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1)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상)
공산정권 어둠 속 음악으로 구원의 희망 증언
현대인들과 음악, 그리고 영적 체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은 언제라도 음원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삶에서 음악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지하철에서,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이어폰을 끼고 주변과 분리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머무는 모습은 일상의 풍경입니다. 원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쉴 새 없이 음악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거리를 걸을 때 이러저런 음악이 들려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고,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간에 들어섰을 때, 대개는 음악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음악이 그저 소리로, 심지어는 소음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노래 한 곡이 우리들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차가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을 체험할 때마다, 새삼 음악이 ‘도시의 광야’를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귀중한 ‘지상의 양식’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좋은 음악은 정서를 어루만져주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때로는 사람들을 영적인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음악이 영성을 담고 표현하는 탁월한 도구라는 뜻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직접적이며 생생한 영적 체험의 순간을 만나게 하는 ‘영성의 샘’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신앙의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기도인 ‘시편’이 노래라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서양 음악사에서 근대 시대가 도래하기까지는 성경 말씀과 전례문, 공동체가 고백하는 신앙내용, 개인의 삶 안에서의 신앙과 영적인 체험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성음악’(Sacral Music)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성음악들은 시대를 넘어서 언제나 새롭게 신앙인들에게 영적 회심과 신앙적 통찰의 계기를 주었습니다.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레고리오 성가와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b 단조 미사’, 헨델의 ‘메시아’와 모차르트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들으며 정서적 감동과 미학적 숭고함을 넘어 영적 차원의 변화를 체험했고 지금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숙고하고 관조하는 삶의 방식을 불필요하게 여기고, 마음은 삭막해지고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지며 관계는 피상적이 되어 마침내 종교적 체험도 울림 없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우리가 사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이러한 음악의 영성적 힘은 더없이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우리 시대에도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처럼 우리에게 진정한 영성적 자각을 체험케 하는 음악이 여전히 쓰여지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 자체도 매우 다양하게, 그래서 때로는 왜곡된 의미로 쓰여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요즘입니다. 그러기에 영성적 음악이라 하면 먼저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어느 정도는 도피적 정서를 만족시키는 ‘뉴에이지’ 음악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성’이란 말 속에 담긴 체험의 풍요로움과 의미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영성’을 식별하는 수고로운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문을 열어주는 우리 시대의 음악을 만나기 위해서는 작곡자만이 아니라 듣는 이도 갈망과 개방성과 결단을 간직한 구도자이자 모험가의 자세를 지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분열되고 상처 입은 시대를 감싸 안으면서, 동시에 시대정신을 거스를 줄 아는 예언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간직한 음악은 나른함과 사탕발림의 영성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도전을 대면하는 용기를 표현해야 하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신비체험에서 감도는 침묵이야말로 언제나 영성의 원천임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구원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희망을, 깊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우리 시대의 음악을 기다리게 됩니다. 아마도 이처럼 현대 음악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샘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Arvo Part, 1935~)의 음악과의 만남은 놀랍고 반가운 사건이 될 것입니다.
