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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의 시학
김 미 라/문학평론가
시인 이경숙의 오늘은 ‘어제의 살결을 만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깊은 겨울, 줄곧 턱을 괴고 앉아 오래된 눈사람과 오지 않은 눈 사이에서 ‘골똘’해지곤 한다. 그는 시집 눈물의 탄생을 통해 지성주의적 질서를 거부하고 관능적 지각을 통해 사유한다. 시인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지각하는 ‘몸’이다. 그의 감각은 전방위적으로 부채살처럼 퍼져 나간다. 사랑의 체험이 이동하고 다시 시작하고 되풀이되면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랑을 향한 그의 욕망은 강제된 죽음 속에서도 죽지 않고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이로써 사랑은 시인에게 삶의 전부가 아닐까 짐작해 보게 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우물 속에 던진 두레박 속에서 연민 같은 것들이 딸려 나온다. “견고한 붙박이의 속성은 견딤이라고/싱크대 앞에서 자발적으로 했을 그날의 요리”(「분리수거」)와 같이 그가 견디어 온 삶의 흔적들을 만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삶의 완성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으로 이뤄져 가는 일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시간이 묻어나는 시편들을 대하는 일은 각각의 스토리를 품은 빈티지 가구를 소개받은 듯, 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 된다.
# 므네모시네의 램프
화가 가브리엘 로제티의 그림(Dante Gabriel Rossetti,1876~1881,<므네모시네 여신>)에는 여신 므네모시네가 손에 램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기억 혹은 회상’(Ricordanza)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신의 손에 등불이 들려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가 삶의 거대한 아카이브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몸 구석구석 등불을 들고 밝혀 보이는 일은 곧 ‘기억’을 호출해 내는 일이고,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아홉 명의 뮤즈를 낳아 이들이 각기 다양한 형태로 작가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 신화들은 므네모시네가 거의 최초의 신들인 하늘과 땅의 딸이라는 점에서 ‘기억’의 중요성을 실감케 하는 상상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삶에서 기억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발가락을 간지렵혀 몸을 일으킨다 누굴까 문 밖에서 (「악몽-저녁이 오는 시간」)
잠들지 못한 밤은 빗줄기로 더욱 거세진다. 떠나보내도 괜찮은 건 없다고 격렬하게 쏟아놓는다 (「폭우」)
사라진 뒷면이 꿈틀거린다 울퉁불퉁하다 얼룩덜룩하다 (「오늘」)
모조리 삼키면 괜찮아질까! 징글징글한 빨강, (「빨강」)
세상에 모든 밤들이 안녕하지 않았으면 그러므로 세상에 모든 일들을 용서하지 말았으면 (「폭우」)
아무것도 모른 채 내가 나를 삼키던 날의 연속이었다. 어제의 그날은 늘 뒤늦게 도착했다. (「고스트라이터」)
그것들은 화자의 ‘오늘’에 다양한 형태로 들어와 묵직한 질감으로 ‘배어’ 있다. 또한 고르지 못한 어제의 그 날들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해 있다. 화자에게 현재는 기억으로 지각知覺되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기억인 의식은 언제나 지각遲刻한다. 지각 작용은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의식의 과정이다. 첫 번째로 나타남과 두 번째로 나타남이 갖는 내용은 서로 구별되는데, 첫 번째 지각을 하는 순간에 두 번째 지각은 아직 오지 않은 지금인 반면, 두 번째 지각을 하는 순간 이미 첫 번째 지각은 이미 지나간 지금이다. 지각 작용과 마찬가지로 내재적 내용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식은 언제나 현재의 순간에 늦게 도착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현재를 결코 현재로서 의식할 수 없다. 의식이 현재를 과거로서만 의식한다는 것은 곧 의식이 현재를 ‘기억’한다는 의미이고, 그러므로 의식은 언제나 ‘기억’이다.
휘청거리는 찰나
(...)
발보다 먼저/몸을 바닥에 닿게 한/몸을 사라지게 한/이 찰나를 기억하는 것, 하여
(...)
