 관념과 실재의 어긋남이 어디서 발생하는가와 관련되어 단절의 지점을 찾게 된다. 관념과 실재를 끊임없이 어긋나게 하는 것은 범람하는 감각들과, 인상들에 의해서이다. 마르셀은 라 베르마의 연극을 다시 보면서 예전에 자신이 라 베르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방해했던 것들이라 생각한 감각적 인상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된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공통적인 관념을 갖는다. 하지만 그러한 공통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미지의 형태가 집요하게 어른거린다. 그것이 마르셀에게 라 베르마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은 기존의 미적 관념과 다른 어떤 형태의 “날카로운 소리를, 기이하게 울어대는 가락”을 듣게되며 그것이 “아름다움이냐? 내가 느끼는 바가 감탄의 정이냐? 이게 빛깔의 풍요함이냐, 고귀함이냐, 힘이냐?”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물음 앞에서 미지의 형태는 그 물음에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 신기한 질문의 가락, 모르는 인간에서 비롯하는 횡포한 인상, 빈틈없이 물질적이라서 그 안에 연기의 넓이를 위해 남아 있는 빈 자리가 조금도 없는 인상”(RTP(5).60)으로 응대한다.
이 인상들은 기존의 미적 관념을 범람하기에 늘 우리를 실망시키고, 어떤 재난처럼 다가오지만 오히려 정신에 포착된 적 없기에 이름 붙여지지 않았던 이러한 감각적 인상들이야 말로 프루스트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개성적인 특질들이다. 그렇기에 프루스트는 재현적인 것들로부터 단절하고 감각 존재를 세우기 위해 먼저 물질적인 감각적 인상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마르셀보다 선취한 예술가로서 화가 엘스티르가 등장하는데 그는 “직접 감각한 것에서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떼어내려고”(RTP(6).137)애쓰는 자이고, 그리하여 이러한 감각 구성물을 순간 속에 담아내는 자이다. 엘스티르의 예술론과는 별개로 이런 감각적 인상들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할머니의 죽음 장면에서도 돋보인다. 여기서 마르셀은 할머니의 죽음의 과정을 육체적 역동성으로 포착해내며 스러져 가는 육체 위에 ‘미소’만이 남는 형상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물질에서 일어나는 인상들이 프루스트의 재료들이며, 이는 정신의 관습적 관념을 넘어서는 일차적인 것이자 사실로서의 감각적 구성물이다.
Ph?dre (1880), Alexandre Cabane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장 라신Jean Racine의 <페드르Ph?dre>를 반복해서 본다.
이 반복 속에서 라 베르마(가상인물)라는 여배우로부터
관념 속 미로부터 벗어나는 감각적인 것의 출현을 마주하게 된다.
3-2. 기억의 블록화
두 번째로 프루스트는 감각적 구성물들이 재현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기억을 블록화한다. 기억을 블록화한다는 것은 “유년의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재 아이가 되어가는-생성들인 유년의 블록들을 통해”(QP.240)글을 쓰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어른 화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로 읽는 것은 다시금 예술을 하나의 재현으로서 취급하는 것이고, 그 작품이 생성하는 감각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르셀이 어머니와 입맞춤을 하기 위해 계속 애썼던 그 밤을 상기하는 것, 레오니 고모와 함께 먹었던 마들렌과 홍차를 상기하는 것은 유년 시절을 추억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러한 유년은 기억의 블록화를 통해 감각적 구성물들에 골조를 부여한다.
프루스트가 “집착하였고 탄생하도록 원하였던 것은 구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무런 구상적 기능도 없는 일종의 형상”으로서, 이를 위해 그는 “무의식적 기억”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무의식적 기억이 과거를 삽화적으로 밝히거나 서술하는 의식적 기억과는 반대로 이 순수한 형상을 솟아나게 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LS.81) 기억을 블록화하는 방식인 무의식적 기억으로서 상기란 무엇인가.
성인 화자인 마르셀은 흘러간 집의 옛 생활, 콩브레에 있는 대고모 댁, 발베크, 파리, 동시에르, 베네치아, 그 밖의 고장에서 생활을 회상하며 밤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조차 아리송할 때 추억souvenir이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물 뿐 아니라 나라는 부동성과 그 부동성에 대한 확신은 우리 사고의 부동성 이며,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습관이 만들어낸 것이다. 오히려 사물이나 나는 불확실한 것들의 수면 위에 있다. 달리는 말을 구경하면서 영사기가 나타내 보이는 연속적인 자태를 실제로 분리해서 판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화자에게 기억m?moire 또는 기억을 한다는 것이란 연속적이고 확실한 것 아래서 일렁이는 불확실한 것들을 상기?vocation해내는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무의식적으로 기억한다는 것, 상기는 “4차원의 현재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망각으로 탈환되는 영토를 망각의 바다 속에 솟아올라 다시 지어지기”(RTP(1).97)를 기다리는 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상기의 방식은 다시 두 가지로 세분화될 수 있다. 먼저는 ‘마들렌과 홍차’로 대표되는 인접성에 의한 상기의 방식이다. 화자는 어느 날 어머니가 주신 마들렌과 홍차를 마시게 된다. 이때 불현듯 그 물질적 대상은 화자에게 “무상과 재앙, 짧음을 넘어선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 힘찬 기쁨”(RTP(1).66)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물질적 대상은 과거 콩브레의 유년과 관계되어 있다. 마들렌과 홍차는 레오니 고모가 주일날 아침이면 방에 찾아온 내게 내주었던 것이다.
이 기억은 커 버린 마르셀의 기억 밖의 기억이자 버려진 기억이 되었지만 마들렌과 홍차라는 물질의 감각, 냄새와 맛만은 “연약하게, 그만큼 뿌리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 환기하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거의 촉지되지 않는 냄새와 맛의 이슬 방울 위에 꿋꿋이 버”(RTP(1).69)티며 숨어 있다. 과거는 지성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물질적 대상 속, 그 감각 안에 숨어 있다가 우연적으로 다가와 펼쳐진다. 콩브레라는 미학적 형상은 성인의 어린아이-되기라는 감각적 생성의 응결이다. 이는 물질적 대상 속에 격리됨과 동시에 되기로서 펼쳐짐으로써 특유의 리듬을 갖는다.
하지만 마들렌과 홍차라는 인접성에 의한 상기 방식은 늘 재현의 위험에 노출된다. 마들렌과 홍차의 예가 성인 화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처럼 빈번하게 읽히는 이유가 이러한 인접성의 상기 방식에 기인한다.
여기서 두 번째 상기의 방식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르와 콩브레’가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아상블라쥬 방식의 상기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마르셀은 가수면 상태에서 동시에르의 아침을 떠올린다. 동시에르는 친구 생 루의 병영이 있는 곳인데, 한 해 전에 갔던 그곳의 인상들이 안개 속에서 펼쳐진다. 특이 이 안개 속에의 인상들 에서 혁대를 윤내고 있는 마치몰이꾼이 벽화에 나타난 인물처럼 돋아난다. 이런 동시에르의 아침은 거리로 나오면서 콩브레의 시기와 연결된다. 안개로 인해 가로등 빛이 약해서 지척이 분간이 안 되는 칠흑 같은 어둠은 언젠가 밤에 도착한 콩브레를 상기시킨다.