아르보 페르트의 ‘요한 수난곡’을 듣다
아르보 페르트는 오늘날 가장 널리 연주되는 현대음악 작곡가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자신의 중요한 성악곡들의 텍스트와 주제 대부분을 성경과 전례문에서 가져오기에 교회합창 음악가로 분류되지 않는, 저명한 현대음악 작곡가들 중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치밀하게 음악언어를 탐색하면서도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적 영성을 일관되게 음악의 핵심적 요소로 삼고 있는 그의 음악은 그 자체가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 영성적 가치를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스토니아의 파이데에서 태어난 그는 에스토니아가 아직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에스토니아 수도인 탈린의 음악원에서 그의 스승 하이노 엘러 밑에서 작곡 수업을 하는 한편 탈린 방송국에서 음향담당을 하며 당시 서방의 가장 전위적인 음악작품들을 풍부하게 듣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공산진영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벨라 바르톡에게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풍의 작곡에서 시작하여 그는 점차 당시 서방 음악 작곡계의 중심 움직임이었던 ‘12음 기법’과 ‘음열주의’를 선구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공산주의 문화계 간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요주의 대상이 되는 계기가 됩니다만, 정작 시간이 지나 동구권 작곡가들도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는게 일상이 되었을 때 그는 이런 흐름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음악과 영성이 만나는 시원을 탐구하며 새롭고도 오래된 음악언어를 모색해 갑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그가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며 받은 감동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종소리’를 뜻하는 어원에서 온 ‘틴틴나불룸’(tintinnabulum)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게 되는 음악적 방향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음악 기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성경 묵상에서 오는 신앙적 확신과 영성적 체험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한 초기의 대표곡이 바로 요한 복음 18-19장 수난기의 불가타 라틴어 번역을 텍스트로 삼은 ‘요한 수난곡’(Passio Domini nostri Jesu Christi secundum Joannem)입니다. 바리톤이 맡은 예수님, 테너가 맡은 빌라도, 4중창의 복음사가, 거기에 바이올린, 오보에, 첼로, 바순이 하나씩 선율에 참여하고 오르간이 곁들여지는 소규모지만 극히 정교한 편성을 지닌 이 곡에서 페르트는 수난 복음의 낭독 그 자체로 가장 깊은 영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음악 미학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도 공산주의 정권 치하였음에도, 명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음악적으로 또 공적으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는 큰 논란이 되었고, 그는 결국 1980년에 가족과 함께 사실상 추방 위협 속에서 독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0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2)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중)
“작곡이란 절대자 앞에서 느끼는 겸허함 담는 것”
신앙고백과 새로운 음악언어의 추구
아르보 페르트는 6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시도되는 현대 음악의 다양한 전위적 기법들을 섭렵하며 다양한 작품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이러한 현대음악의 정형화된 실험들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됩니다. 1968년에 그가 내놓은 작품 ‘크레도’(Credo)는 자신의 초창기 작품경향의 요약이자 동시에 이와의 결별을 암시한 의미심장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곡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 나오는 C 장조 전주곡으로 시작하여 무조음악의 날카로운 파열음들로 현대의 위기를 묘사한 후 다시금 바흐의 음악으로 마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여러 음악을 조합하여 재구성하는 ‘콜라주’ 기법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이 곡이 탈린에서 명 지휘자 네메 예르비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 이른바 ‘크레도?스캔들’을 일으킵니다. 음악미학 때문이 아니라 이 곡의 제목과 가사인 전례문이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곡가의 신앙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공식적으로 유물론적 무신론이 견지되던 상황에서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에게 많은 시련을 가져오게 됩니다만, 그는 음악미학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거하고 영성을 깊이 추구하는 삶의 길을 그 이후로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견뎌내고 첫 번째 결혼의 실패 등 개인적인 정신적 위기를 넘기며 새로운 음악적 길을 찾는 동안 그는 거의 어떤 음악도 발표하지 않으며 긴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전통대로 어린 시절 루터교에서 세례를 받았던 그는 이 은거의 시기 동안 동방 정교회 영성에 깊이 매료돼 러시아 정교회에 입교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그가 수도승들의 기도와 고요함의 전통에 접근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정신적, 영적 위기를 극복했을뿐더러 음악을 작곡하는 행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됩니다. 그는 작곡이 절대자 앞에서 체험하는 겸허함과 침묵에서 얻는 고요함 평화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언젠가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체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러시아에서 한 수도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하면 작곡가로서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수도사는 내게 답하기를 자신도 해결방안이 있지는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내가 지금 기도를 쓰고, 기도문이나 시편에 곡을 붙여보곤 하는데 이런 것이 혹시 도움이 될까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닙니다. 틀렸어요. 모든 기도는 이미 쓰여 있습니다. 당신은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준비하셔야 합니다.’ 저는 그 수도사 말 안에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래가 어느 날에는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위대한 예술가에게도 그가 더 이상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거나 만들 필요가 없는 순간이 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그때 그의 창작을 더 높이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작품’을 넘어선 순간에 다다른 것이니까요.”