앞길의 낙차落差를 몸으로 쓴 날
- 「삐끗」 부분
데리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오직 맹인이라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다. 보지 못함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찌르고 있는 지점을 보지 못한다. 못 보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현재 순간과 결코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 지점에 대해서 맹목盲目적이라는 말이다. 화가가 자기 자신을 그릴 때, 그리는 순간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화상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본 후에야 그 기억을 토대로 그리는 ‘기억의 작업’이듯이 시인에게도 역시 펜의 끝부분, 즉 ‘근원적인 지점’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그 지점은 언제나 글쓰는 이를 피해서 도망간다. 물론 시인은 현재의 찌르는 순간에 볼 수 없었던 그 지점을 나중에야 다시 볼 수 있다(“몸을 사라지게 한/이 찰나를 기억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보지 못한다.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본다. 만일 의식이 무언가를 본다면, 그 ‘봄’은 기억에 다름 아니다. ‘몸을 사라지게 한’ ‘그 찰나’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다시 보는’ 것에서 시쓰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들을 몸으로 기록하게 하는 일이다(“앞길의 낙차落差를 몸으로 쓴 날”).
사라진 뒷면이 꿈틀거린다 울퉁불퉁하다 얼룩덜룩하다 (「오늘」)
뒤꿈치를 든 맨발은 고요의 소리를 따라 걸어 다니고 어리둥절한 눈은 하얀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제의 살결을 만진다 (「오늘의 시작」)
시계는 멈추지 않지 지나온 시간은 멀리 앞서가고 (「오늘」)
어제의 소리와 햇살을 밟고/가끔씩 기쁜 오늘이 지나간다/너를 떠나보내는 이런 시간이 좋아 (엔딩 크 레딧)
지각 작용이 내적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면 그 시간 의식은 매 순간이 지속일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 대한 지각으로서의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지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재를 점 적인 순간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는 후설의 시간론에 따르면, 오히려 더 이상 지금이 아닌 것에 대한 의식, 즉 파지적(과거에 대한 지각) 연속으로서의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지금이다. 구체적인 현재는 그러므로 언제나 지속이자 연장일 수밖에 없다.
위 시의 화자들은 ‘지금-이 시간’ 과거와 미래의 시간 속에 있다. 우리 모두는 ‘현재(the present)’에 살고 있고, 언제나 ‘현재’에 살고 있었으며, 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한 지나간 사람의 ‘현재’는 우리에게는 ‘과거(the past)’이며, 우리의 ‘현재’는 미래의 사람에게는 ‘과거’가 될 것이다. 지속되고 확장되는 의식의 흐름 가운데 있는 위 시의 화자들과 같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울퉁불퉁”하고 때로는 “얼룩덜룩”한 “오늘”을 만나고, “어리둥절”한 오늘을 시작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오늘’은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어제의 살결을 만지”는 시간으로부터 “멀리 앞서”가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존재한다. 시인은 이 모든 ‘오늘’을 긍정한다(“너를 떠나보내는 이런 시간이 좋아”-「엔딩크레딧」). 그럼으로써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이 어쩔 수 없이 동반하는 고통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시집의 현재적 주체들은 각자가 품고 있는 원초적 기억들 사이를 통과함으로써 아픔과 절망과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한다. 무언가를 극복하려는 일은, 그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만져지지 않는 기억들을 지금 이 자리에 불러내어 감각 해내는 일은 내적 치유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 속에 묻어두었던 상처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시인에게 그런 순간들을 호출하게 하는 것은 바로 ‘몸’이다. 메를로 퐁티가 몸은 ‘근원적 표현’이라 명명했던 것처럼 몸은 표현 이전에 ‘존재’한다. 시적 주체들이 고도의 감응력으로 몸의 현상 곳곳에서 삶의 복잡다단한 사연들을 읽어낼 때 독자도 그의 몸과 하나가 된다. 그럴 때 슬픔과 고통과 기쁨 등의 곤핍감은 단순히 작품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삶 속에 ‘배어’있게 된다.