양립불가능한 기억이 상기되면서 그 둘은 자신의 집을 이루는 면들을 부수고 틀들은 결합된다. 이들은 어떤 인접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조의 돋아남과 안개의 결합이 일구어내는 공통된 리듬에 의해 연결된다. 이것을 우리는 더 깊은 인접성,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프루스트에게 이런 무의식적 기억, 상기의 두 가지 방식은 현재의 판에 박힌 기억에 칼자국을 내는 것이며, 그 사이로 하나의 빛이 스며드는 것이다. 이로써 프루스트는 버려져 있는 기억의 비가시적 시간의 힘들을 독자로 하여금 보게 만든다.
REMEMBRANCE OF THINGS PAST ? Paul Helleu drawing of Man Ray's Nov. 1922 photo of Marcel Proust on his deathbed
만 레이Man Ray가 찍은 프루스트. 프루스트는 재현적인 것과 단절하기 위해 감각적 인상의 출현, 기억의 불록화, 무한 생성의 리토르넬로의 글쓰기를 수행한다.
3-3. 무한 생성의 리토르넬로
앞서 재현적인 것과 단절하기 위한 상기의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리듬에 대해 언급하고 지나간 바 있다. 하나는 “마들렌과 홍차”의 인접성의 상기에서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 다른 하나는 “동시에르와 콩브레”의 아상블라주식 상기에서 나타나는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었다. 재료들의 감각, 물질적 사물들의 감각을 넘어서서 이제 리듬들이 감각이 된다. 그리고 리듬은 각각의 미학적 형상물들의 공통의 일을 만들어내며 각각의 윤곽을, 집의 거주자로서 위치를 파기하기에 이른다.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이 아직 형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일이라면, 돋아남과 결합은 형상과 풍경(이는 세계이자 우주이다)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둘러싼 거대한 리듬 혹은 순환적 리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의 테마에서 나타나는 이완과 수축의 리듬이다.
이 리듬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시간의 힘이기도 하다. 먼저 도취의 시간이 있다. 도취의 시간은 삶의 목적을 현재의 찰나적 행복에 두는 시간이다. 이 도취의 시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발베크에서 취기 속 마르셀의 모습이다. 마르셀은 할머니와 함께 간 여행에서 낯선 호텔, 낯선 사람들, 낯선 방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긴장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의 보살핌 없이 그 공간을 견디질 못한다. 하지만 잠시 생 루와 술을 마시는 그 취기의 시간 동안 근심에서의 해방을 느낀다. “현재의 찰나에 밀착, 감각 이상의 확장을 못 갖고 감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목적밖에 없으므로, 현재의 찰나의 감각만이, 그 야릇한 힘, 그것이 가져다주는 희열” 속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이는 취한 시간 동안만 삶의 “가치를 바꾸는 계수”(RTP(4).247)를 갖는다. 형상은 현재의 찰나 속에서 자신의 감각을 고립시키면서 오로지 그 안에서만 펼쳐짐, 즉 감각의 해방이 일어난다.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은 취기가 끝날 때까지만 형상 안에서만 일어나는 리듬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취의 시간은 충분히 감각적이지만 이 감각은 스스로 보존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두 번째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 이 잃어버린 시간은 알베르틴과의 만남 속에서 포착된다. 발베크 바다에서 만났던 알베르틴이 파리의 마르셀의 집으로 찾아온다. 발베크에서 그의 입맞춤이 거절당한 이후로 처음 만남인데 마르셀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만남에서 마르셀이 알베르틴과의 입맞춤에서 포착한 형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베르틴과 입맞추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마르셀에게 발베크의 인상들이 다가온다.
“발베크에서의 우리의 생활의 온갖 추억, 창 밑에 부서지는 물결 소리, 어린이들의 고함”이 일렁이며 알베르틴의 형상(머리칼, 두 볼, 눈과 볼 사이의 곡선)이 발베크의 거대한 풍경, 산맥과 봉우리, 골짜기가 된다.
비인간적 풍경 되기 속에서 형상은 비인간적 되기라는 감응을 촉발한다. 그리고 알베르틴이라는 형상은 풍경의 변화와 속도 속에서 열 사람의 알베르틴이 돋아난다. 이 형상과 풍경 사이에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 있다. 형상은 풍경-되기를 통해 풍경과 결합함과 동시에 더욱 그 형상은 돋아난다. 이때 돋아나는 형상은 구상적 형태가 아닌 변화하는, 비인간적인 것 되기로 변화하고, 생성되는 신체이다.
이 시간은 형상과 풍경 사이의 생성의 리듬을 담지하고 있지만 마르셀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기도 하다. 이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 무한의 구도 속에서 수축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이 리듬은 마르셀에게 잃어버린 시간이 되는 것이다.
마르셀은 지속적으로 소멸에 대한 힘을 느낀다. 하지만 한번은 죽음의 편에서이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때야만 이 힘은 오히려 생성의 편으로 탈취될 수 있다. 엄마가 함께 해주지 않는 콩브레의 밤과 발베크의 낯선 호텔에서 마르셀은 긴장하면서 잠들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오이디푸스적 인 것이 아니라 소멸에 대한 힘 때문이다. 그 힘이 마르셀을 짓누르는 것이다. 소멸은 소박하게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인간적 소멸에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등을 돌리거나 붕괴될지 모른다는 존재적 소멸에까지 이른다.
마르셀의 할머니의 죽음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 존재적 소멸이 죽음의 편에서가 아닌 생성의 편으로 탈취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독증에 의한 증상들은 눈멈과 귀먹음은 차례로 다가와 할머니의 얼굴을 흔들어 놓는다. 할머니나 식구들은 이 힘을 외면하고자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듯, 여전히 들리고 보이는 듯 행동한다. 그녀는 죽음 직전까지 이 소멸의 힘 속에서 웅크린다.
“침대 위에 몸을 반원형으로 구부리고, 할머니가 아닌 다른 인간, 그 머리털을 뒤집어쓰고, 그 시트에 누운 일종의 동물이, 헐떡거리며, 신음하며, 경련하며, 이불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RTP(6).37)
소멸의 힘에 의해 신체는 수축하면서 더욱 도드라지는 육체적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숨결과 맥박은 이완 속에서 ‘한 지류’, ‘새소리’로, 거대한 자연으로 이행한다. 그것은 고정된 의미의 말이 아니지만 “말하고 싶은 것이 모조리 이와 같이 흘러나오듯, 참으로 장황하게, 열성 있게. 진심을 토로하여 우리한데 말하고 있는 듯하다”(RTP(6).45) 거대한 우주 속으로 스며든 형상이 표현하는 것은 바로 형상과 풍경을 통과하는, 거대한 이완과 수축의 리듬의 순수한 순환적 시간이다. 이 이완과 수축의 거대 리듬의 구도 속에 형상과 풍경이 소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소멸의 힘을 우리는 카오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익숙한 것들을 삼켜버리는 재난. 프루스트는 이 카오스와 대결한다. 그리고 그와 대결하기 위해 상기하는 것이며 글을 쓰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카오스를 통과해내야만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되찾은 시간, 혹은 새로운 세계는 이미 곁에 있는 세계로서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이다. 이 잃어버린 세계, 우연히 사물들·인상들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세계를 가시화하는 하는 것이 예술의 길이다.