침묵과 고요의 음악
페르트 음악에 정교회 영성이 깊은 영향을 주고 있지만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레고리오 성가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를 자신의 음악 언어에 도입하려 시도하며 라틴어 전례의 본문들을 깊은 존중감을 가지고 연구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두 번째 부인 노라와 결혼하고 가정적 안정도 찾으면서 1976년, 마침내 비로소 침묵의 세월을 끝냅니다. 10월 27일 연주회에서 ‘틴틴나불리 조곡’을 발표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그의 음악을 상징하는 ‘틴틴나불리’라는 음악미학이 꽃 피었음을 세상에 알립니다.
‘틴틴나불리’는 종소리(Tintinnabulum)라는 뜻의 라틴어 복수 2격형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페르트는 자신이 중세 때 지어진 성당들 종소리와 같은 숭고한 단순함과 들리지 않게 감싸고도는 충만한 침묵과 고요를 간직한 음악미학을 추구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침묵과 고요는 결코 ‘뉴에이지’적인 심리적 평안함을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에 뿌리내린 영성적 체험과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07년 5월 4일 독일의 유서 깊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가톨릭 신학부는 이례적으로 아르보 페르트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합니다. 당시 축하 강연을 한 신학자 헬무트 호핑(Helmut Hoping)은 페르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침묵과 고요의 미학이 그저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깊은 영성과 신학을 담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로마 가톨릭 전례에서 입당송으로 사용되고 있는 ‘솔로몬의 지혜’(Sapientia Salomonis)에서 따온 한 옛날 성탄절 성가 가사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침묵의 시간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 계시를 담은 하느님 말씀에 대해 듣게 됩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4-15) 이러한 하느님 말씀이 페르트의 ‘틴틴나불리’ 음악을 오늘날까지 깊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스러운 음악은 음악의 시학 형태를 한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청자를 ‘침묵의 고요’로 이끕니다. 그 안에서 듣는 이는 인간이 내는 소리가 아닌 또 다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3)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 (하)
영혼을 비추는 음악, 사랑과 구원 갈망 담아
아르보 페르트의 여정과 그의 벗들
아르보 페르트는 침묵과 성찰, 모색과 시도의 긴 시간 속에서 시대를 위로하면서도 시류에서 자유로운 ‘영원함’의 흔적을 담을 수 있는 고유한 음악의 길을 발견합니다.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새롭고도 영적인 영감이 깃든 곡들을 잇달아 내놓고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안에서 페르트는 그의 신앙고백과 음악관에 대한 당시 정권과 예술계 관료들의 비판, 다른 음악가들의 질시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그는 기관원들로부터 스스로 이민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위해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번 받습니다.
결국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주 장소를 찾는데 난관을 겪었지만 저명한 음악가 알프레드 쉬니트케가 연결해준 한 음악 출판사 도움으로 난민수용소에 머무는 대신 바로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에게 빠른 시간 안에 국적을 부여합니다.