# 몸을 타고 흐르는 사랑의 욕망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것에 적합한 말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거기에 적확한 말은 무엇인가? 사랑의 운명은 어쩌면 시간이 경과 한 후에야 말할 수 있는 글쓰기와 같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의미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방황하는 가운데에 있는 것이라면, 사랑의 시련은 언어의 시련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사랑은 모순투성이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의미가 무한한 동시에 완전히 소멸되고야 마는 것이다.
시인에게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천변 벤치에 앉아 책을 읽네 내가 사랑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였네 (「절판」)
문을 열고 성큼, 강물이 들어섭니다. 강물에 붙잡혀 문이 꽁꽁 묶입니다. (「수몰」)
뜨거움이 몰려온다 이런 이런 (「눈물의 탄생」)
무수한 네가 내 안에서 쏟아지면 좋겠어 (나나」)
그에게 사랑은 이러해야 한다.
“그가 누구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사라졌다 나타나는 나를 찾지 말아야” 하고, “내가 잠들었던 세상에서 불현듯 깨어나 떨어진 잠을 주울 줄” 알아야 하고, “그 곳이 어디든” “짐짓 태연하게 걸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걷는 세상은 “희미하”고 “램프의 심지를 올리고 쓰다듬어줄 수 있어야” 하며, “램프 속에서 또 한세상이 흘러나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잃어버려도 좋”지만, “당당함”이 있어야 하고, 또한 “부드러운 혀로 눈물방울을 핥는 은밀함도 있어야” 하기에 “모르는 곳에 새로운 방 하나 빌려줄 수 있”(「애인 구함」)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랑을 위해 시인은 오래된 잠을 부른다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아/또 하나의 속눈썹을 뽑으며/온몸으로/어둠을 끈질기게 밀어내며/어둠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시간을 버리는/그러나 시간을 못 버리는”“눈꺼풀로 속눈썹을 잘라내며”(「불면」)
그의 사랑을 향한 욕망은 잠 속에서 은밀하게 드러난다.
“잠 속으로 네가 들어온다/오늘 밤은 깊고 짧다” “말없이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비밀이 많아진 네 등뼈를 만지며/뜨거워진다.” “오늘은 조금 더 은밀해져”"네 혀를 끌어당기지만“"목구멍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삼키며” “어둠 속에서/입을 벌리며, 팔을 벌리며/현기증이 나도록 더듬어 닿고 싶은 너의 세계/반만이라도/절반만이라도 가지기로 한다” “너는 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한다”(「애인」)
살아있는 몸은 최고의 원초적 표현이다. 메를로 퐁티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몸에 의거한 실존, 몸에 의거한 상호주체성을 다루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성이 근본적인 것임을 일러준다. 촉각적인 자극들이 몸에 말을 걸어오면 우리 몸은 성의 틀(un schéma sexuel)에 의해 지각하고, 자신의 몸을 성의 관계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되면서 몸과 하나를 이루는 대상들은 감정적으로(affectif) 힘을 발휘하게 된다. 지성이 성적인 행동을 통각할 때 관념하의 경험을 하는 데 반해, 욕망은 몸과 몸을 연결하면서 맹목적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때문에 관능적인 이해란, 지각이 지성의 질서에 속한다기보다는 맹목적盲目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속에서 사랑의 담론은 현실적이거나 상상적인 사랑의 결핍이다. 우리가 어떤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거대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상처를 입히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지나간 일이라 해도 상처로부터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번 사랑하는 단 한 사람과 사랑을 창조해 낸다. 매 순간마다, 유일한 현장 속에서, 각자가 쌓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러나 사랑을 위한 안정된 거울이란 없다. 사랑이란 결국 아픔이고, 자유이고 기쁨이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애인”처럼 사랑은 온전히 소유할 수도 없고, 그것에는 어떠한 준칙도 없다는 것이 시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욕망을 앞세운 사랑은 쾌락을 넘나들며, 쾌락과 욕망의 주위를 에워싸거나 또는 이것들을 우주적 차원으로 이동시켜 스스로를 성장시키기도 한다.