프루스트에게서는 무의식적 기억, 인접성과 아상블라쥬라는 상기의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 감각적 인상들의 가시화가 이루어졌다. 예술은 카오스에서 탈취한 구도를 통해 동일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며, 그것은 이미 새로운 세계이다. 소멸조차도 생성의 편에서 힘으로 포착해내는 것, 그래서 소멸조차 우주적 생성의 무한으로 열리게 하는 세계를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주어준다. 할머니가 남긴 이 비인간적인 ‘미소’만이 되찾은 시간이며 대상이나 주체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서는 감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왕네 집 쪽으로(Du c?t? chez Swann)」라고 이름 붙여진 첫 권은 마르셀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그가 매년마다 부모와 함께 콩브레에서 보냈던 여름 휴가의 기억들이 그려진다. 마르셀이 이 초창기 시절에서 떠올리는 유일한 기억은 잠자리에 들기 전의 인사를 거부했던 연극이다. 그 집안의 친구인 스왕이 저녁마다 찾아오면 당시 열 살배기인 마르셀은 어머니에게 받고 싶어 했던 잘 자라는 뽀뽀도 받지 못한 채 어김없이 잠자리로 가야 했다. 어머니의 관심을 계속해서 잃게 되자 이것이 평생의 상처로 남게 되고, 그 내면적 상처는 이후 마르셀에게 여성에 대한 상실의 불안과 공격적 질투심이라는 형태로 남게 된다. 잠자리 인사의 에피소드가 유년기의 유일한 기억인 반면에, 저 유명한 마들렌 과자 맛의 느낌은 돌연히 유년기 당시에 있었던 인물들, 장소들과 더불어 그의 기억을 다시 살아나게 만든다.
*마들렌- 프루스트 현상의 표상.
제 2권 -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서
사춘기로 들어선 마르셀은 난생 처음으로 성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스왕의 딸인 새침떼기 질베르트를 샹젤리제에서 재미 삼아 만나 잊지 못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천식에 시달리던 마르셀은(프루스트도 그랬다) 열일곱 살 때 그의 할머니와 함께 노르망디 해변의 발베크로 해수욕을 하러 간다. 그곳에서 그는 로베르 드 생 루를 사귀게 된다. 생 루는 대단히 매력적인 젊은이인데, 훗날 동성애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질베르트와 결혼한다. 마르셀은 생 루의 삼촌 샤를뤼 남작도 만나는데, 그는 이후 동성애를 통해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르셀은 발베크에서 자신의 본격적인 사랑의 주인공 알베르틴을 만나게 된다.
제 3권- 게르망트가의 사람들
「게르망트가의 사람들(Le c?t? de Guermantes)」에서는 마르셀이 그의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한다. 그들은 이제 게르망트 저택에 속하는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마르셀은 (늘 그랬던 것처럼) 먼발치에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을 사랑한다. 마침내 그 부인을 만났을 때 그는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실망한다. 당시 사회생활의 중심인 살롱의 끊임없는 대화 소재는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 사건이다.
제 4권- 소돔과 고모라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의 주요 테마는 동성애다. 처음에 마르셀은 우연히 샤를뤼 남작의 동성애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남작은 이 동성애 사건으로 점차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그 사이 알베르틴을 다시 만나게 된 마르셀은 그녀 역시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제 5권 - 갇힌 여자
갇힌 여인(La Prisonni?re)」에서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자기가 있는 파리로 불러들인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기거한다. 알베르틴이 외출하면 그는 질투심에 불타 그녀를 감시한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마르셀의 태도 때문에 알베르틴은 어느 날 아침 그 집을 떠나고 만다.
제 6권- 사라진 알베르틴
「사라진 알베르틴(Albertine disparue)」에서 마르셀은 친구 생 루에게 알베르틴을 수소문하여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마르셀은 알베르틴이 승마를 하다 사고가 나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 7권- 되찾은 시간
제7권이자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 저택으로 마티네를 방문한다. 그 집의 서재에서 마르셀은 문득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런 깨달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처음으로 회귀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 소설을 쓰게 되고,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비로소 독서를 마치게 되는 셈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세기 서구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마르셀 프루스트(Valentin Louis Georges Eug?ne Marcel Proust 1871-1922)의 삶과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는 인상주의 예술, 아르누보 운동, 만국박람회 등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를 살았던 작가다. 철학, 미술, 음악, 미술, 심리학 등이 하나의 언어로 말하고 서로 교섭하는 유일한 책을 쓰려고 작가는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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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명 이상의 인물 등장하는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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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의사였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로부터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천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부모 덕분에 어려서부터 문인, 음악가, 화가 등 예술인들과 많은 교분을 쌓을 수 있었으며 일찍이 글쓰기를 시작했다.
북이탈리아를 동경하고 베네치아, 파도바 등지를 여행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관한 폭넓은 견문을 쌓았다. 19세기 영국의 수공예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의 스승 존 러스킨에 심취하여 「깨와 백합」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루스트 문학의 백미는 전 7권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1919년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두 번째 책인 『젊은 소녀의 그늘』로 공쿠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 쓰기에 매진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 1922년 지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0명 이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하소설로서 시간과 기억, 그리고 예술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다. 흘러가 버린 과거의 시간 안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회상 형식으로 묘사되고, 스완의 사랑과 질투, 동성애 등 다양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잃어버린 시간’은 가공의 인물,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주인공 마르셀을 내세워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고 있다.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류층 인물들의 모습과 삶에 대한 그들의 경멸과 매혹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작가 프루스트 자신이 경험했던 인물들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으며 이들에 대한 묘사는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와 그림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과 일상 위에 교차되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예리하게 관찰하였으며 부단히 변화하고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도 영원한 그 무엇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작가는 어둠의 바닷속에 좌초된 잃어버린 시간을 탐험하면서 진정하게 의미 있는 것들만 낚아 올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다.
소설은 어린 시절이라는 옛 ‘고향’에로의 초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춰주는 삶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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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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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논픽션이 아니라 허구적 서사로 엮어진다. 그렇다면 허구적 이야기가 삶의 진실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삶의 진실 가운데 핵심 주제는 시간과 기억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무한히 흘러가는 세월을 포착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절규한다. 과거의 시간은 흘러가버렸고 미래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의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가고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이며, 시간을 포착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스완의 집 쪽으로』는 어머니의 입맞춤을 애타게 기다리던 주인공 마르셀이 허구적인 이야기로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지도다. 어머니가 읽어주던 작가 조르주 상드의 프랑수아 샹피, 침대에서의 어머니 입맞춤의 기다림 등은 추억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엄마가 상드의 책을 읽어주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추억이 그 제목을 보는 순간 되살아났다. (…)
그것은 내가 즉시 깨닫지 못하였으나,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나의 추억이 부드럽게 섞여 있는 인상이었다. 처음 순간, 나는 화를 내며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상한 이것이 무엇인지 자문하였다.
