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강해(1)31장
출 31: 1-11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인줄 믿습니다. 사물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과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이 역사 이후 계속 대립되어왔습니다. 어떤 시대는 사물이 사람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었고 그래서 사람이 죽는 것보다 물건이 손상되는 것을 더 아까워하는 그런 시대도 우리는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보아왔습니다.
얼마전에 조지아주에 있는 한 신문사가 사과의 광고를 내었는데 약 200년전에 자사 광고란에 "건강하고 힘센 노예를 팝니다"라는 광고를 내었던 것을 이제 와서 그같은 행위가 잘못된 광고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금과 은이 중요했지 몇 십불 정도면 건강하고 일 잘하는, 흑인 노예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그 가치는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떠한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알려주신 후, 유다 지파 중에서 브사렐이라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깊은 의미 중의 하나는 유다 지파 중에서 브사렐을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결혼에 앞서 친구들을 사귈 때 처음부터 애인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 집에 한번 데리고 와 보아라" 사귀는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때 부모된 우리가 제일 먼저 물어야 할 관심사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부모님은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니?"
하나님께서 브사렐을 지명해 부르셨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유다 지파로부터 시작을 해서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오홀리압을 부르실 때도 단 지파의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 오홀리압을 부르셨다고 똑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동역자들에게서 부러움을 사는 것 중의 하나는 부모님이 목회를 하셨고, 그리고 이제는 명예롭게 은퇴하신 분이라는 그래서 영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 지금도 저는 제 목회를 한다기 보다 약 42년간 목회하셨던 아버님의 목회를 어릴 때부터 보면서 교인을 대하는 모습,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 등을 생활 속에서 배웠고 이제 실천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예를 들면, 눈이 무릎에 찰 정도로 많이 왔을 때, 여 집사의 남편이 술을 먹고 와서 교회 문을 부수고, 주택 문을 발로 차면서 목사 나오라고 소리를 쳤을 때 아버님이 밤중에 나가서 술주정을 받아주시는 모습, 아버님이 운동을 하신 분이라 건강한 사람도 힘들이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술취한 사람에게 멱살을 잡혀 교회 마당을 수없이 끌려 다니는 것을 보면서 청년기의 제 심장은 피가 끌어오르는데, 이제는 제 멱살까지 잡고 또 끌고 다닐 때 아버님께서 저를 쫓아오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요한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목회를 하는 지금,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대하는 자세의 중요함을 이미 부모님을 통해서 배웠던 것입니다.
여기 우리 장로님이 앉아계시지만 17년 전에 전도사로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새로 오신 분들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처음 목회하는 전도사님 같지 않아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아마 그런데서 인연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명자들이 목회를 똑같이 시작하지만 가정에 영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부모님조차 믿지 않거나 혹은 핍박받는 입장에 서있는 목회자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고 호소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성막이라는 귀하고 복된 사명을 감당할 자로 유다 지파에서 브사렐을, 단 지파에서 오홀리압을 부르신 의도가 얼마나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해 사람을 선택한 후 하신 첫 번째 일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이 충만케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성령충만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을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뽑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명되어 부름을 받았으면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아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번째가 아니라 사역을 위한 첫 번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목사는 성령충만하지 않은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브사렐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그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신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하신 일은, 지혜로운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불러 그들을 더욱 더 지혜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부를 때 아무나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백성 중에 지혜로움을 가진 이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적 지혜로움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기에 그들이 가진 지혜 위에 하늘의 지혜를 더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면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것만 가지고 무엇을 해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힘입어서 그것을 감당하려고 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내게 말씀하시고 내게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의 지혜를 더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막과 성막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다 만들도록 맡기셨습니다. 이제는 위임하시는 거예요. 철저하게 맡기는 것입니다.
앞서가는 회사들이 팀제도를 만들어서 팀장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결제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니까 부서마다 창조적으로 자율적으로 잘 돌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어요.