자세를 바꿔볼까
바람이 담장을 너머 꽃무늬 빤스를 건드린다
뒤집었다가 눕혔다가 밀었다가 끌어당겼다가
햇볕과 바람을 삼킨 엄마의 꽃무늬 빤스
그 숨결 절정이다
- 「꽃무늬 빤스」 부분
이 시의 관능적이고 구체적인 몸의 움직임은 인간 삶에 부단히 일어나는 어떤 분위기처럼 작용한다. 성이 애매한 분위기로 삶과 공존하는 것처럼, 비결정성 내지는 애매성이 인간 실존의 원리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꽃무늬 빤스」의 “바람”은 개인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꽃무늬 빤스”라는 대상 속으로 그리고 그 대상과 함께 체험하는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된다. 몸은 환경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어긋날 수밖에는 없다. 오히려 그 어긋남을 통해 몸과 세계가 발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 속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의미구조와 대응하는 것을 찾지 못했을 때, ‘바람’이 자세를 바꿔 ‘꽃무늬 빤스’를 건드려보듯이 스스로 환경에 맞추어 새로운 방식으로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긋나는 틈새를 메우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 반성反省이다.
시인에게 반성의 원천은 몸에 있다. 이중감각 즉 실제로 만지는 몸과 만져지는 몸의 이중성 속에서 일종의 반성이 극대화되어 ‘정신적인 반성’을 일으킨다. 위의 시에서 ‘바람’과 ‘햇볕’이 “엄마의 꽃무늬 빤스”와 나누는 몸의 유희는 마지막에 “그 숨결”이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둥근 사랑”의 실천행위로써 “수없이 허리를 굽혔을 어머니”를 향해 “젓가락, 그 직선의 어긋남”의 행위로 “어머니의 둥근 품을” “아프게 울렸”(「밥상을 차리며」, 몸속에 그늘이 산다, 지혜, 2015)을 화자의 반성적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와 함께 두릅을 꺾었네. 서툰 손가락이 센 가시에 찔렸네. 찔끔 눈물이 흘렀네. 내 몸에서 물이 솟는 것이었네. 물이 없을 것 같은 몸 어디에 물이 숨어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 두릅나무 수액이 밀어 올린 새순처럼 눈물은 돋은 것일까.
- 「눈물」 부분
시에서 “서툰 손가락”이 “센 가시에 찔”리게 되는 현상 역시 일종의 ‘몸의 반성’이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틈새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은, 역시 주체인 타인의 몸이 속해 있는 곳으로 “두릅나무 수액”과 “새순”은 “햇볕과 바람이 삼킨 엄마의 꽃무늬 빤스”와 같이 사랑하는 대상과 상호몸성(intercorporéité)을 맺게 되는 세계이다. “내 몸에서 물이 솟”는 것처럼 나의 몸이 깨어날 때, 연결된 몸들이 함께 깨어난다. 나와 함께 세계에 속해 있는 타자들이 나라는 장소에 출몰하고, 타자들의 존재 역시 내가 출몰하는 장소가 된다. 이처럼 내 몸은 하나의 자아이다. 혼란을 통해서, 나르시시즘을 통해서, 세계와의 내속을 통해서 내 몸은 자아가 된다. 내 몸은 사물들 사이에 묶여있는 자아이고, 과거와 미래가 있는 자아이다. 시인에게 지성적인 반성의 원천은 바로 이와 같은 몸의 반성인 것이다.
누군가를 젖게 하기 위해 태어나는 운명이라니
눈동자 속에 하늘을 그려놓고
오래도록 만지작거리면 구름이 도착한다
비뚤어진 감정으로 한 입 베어 물면
몸을 비트는 구름
(...)