이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책을 되살아나게 한 것은 어린 시절의 나였다. 그 책이 그 어린아이를 즉시 불러온 것은 나만이 그 소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되찾은 시간』
고독, 고통, 혼돈의 세계에 한 가닥 빛을 던져주는 것은 추억이고, 추억은 구원처럼 다가와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추억은 흔들리고 불안정한 공간을 고정시키고 견고하게 만든다.
추억은 다름 아닌 텅 빈 공간 속에 나타난 사건들의 기억이므로, 주인공 마르셀은 자신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추억의 공간들을 의식의 표면 위에 떠올려야 한다.
프루스트 문학에서 과거라는 시간은 죽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 있다가 우연히 부르면 즉시 대답한다.
모든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영혼불멸과 윤회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콩브레의 추억은 프루스트 미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우울했던 하루와 내일도 슬픈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린 나는 기계적으로 입에 한 모금 가져갔고 나는 차와 함께 마들렌느 과자 한 조각을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게 놔두었다. 그러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와 차가 함께 녹아 입천장을 건드리는 순간, 나는 전율했고 내 안에 기막힌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쾌감이 이유 없이 내게 다가와서 나를 고립시켰다. 곧 그 쾌감은 나로 하여금 일상적인 삶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끔찍한 것들이 비공격적이 되었으며, 짧은 삶 자체가 하찮아 보였다.
사랑의 효과처럼 쾌감은 나를 중요한 것으로 가득 채웠다. 아니 이 요체는 내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보잘것없고 우연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님을 느꼈다. "
― 『스완의 집 쪽으로』
프루스트 문학의 백미인 이 대목은 그의 소설이 근본적으로 물질과 감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 존재, 영원 등 형이상학적 주제들도 감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감각적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찰나 속에서 불변하는 ‘그 무엇’을 느끼게 함으로써, 아니 내가 그 자체가 됨으로써 영원성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 우연의 왕국은 순간적으로 영원성을 맛보는 영역이기도 하며, 우연히 맛본 차와 과자가 말로 형언하기 힘든 환희를 느끼게 한다.
"이 커다란 힘을 가진 환희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나는 커다란 기쁨이 차와 과자의 멋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환희는 차와 과자의 맛을 훨씬 뛰어넘어 다른 성질의 것이 되었다. 환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
― 『스완의 집 쪽으로』
주인공 마르셀은 ‘일상적 질서를 넘어가는 그 어떤 것’이 내면의 심층으로부터 의식의 표면까지 떠오르고자 하는 줄기찬 시도와 미지의 그 무엇이 내 안에 저항하고 수많은 시간들을 거쳐 온 ‘끊임없이 웅얼대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회상의 목소리다.
회상의 목소리는 “사물들이 파괴된 후 어떤 것도 과거의 과거 속에 살아남는 것이 없을 때도 냄새와 맛은 남아 있다. 냄새와 달콤한 맛은 연약하더라도 생생하고 비물질이고, 지속적이며, 충직하게 영혼처럼 오랫동안 남아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한다.”
(『스완의 집 쪽으로』)
프루스트의 문학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진 후에도 냄새, 맛 등의 감각적인 것들은 죽은 시간의 무덤에서 부활을 꿈꾸는 파수꾼들이다. 시간의 공동묘지 속에서 감각적인 것들은 약하지만, 시간에 줄기차게 저항하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가장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영원성을 지닐 수 있다는 진리는 허구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함으로써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
과거로 되돌아감은 물리적인 되돌아감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예술을 경유해서만’ 되돌아갈 수 있다.
과거로의 여행은 과거 시간들이 인상으로만 회상되는 순간 과거는 현재로 되살아나게 해 준다.
과거의 회상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지극히 감각적인 것의 부활이다.
프루스트의 회상은 지난 과거의 경험이 구체적인 감각과 생생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며 허구적 이야기만이 그것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고,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글 김동윤
1953년 서울 생. 건국대 문과대 학장.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 대학원 박사. 한국영상문화학회, 한국기호학회 등에서 학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메를리 뽕띠, 하버마스 등의 연구를 통해 인문학적 지평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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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① 생애 “파리 교외 오퇴유에서 저명한 파리 의과대학 교수 아드리앵 프루스트와 유대인 출신 부유한 증권업자의 딸 잔 베유 사이에서 태어났다. 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명문 콩도르세 중고등학교를 거쳐 파리 대학에서 법학사와 문학사를 공부했고 아버지의 성화에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지만 한 번도 근무하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포부르생제르맹 귀족들의 살롱에서 보냈다.
그러나 1905년 어머니의 죽음은 이런 딜레탕트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고, 그리하여 어머니가 모르는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유명 백화점들이 밀집된,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오스만 거리 102번지에서....낮에는 자고 밤에는 글을 쓰는 긴 칩거 생활로 들어갔다. 이런 칩거 생활의 결실이 ‘20세기 최대의 문학적 사건’으로 기록되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김희영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권, 411쪽)
1913-1929 사이에 쓰인 7부 15권으로 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외에도 단편집『기쁨과 세월 Les Plaisirs et les Jours』(1896), 유고 장편『장 상퇴유Jean Santeuil』(1952년 간행), 1900년 경부터 10여년간 주로 피가로 지에 발표된 글을 수록한『모작과 혼합물Pastiches et M?langes』(1919) 등의 작품이 있다.
②『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구성과 내용
스완네 집 쪽으로(2권)
(유년기) 화자인 어린 소년(마르셀)은 가족과 함께 콩브레의 레오니 고모님 댁에서 휴가를 보낸다. 어린 시절을 보낸 콩브레의 묘사. 두 개의 산책로 : 스완네 쪽과 게르망트네 쪽 [스완의 사랑과 그의 아내의 배신] 스완의 딸 질베르트와 친구가 됨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3권)
파리에 있는 스완네 집에 드나들면서 대문호 베르고트를 만남. 질베르트와의 불화 노르망디 해안 발베크 여행 바닷가의 젊은 아가씨들을 만남 화가 엘스티르와 사귀게 됨 젊은 아가씨들 중 알베르틴을 만남
게르망트 쪽(2권)
I. 파리 게르망트 저택으로 이사.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연모. 군복무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옴. II. 1. 할머니의 임종과 죽음
2. 알베르틴이 찾아오고 둘이 사귀게 됨
소돔과 고모라(3권)
I. 샤를뤼스의 동성애 II. 1.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야회, 다시 발베크. 문득 할머니의 죽음을 실감.
2. 알베르틴과의 연애하나 그녀를 의심
3. 애정이 깊어가나 절교할 생각도 있다
4. 알베르틴의 동성애를 눈치채게 됨
갇힌 여인(2권)
알베르틴을 파리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 알베르틴의 동성애에 대한 의혹 및 두려움 결국 질투가 가라앉고 사랑도 식음
사라진 여인(1권)
알베르틴이 사라짐. 다시 데려오려고 했으나 실패. 알베르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더욱 생생하게 회상하게 됨
되찾은 시간(2권)
스스로 문학에 대한 소질이 없다고 생각 게르망트 대송 부인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 들어서다 포석에 부딪힘.