이후 그 다음 해에 역시 쉬니트케의 도움으로 독일정부로부터 최소한의 안정적인 생활과 창작을 위한 여건을 가능하게 하는 장학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베를린으로 이주해서는 서방에 정착하여 음악 창작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베를린은 계속하여 그의 거주지로 남습니다. 그가 베를린이라는 도시와 맺고 있는 각별한 관계는 1990년 베를린대교구에서 개최된 90번째 ‘가톨릭의 날’(Katholikentag)을 위해 작곡한 ‘베를린 미사’(Berliner Messe)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성전에서의 미사 전례를 위한 음악입니다. 이 곡에서 ‘틴틴나불리’의 음악미학은 로마전례의 경건하고 간결한 고유양식에 잘 녹아들고 있습니다.이 곡은 1990년 5월 24일 베를린대교구 성 헤드비히 대성당에서 봉헌된 ‘가톨릭의 날’ 정점이 된 장엄미사에서 연주되었습니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음악에 전념한 페르트는 잇달아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았고 그의 음악은 독일어권을 넘어, 전 유럽과 특히 영국으로, 이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2010년, 노년에 이른 아르보 페르트는 비로소 자신의 고국에 거처를 마련하고 긴 여정 끝에 귀향합니다. 아르보 페르트는 서방으로의 이주 이후 새로운 작품을 작곡했을뿐더러 자신이 예전에 내놓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수정 보완하고, 그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연주자들을 통해 실연해보려 애씁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음악을 알아보고 완벽에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동반자들을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영국의 성악가이자 지휘자, 음악학자인 폴 힐리어(Paul Hillier)였습니다. 그는 정교하고 완벽한 가창과 뛰어난 곡해석, 틀에 박히지 않는 음악적 모험으로 유명한 고음악 단체 ‘힐리어드 앙상블’(Hilliard Ensembles)의 공동 창립자로서 1990년까지 이 단체의 일원이었습니다. 또한 음악학자로서 페르트의 음악미학에 대해 중요한 연구와 저서를 남긴 사람이기도 합니다.(1990년 이후에는 자신이 창설한 성악그룹 ‘Theatre of Voices’를 통해 페르트의 후기 걸작들을 뛰어난 연주와 녹음으로 전 세계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폴 힐리어를 통해 페르트는 자신의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과 영적인 힘을 ‘힐리어드 앙상블’의 탁월한 연주로 구현할 수 있었고 또 많은 이들을 매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요한 수난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처음 뮌헨의 루카스 교회에서 초연되었을 때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에 입각한 수난복음의 영창과 그 음절 사이 침묵에 청중들이 익숙하지 못한 것도 이유였지만, 연주자들 역시 이 곡의 낯선 기법과 정신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힐리어드 앙상블은 작곡가 페르트마저 탄복한 완벽한 음악적 테크닉과 해석력, 곡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 이 음악의 가치를 연주회에서, 녹음에서 잘 드러냈습니다. 이 곡 외에도 폴 힐리어와 힐리어드 앙상블을 통해 ‘데 프로푼두스’(De Profundus)나 ‘칸타테 도미노’(Cantate Domino) 같은 페르트의 전환기 이후 중요한 곡들이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페르트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한, 또 한 명의 벗은 독일 재즈 음악가이자 음반 제작자인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였습니다. 아이허는 20세기 후반기 이후 가장 혁신적인 음악 레이블인 ECM 레코드를 설립하고 키워온 사람입니다.
새로운 유형의 실험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한 재즈 명반들을 제작하던 그는 우연히 차에서 방송되던 페르트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음반을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현대음악과 고음악, 클래식 음악, 민속음악 등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다양한 음악을 넘나들며 투명하고 심오한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ECM 뉴시리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페르트가 이탈리아 음악학자 엔조 레스타뇨와의 대담에서 여전히 감탄하며 회고하듯, 아이허는 놀랄만한 정열과 장인적인 능력으로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 앨범 ‘타불라 라사’를 1984년에 내놓았습니다. 이 앨범은 페르트의 음악을 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 바이올린 주자 기돈 크레머가 참여한 이 앨범은 ‘프라트레스’(Fratres 형제들이여) ‘칸투스’(Cantus 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찬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빈 서판/순수한 마음) 등 그가 ‘틴틴나불리’ 기법을 확립한 후 아직 에스토니아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대표작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앨범이 나왔을 때 그의 음악은 한동안 필립 글래스나 스티브 라이히 같은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들이 주도한 ‘미니멀 음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르보 페르트의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라이히의 도시적인 사고와 감수성, 필립 글래스의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에 영향받고 뉴에이지적 경향을 지니는 종교관이 다르듯, 페르트의 음악적 방향 역시 현대의 미니멀 음악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비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침묵과 고요를 추구하는 음악이 지니는 독자성은 점점 더 함께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었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음악은 세월과 함께 ‘틴틴나불리’라는 기법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렵게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자비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길을, 빛과 사랑의 침묵과 공허하지 않는 고요를 담은 소리 속에서 탐구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할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이 그의 음악은 ‘프리즘’처럼 우리의 영혼을 드러내고 청자로 하여금 내면에 깊이 간직된 사랑과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을 만나게 합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4)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상) : 성 필립보 네리