비는 오고
비는 오고
비는 또 오고
- 「연우連雨」 부분
바슐라르는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상상력의 탐구를 통해 특히 ‘물질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의 정신이 갖는 상상적 힘을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을 동시에 찾아내는데, 이를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로 분류해 연결짓는다. 이에 따라 이경숙 시의 이미지가 하나의 물질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바로 ‘물’일 것이다(“몸 어디에 물이 숨어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 시인이 사유하는 몸은 위의 시에서와 같이 “비”, “구름” 등의 물이 지배하고 있다. 특히 ‘뜨거운 물’(“눈물”)은 몸을 통해 그의 욕망과 감정들을 쏟아낸다. “뜨거움이 몰려온다” “물을 가득 품은 눈이 마지막까지 입을 틀어막는다” “삼켰던 물소리가 들썩인다/ 속눈썹 끝에 달라붙어 커지는 물방울들/ 눈을 감아도 계속 쏟아진다”(「눈물의 탄생」)그의 몸 안에 잠재되어 실현되기를 요구하는 욕망들이 끊임없이 말을 쏟아낸다. 마침내 사랑의 대상인 또하나의 주체이자 타자는 그의 눈물을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함께 ‘뜨거워’진다(“너는 뜨거워지고 얼어붙은 심장은 녹는다”).
이처럼 시인은 몸의 상상을 통해 끊임없이 어떤 만남과 마주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첫 번째 시집 몸속에 그늘이 산다에서 신발 가게 진열장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점원 “K군”과의 내밀한 만남 또한 그러하다. 양자 사이에 잠재해 있는 어떤 엄청난 힘의 부딪침이 화자의 상상을 통해 발산되고 있다. 손님이 신발을 신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취하는 점원의 자세를 화자는 사랑의 대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백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이는 ‘언젠가 만난’적 있고, ‘언젠가 와 본’ 것 같은 풍경을 떠올리는 일이다. 화자가 “K군”과 벌이는 관능적 유희는 “마음 밑바닥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일이고, “뜨거움이 뼈와 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일렁”이게 하는 일이다(「신발가게 K군」).
# 강제된 죽음의 불가능성
너에게 관심이 많아
슬픔 가까이에서 슬픔을 묻히며 놀고 놀이는 생각보다 중독성이 있다
잠길 듯 잠길 듯 위험 수위는 어디쯤일까
몸은 젖고 핏발 선 눈동자가 바글바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너는
(...) 힘을 빼고 몸을 맡겨야 해 (...) 슬픔은 강하지 반대편에 몸을 숨겨도 소용없어
(...)
클릭
의도적인 버그
너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너 없는 게임은 만만해진다
무엇보다 죽이고 싶던 이름을 제거하면
게임 오버
또 다시 시작 버튼은 깜빡이는데
- 「슬픔의 방식」 부분
이 시는 화자가 강력한 사랑놀이 속에서 에로스의 이면인 타나토스를 ‘의도적인 버그’라는 약호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자아는 팽창한다. 자아가 엄청나게 확대되는 반면, 사랑의 체험 한 복판에는 이상한 구멍이 생긴다. 나르시스의 상처일 수도 있고,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 같은 아픔일 수도, 자기 안의 죽음일 수도 있다. 이는 사랑에 있어서 ‘나’란 타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인정하는 불안한 상태인 것이다. 대체로 정열적인 사랑은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길을 택하거나, 이탈 혹은 파괴와 손을 잡는다. 그 위험한 정상에서 ‘죽음’과 ‘재생’의 힘 겨루기를 하는 것이다.
시 「슬픔의 방식」에서 드러난 죽음과 재생의 역설적 현장은 최고의 충동적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이다. ‘완전한 암흑’만이 빛과 비슷하다는 바타유의 주장에서와 같이, 컴퓨터 화면 속 대립하는 의미의 장을 통해 우리는 “게임 오버”와 “다시 시작”을 충돌시키고, 비통합적인 이 접합의 긴장으로 충격의 결과를 낳는 은유의 전개를 볼 수 있다. 마치 눈부신 태양이나 견디어낼 수 없는 죽음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슬퍼져야 가능한’ 에로틱한 격정을 화자는 자신의 기호로 옮겨놓고 있다.