이랜드 그룹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설악산 켄싱턴호텔에 가면 30대 젊은이가 사장입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존 회사 같으면 과장 정도밖에 안될 나이인데 사장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젊고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만큼 책임과 권한을 위임해 준 것에 대한 자신의 달란트를 100% 활용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불러 그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 먼저 성령충만케 하셨고, 그들의 지혜 위에 하늘의 지혜를 더하여 주셔서 성막을 다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그 성막이 어떤 성막입니까? 광야에서 지어야 할 성막이요, 이동식 성막입니다. 때로는 하루만에, 때로는 몇 달만에 성막을 뜯어서 다른 광야로 옮겨간 후에 다시 성막을 세우고 각 지파마다 텐트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성막은 고정식보다 더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정식이라면 속에 있는 기초가 혹시 잘못되어도 겉을 예쁘게 마감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동식은 모두 뜯었다가 다시 조립해야 하기 때문에 안팎의 모든 기구가 정확한 치수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막은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치수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대강 대강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막은 예술성이 있어요. 촛대 하나를 만들어도 가지 가지마다 꽃잎 모양으로 아름답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정성을 다해 그들의 공교한 기술을 사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과학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을 우리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제가 처음 개척할 때 전기료가 부담이 되어서 형광등 중에 일부를 끄고 강단 앞에 있는 등만 켜고 새벽 기도회를 드렸던 때가 있었어요. 교인이라고는 저희 집사람 혼자였으니까 뭐 어두워도 소리는 들릴테니까 하고 그렇게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여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예배실에 전기료 아끼려고 등을 다 끄다니" 제가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했는지 몰라요.
사실 생각의 차이예요. 절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배에서 은혜 받게 하는 환경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 다 해봐야 한 달 전기료가 5,000원도 안나올 때인데, 한 사람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10,000원을 헌금하면 두 달치 전기료가 해결되는 거 아니예요.
제가 아버님을 존경하는 것도 그런 적극적인 목회 의지에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를 갈 때 "성미를 몇 말 줍니까? 우리는 식구가 7명인데.." "우리 교회는 성미를 두 말 밖에 못 드리는데요" "그러면 안되겠네요" 그리고 성미 네말 주는 교회를 찾아다녀요. 그런데 아버님의 생각은 달라요. "두말 주는데 가서 두 가마 나오는 교회로 부흥시키면 될 것 아니냐?" 할렐루야! 생각이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쓰시는 줄 믿습니다. 다 되어있는 것 찾아 다니는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창조적이고 일을 하겠다는 개척자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제 그 성막의 마지막 의미를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신 교회, 그 분을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들' 그들이 모인 장소를 '교회'라 그럽니다. 과거에는 광야의 성막을 그들의 이동에 따라서 옮겼지만 솔로몬 시대에는 시온산 정상에 움직이지 않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성전조차도 세 번에 걸쳐서 새롭게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한번은 솔로몬에 의해서, 한번은 바벨론 포로 이후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통해서, 그리고 또 한번은 전혀 믿음은 없지만 정치적으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헤롯 대왕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의 수고와 땀이 들어가 있지 않은 성전은 건물일 뿐 성전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의 중요한 의미는 이런 보이는 건물에 의해서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의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이동하면 그곳에 또 교회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화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믿으면 이미 그곳은 교회입니다. 자식들까지 믿고 부모까지 믿으면 완벽한 교회입니다. 그 가정 교회에서 초대교회처럼 예배가 이루어져야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되고 기도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까지도 계속 이동식입니다. 천국에 가면 교회가 필요할까요? 천국에서는 더 이상 교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성막을 짓기 위해 부르신 이 시대의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되어야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 위에 하나님의 지혜를 더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믿고 위임하신 일꾼들로서 공교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 47절이나 4장에 보면 "날마다 주께서 그 수를 더하시는" 살아있는 교회가 사도행전적인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건물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날마다 그 수를 더함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가 날마다 증축되는, 살아있고 건강한 주님의 교회를 지어가는 이 시대의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됨을 철저하게 주님 앞에 고백하며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어떠한 모습을 더 기뻐하시는지를 깨닫기 원합니다. 평안의교회가 날마다 그 수를 더해가는 살아있는 교회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살아있는 교회를 날마다 새롭게 증축해 나가는 이 시대의 필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강해(2)31장
출 31: 12-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중에 좀 중요하고 강조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몇 번씩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을 봅니다. 말씀을 좀 더 귀 기울여 듣기를 원하실 때에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듣는 사람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것이지요. 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 귀를 열어 듣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도전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안식'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에만 무려 4번이나 반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4번씩 반복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성도들이 안식에 관한 삶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주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에 관한 언급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얻을 때였습니? 만나는 그대로 먹는 양식입니다. 아침마다 나가면 새벽 이슬 같이 하얀 가루가 그들 진영에 쌓였고 그것을 가족 식구만큼 떠오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주셨기에 일용할 양식입니다. '만나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많이 가져간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가져간 사람도 모자라지 않는 은혜의 법칙입니다.
