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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7:1-5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 칼빈
본 시편에서 우리가 대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서술은 율법 아래에서의 그 나라의 상태에 대해서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편이 복음의 전파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 나라의 위대함과 영광을 강조함으로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한편, 사람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그 나라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서 그 나라에 대하여 친절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1-5절은 “(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3)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4)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5)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 입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들을 청하여 기뻐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인류의 구원과 최상의 복에 떨래야 뗄 수 없게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그 기쁨이 온 세계와 바다 저편의 지역들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시편 기자가 이제까지 유대의 좁은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던 하나님의 나라가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될 것을 예언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시편 기자는 뒤따르는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양하게 서술함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헛된 자신감과 육체의 자랑을 꺾기 위해서 하나님께 돌려지는 두려운 위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름이 덮인 하늘은 맑은 하늘보다 우리에게 더 위압감을 줍니다.
이는 어둠은 느낌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시편 기자는 세계에 하나님께 대하여 보다 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상징을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이 말에 대해 보다 상세히 논하고 구름이 인간의 경솔한 행동과 무리한 추측을 막고 하나님의 신비를 지나치게 파고드는 과도한 호기심을 제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주위에 둘려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유익한 교훈을 가르쳐 주는 해석입니다.
시편 97 편
그러나 우리는 다듬어 놓은 번역들은 모두 다 반대합니다.
또 흑암을 하나님께 연관시킴에 있어서 시편 기자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머지 문맥에서도 그와 동일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곧 ‘불이 그의 얼굴 앞에서 발하여 사면에 있는 그의 원수들을 사르리로다. 그의 번개들이 세계를 비취니 땅이 볼 것이요 또 떨리로다’ 등이 그런 의미입니다.
만일 누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퍼져 나오는 기쁨에 관하여 언급한 바와 일치되지 않는다고 반대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먼저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편에서 그가 통치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복을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복을 받아들일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그 외에도 우리가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진리는 신자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저희의 육신의 자랑을 꺾어 주며 하나님께 대한 저희의 경외심을 깊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의와 공평” 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는 그 보좌로부터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을 뜻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는 의와 공평이 없는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사 의가 세상에 회복될 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찬송을 돌려야 할 문제라고 언급합니다.
시편 기자는 분명히 하나님이 그의 성령의 부드러우시면서도 강력한 역사로 우리를 그의 말씀의 멍에에 복종시키시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의도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완강히 저항하고 또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악인들에게 저희의 완악한 반대가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보다 엄한 면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비하신 은혜로 가까이하실 때 저희가 경외와 존경심을 가지고 겸손히 그를 영접해 들이지 못하게 되면 이것은 곧 심히 악한 불신앙을 뜻합니다.
이런 경고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적합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독생자의 인격 안에 계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은 불원간에 분명히 하나님의 두려우신 위엄 앞에 위압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려는 저들의 시도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핑계를 대고 숨고자 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저희가 아무리 그와 같은 술책을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합니다.
시편 97 편
시97:6-8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이 시편도 “여호와의 통치” 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여호와의 통치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그 일이 필경 성립됩니다(1-7).
(1) 그 일은 땅이 즐거워할 일입니다(1절 하반).
이것은 신약 시대의 구원의 세계성(世界性)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란 말이 거기 따릅니다.
“섬” 들은 모든 나라들을 비유합니다.
(2)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는 위엄(威嚴) 앞에서 원수들은 망합니다(2-8).
“구름과 흑암”, “불과 번개” 등은 원수들에 대한 주의 위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찾아오셔서 그 백성을 위해 속죄하시는 일이 신자들에게는 기쁨이 되지만 마귀와 및 그 후손들에게는 심히 무서운 사건인 것입니다.
1. 본문 6절은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의가 하늘이 그것을 선포할 정도로 뛰어나게 나타났다고 진술합니다.
그 의미는 19편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이 그것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늘의 구조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적인 의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처럼 현저히 나타나서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다는 것입니다.
이 의인법에는 큰 강조점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의의 의미를 간파한 것처럼 말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하늘은 여기서 ‘하늘에 포함되어 있는 천사들’을 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환유, 곧 왕을 왕관으로 나타내는 식의 표현법이거나 혹은 제유, 곧 배를 돛으로 나타내는 표현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는 시편 기자가 땅을 언급하는 대신에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찬양한다고 말한 것은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시편 97 편
2. 본문 7절은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발명품들 - 칼빈)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참 하나님과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낸 거짓 신들 사이에 큰 구분을 짓습니다.