이 감각을 통해 결부되었던 기억이 소생. 초대를 받아 모인 사람들을 보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지나온 자신의 삶을 예술의 형태로 승화할 소설을 쓰는 데 남은 시간을 바칠 것을 결심
③ “일종의 소설”
프루스트는 “고전적인 소설과는 전혀 닮은 데가 없는 한 권의 책을 독자들이 받아들여주도록 해줄 의향이 있는 출판사를 찾는다”고 쓴 적이 있다. 그는 “‘기억의 우발성’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매우 엄격한 구성’을 갖추었으므로 ‘소설’이라고 칭하기는 하지만 자신도 정확하게 그 장르를 규정할 능력은 없다고 말했다.
1913년에 그는 새로 나올 그의 책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중요한 저작은 이를테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프루스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작업이 특이한 것임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즉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거나 어떤 일정한 주제를 다루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것을 모두 다 말하고 싶어했다. 그의 책은 삶의 총결산이었다. 그는 경험의 총체를 보고하듯이 쓰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전통적인 소설의 테두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프루스트의 새로움은 1인칭을 사용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1인칭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었다.”(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현대문학, 308쪽)
“프루스트 자신은 그의 모든 작품이 다 완성되어 발표될 때까지 기다려본 다음에 그 전체에 대한 판단을 내려줄 것은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큰 관심거리는 바로 작품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문제였었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분명히 말했다. 그는 그 구성이 “거대한 척도에 따라 전개되어가는” 것이며 “복합적”이며 “비록 은폐되어 있긴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엄격성을 지닌”구성임을 강조했는데 그것으로서 그는 자신의 구성방식이 어떤 모험적 이야기의 전개나 어떤 성격의 강조와는 다른 그 무엇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다는 시실을 충분히 말한 것”(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현대문학, 326쪽)이다.
2. “상징주의 세대의 소설”
① 리얼리즘 비판
“잃어버린... 는 그 중요성으로 인해 그 앞세기에 있어서 “인간희극”이, 그리고 그보다 한층 더 “루공 마카르”가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과 맞먹는 소설적 대집성을 이룬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발자크와 졸라가 마음속에 품었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야심에 부응하고 있다.... 이 작품은 리얼리스트 문학에 맞선 거대한 반작용적 운동에 그 맥이 닿아있다.... 발자크에서 졸라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헌들을 쌓아둔 창고”였다. 그러나 상징주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받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호적부와 경쟁을 해보겠다는 야심은 헛된 것으로 보였다... 작자는 누구나 사는 평범한 삶에 대한 지식들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소 희귀한 어떤 인상의 질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계층’이라든가 돌아가는 세상 형편이라든가, 돈이라든가, 삶의 물질적이고 범속한 조건 따위에는 거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336쪽)
② 이데올로기 비판
프루스트는 소설 작품 속에 담겨있는 이데올로기를 배격한다. 그는 “소설은 현실의 사진이어도 안 되고 어떤 이상의 표현이어도 안 되는 것이었다. 프루스트의 독창성과 위대함은 개별성과 일반성, 현실성과 사상성을 통합하고자 한 데 있다. 작품은 미리부터 구상한 어떤 사상으로부터 생겨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 프루스트는 리얼리즘과 상징주의를 동시에 배격했다....
그는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에 더욱 심오한 예술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다시 한 번 더 상징주의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의 우발성’을 무시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영원한 진실들만을 보여주겠다고 자처하면서 상징주의는 또 다른 한 가지 생명법칙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 혹은 영원한 것을 실현하되 그것을 개인들의 삶속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법칙을 말이다. 순전히 상징적이기만 한 작품들은 그러므로 생명이 결여되고, 그리하여 깊이가 결여될 위험이 있다.”
(미셸 레몽, 프랑스 현대소설사, 338-339쪽)
3. 마들렌 일화 읽기
① 잊힌 기억을 되찾기
어느 추운 겨울날, 우연히 어머니의 권유로 마들렌 과자를 맛보았을 때, 소설의 화자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기억이 솟아오르는 경험을 한다. 사실 마들렌 과자 이야기는 작품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일화에 불과하며, 소설 내내 몇 가지 에피소드(『되찾은 시간』에서 포석 위에 넘어질 뻔했던 경험, 접시에 수저가 부딪혀 내는 소리, 냅킨의 감촉 등)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자의 경험은 단지 어떤 이유에서인가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기억과는 구분되는 자연발생적으로 솟아오르는 “비의지적”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의식의 힘 때문에 편향된 우리 몸의 균형을 새롭게 잡아가는 일이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일견 ‘평범하기 짝이 없고’ ‘우발적’인 경험이지만, 바로 그 경험이 우리가 적응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나 있는 그 ‘기억’의 세계, ‘잊힌 시간’을 되찾는 것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
② 사소한 것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기
우울하고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과, 그 일상에서 우연히 내 앞에 놓인 차와 마들렌 과자가 무미건조한 삶을 뒤흔들고, 흔한 기억과 뻔한 일상 너머로 나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마들렌 과자는 언제든 먹기만 하면 잊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사물이 아니라, 몸의 감각이 예술적 감수성으로 상승하도록 해주는 ‘특별한’ 그리고 ‘유일한’ 계기이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소설에 수많은 작가, 화가, 음악가가 등장하고, 작가 자신이 깊은 예술적 성찰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진부하고 관습적인 표현 대신, 내가 새로 찾은 그 ‘기억’에 가장 합당하고 적합한 말을 찾아 나가는 것,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일이며, 따분한 사회를 벗어나 ‘이상’의 세계로 나가가는 것이며, 무기력한 삶에서 ‘승화’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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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재현적 “감각존재”의 구축-2
들뢰즈 문학론의 중심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놓여 있다.
들뢰즈는 <철학의 사유>에서 감각 존재를 창안하는 자를 예술가라고 말하며
프루스트를 그 예로 들고 있다.
3.감각 존재를 창안하는 방법론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3-1. 재현을 폐기하는 감각적 인상
들뢰즈는 “감각 존재를 창안한 자”(QP.240)로서 프루스트를 언급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감각의 논리』에서도 언급되는데, 여기서도 그는 “프루스트는 사실 너무 ‘지적인’ 추상적 문학을 원하지 않았고, 더욱이 어떤 스토리를 전개하기에 적합한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문학도 원하지 않았다”(LS.81)고 말하며 재현적인 것들과 단절하기 위한 자신의 방법론을 구축한 자로서 제시된다. 그렇다면 프루스트는 어떻게 스스로 서는 감각 존재를 창안했는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에는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에 대한 유명한 구절이 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감겨서 ‘잠드는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잠드는 과정이 30페이지 가량 펼쳐지고 있는 이 부분을 당시 출판업자는 이해할 수 없어했다. 하지만 꿈은 인상들이 산란하게 얽혀있는 기억이며,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와 상응한다.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는 이완과 수축의 리듬을 형성한다. 꿈, 혹은 가수면 상태에서 지성은 휴식을 하고 이완된 신체를 뚫고 인상들이 스며든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신체는 고정된 사물들에 의해 수축된다. 화자의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찾아지는 거대한 순환적 리듬이기도 하다.