"누구든지 안식일에 거두어서는 안된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혹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기 위해서 헛수고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육신의 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영의 양식을 위해 일하고 육의 양식을 위해서는 땀흘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대도' 큰 도둑은 부잣집들만 텁니다. 한번 털면 수백만원, 수천만원씩 귀금속이 나오고 현금이 나오지요. 여러분, 그런데 도둑질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 보셨습니까? 화투판에서 번 돈은 화투판에서 쓴다고, 도둑질해서 번 돈은 불의하게 벌었기 때문에 그것이 재산이 되지 못하고 축복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또 훔쳐야 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식일에 육신의 양식을 주시지 않고 이날 만큼은 영의 양식을 주신다고 하는 주님의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으시고 그렇게 생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학생들 중에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는 이들이 있지요. 우스개 말로 서울대 학생들은 1년만 과외를 하면 집을 살 수가 있고, 연고대생은 자가용을 살 수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주일에 아르바이트하는 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져 있는 거예요. 학생이든지 어른이든지 주일에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 안되는 겁니다. 안식일에 거두기 위해서 나간 사람은 언제나 헛수고만 경험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그리고 또 안식일에 돈을 벌러 나갑니다. 안식일에 돈을 벌었으면 부자가 되었어야 하잖아요. 마치 도둑이 도둑질을 했으면 부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또 훔쳐야 되는 가난을 갖는 것처럼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치고 정상적으로 경제생활이 넉넉한 분 보셨습니까? 왜 그런 어리석은 생활을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반복하느냐 말이예요. 이제 어리석은 생활은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 안식일에 대한 말씀은 십계명을 주시면서였습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는 안식일의 쉼의 대상이 어디까지냐를 말씀해 주셨는데 "너 자신과 너의 가족과 인간 대우도 받지 못했던 노예, 남종이나 여종들까지 쉬게 하고 심지어는 짐승들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인 자신만 혼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종업원들은 일을 시키면 안됩니다. 아마 요즘은 그렇게 해서 회사가 돌아갈 리가 없지요.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세계적인 이벤트가 열려도 롯데호텔 노조원들은 데모를 했습니다. 옛날 우리 생각 같으면 "큰 일이니까 좀 참자" 했을텐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한 성도님이 그럽니다. "목사님,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요. 어떤 설문조사의 내용이 3박4일 동안 쉬겠느냐, 아니면 쉬지않고 일하는 대신 50만원의 현금을 받겠느냐 조사를 했더니 ⅔가 넘는 사람들이 50만원을 받지않고 3박4일 휴가를 가겠다고 대답했답니다"
2000년의 한국인들의 생각입니다. 혹시 여기 중에 "어휴, 나 같으면 50만원 받고 일을 하지"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19세기 생각입니다. 백년은 뒤떨어진 가치관이 되는거예요. 그만큼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돈보다 쉼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야 쉼의 중요성을 알지만 우리 주님은 3500년 전에 이미 너희와 가족과 그리고 일하는 짐승까지도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주일에 쉬니까 우리도 마지못해 따라서 쉬는 부끄러운 모습들을 이제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리챠드 리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주님께서 세상을 변혁시키러 오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옆집 앞집 다 문을 닫는데 내가 열어서야 이거 체면이 서나"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일은 쉽니다" 이렇게 생색내지 말고 남들 다 문을 열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의 자존심을 가지고 "주일은 쉽니다"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그 말이예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의 멋있는 모습을 따라 "우리도 쉬자" 이렇게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안식에 대한 말씀은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셔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위임해 주시고 나서 그들에게 정성을 다해 공교한 기술을 가지고 짓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을 짓다가 보면 거기에 몰두하게 되고 안식을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고 말 하지만 주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 보수공사가 지난 2주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2주 동안이나 자기 업무 전폐하고 수고하신 분들이 너무나 많은데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으면 하루 일당 30만원을 드려도 적은 것인데, 그분들에게 수고비를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책임 맡은 장로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제가 다 물어보았는데요, 목사님, 그 분들 말씀이 일당받고 일하려했다면 왜 새벽 6시에 나와서 밤 12시까지 합니까? 오전 9시에 나와서 오후 5시까지만 하지요"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몰라요.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오전 9시에 와서 오후 5시에 가지만, 전심으로 사랑하고 자원하는 사람은 새벽에 와도 불평이 없고 밤 12시에 끝나도 불평이 없다는 말이예요.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어려운 줄 모르는 거예요.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공사기간 중 수요예배 시간이 다가왔어요. 어떤 분이 그래요. "목사님, 한 두시간만 더 일하면 작업을 마무리하겠는데 예배는 따로 드리라 하고, 우리는 여기서 그냥 계속 일하면 어떨까요?" 제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성전을 이렇게 아름답게 중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하기 위해서지요.