“험담은 바람에 흩어지는 닭 깃털과 같다”
성 필립보 네리봄이 왔습니다. 만개하는 꽃들의 성찬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꽃향기와 새소리가 우리의 감각에서부터 내면의 생명력을 깨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부활성야를 밝히는 부활초처럼 우리 존재를 비추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생동하는 자연과 함께 이제야 조금씩 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한들, 봄이 왔다 한들, 나를 짓누르고 고심하게 하고 불면의 밤으로 이끄는 근심들이 어디로 가겠는가”라는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 옆에서 빛을 밝히는 부활초에 눈길을 보내면서, 찬란히 피어나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내 마음으로 돌아와보면, 문득 세상의 계산과 예측과 상관없이 출구 없는 방에 빛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울함과 낙담의 한 가운데서 나는 어느새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나 봅니다.봄날, 우울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오히려 더 큰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는 이 시절에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압도하시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미풍처럼 다가오신 것처럼 상처 입고 좌절한 심정을 잘 알아주고 때로는 인자한 웃음과 유머로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고, 독려하기에 앞서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는 성인들이 그리워집니다. 부활의 여운이, 들리지 않되 공간을 채우는 종소리처럼 가득한 이즈음에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을 새롭게 발견하며 우리도 용기를 얻고 일상 안에서 부활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이라는 제목으로 그런 분들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바로 성 필립보 네리와 코베르티노의 성 요셉, 그리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입니다.
기쁨 속에 복음을 사는 삶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이자 화려한 예술의 도시였던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삼촌에게서 상업가로서의 도제교육을 받았지만 젊은 시절 이미 그는 복음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는 생활에서 더 큰 기쁨과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삼촌을 떠나 로마로 갑니다. 애초엔 신학 공부를 염두에 두고 로마에 온 그였지만, 그에게는 복음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밤에는 카타콤바에서 기도하고, 낮에는 애덕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도시의 수도사’ 같은 삶을 그는 선택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우아함과 세련됨, 화려함이 숭상되었고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애덕의 실천과 계명의 준수가 시대에 뒤처진 고루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는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하며 주님의 좋으심과 선행의 아름다움을 전했습니다. 매일매일의 밥벌이에만 얽매이게 되는 가난한 사람이든, 자신의 부와 권력에 도취해 있는 상류층 인사들이든 그들이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려주려 애썼습니다. 그의 타고난 유머와 따뜻함, 촌철살인 같은 재치는 사람들을 위축감이나 거부감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변화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이 35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계기가 생깁니다. 그것은 일찍부터 그가 자신의 중요한 소명으로 생각한 것이었는데, 로마로 오는 수많은 가난하고 지친 순례자들을 돌보기 위해 그의 고해사제인 페르시아노 로사 신부와 함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형제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이제 그와 그의 형제회는 가난한 순례자를 위해 침대가 있는 집을 마련하고 그들을 돌보는 데 전념합니다. 이러한 애덕활동이 얼마나 큰 결실을 맺었는지는 형제회 설립 25년이 지났을 때, 그간 돌본 순례객들이 수십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필립보 네리 신부가 일찍부터 얼마나 아이들을 위해 애썼는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애썼습니다. 평신도 설교가이자 애덕의 사도로 이미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는 주변의 강한 권유로 1555년 마흔의 비교적 많은 나이에 비로소 사제직을 받습니다. 사제직을 받은 후 인도로 선교를 위해 떠나려 했지만, 한 고해사제로부터 “당신의 인도는 로마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로마에 남기로 결심합니다. 사제가 된 그는 사목자로서 따뜻한 마음과 헌신, 유머로 교우들을 돌봅니다.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웃의 험담을 즐겨하는 한 부인에게 준 그의 고해성사 보속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네리 신부는 그녀에게 닭의 깃털을 로마를 돌아다니며 뽑고 난 후 다시 돌아오라고 보속을 주었고, 이윽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 성인은 그녀에게 다시 그 깃털을 모아오라고 명합니다. 그녀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닭의 깃털은 이미 바람에 다 흩어져 버렸으니까요. 이는 험담한 말이 상대에게 주는 피해는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느끼게 한 것이었습니다.