신체는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고정된 코드들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 형성되기를 강요받는다. 이러한 질서화된 코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베르뒤랭, 오데뜨, 빌파리지 부인, 게르망트 공작 부인 등의 계열로 이어지는 살롱이다. 이들 살롱에서 인물들은 부르주아지, 귀족, 예술가, 학자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속물근성을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살롱 내의 소통체계인 일정한 코드를 학습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에게서 예절이란 코드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의 예절이란 상황이나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각각의 상황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가문의 습관으로서 그들은 상황과 대상에 관계없이 살롱의 코드인 예절을 방사한다. 특히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에서 게르망트 공작의 태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마르셀의 집에서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기를, 그래서 마르셀이 그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는 마르셀이 슬픔에 빠진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소개하지 않자 그들을 예절 따위를 습득하지 않은 괴이한 자로 판명한다.
마르셀 역시 코드화된 미적 관념에 실제를 등치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스완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스완은 오데트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만해도 그녀를 육체적 염오의 정을 일으키는 여인, 관능이 요구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타입의 여인으로 느낀다. 그가 오데트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두 볼에서 장밋빛 도는 산뜻한 광대뼈 언저리만을 떼어 마음속으로 그려야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오데트의 집에서 “풀어헤친 머리채가 볼을 따라 흐르듯 늘어지게 내버려둔 채, 활기를 띠지 않았을 때에는 지치고 침울해 보이는 그 커다란 눈으로, 머리를 숙여 판화를 들여다보려고 힘들이지 않고 몸을 기울이기 위해서, 가볍게 춤을 추는 듯한 자세로 다리 하나를 구부리는 그녀의 모습”(RTP(2).56)이 시스티나 성당 벽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제트로의 딸 십보라의 모습과 동일함을 본다. 스완은 실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미적 관념을 실제에게 부착한다. 이는 오데트라는 실제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의 재현으로 오데트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만 실현될 뿐인 미적 관념이 실제에 부착되지 않을 경우 끊임없이 실망한다. 마르셀에게 라 베르마가 그러하다. 그는 라 베르마의 연극 무대에 관한 책들, 기사들을 통해 먼저 미적 관념을 선취한다. 하지만 연극 무대에 선 라 베르마를 보자마자 그는 실망한다. 관념과 실재는 언제나 이렇듯 어긋난다.
사실 이런 구상적인, 코드화된 세계와 어떻게 단절할 것이가 하는 문제가 프루스트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이 첫 번째 문제는 관념과 실재의 어긋남이 어디서 발생하는가와 관련되어 단절의 지점을 찾게 된다. 관념과 실재를 끊임없이 어긋나게 하는 것은 범람하는 감각들과, 인상들에 의해서이다. 마르셀은 라 베르마의 연극을 다시 보면서 예전에 자신이 라 베르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방해했던 것들이라 생각한 감각적 인상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된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공통적인 관념을 갖는다. 하지만 그러한 공통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미지의 형태가 집요하게 어른거린다. 그것이 마르셀에게 라 베르마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은 기존의 미적 관념과 다른 어떤 형태의 “날카로운 소리를, 기이하게 울어대는 가락”을 듣게되며 그것이 “아름다움이냐? 내가 느끼는 바가 감탄의 정이냐? 이게 빛깔의 풍요함이냐, 고귀함이냐, 힘이냐?”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물음 앞에서 미지의 형태는 그 물음에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 신기한 질문의 가락, 모르는 인간에서 비롯하는 횡포한 인상, 빈틈없이 물질적이라서 그 안에 연기의 넓이를 위해 남아 있는 빈 자리가 조금도 없는 인상”(RTP(5).60)으로 응대한다.
이 인상들은 기존의 미적 관념을 범람하기에 늘 우리를 실망시키고, 어떤 재난처럼 다가오지만 오히려 정신에 포착된 적 없기에 이름 붙여지지 않았던 이러한 감각적 인상들이야 말로 프루스트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개성적인 특질들이다. 그렇기에 프루스트는 재현적인 것들로부터 단절하고 감각 존재를 세우기 위해 먼저 물질적인 감각적 인상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마르셀보다 선취한 예술가로서 화가 엘스티르가 등장하는데 그는 “직접 감각한 것에서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떼어내려고”(RTP(6).137)애쓰는 자이고, 그리하여 이러한 감각 구성물을 순간 속에 담아내는 자이다. 엘스티르의 예술론과는 별개로 이런 감각적 인상들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할머니의 죽음 장면에서도 돋보인다. 여기서 마르셀은 할머니의 죽음의 과정을 육체적 역동성으로 포착해내며 스러져 가는 육체 위에 ‘미소’만이 남는 형상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물질에서 일어나는 인상들이 프루스트의 재료들이며, 이는 정신의 관습적 관념을 넘어서는 일차적인 것이자 사실로서의 감각적 구성물이다.
Ph?dre (1880), Alexandre Cabane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장 라신Jean Racine의 <페드르Ph?dre>를 반복해서 본다.
이 반복 속에서 라 베르마(가상인물)라는 여배우로부터
관념 속 미로부터 벗어나는 감각적인 것의 출현을 마주하게 된다.
3-2. 기억의 블록화
두 번째로 프루스트는 감각적 구성물들이 재현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기억을 블록화한다. 기억을 블록화한다는 것은 “유년의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재 아이가 되어가는-생성들인 유년의 블록들을 통해”(QP.240)글을 쓰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어른 화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로 읽는 것은 다시금 예술을 하나의 재현으로서 취급하는 것이고, 그 작품이 생성하는 감각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르셀이 어머니와 입맞춤을 하기 위해 계속 애썼던 그 밤을 상기하는 것, 레오니 고모와 함께 먹었던 마들렌과 홍차를 상기하는 것은 유년 시절을 추억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러한 유년은 기억의 블록화를 통해 감각적 구성물들에 골조를 부여한다.
프루스트가 “집착하였고 탄생하도록 원하였던 것은 구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무런 구상적 기능도 없는 일종의 형상”으로서, 이를 위해 그는 “무의식적 기억”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무의식적 기억이 과거를 삽화적으로 밝히거나 서술하는 의식적 기억과는 반대로 이 순수한 형상을 솟아나게 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LS.81) 기억을 블록화하는 방식인 무의식적 기억으로서 상기란 무엇인가.