위 시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사랑의 열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것은 언제고 끝이 날 운명인 것이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너는” 이미 이 게임을 “지루해”하고 있는 사태에 화자는 직면해 있다. 이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건 ‘지금-이 순간’ 게임을 끝내는 것이다. 이는 슬픔을 통과하는 시인의 능동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현재적인 것 속에 깃든 과거적인 것 그리고 미래적인 것의 어떤 유토피아적 얽힘이고, 이 얽힘의 현재적 체험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자신만의 유토피아에 다다른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끝냈다고 생각했던 게임의 세계가 화면 속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슬픔과 대결하는 일은 화자에게 있어서 “단순한 게임과 다”른 무엇이다. 무엇보다 “힘을 빼”야 하고, “몸을 맡겨야” 하며, “익숙하게 쓰러지는 법”도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은 “완전히 슬퍼져야 가능한 감정들”이기도 하다. “그래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슬픔의 방식」)화자의 고백은 지난 시간 속에서 이미 체험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벤야민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얽힘을 아우라라는 개념을 통해 비의적인 문장으로 서술하였지만, 문제는 이런 아우라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얽힘 또는 혼융의 생생한 체험이다. 이미 가버린 것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미래의 흔적을 내포한다. 시 「슬픔의 방식」은 끊어냄과 이어짐의 연속선 상에 있는 사랑의 욕망을, 인간 삶의 근본 속성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뭇가지 끝에 새 한 마리 앉았다가 파닥이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날개를 파르르 떨다가, 꽁지를 까닥까닥하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좀 더 견뎌보자던 이파리들
햇살 속에 떨어지고
출렁,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
온전히 잊기 위해 간신히 남아있던
사라질 빛들이 남기는 마지막 울먹임 같은 것들을 풀어놓으며
흔잣말하는 저녁이었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 「흔들림이 세계」 부분
시인이 사랑의 게임에 의도적으로 버그를 일으키는 상황은 사랑의 절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행위이다.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타자를 향해 “서둘러 문을 닫는”(「악몽-저녁이 오는 시간」) 행위이다. 그렇지만, “나무를 떠나보내고 한 나무를 떠나보내고 또 한 나무를 떠나보내고 또 다시 한 나무를 떠나보내도” 화자에겐 “아직도 너무 많은 나무들”이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수런대고 있다. 이때 화자는 “비밀 하나쯤 만져질 것 같은”(「보라」)“발그레 물든 저녁”(「악몽-저녁이 오는 시간」)을 만난다.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며(“통화음이 길어질 때/차라리 귀가 없었으면 했다”-「봄밤」, “그는 오지 않고 나는 오래도록 그대로 있었네”-「절판」), 이미 내가 아닌 내가 되어있는(“이미 내 것이 아닌 귀가 잎사귀로 자라고 있었다”-「봄밤」)나를 인정하고야 마는 것이다(“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로, 지워져도 알아보는 얼굴로 발자국들 묻으며” “집으로 가자”-「절판」).