성인은 뛰어난 사목자였으며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데 열정적으로 투신한 애덕의 사도이자 사회사목의 선구자였지만 또한 깊은 영성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고 거주하던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에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오라토리오 회’를 창설했습니다. ‘기도방’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오라토리움’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이름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전례를 거행하던 장소에서 따왔습니다. 일종의 수도회이지만 그는 일반적인 수도회와는 달리 수도원 건물이나 자세한 회헌과 서원 대신에 세상 안에서 ‘오직 애덕만을 규칙으로’ 삼아 함께 동고동락하는 공동체를 원했습니다. 오라토리오 회는 그 후에 구호활동만이 아니라 전례와 성음악 발전에도 크게 기여합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이미 생전에 로마의 신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고위 성직을 내리려는 교황의 뜻도 완곡히 사양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다가 1595년 5월 25일 모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십자가로 강복한 후 선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바람대로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릅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의 영성에 대해 그가 세운 오라토리오 회 회원이기도 한 현대의 저명한 영성학자 루이 부이에는 “그처럼 큰 초자연적 은총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신비적 체험을 일상의 상식과 잘 결합시킨 성인은 거의 없다”고 요약합니다. 한편 역시 오라토리오 회 회원이었던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이 선택한 인생의 모토인 ‘마음이 마음에게 말한다’(Cor ad cor loquitur)라는 문구 역시 그 창립자의 정신을 잘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기쁨 없는 덕은 참된 덕이 아닙니다”라는 성인의 말을 이 봄날에 마음에 새기며 그분과 함께 미소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5)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중) : “하늘을 나는 수도사” -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
스스로를 비웠기에 날아올랐다
천사는 자신을 가벼이 여기기에 날 수 있었음을…
“새가 본성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힘 안에는 그 스스로를 공중에 지탱시키는 일종의 가벼움이 있다. 기적사의 연구가들은, 연구하는 학자들은 ‘공중 부양’이 위대한 성인들의 특징임을 진지하게 인정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나아가서 위대한 성자들의 특징은 엄숙함을 피하고, 경박해질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만함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려 쉽게 엄숙함에 이르게 하고, 일종의 자기중심적인 심각함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에 집착하지 않는 명랑함으로 올라와야 한다.… 자기자신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마치 본성적인 경향과도 같아 쉽게 행하게 된다. 반면에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사탄은 중력에 의해 추락하였다.” - G.K.체스터튼의 「정통」 중에서
추리소설인 「브라운 신부」 단편들로 잘 알려진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이며 20세기에 활동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자’라고 할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이 1908년에 출판한 「정통(오소독시)」은 근대 문화와 세태에 대한 예리하고 근본적인 비판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열정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변호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근대인들이 빠져있는 ‘힘’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지적하면서 위에 인용한 것처럼 하늘을 나는 천사의 ‘가벼움’이 지닌 영성적 의미에 대해서 인상 깊은 성찰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시대 이래 사람들은 탈혼에 결부된 공중부양의 현상을 한 성인의 성성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날아오르는 성인’이라는 표현을 듣게 될 때 그저 하나의 은유처럼 받아들이기 마련이겠지만, 실제 교회 안에는 백여 번 넘게 공중부양의 은사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하늘을 나는 수도자’로 불린 성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 공중에 뜬 것이 아니라 탈혼 중에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랐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목격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체스터튼이 그리도 그리워했던 덕성인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겸손과 단순함과 유쾌함을 지니고 많은 이들을 미소 짓게 했던 성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쥬제페 데사, 곧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1603~1663)입니다. 살아서 이미 성인으로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그는 1767년에 공식적으로 시성되었으며, 역시 미소와 쾌활함으로 잘 알려졌던 요한 23세는 20세기의 과학발전에 발맞추어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을 모든 비행사와 우주비행사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겸손함, 단순함, 쾌활함, 그리고 인내