성인 화자인 마르셀은 흘러간 집의 옛 생활, 콩브레에 있는 대고모 댁, 발베크, 파리, 동시에르, 베네치아, 그 밖의 고장에서 생활을 회상하며 밤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조차 아리송할 때 추억souvenir이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물 뿐 아니라 나라는 부동성과 그 부동성에 대한 확신은 우리 사고의 부동성 이며,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습관이 만들어낸 것이다. 오히려 사물이나 나는 불확실한 것들의 수면 위에 있다. 달리는 말을 구경하면서 영사기가 나타내 보이는 연속적인 자태를 실제로 분리해서 판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화자에게 기억m?moire 또는 기억을 한다는 것이란 연속적이고 확실한 것 아래서 일렁이는 불확실한 것들을 상기?vocation해내는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무의식적으로 기억한다는 것, 상기는 “4차원의 현재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망각으로 탈환되는 영토를 망각의 바다 속에 솟아올라 다시 지어지기”(RTP(1).97)를 기다리는 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상기의 방식은 다시 두 가지로 세분화될 수 있다. 먼저는 ‘마들렌과 홍차’로 대표되는 인접성에 의한 상기의 방식이다. 화자는 어느 날 어머니가 주신 마들렌과 홍차를 마시게 된다. 이때 불현듯 그 물질적 대상은 화자에게 “무상과 재앙, 짧음을 넘어선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 힘찬 기쁨”(RTP(1).66)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물질적 대상은 과거 콩브레의 유년과 관계되어 있다. 마들렌과 홍차는 레오니 고모가 주일날 아침이면 방에 찾아온 내게 내주었던 것이다.
이 기억은 커 버린 마르셀의 기억 밖의 기억이자 버려진 기억이 되었지만 마들렌과 홍차라는 물질의 감각, 냄새와 맛만은 “연약하게, 그만큼 뿌리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 환기하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거의 촉지되지 않는 냄새와 맛의 이슬 방울 위에 꿋꿋이 버”(RTP(1).69)티며 숨어 있다. 과거는 지성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물질적 대상 속, 그 감각 안에 숨어 있다가 우연적으로 다가와 펼쳐진다. 콩브레라는 미학적 형상은 성인의 어린아이-되기라는 감각적 생성의 응결이다. 이는 물질적 대상 속에 격리됨과 동시에 되기로서 펼쳐짐으로써 특유의 리듬을 갖는다.
하지만 마들렌과 홍차라는 인접성에 의한 상기 방식은 늘 재현의 위험에 노출된다. 마들렌과 홍차의 예가 성인 화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처럼 빈번하게 읽히는 이유가 이러한 인접성의 상기 방식에 기인한다.
여기서 두 번째 상기의 방식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르와 콩브레’가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아상블라쥬 방식의 상기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마르셀은 가수면 상태에서 동시에르의 아침을 떠올린다. 동시에르는 친구 생 루의 병영이 있는 곳인데, 한 해 전에 갔던 그곳의 인상들이 안개 속에서 펼쳐진다. 특이 이 안개 속에의 인상들 에서 혁대를 윤내고 있는 마치몰이꾼이 벽화에 나타난 인물처럼 돋아난다. 이런 동시에르의 아침은 거리로 나오면서 콩브레의 시기와 연결된다. 안개로 인해 가로등 빛이 약해서 지척이 분간이 안 되는 칠흑 같은 어둠은 언젠가 밤에 도착한 콩브레를 상기시킨다.
양립불가능한 기억이 상기되면서 그 둘은 자신의 집을 이루는 면들을 부수고 틀들은 결합된다. 이들은 어떤 인접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조의 돋아남과 안개의 결합이 일구어내는 공통된 리듬에 의해 연결된다. 이것을 우리는 더 깊은 인접성,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프루스트에게 이런 무의식적 기억, 상기의 두 가지 방식은 현재의 판에 박힌 기억에 칼자국을 내는 것이며, 그 사이로 하나의 빛이 스며드는 것이다. 이로써 프루스트는 버려져 있는 기억의 비가시적 시간의 힘들을 독자로 하여금 보게 만든다.
REMEMBRANCE OF THINGS PAST ? Paul Helleu drawing of Man Ray's Nov. 1922 photo of Marcel Proust on his deathbed
만 레이Man Ray가 찍은 프루스트. 프루스트는 재현적인 것과 단절하기 위해 감각적 인상의 출현, 기억의 불록화, 무한 생성의 리토르넬로의 글쓰기를 수행한다.
3-3. 무한 생성의 리토르넬로
앞서 재현적인 것과 단절하기 위한 상기의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리듬에 대해 언급하고 지나간 바 있다. 하나는 “마들렌과 홍차”의 인접성의 상기에서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 다른 하나는 “동시에르와 콩브레”의 아상블라주식 상기에서 나타나는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었다. 재료들의 감각, 물질적 사물들의 감각을 넘어서서 이제 리듬들이 감각이 된다. 그리고 리듬은 각각의 미학적 형상물들의 공통의 일을 만들어내며 각각의 윤곽을, 집의 거주자로서 위치를 파기하기에 이른다.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이 아직 형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일이라면, 돋아남과 결합은 형상과 풍경(이는 세계이자 우주이다)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둘러싼 거대한 리듬 혹은 순환적 리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의 테마에서 나타나는 이완과 수축의 리듬이다.
이 리듬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시간의 힘이기도 하다. 먼저 도취의 시간이 있다. 도취의 시간은 삶의 목적을 현재의 찰나적 행복에 두는 시간이다. 이 도취의 시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발베크에서 취기 속 마르셀의 모습이다. 마르셀은 할머니와 함께 간 여행에서 낯선 호텔, 낯선 사람들, 낯선 방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긴장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의 보살핌 없이 그 공간을 견디질 못한다. 하지만 잠시 생 루와 술을 마시는 그 취기의 시간 동안 근심에서의 해방을 느낀다. “현재의 찰나에 밀착, 감각 이상의 확장을 못 갖고 감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목적밖에 없으므로, 현재의 찰나의 감각만이, 그 야릇한 힘, 그것이 가져다주는 희열” 속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이는 취한 시간 동안만 삶의 “가치를 바꾸는 계수”(RTP(4).247)를 갖는다. 형상은 현재의 찰나 속에서 자신의 감각을 고립시키면서 오로지 그 안에서만 펼쳐짐, 즉 감각의 해방이 일어난다.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은 취기가 끝날 때까지만 형상 안에서만 일어나는 리듬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취의 시간은 충분히 감각적이지만 이 감각은 스스로 보존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두 번째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 이 잃어버린 시간은 알베르틴과의 만남 속에서 포착된다. 발베크 바다에서 만났던 알베르틴이 파리의 마르셀의 집으로 찾아온다. 발베크에서 그의 입맞춤이 거절당한 이후로 처음 만남인데 마르셀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만남에서 마르셀이 알베르틴과의 입맞춤에서 포착한 형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베르틴과 입맞추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마르셀에게 발베크의 인상들이 다가온다.
“발베크에서의 우리의 생활의 온갖 추억, 창 밑에 부서지는 물결 소리, 어린이들의 고함”이 일렁이며 알베르틴의 형상(머리칼, 두 볼, 눈과 볼 사이의 곡선)이 발베크의 거대한 풍경, 산맥과 봉우리, 골짜기가 된다.
비인간적 풍경 되기 속에서 형상은 비인간적 되기라는 감응을 촉발한다. 그리고 알베르틴이라는 형상은 풍경의 변화와 속도 속에서 열 사람의 알베르틴이 돋아난다. 이 형상과 풍경 사이에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 있다. 형상은 풍경-되기를 통해 풍경과 결합함과 동시에 더욱 그 형상은 돋아난다. 이때 돋아나는 형상은 구상적 형태가 아닌 변화하는, 비인간적인 것 되기로 변화하고, 생성되는 신체이다.
