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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퍼온글임을 밝힙니다...^^
에릭 사티와 쉬잔 발라동
30년 뒤에야 배달된 러브레터
_ 글: 소설가 조경란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짐노페디>나 <그노시엔>.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처음 쉬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한다. 쉬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다.
툴루즈 로트레크 - 압생트를 마주한 쉬잔 발라동(Gueule de bois), 1887,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
사티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쉬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다. 사티가 쉬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쉬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 위트릴로이다.
그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지만 쉬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그림 속에 나오는 쉬잔(Danse à Bougival, Suzanne Valadon et Paul Lhote), 1883, 보스턴미술관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 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된다.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는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다.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는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 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이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한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 쉬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다. 쉬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 라고.
결국 쉬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쉬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에릭 사티 Eric Satie
시대를 앞서간 기발한 상상력
프랑스 노르망디의 옹폴뢰르에서 태어났으며,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고독을 내면화하며 매사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까탈스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기벽과 독특한 삶은 남다른 상상력의 산물이다. 펠트 모자를 쓴 채 염소 염을 기르고 코안경을 쓴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지금 봐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의 경박하고 괴상한 차림과 거침없고 익살스러운 행동들은 동료 음악가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당대의 음악가들은 사티의 뒤에서 수군거렸는데, 보통은 사티가 사기꾼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어릿광대의 모습을 하고 과도한 음주로 비틀거리며 몽마르트 거리를 활보하는 사티의 모습은 시대에서 튕겨져 나온 반항아, 이단자의 모습이다. 사티는 파리음악원에서 피아노와 화성학과 솔페지오를 배웠지만 규율의 엄격함을 견뎌내지 못했다. 국가가 규범의 총체를 발명해내는 곳이라면, 학교는 그것을 유포하고 개인의 의식에 덧씌우는 기관이다. 사티는 음악원 공부 대신에 국립도서관을 다니며 플로베르의 소설을 읽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들을 읽고 탐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사티는 파리음악원에서 뛰쳐나와 자유를 찾아 보병으로 군대에 들어가는데, 거기 역시 음습한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군대에서 패충열이라는 병을 얻어 제대한 뒤 사티는 파리 몽마르트에 있는 카바레 ‘검은고양이’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꾸린다. 사티는 나중에 카페 ‘오베르주 뒤 클루’로 옮겼는데, 여기서 자기보다 네 살 위인 드뷔시를 만나고 오랫동안 교유를 이어갔다. 두 사람의 음악적 경향은 달랐지만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사티는 자주 점심을 먹으러 드뷔시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1898년부터 파리 근교의 빈민가에 있는 아르쾨유의 한 아파트에서 오래 숨어 지내는 생활을 했다. 아무도 사티의 아파트를 가본 사람이 없다. 염세주의자이자 우울증 환자였던 사티는 아무도 아파트에 들이지 않고 혼자 가난과 고립의 운명을 벗 삼아 살아갔다. 사티는 “삶은 내게는 너무나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내 영지 속에 은둔해 살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창문조차 봉쇄해 외부자의 시선을 차단한 그 아파트에서 사티는 무려 27년간을 은둔하며 살았다.
Ramon Casas가 그린 에릭 사티, 1891.
사티의 사후에 비로소 그 아파트가 공개됐는데, 고장 난 피아노 뚜껑 밑에 쓰레기들이 은닉되어 있었고, 집안은 온통 몇 년 동안 그가 쓰고 버린 물건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그 더럽고 누추한 아파트 내부의 광경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모든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사티도 음악에서의 전통적 형식이나 조성 구조조차 버리고 독창적인 제 길을 걸어갔다. 악보에는 통상적인 연주 기호 대신에 ‘중병에 걸리듯이’ ‘계란처럼 가볍게, ‘이가 아픈 꾀꼬리 같이’와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을 써놓곤 했다.