꿈에 빗소리가 들릴 때면 산을 내려오는 내가 보인다
동수나무를 지나 으스스한 당집 앞을 빠르게 지나간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을 즈음 거짓처럼 달이 뜬다 주인 없는 방앗간을 지나 정자 모퉁이를 돌아서 낡고 허름한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헛간 옆 베어낸 대추나무 아래 모가지를 길게 뺀 당신이 있다
이건 꿈일 거야
잠속에서 잠들지 못하는 마음이 술렁인다
덜 익은 대추가 발 아래로 무섭게 쏟아진다
그래 이건 분명 꿈이란다
나쁜 일은 영원히 생기지 않아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하룻밤은 지나간단다
조근조근 당신의 눈빛이 하염없다
세상 모든 걱정 내려놓고 나 행복하라고 당신을 가까이로 데려온다
행복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 행복한 것
누군가의 마음을 훔치는 잠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귀를 적시는 꿈을 꾼다
- 「동티」 전문
벤야민은 희망이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 과거 속에는 잠재된 욕망이 있고 그것이 끊임없이 욕망의 실현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위의 시 화자 역시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 “귀를 적시는 꿈을 꾼다”. 그의 욕망들은 과거 속에 실현되지 않은 채로 잠재해 있다. 그리고 얘기한다. “조근조근”한 “눈빛”으로 “하염없이”. 화자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공포와 거짓 현실’이라는 조건 속에 감금되어 있다. 어쩌면 그에게 꿈은 꿈을 위한 꿈일 뿐일지도 모른다. 꿈을 꾸게 하는 현재의 조건이 행복이라는 꿈을 실현시킬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암울하다고 해서 그 꿈이 미래의 행복과 전혀 무관할 리 없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론적이고 경험론적 접근만이 가능한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자가 꿈속에서 기억을 소환하는 이유는 현실이 행복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고, 이 조건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꿈을 시를 통해 실제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미래 지향적인 시간관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시를 읽어가는 동안 어느새 숨을 고르고 시인의 시간관을 따라 흘러가게 된다. 현대인에게 행복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근대적 시간관이다. 그러나 과거를 응시해 보면, 누구에게나 한 번쯤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가 가족이든 연인이든 스승이든, 미래에는 불확실한 사랑의 순간이 과거의 기억 속에는 분명 있다. 그것들을 가만히 응시해 보면, 그것들과 얘기를 하고, 우리가 그런 구체적인 가능성을 갖게 된다면, 마침내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흔들림, 그 아름다운 사랑의 몸짓
또 무서운 꿈을 꾼 모양이구나
이리 온. 안아 줄게 울지 말거라. 몸이 펄펄 끓는구나 이런 새가슴 되어 떨고 있구나 누가 때리기라도 하던. 말해 보렴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어때 소리쳐도 된단다 밤은 원래 캄캄하고 유령 따윈 없단다
(...)
코 자자 꿈속에서 우리 만날까 엄마는 놀이터에서 기다릴 거야 아가 부르면 네 큰소리로 대답하렴 딸 기 맛 사탕을 줄게 달콤한 막대사탕을 빨며 너는 까르르 웃을 거야 웃음은 노래를 부르며 그네를 타겠 지 노래 소리는 힘차게 그네를 밀 거고 하늘 끝까지 닿았다가 천천히 내려올 거란다 몽실몽실한 양을 만질 수도 있고 코끼리 등에 올라탈 수도 있겠지. 어쩜 팅거벨이 되어 날아다닐지도 몰라
- 「걱정인형」 부분
인간 존재는 직접적으로 ‘상황 속에’ 있다. 상황 속의 존재가 삶의 근본적인 조건인 셈이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계획들이나, 약속들, 또는 가치들에 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최초의 기획투사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걱정인형”이라는 사물을 통해 불안을 “펄펄 끓는”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엄마와 분리된 아이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달래고 안심시키면서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임을 인식시키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이 과거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또 미래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때 불안을 느낀다. 자유 역시 미래로부터, 과거로부터 분리되어 나타난다. 시 「걱정인형」은 불안을 통해 자유가 작동하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불안은 자유의 존재 방식이다. 결국 자유는 불안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실재인지 아니면 단지 꿈이나 환상인지 확신할 수 없음은 데카르트가 지적한 바 있다. 화자가 불안 속에서 ‘잠들지 못’하거나 ‘흔들리는 순간’ 발견해 낸 틈은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일종의 ‘판단 중지’를 수행하는 일이다. 이로써 감각의 기만 가능성에 대해 한 번 더 의심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상이 인식에 주어져 있으면서도 그 자체적인 성격, 즉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그것은 시인이 삶과의 불화를 해결해 나가는 하나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는 찰나 (...) 잠시, 숨도 쉬지 않고 적막해지기로 했다 (「흔들림의 세계」)
세계 속에 놓인 인식 주체로서의 시인은 자기소여성을 기반으로 주어진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틈’을 찾아낸다. 이러한 태도는 일상생활 속의 대상과 의식 작용 간의 상관관계를 주목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흔들리는 찰나”에 “잠시, 숨”을 ‘멈추는’ 행위는 주체와 주체의 근원적인 얽힘이 드러나는 순간을 만나는 일이다. “뾰족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세우던” “그”가 “가장 순한 짐승이 되”고, “어제”를 버리고 새로운 “오늘”을 만나는 ‘그’를 맞이하는 일이다(「틈」).