이 시간은 형상과 풍경 사이의 생성의 리듬을 담지하고 있지만 마르셀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기도 하다. 이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 무한의 구도 속에서 수축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이 리듬은 마르셀에게 잃어버린 시간이 되는 것이다.
마르셀은 지속적으로 소멸에 대한 힘을 느낀다. 하지만 한번은 죽음의 편에서이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때야만 이 힘은 오히려 생성의 편으로 탈취될 수 있다. 엄마가 함께 해주지 않는 콩브레의 밤과 발베크의 낯선 호텔에서 마르셀은 긴장하면서 잠들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오이디푸스적 인 것이 아니라 소멸에 대한 힘 때문이다. 그 힘이 마르셀을 짓누르는 것이다. 소멸은 소박하게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인간적 소멸에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등을 돌리거나 붕괴될지 모른다는 존재적 소멸에까지 이른다.
마르셀의 할머니의 죽음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 존재적 소멸이 죽음의 편에서가 아닌 생성의 편으로 탈취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독증에 의한 증상들은 눈멈과 귀먹음은 차례로 다가와 할머니의 얼굴을 흔들어 놓는다. 할머니나 식구들은 이 힘을 외면하고자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듯, 여전히 들리고 보이는 듯 행동한다. 그녀는 죽음 직전까지 이 소멸의 힘 속에서 웅크린다.
“침대 위에 몸을 반원형으로 구부리고, 할머니가 아닌 다른 인간, 그 머리털을 뒤집어쓰고, 그 시트에 누운 일종의 동물이, 헐떡거리며, 신음하며, 경련하며, 이불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RTP(6).37)
소멸의 힘에 의해 신체는 수축하면서 더욱 도드라지는 육체적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숨결과 맥박은 이완 속에서 ‘한 지류’, ‘새소리’로, 거대한 자연으로 이행한다. 그것은 고정된 의미의 말이 아니지만 “말하고 싶은 것이 모조리 이와 같이 흘러나오듯, 참으로 장황하게, 열성 있게. 진심을 토로하여 우리한데 말하고 있는 듯하다”(RTP(6).45) 거대한 우주 속으로 스며든 형상이 표현하는 것은 바로 형상과 풍경을 통과하는, 거대한 이완과 수축의 리듬의 순수한 순환적 시간이다. 이 이완과 수축의 거대 리듬의 구도 속에 형상과 풍경이 소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소멸의 힘을 우리는 카오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익숙한 것들을 삼켜버리는 재난. 프루스트는 이 카오스와 대결한다. 그리고 그와 대결하기 위해 상기하는 것이며 글을 쓰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카오스를 통과해내야만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되찾은 시간, 혹은 새로운 세계는 이미 곁에 있는 세계로서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이다. 이 잃어버린 세계, 우연히 사물들·인상들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세계를 가시화하는 하는 것이 예술의 길이다.
프루스트에게서는 무의식적 기억, 인접성과 아상블라쥬라는 상기의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 감각적 인상들의 가시화가 이루어졌다. 예술은 카오스에서 탈취한 구도를 통해 동일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며, 그것은 이미 새로운 세계이다. 소멸조차도 생성의 편에서 힘으로 포착해내는 것, 그래서 소멸조차 우주적 생성의 무한으로 열리게 하는 세계를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주어준다. 할머니가 남긴 이 비인간적인 ‘미소’만이 되찾은 시간이며 대상이나 주체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서는 감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왕네 집 쪽으로(Du c?t? chez Swann)」라고 이름 붙여진 첫 권은 마르셀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그가 매년마다 부모와 함께 콩브레에서 보냈던 여름 휴가의 기억들이 그려진다. 마르셀이 이 초창기 시절에서 떠올리는 유일한 기억은 잠자리에 들기 전의 인사를 거부했던 연극이다. 그 집안의 친구인 스왕이 저녁마다 찾아오면 당시 열 살배기인 마르셀은 어머니에게 받고 싶어 했던 잘 자라는 뽀뽀도 받지 못한 채 어김없이 잠자리로 가야 했다. 어머니의 관심을 계속해서 잃게 되자 이것이 평생의 상처로 남게 되고, 그 내면적 상처는 이후 마르셀에게 여성에 대한 상실의 불안과 공격적 질투심이라는 형태로 남게 된다. 잠자리 인사의 에피소드가 유년기의 유일한 기억인 반면에, 저 유명한 마들렌 과자 맛의 느낌은 돌연히 유년기 당시에 있었던 인물들, 장소들과 더불어 그의 기억을 다시 살아나게 만든다.
*마들렌- 프루스트 현상의 표상.
제 2권 -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서
사춘기로 들어선 마르셀은 난생 처음으로 성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스왕의 딸인 새침떼기 질베르트를 샹젤리제에서 재미 삼아 만나 잊지 못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천식에 시달리던 마르셀은(프루스트도 그랬다) 열일곱 살 때 그의 할머니와 함께 노르망디 해변의 발베크로 해수욕을 하러 간다. 그곳에서 그는 로베르 드 생 루를 사귀게 된다. 생 루는 대단히 매력적인 젊은이인데, 훗날 동성애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질베르트와 결혼한다. 마르셀은 생 루의 삼촌 샤를뤼 남작도 만나는데, 그는 이후 동성애를 통해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르셀은 발베크에서 자신의 본격적인 사랑의 주인공 알베르틴을 만나게 된다.
제 3권- 게르망트가의 사람들
「게르망트가의 사람들(Le c?t? de Guermantes)」에서는 마르셀이 그의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한다. 그들은 이제 게르망트 저택에 속하는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마르셀은 (늘 그랬던 것처럼) 먼발치에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을 사랑한다. 마침내 그 부인을 만났을 때 그는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실망한다. 당시 사회생활의 중심인 살롱의 끊임없는 대화 소재는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 사건이다.
제 4권- 소돔과 고모라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의 주요 테마는 동성애다. 처음에 마르셀은 우연히 샤를뤼 남작의 동성애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남작은 이 동성애 사건으로 점차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그 사이 알베르틴을 다시 만나게 된 마르셀은 그녀 역시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제 5권 - 갇힌 여자
갇힌 여인(La Prisonni?re)」에서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자기가 있는 파리로 불러들인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기거한다. 알베르틴이 외출하면 그는 질투심에 불타 그녀를 감시한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마르셀의 태도 때문에 알베르틴은 어느 날 아침 그 집을 떠나고 만다.
제 6권- 사라진 알베르틴
「사라진 알베르틴(Albertine disparue)」에서 마르셀은 친구 생 루에게 알베르틴을 수소문하여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마르셀은 알베르틴이 승마를 하다 사고가 나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 7권- 되찾은 시간
제7권이자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 저택으로 마티네를 방문한다. 그 집의 서재에서 마르셀은 문득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런 깨달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소설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처음으로 회귀하게 된다. 마르셀은 이 소설을 쓰게 되고,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비로소 독서를 마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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