그는 그가 돌린 찬양이 오직 참 하나님께만 적용되도록 이 같은 구분을 짓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본래 우상숭배에 빠지기 쉬워서 실로 바른 자세로 하나님께 경배하게 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저희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자마자 가장 근거 없는 미혹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각기 자기를 위하여 신을 만들고 모두가 다 잡다한 발명품들 중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라서 섬깁니다.
이것이 바로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가 사람들이 거짓 신들에게로 향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권면하는 동시에 누가 참 하나님이신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유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순서는 참 종교를 얻기 전에는 타락한 우상숭배가 결코 제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영적인 지각이 둔하여 참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헛된 것들 안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양이 어두움을 물리치듯 우매를 물리치는 것이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그들 안에 종교에 관한 어떤 것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연약할 뿐 아니라 우매하고 둔해서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각이 즉시 부패해 버립니다.
종교는 이와 같이 모든 우상숭배의 시초가 됩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고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어두움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됩니다.
그 마음의 어두움이 그들로 우상들과 참 하나님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상숭배를 제거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생합니다.
태양이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를 흡수할진대, 하나님 자신의 임재는 그보다 훨씬 더 효력을 발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함에 있어서 이사야 선지자가 복음이 전파될 일을 언급할 때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사19:1)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덧붙인 것과 같이 조각한 신상들을 자랑하던 불경건한 민족들에 대하여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97 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사람들의 눈에 숨겨졌으므로 우리는 또한 세계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엄청난 우상숭배에 대해서 놀랄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역시 깨닫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와 동일한 사실에 대한 하나의 예증을 갖습니다.
참 교리에 대한 지식은 회교도와 유대교도와 교황주의자들 사이에 구분이 됩니다.
그에 따른 하나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저희는 오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바른 생각으로 되돌아오거나 혹은 저희의 잘못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가 ‘저희가 당황케 될 것’을 언급할 때 그는 우상숭배에 빠졌던 자들이 회개하고 참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돌아올 때가 이르렀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예외 없이 진정한 회개에 이르리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시대에 신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미신 혹은 우상숭배를 그만둘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면서도 말할 수 없이 철면피한 행위를 저지를 것인가 하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희의 잘못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져다 주는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무례하게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교황권 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희가 멸시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고 저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황케 되리라는 것을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조금 뒤에 시편기자가 말한 바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는 말씀은 당연히 천사들에게 해당됩니다.
천사들 안에서는 어떤 작은 부분의 신성이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또 비록 덜 적합하긴 하나 거짓 신들에게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마치 “신으로 해석되는 혹은 주장되는 존재는 무엇이나 다 하나님 한분만 높임을 받으시도록 그 자리를 내어드리고 그 주장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고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섬김을 받으시고 그 혼자서만 지극히 높임을 받으실 때 어떤 피조물도 그의 신성을 흐리게 하지 않는 것이 경건에 대한 참된 정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우리 가운데서 참 경건이 완전히 파괴되지 아니하게 하려면 무슨 피조물이든 우리가 그것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이 원리를 붙잡아야 됩니다.
시편 97 편
3. 본문 8절은 “여호와여 주의 판단을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 하였나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온 세계가 다 참여하여야 할 기쁨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합니다.
이것은 일부 저희가 이 기쁨의 첫 열매를 즐겨야 했기 때문이고 일부 시편 기자가 경쟁심 혹은 시기심을 유발시킬 기회를 일체 제거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민족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더불어 동일한 특권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하고 난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민족들이 이 특권을 함께 나누게 되는 일로 말미암아 명예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으로 세계가 급수를 받고 새롭게 소생하게 될 샘으로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것을 기뻐해야 할 문제라고 덧붙입니다.
시편 기자가 언급하는 사람들은 오직 아브라함의 참 자손들입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그의 통치와 영광을 확장하실 때 더욱 즐거워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에게 약속하신 저희의 구속을 완전히 성취하여 나타내실 때 저희가 또한 유대의 제한된 지역에서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주셨던 예언에 따라 이방의 만민들이 아브라함의 씨 안에서 복을 받게 될 때 이것은 저희의 믿음을 아주 굳게 해줄 것이었고 또 저희가 과거에 증오와 멸시를 받았던 한 종교가 온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볼 때에도 그리하여 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어찌 ‘보았던’ 일들보다는 오히려 ‘들었던’ 일들을 언급하고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믿는 백성들로 약속된 복이 아직 이르기 전에 소망 가운데서 그 복을 기대하게 하려 합니다.
둘째로 시편 기자의 말은 복음의 영광이 그처럼 먼 곳까지 퍼지게 될 것이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저희 눈으로 그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목격하기 보다는 보고를 통해서 듣게 되리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97 편
시97:9-12 여호와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 곧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은 기뻐하게 됩니다(9).
