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얼이 깃든 판소리
선창(先唱)에 따라 부르려고 애를 써본다. 옆 사람도 알아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부른다. 나 혼자 입 안에서 웅얼거릴 뿐이고, 누가 들을까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얼굴 붉어진다.
젊어 청춘 좋은 그때 엊그젠 줄 알았더니/오날 보니 늙었구나/검던 머리 희어지고
곱던 형용 추악허여/우수가 그늘 되니
원수야~ 원수가 따로 없고/백발이 모두 원수로구나
- 중략 -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마라
알뜰한 청춘들이 다 늙어간다.
- 하략 - (백발가)
우리가락 우리노랫소리는 봄볕 따스한 솔밭에 이는 솔바람 소리다.
오솔길 걸으며 송화(松花)가루 날리는 그 소리.
오랜 세월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노래이다.
부채 살 쫙 펴며 옅은 하늘색 치맛자락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하얀 버선코가 일으키는 삽짝바람, 인생 고갯길을 넘어가는 한 맺힌 노래이다.
보릿고개 서러운 한숨, 장다리 노란 밭고랑으로 사푼사푼 나비춤사위는 구름 따라 하늘 강을 건너가는 가야금과 거문고에 실려 가는 노래인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소리. 저 먼 단애(斷崖)와 천애(天涯)에 소리 길을 만들고, 너울너울 춤을 춘다.
누구나 넘어야 할 인생 고개, 흰 구름 푸른 산에 머무는 한 많은 노래이다.
구중심처 청상(靑孀)의 그리움이 엉켜 한(恨)이 되었다가 서리서리 풀어내는 노래.
두견이 한 번 울적마다 한 송이씩 피고진다는 진달래처럼 붉게 산천에 꽃피우는 노래다.
그것은 비바람 천둥과 번개와 햇볕이 다듬어준 자연의 소리며 생의 매듭을 풀어주는 천상의 소리이다.
소매바람 일으키며 인생 한고비 꺾고 넘어갈 때 삶의 마디마디 쓰다듬고 주무르며 한 가닥으로 어우르는 이별이며 해후의 노래이다.
그리운 임, 마음껏 불러보고 싶은 사람, 가슴에 맺힌 그리운 사람, 그 노래 가락이 삶의 길목에 머물러 한으로 남는다.
삶의 애환을 녹여 풀어내는 가장 속 깊고 아득한 소리다.
가슴속 마디마디 소리가 되어 영겁의 달빛에 물드는 조선의 노래이다.
부챗살 징검다리 건너가는 추임새.
때로는 비구름이요 눈보라이었다가 살포시 꽃눈 뜨고 바라보는 임, 차마 그 눈빛 마주하지 못하고 사랑 마음 숨긴 채 돌아서는 심정, 말로 어이 다할 수 있을까.
눈빛에 실려 오는 그 소리, 때로는 서러움이고, 때로는 몸부림이며 속으로 삼킨 체읍(涕泣)이다.
실컷 울고 나야 가슴이 탁 트이듯이 너의 노래는 이 한밤 온통 나의 가슴에 머문다.
네 노래는 사무쳐 흐느끼듯 춤을 추듯 너무도 청아하여 기쁨에도 눈물일 것만 같다. 그 눈물 손수건으로 찍어낸다. 방황하는 마음 어루만져 주는 임의 손길 영원의 소리며 득음(得音)의 깨달음이다.
동편제 서편제를 초월하여 영원으로 스며드는 소리.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 한데 모아 고요한 달빛 속에 흐르게 한다.
삶의 고비마다 알알이 맺혀오는 시름과 서러움을 구름에 띄워 보내고,마음에 쌓여 무거워진 한숨 소리도 가락으로 바꿔 우리 내면의 가장 밝고 맑은 곳에 쌓아 둔다.
한번 가면 오지 못할 세상이다.
속절없는 인연일지언정 지금 이 자리에 머물자.
한 점의 사랑, 가슴에 맺힌 아름다운 사연을 고이 접어 간직하자.
노랫소리.
창밖에 달빛은 휘영청 밝은데, 솔바람 스쳐간 추억의 오솔길을 걸으며 노래는 우리를 인도한다.
귀명창들은 달빛 밟으며 추임새 넣어 장단을 맞춘다.
소리의 날개옷으로 고요의 오솔길을 날아간다. 원도 한도 없는 소리의 한복판으로 날아가고 있다.
우리의 창(唱)은 정화된 마음의 고향이다.
그냥 소리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모음의 소리다.
그 소리는 영원의 고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영겁의 세월이 선율로 흐르며 변함없이 강물 따라 바다에 이른다.
판소리를 완성하는 인물치레, 아니리와 득음과 발림은 하늘과 땅이 마음을 교감하는 신비의 체험이다.
인수순약격석화요(人壽瞬若擊石火)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ⵈ사 철를 노래한다.
판소리는 노래 따라 마음의 산책을 나서는 길이며 깊은 사색의 연화장세계에 도달하는 반야용선(般若傭船)이다.
차분하면서도 조용하고, 서러움인 듯 아름다운 소리,
영원의 달빛에 맞닿아 있는 생명의 소리이며 삶이 농익은 애환(哀歡)의 노래이다.
우리민족이 영원히 희망으로 이어가야할 과제이며, 우리의 영혼에 아름답게 꽃피워야할 한(恨)을 푸는 숙제의 소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