성인이 살았던 17세기는 교회와 유럽사회가 종교분열이라는 커다란 혼란과 시련을 겪은 후 학자, 신비가, 교회행정가, 사회적 애덕의 선구자 등 다양한 방향에서 위대한 성인들이 연이어 나타나 영성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질서를 재정립하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성인의 시대에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과 소박함, 그리고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쾌활함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해주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미소를 전해주는, 작은 보석같이 반짝이는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이 태어난 코페르티노는 장화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이탈리아 지도의 뒤축쯤에 위치한 브린디시라는 도시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가난한 목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고 곧 사망했기에 그의 어머니와 그는 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헤벌린 입’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듯이 착하기만 하고, 재빠르거나 능란하지 못하여 그의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기술을 익혀 장인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은 가망 없는 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그를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한 갈래인 카푸친회의 수사로 살게 하려 했지만 그는 카푸친회가 요구하는 수도원 일과 규율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서툴렀습니다. 다행히도 집안에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신부가 있어서 그는 성모성지로 유명했던 그로텔라의 수도원에 입회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제3회원의 신분으로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그의 순박하고 깊은 신심과 착한 품성이 점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서, 정식 수련자로 받아들여지고 마침내는 사제직을 준비하도록 선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공부에는 재능이 없었기에 사제직에 요구되는 지적인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걱정하였지만 그에게는 우리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는 주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시험관은 직접 교구의 주교가 맡았는데 첫 번째 시험에서 주교가 요구한 복음서 암기 문제는 공교롭게 그가 유일하게 외울 수 있었던 루카복음의 한 대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에선 주교의 갑작스런 바쁜 일정으로 그에게는 질문이 생략되어 그냥 통과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그래서인가요? 그는 언제부터인가 ‘수험생들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사제직을 수행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 없이 수도회의 가장 허드렛일을 기쁘게 한 그는 미사나 기도 중에 깊이 잠심하곤 했으며, 가끔씩 탈혼 중에 제대 위까지 날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신 깊은 사랑에 충만하여 그를 찾는 수많은 시름에 잠긴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평소에는 어눌하고 아둔하게 보였던 그가 이럴 때는 놀랍게도 사람의 내면을 깊이 통찰하며 적절한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한 마리 ‘나귀’에 즐겨 비유할 정도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사랑만이 아니라 지독한 질시와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서 다른 수도원으로 유폐되어 공적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금지당하기도 하는 시련의 시기를 인내와 겸손으로 견뎌야 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1657년 그는 오시모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과의 만남은 제한을 받았습니다. 영성작가 크리스티안 펠트만에 의하면 그는 1663년 오시모 수도원에서 마지막 미사를 마치고 선종할 때 미소 지으며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이제 나귀가 산을 오르는 것을 시작하는구먼….”
능력과 똑똑함만이 인정받는 시대에 ‘하늘을 나는 수도자’가 시련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어린이다운 단순성과 겸손함, 그리고 쾌활함이 우리를 미소 짓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줍니다.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6)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하) :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는 미소 잃지 마세요”
19세기 중반 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의 법과생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1813~1853)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도움을 위해 설립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애덕과 봉사 활동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회의를 겪던 청년 오자남은 뜻을 같이 하는 벗들과 함께 1833년 ‘역사 연구회’를 만들어 격동의 사회 속에서 참된 가치가 어디 있는지를 모색하고 토론하며 마침내 사상적 혼돈을 이겨내고 다시금 신앙의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러한 지성적 차원의 쇄신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생시몽주의’라 불리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에 경도된 한 학우에게 받은 다음과 같은 질문은 그를 깊이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때 교회가 위대하였고 선의 원천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들의 활동을 알려주면 우리도 당신들을 믿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난한 이들을 물질적으로 돕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며 정신적으로도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활동 단체를 조직하게 되고 이 단체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라고 부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주보성인인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프랑스어로는 뱅상 드 뽈, Vincent de Paul, 1581~1660)는 교회의 평신도나 성직자들이 가난한 이들의 영적 구원만이 아니라 물질적 가난과 비참함을 덜어주기 위해 개인적 자선행위의 범위를 넘어서 ‘조직적’으로 헌신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대에 선구적으로 사회적 애덕활동이 교회의 참 소명임을 보여준 사목자였으니까요.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의 삶과 영성이 오늘에 주는 의미
빈첸시오 성인은 프랑스 닥스 지방 뿌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이 살아낸 시대는 프랑스가 유럽정치와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위대한 세기’였지만 동시에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가혹한 시대였습니다. 특히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이 상징하는 종교 전쟁과 상류층의 사치 향락은 수많은 힘없는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굶어 죽고, 고아가 되는 비참한 현실을 자아냈습니다.