1차 세계대전 초기에 만난 장 콕토는 사티 음악의 숭배자가 되었다. 장 콕토는 사티의 음악을 두고 “군더더기 없이 쇄신된 건강하고 새로운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청중들은 당대의 평균적 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난삽한 사티 음악에 야유와 욕설을 보내면서 모독을 서슴지 않았다. 사티는 59세가 되던 해인 1925년에 성 요셉병원에서,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이 고독한 삶을 끝냈다. 에릭 사티는 죽고 난 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현대음악을 연 천재적인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고,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랬듯이 사티의 가치는 뒤늦게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티는 그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시대를 앞지르며, 뒤에 올 스트라빈스키나 존 케이지의 길을 먼저 열어갔다.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기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띠고?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갓난아이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 불렀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
_ 에릭 사티의 <일기> 중에서(영화 <사티와 쉬잔>의 마지막 대사이기도 하다.)
사티의 연인 수잔 발라동
샤티가 그린 쉬잔 발라동
쉬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입니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사티는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네요.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쉬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입니다.
사티가 쉬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쉬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 위트릴로입니다.
샤티
Yoshikazu Mera
그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지만
쉬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습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구요.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ㅎ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라니~~참~.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되었고요.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습니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하네요.
쉬잔 발라동이 그린 젊은날의 샤티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
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장콕도가 그린
샤티, 데생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습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죠...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입니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요~~.
쉬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습니다.
쉬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 라고.. ..
결국 쉬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쉬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티는
"나는 진실되지 못한 음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아카데미즘의 미명하에 남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작품을 체면 때문에
프로페셔널리즘이라 쓰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음악을 써야한다는 교훈을
조용하게 그러나 매우 설득력 있게 남겨 준 셈입니다.
사티는 장 콕토의 참여로 발족된
프랑스 6인조의 창작 세계에 방향 설정을 해 준 장본인으로도
평가되며 어떠한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나
근대 프랑스 음악의
실험정신에 좋은 자극을 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1919년 사티의 음악을 접한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 음악은 비제, 샤브리에, 사티 외에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겁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띄고서?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태어나
얼마 안된 아이일때 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 불렀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
에릭 사티, 일기 중에서,
(영화 ''사티와 수잔''의 마지막 대사이기도 합니다. )
만인의 애인 - 수잔 발라동
프랑스 최초의 여류 화가
Suzanne Valadon
(September 23, 1865 – April 7, 1938)
Young Girl in Front of a Window by Suzanne Valadon, San Diego Museum of Art.
Nude to the scratched cover (1865 - 1938)
The Bath, 1905
Woman at Her Toilette with a Servant, c. 1900
Two Women Drying Themselves, 1896
Suzanne Valadon / Les Deux Baigneuses(1923)
Reclining Nude, 1928 Suzanne Valadon
Suzanne Valadon / Nude Female Reclining(1922)
The Blue Room by Suzanne Valadon
Bouquet de fleur par Suzanne Valadon, Musée Albert-André, Bagnols-sur-Cèze, Gard, France
La Ferme du Montcorin à Irigny
Les deux chats
Suzanne Valadon (September 23, 1865 – April 7, 1938)
강렬하고 힘찬 인물묘사와 대담한 색채로 된 작품으로 유명하며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어머니이다.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도움없이 살아야 했다.
여급과 서커스 곡예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1880년대초에 미술 모델이 되어
피에르 퓌비 드 샤반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미술가들을 위해 일했다.
그들의 작품을 틈틈이 관찰하면서 배운 솜씨로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90년경 에드가 드가는 그녀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여 작품을 직접 구입하기도 했으며 친구처럼 지내곤 했다.
1892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894년경 이후에는 판화도 제작했다.
1896년 사업가와 결혼한 뒤에도 계속하여 작품을 제작·발표했다.
