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학생들 주도로 시작되어 1단계,
상인과 노동자가 합류하면서 중소 도시로 번지고 2단계, 뒤이어 농민들까지 가세하여
무장투쟁으로 발전합니다 3단계.
3·1운동의 규모를 살펴보면,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당시 우리나라 추정 인구
1700만 명 중 총 200만여 명이며 일본 군경에 살해당한 사람은 7500여 명, 부상자는
1만 6000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 7000여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20여호,
교회가 50여 개소, 학교가 2개소였습니다. 집계된 숫자보다 집계되지않은 수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국민이 나라의 독립을 외치다가 희생당한 것입니다.
이후 3·1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로도 번져나가 일본, 만주, 연해주, 미주 등 해외
곳곳에서 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제암리 학살이라는 끔찍한 사건도 벌어집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 군경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에서
마을사람 30여 명을 교회로 불러 모읍니다. 그러고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후
집중사격을 퍼부어 무고한 민간인들을 마구 학살하죠. 아기만은 살려달라는 부녀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 아기마저 잔혹하게 찔러 죽였다고 하니 그 잔혹함에 치가 떨립니다.
그것도 모자라 교회에 불을 질러 충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모두 죽이고, 모든 증거도
없애버려요. 여기에 더해 부근의 민가도 서른한 채나 방화하여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일제의 이 같은 만행에 분노한 선교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사진에 담아 보고서를 작성, 미국으로 보내 여론화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민간인에게 저지른 만행 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사건입니다.
-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