성인의 어머니는 일찍이 그가 사제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했고, 실제로 그는 여러 유력한 은인들의 도움을 얻는 행운 속에 스물이 채 안 된 나이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동기에는 많은 부분 가난한 가정을 일으키려는 세속적 절박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참 후에 스탕달이 소설 「적과 흑」에서 묘사했듯, 그 시대에는 사제직이 가난한 집 출신의 아이가 신분상승을 하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삶의 시련과 영적 고뇌를 통해 어느덧 이런 동기를 정화하고 내적으로 회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젊은 시절부터 많은 유력가들의 가정교사 내지는 개인적 지도 신부로 활동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최상류층과의 개인적 친분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유명한 왕비 마고의 자선활동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고, 앙리 4세와 개인적 교류를 했으며, 루이 13세의 임종을 지켜주었고, 당대의 최고 실력자 리슐리에 추기경, 마자랭 추기경과도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함대 사령관이자 그의 세 아들이 모두 파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던 공디 백작 및 백작 부인과의 친교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상류 사회와의 교류에서 개인적 이익, 명예, 지위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그러한 분위기에 휩싸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저 ‘벵상’씨라고 부르게 하며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난한 이였음을 잊지 않고 평생 가난한 이, 병든 이와 함께하는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맺고 있는 고위층과 귀족들과의 친분을 오직 가난한 이들을 실질적으로 돕는 애덕 행위와 그러한 애덕활동을 위한 단체 조직에만 선용하였습니다. 그는 공디 백작 함대의 겔리선에서 비참하게 일하는 도형수들을 진심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이들, 얼어 죽어가는 버려진 아이들을 돕기 위해 라자로 회와, 애덕의 부녀회, 애덕의 자매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스스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애덕회 일원이 되어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여러 애덕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이 회의 목적이 가난한 이들을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신적으로도 돕는 데 있으므로 위에 말한 가난한 이의 봉사자들은 병이 나은 사람들은 더 착하게 살도록, 죽을 때가 된 사람들에게는 잘 죽도록 준비시키기를 힘쓸 것이며, 이렇게 하도록 전념할 것이다.” 그리고 애덕의 자매회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기도와 미사성제를 떠난다고 해도 거기에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아세요.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은 하느님께 가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하느님을 보고, 그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그가 복음에서 확신한 실천적 삶이었으며, 이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인들에게도 큰 힘과 귀감이 됩니다. 절망감이 만연하고 가치관의 혼돈이 심했던 종전 직후의 프랑스에서 성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뱅상씨’(므슈 뱅상·Monsieur Vincent)가 개봉하였고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과 시네마 프랑스 대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휩쓸기도 한 이 영화의 성공은 소명에 투철하며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장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 모습을 얼마나 사람들이 갈구하는지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병고와 싸우면서도 가난한 이와 끝까지 함께하는 노년의 빈첸시오 성인이 젊은 봉사자에게 당부합니다. “그들에게 미소를 잃지 마십시오.” 그저 편안함과 안락함에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각고의 투신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얼마나 값지고 행복한 것인지 성인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