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고 있는 작가 헬렌 한프(앤 밴크로프트)는 대단한 독서광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읽고 싶어하는 영국 고전 작가들의 책이 도서관에도 서점에도 없어 “뉴욕엔 영문학 책 읽는 사람이 없나요?”라고 투덜거리지요.
어느 날, 신문 문학 난에서 절판된 책이나 희귀 서적을 구해준다는 런던의 서점 ‘마크스’(Marks&Co)에 대한 기사를 읽고, 주문 편지를 보냅니다. 마크스 서점의 지배인 프랭크 도엘(안소니 홉킨스)로부터 정중한 답과 함께 책이 오고, 이때부터 20여년 간 편지와 주문서, 돈, 책, 선물이 대서양을 넘나들지요.
<84번가의 연인>은 <연인>이라는 말 때문에 로맨스 영화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요.
어쩌면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중고 서점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영문학이 뭔데? 하는 이들에게는 지루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아마도 중간에 때려치울 확률이 99%.
그렇지만, 인물들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헬렌 한프는 허름한 아파트에 처박혀 담배를 피워대며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를 두드리는, 그리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홀로 사는 중년 작가입니다. 성격 급하고 직선적인 헬렌은 고대했던 라틴어 성경 번역본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성서의 번역을 망쳤다”고 신랄한 비평을 보내기도 합니다. 소신 있는 작가입니다.
양복이나 버버리 차림에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하며, 유명 고서점 지배인다운 지적이며 단정한 분위기의 중년 남성 프랭크는 시골 영주 저택으로 책을 사러가기도 하는 등, 고객의 주문에 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꼼꼼하고 깐깐하게 책을 고릅니다. 헬렌의 불만 섞인 서평에는 당당하게 응하고, 사적인 내용에는 시침 뚝 뗀 간결한 유머로 답하며, 무엇보다 장정까지 아름다운 좋은 책을 권하고 헬렌이 좋아할만한 책을 알아서 챙겨 보내기도 하지요.
성격과 환경이 완전 반대인 헬렌과 프랭크지만, 책과 작가에 대한 사랑과 열정, 숭배는 애서가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습니다.
1904년에 개점한 서점 마크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서점 주인들을 훈련시킨 사관학교와 같은 유명 서점이었습니다. 현재는 레스토랑이 들어선 서점 자리엔 헬렌 한프의 책 <체링크로스가 84번지>(1970)와 영화 <84번가의 연인>(1987)의 무대였던 마크스 서점이 있었다는 동판이 붙어있다고 하네요. 서점은 사라지고, 영화와 책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문득 쓸쓸해집니다. 언젠가 영국에 다시 가게 된다면 꼭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헬렌과 프랭크는 갑작스런 프랭크의 죽음으로 만나지 못하고 헬렌은 폐허가 된 서점을 찾아가면서 영화의 시작과 끝이 맞물립니다.
우리나라도 유명한 고서점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 그또한 안타깝고 서글프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푹 빠져서 보았던 영화였습니다.
첫댓글 이건 딱 제 취향일 것 같네요!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편지로 작가와 서점 식구들은 모두 친구가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