달력에서 오늘 하나를 지운다 (...) 기억나지 않는 오늘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오늘로부터 사라질 오늘이 될 때까지 달력을 찢으며 지우며 반복한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내가 죽은 만큼 나는 다시 태어난다
- 「오늘」 부분
사고 작용은 다분히 시간적인 반면, 이념성에 속하는 어떤 것은 무시간적이다. 인식 작용의 시간적 본성과 이념성의 무시간적 본성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소여성自己所與性’의 탐구 여부일 것이다. 후설이 ‘사태 자체’를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한 것처럼, 사태에서 벗어나 있는 선입견들을 제거함으로써만 인식 주체에게 주어지는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화자는 “불량하게 달려온” “오늘”을 반성한다. “어제의 욕심으로 그제의 생각으로” “만만했던 하루”가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사라진 오늘”이 “사라질 오늘”이 되기까지 “달력을 찢으며 지우며” “날마다 죽고” “다시 태어난다”(「오늘」).
시인의 체험을 ‘지금-여기’에서 시적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은 그야말로 맹목의 조건하에서 가능한 일이다. 끊임없이 도망하는 ‘비가시적’ 통점이 언제나 이미 지나간 과거 속에서만 발각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죽임을 당했던 사랑의 대상들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 몸을 뜨겁게 달구고, 또다시 죽어가며, 계속해서 “속눈썹 끝에 달라붙어” 눈물로 쏟아진다(「눈물의 탄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사랑은 여전히 어떤 예감으로 존재한다(“착하고 순한 눈사람이 골목 끝에 서 있을 것 같은”-「눈사람」). 그것들은 지금-여기까지 끌고 온 ‘얼룩들이 담긴 분홍 트렁크’(「오늘의 시작」)를 환하게 열어젖히고, ‘찰랑찰랑 흔들리는 몸’으로 수많은 산꽃들의 ‘냄새로 번진다’(「수몰」).
이 시집의 시적 화자들은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들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 거주하면서 몸을 토대로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려는 실존적 주체이다. 이를 통해 사랑이야말로 시인에게는 알파와 오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에 대한 결핍이 그 지극한 대상을 향한 갈망과 고통이 그의 시쓰기의 깊고도 성스러운 우물이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그가 “끌고 온 얼룩들이 자라나는 몸”을 “분홍 트렁크”(「오늘의 시작」)라고 부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길어 올린 고통스런 기억들이 삶을 회복시키는 비밀스런 카드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시집(몸속에 그늘이 산다)의 제목처럼 그의 사랑의 언어들은 주술에 걸린 듯 그늘 속을 거닐며 햇살을 끌어당긴다. 한없이 커진 귀로 끊임없이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사랑하는 시인의 언어는 곧 사랑하는 독자의 언어가 된다. 시쓰기는, 시읽기는 사랑의 행위와도 같이 결합에로의 꿈을 실현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몸’으로 글을 쓰는 시인에게 삶은 사랑을 향한 끝없는 여정이 될 것이다.
언제 밥 한 번 먹어요
당신은 말했지요
언제가 언제일까
저녁이 어둑하게 찾아오고
언제 꼭 같이 밥을 먹자던 당신의 말이
비릿하게 다가올 때
골목 끝에서 퍼지는 고등어 굽는 냄새
어느새 당신의 손을 잡아끌어 밥상 앞에 앉히고
노릇하게 구운 고등어 한 접시 차렸지요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살 속에 박힌 가시를 바르느라 여념이 없네요
당신도 나도 기약할 수 없는 언제라는 말
젓가락으로 하나씩 발라내며
함께 밥 먹자고
지금 당장 밥 먹자고
자꾸만 당신을 내게로 데려와요
- 「언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