여기 이른바 “시온(교회)이 듣고 기뻐함”. “유다의 딸들(하나님의 백성)이 인하여 즐거워함”(8절) 이란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들이 기뻐할 이유는 9절이 이유 접속사 י י(키)로 시작되어 설명합니다.
곧 여호와께서 온 땅위에 높아지시며 또한 모든 신(神) 위에 뛰어나시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전에 몰랐던 여호와께서 참 신이심이 드러났고, 따라서 모든 우상숭배가 타격을 받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모든 헛된 신을 섬기던 일들은 무너지는 법입니다.
여호와의 통치,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 무엇인가?(10, 11절)
그들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인데, 그들의 할 일은 악을 미워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속죄(贖罪)하여 주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악을 미워하여 떠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악을 떠나는 것이 영혼이 보존(구원)되는 길입니다
주의 보혈(寶血)의 공로를 힘입은 성도들은 세상 복 보다 성결을 따라 가야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악을 미워하여 선한 싸움을 하게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좋은 일을 당하도록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11절).
“빛을 뿌렸다”는 말과 “기쁨을 뿌렸다”는 말은 죄로 더불어 싸우는 신자들을 위해 빛과 기쁨을 심었다는 뜻입니다.
“빛”과 “기쁨”은 구원과 영광으로 신자들은 필경 빛과 기쁨의 열매를 받습니다.
이 시인은 또 다시 의인(신자)들더러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합니다(12절).
1. 본문 9절은 “여호와여 주는 온 땅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위에 초월하시니이다” 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 말씀을 이미 설명했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 뛰어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들 사이에 하나의 대조가 의도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시편 97 편
시편 기자는 모든 위엄이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돌려지도록 그와 같이 다른 모든 존재들의 우월성을 일체 제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독생자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었습니다.
독생자는 하나님 자신의 명시된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가 이르기 전에는 그가 보다 덜 알려지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위대하심도 보다 덜 분명할 것이었습니다.
2. 본문 10절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바울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여기서 의를 행하라는 분부를 받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우리가 죄에서 떠나 의를 행치 않는다면 그의 종들로 판단을 받고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의의 샘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진대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모든 죄악과 불의를 미워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불의에서 떠날 때에 한해서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됩니다.
악인들의 박해는 우리로 복수를 추구하게 하고 용납될 수 없는 도피 방법들을 찾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자요 보호하시는 자이신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우리가 이 같은 시험에 빠지지 못하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악인들과 다투거나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에 우리를 신실하게 지켜주실 하나님께 우리의 안전을 부탁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이 같은 보살핌은 악한 것을 버리고 도발을 받으면서도 정직한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실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초조함을 막아 주는 방편이 될 것입니다.
3. 본문 11-12절은 “(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 을 뿌렸도다
(12)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입니다
시편 97 편
시편 기자는 바로 앞서 언급한 진리를 확고히 하고 나서 그 진리에 대하여 제기될지도 모르는 반대를 예측합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 자주 극도로 잔인하고 불공평하게 대우를 받고 저희 원수들의 진노에 방치되어 있는 듯한 것을 보아왔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즉시 자기 자녀들을 구원하여 주시지 아니하는 때에라 할지라도 저희를 자신의 은밀한 권능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 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하나의 이중적인 은유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빛은 기쁨 혹은 형통한 일을 뜻하는 반면 어두움은 역경을 뜻합니다.
뒤에 나오는 ‘뿌림’의 은유를 한층 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어떤 이들은 마치 땅에 뿌려지고 흙에 묻혀서 혹은 죽어서 얼마쯤 지난 후에 싹이 돋아 나오는 씨앗처럼 기쁨이 의인을 위하여 뿌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좋은 견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 말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곧 비록 의인들이 세상에서 거의 사라지고 저희가 위험을 무릅쓰고 공중 앞에 나타날 수 없어서 사람들 눈에 숨겨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씨앗처럼 저희 기쁨을 널리 퍼지게, 혹은 이제까지 닫혀 있었던 저희 기쁨의 빛을 비취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절의 하반절은 상반절에 대한 하나의 해석입니다.
“빛”은 “기쁨”을 뜻한 것으로 “의인”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뜻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의에 대한 이 정의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곧 의는 단순히 외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가 다만 우리의 혀나 손, 혹은 발은 악에서 금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는 데에 요구되는 우리의 내적인 마음 자세의 정직성까지도 포함합니다.
끝 절에서 시인은 주의 백성들에게 감사할 것과 하나님을 저희의 구속자로 바라보고 저희가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삶을 영위해 나아갈 것과 저희가 당하는 모든 악 아래서도 저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즐긴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만족할 것을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