1909년 이혼했으며 그 무렵 성숙한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제는 누드와 정물, 초상, 풍경 등이었으며, 대담한 선 및 문양과 더불어 섬세한 관찰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자주 전시회를 가졌으며 1920~3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Suzanne Valadon Weiblicher Akt sich waschend
Suzanne Valadon: Nu, Kohle und Buntstift auf Papier, 29 x 20 cm, Privatbesitz
Portrait of the painter Maurice Utrillo
The Bath. (1908). Suzanne Valadon. Pastel. 60x49 cm. Grenoble: Musée des Beaux Arts
그녀는 몽마르트르에서 많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사랑을 나눴고
모델로서 영감을 주었으며
그들에게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수잔 발라동이 어울린 예술가들은
오늘날 예술사에서
후기 인상파로 알려진 화가들이다.
그녀를 특히 많이 그린 사람들은
르느와르와 로트렉이었다.
그녀는 그들 모두의 모델이자 애인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로트렉과 음악가 에릭 사티와의 사랑은
각별했다.
수잔 발라동은 화가들뿐 아니라
작곡가 에릭 사티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는데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사티는
그녀에게 곧장 프러포즈를
할 정도로 그녀에게 빠졌다.
파리 몽마르뜨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처음 수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로트렉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하는 생각을 한다.
수잔 역시 로트렉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헤어지게 되지만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게 된다.
사티의 대표 곡 중 하나인 [난 널 원해(Je te
veux)]는
사티가 수잔 발라동과 사랑에 빠져 만든 곡이다.
Portrait of Erik Satie
Eric Satie - Je te veux
Je n''ai pas de
regrets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Et je n''ai gu''une
envie;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갈망만은 갖는다:
Près de toi, là tout
près
너의 가까이, 그
곳 아주 가까이서,
Vivre toute ma
vie,
전체 나의 생애를
살아,
Que mon
cœur soit le tien
나의 심장은 너의 것이 되고
Et ta lèvre la
mienne,
그리고 너의
입술은 나의 것이 되고,
Que ton corps soit le
mien,
너의 몸은 나의
것이 되고,
Et que
toute ma chair soit tienne.
그리고 모든 나의 육신은 너의 것이 될
것을
Oui, je
vois dans tes yeux
그렇다. 너의 두 눈속에서 나는
본다.
La divine
promesse
신성한
약속을
Que ton
cœur amoureux
사랑에 빠진 너의 심장은
Vient chercher ma
caresse
나의 애무를
구하러 온다.
Enlacés
pour toujours,
영원히 서로 얽혀,
Brûlés des mêmes
flammes,
동일한
불길로 불태워져
Dans
des rêves d''amours
사랑의 꿈속에서
Nous échangerons nos deux
âmes
우리는 우리의 두
영혼을 교환할 것이다.
Cat Lying in front of a Bouquet of Flowers
Roses in a Vase
Nudes
View from My Window in Genets (Brittany)
Flower vase on a round table
여러 화가들의 모댈이 된 작품들
Toulouse-Lautrec - Potrait de Suzanne Valadon, 1885
Portrait de Suzanne Valadon par Henri de Toulouse-Lautrec
Woman at Her Toilette Henri de Toulouse-Lautrec - 1896
Henri de Toulouse-Lautrec: The Laundry Worker
Suzanne Valadon by Henri de Toulouse-Lautrec
Edgar De Gas / Miss Lola, au Cirque Fernando(1879)
Pierre-Auguste Renoir : Girl Braiding Her Hair (Suzanne Valadon). 1885
Pierre-Auguste Renoir: Umbrellas (1883), featuring Suzanne Valadon at left
"Dance in the City" by Renoir
Renoir / Dance at Bougival(1882-3)
Pierre-Auguste Renoir - Danse à Bougival
Pierre-Auguste Renoir: Profile portrait of Suzanne Valadon, 1885
1885, by Pierre Auguste Renoir
Portrait drawing of Suzanne Valadon by Théophile-Alexandre Steinlen (1859-1923). Gray crayon on beige paper
Summer Shower (models: Suzanne Valadon
and Miguel Utrillo in Rusinol's room above the Moulin de la Galette in Montmartre)
Musée Utrillo-Valadon à Sannois - Val-d'Oise (France)
Musée Utrillo-Valadon à Sannois - Val-d'Oise (Fra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