성막을 지으라고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성도들이 성막에 필요한 물품을 너무나도 많이 가져올 정도로 풍성한 은혜의 자리에서 헌신하다가 보면 혹 성막을 짓다가 안식일을 잊을까 염려하신 주님은 성막을 짓는 그 순간에도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다시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성막이 중요해도 안식일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건축하는 교회 가운데는 "건축하는 동안은 선교비도 중단합니다. 교육비도 50%로 줄입니다"라는 광고를
스스럼없이 하게되고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도 당연한듯 생각해왔는데 사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평안의교회는 17년동안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기준에 따라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건축을 하는 동안 견디기 어려운 경제적인 여건 속에서도 국내외의 50여 교회에 선교비를 보내는 일과 파송한 선교사를 줄이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도 봉사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건축비를 매달 정확한 날짜에 지불한 것도 기적이지만 더 큰 기적은 마땅히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손상 입히지 않으면서 건축을 한 것이 더 큰 기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종종 안타까운 일들이 뭔지 아세요? 예를 들면, 교사대학이나 베델성서대학이나 성가대 연습이 수요예배후에 있는 경우, 정작 예배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그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모임을 제대로 구별 못하는 것은 아닌가?" 답답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결국은 아론을 중심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을 추면서 제사를 지내는 그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면서 다시한번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애굽에서는 눈 뜨면 보는 것이 우상숭배였기에 그들이 삶의 위기에 준비할 수 있는 행위는 바로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성장하는 바탕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등에 업혀 성전을 출입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속회예배 드릴 때, 심방예배 드릴 때, 아이들 용돈 집어주고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사탕을 사오고, 먹을 것을 사오게 해서 어머니 곁에서 예배를 드리게 해야지, 시끄럽다고 쫓아내면 그 짧은 시간은 조용할지 모르나 기독교 교육은 실패하는 곳입니다. 사실 아이들은 떠들면서도 들을 것은 다 듣습니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개회예배 때 제가 유치부 아이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그랬어요. "목사님 멋있어 보여요?" "네!!" 그래서 "목사님이 유승준보다 낫지요?" 그랬더니 모두들 "예!!" 그랬어요. 그런데 유치부 한 어린이가 집에 가서는 할머니, 엄마, 아빠 다 불러들이더니 "목사님이 그러는데 목사님이 유승준을 낳았대 !!"라고 해서 온 집안 식구가 한바탕 웃었다고 아이의 할머니 되시는 권사님이 전해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놀아도 노래 다 배우고 선생님 말씀 다 듣습니다. 어릴 때 어린아이들의 노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보고 듣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제 목회의 대부분도 42년 아버님 목회를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것 지금 따라하는 것 뿐이예요. 그분의 목회를 따라만 하는 데도 다른 동역자들이 볼 때는 목회를 잘한다고 격려해주곤 합니다. 따라만 해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라고 하는 영적 지도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옛날에 보고 배운 것, 즉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탓하기 이전에 그들의 배경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녀들의 배우자를 정할 때에도 "부모님은 신앙생활하시느냐?" 그것이 첫 번째 질문이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예요. 그것은 고리타분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영적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성막을 지으면서,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중요한 장면마다 안식에 대한 말씀을 결부시키고 게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안식에 대한 올바른 삶을 얼마나 원하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나 안식의 정신이 살아있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얼마나 주님께서 안식을 귀하게 여기셨는지 중요한 일마다 그 말씀을 연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큰 안식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을 위해 다시한번 다짐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것처럼, 안식을 통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은혜를 확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