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문⟩
왜 인 록
Who's Who ln Japanese Wokou
2075년 동안 한반도를 유린한 왜구들의 인명사전을 펴내면서
이 책을 펴내고자 했던 목적은 큰 데 있지 않았다.
일본인들로 인해 1년이면 몇 차례 솟구치는 울분과 안타까움을 해소하고픈 생각에 한반도를 침략하고 괴롭힌 왜구(일본인)들의 신상을 파악해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의 역사책 대부분이‘왜구들이 어디 어디를 침략했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구체적으로 어디서 사는 누가 침략했는지, 또 그 후손들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싶어서이다.
왜구들이 한반도를 최초로 침략한 것은 BC50년이다.
그러니까, 올해로 딱 2075년 전의 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BC50년 신라 박혁거세왕 때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반도를 괴롭히고 있는 일본인들의 뿌리를 찾아, 왜구들과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고 싶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들과 계속 원수로 지낼 것인지, 친구로 개선해 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필자는 1991년 일본생협(생활협동조합)에 연수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비누 운동가들과 인연을 맺어‘아시아비누회의’를 조직하고, 공동사무국장으로 2020년까지 활동한 바 있다. 일본에 속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지인들이 많은 편이라, 이 책을 쓰면서도 혹여 왜구와 관련된 후손들은 없는지,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자료를 추적하다 보니, 한반도와 친화적인 인물 중에도 의외의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제79대 수상 호소카와모리히로(細川護煕,1938∼)의 선조인 고쿠라번(小倉藩,기타규슈시)의 초대 번주를 지낸 호소카와타다오키(細川忠興,1563∼1646)는 제1∼2차 진주성을 침략해 10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을 몰살했던 악랄한 왜장이었다. 그의 외조부는 국가사회주의 전범 조직이었던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를 조직한 수상 고노에후미마로(近衞文麿,1891∼1945)로, 그는 태평양전쟁의 A급전범으로 지명되자,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음독자살하였다. 또한 고노담화(河野談話)의 주인공인 고노요헤이(河野洋平,1937∼)의 부친인 고노이치로(河野一郎,1898∼1965)는 태평양전쟁의 A-급전범으로 공직에서 추방된 자였으며, 또 한 명의 친한파로 제93대 수상을 지낸 하토야마유키오(鳩山由紀夫,1947∼)의 조부 하토야마이치로(鳩山一郎,1883∼1959)는 제52∼54대 수상을 지내면서, 전범들의 정당인 자민당의 초대 당수를 지냈는데, 그 역시 A-급전범으로 공직에서 추방된 이력이 있는 자이다.
반한파들 역시 예상대로 전범들의 후손들이었는데, 반한파 수상의 대명사인 고이즈쥰미이치로(小泉純一郎,1942∼), 아베신조(安倍晋三,1954∼2022)의 조부와 부친들도 A급전범과 그로 인해 공직에서 추방된 자들이었고, 고이즈미(小泉)의 조부 고이즈미마타지로(小泉又次郎,1865∼1951,체신대신)와 부친 고이즈미쥰야(小泉純也,1904∼1969,방위청장관)는 모두 태평양전쟁의 A-급전범(공직추방)이었으며, 아베(安倍)의 고조부(조모의 조부)인 오시마요시마사(大島義昌,1850∼1926,육군대장)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1만 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불법으로 조선에 들어와 무자비하게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자였으며, 외조부 기시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는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만주 관동군(関東軍)의 마약 밀매 책임자였다. 패전 후에는 A급전범으로 체포되어 추방되었다가, 추방에서 해제된 후에는 돌아온 전범이 되어 자민당 소속으로 제56∼57대 수상을 지냈다. 또한 작은 외조부 사토에이사쿠(佐藤栄作,1901∼1975)는 제61∼63대 수상을 지내면서 박정희와 한일 수교협정을 강행했으며, 또 비핵-3원칙(갖지 않는다・만들지 않는다・들여오지 않는다)으로, 세계를 기만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이는 노벨평화상 사상 최초의 사기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앞에서 소개한 친한파든 반한파든 재일조선인들이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가졌던 193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 후반까지, 모두 재일조선인들과는 엄청난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투표권이 없어진 오늘날, 그나마 친한파는 의리를 지켰다고 평가할 수 있는 반면, 반한파는 여지없이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책자는 총 8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제1장과 제2장으로 나뉘어 편집되어 있다. 각 장의 1장은 당시 한반도를 유린했던 왜구들의 침략 내용 또는 당시 상황을 개관하였고, 2장은 한반도의 침략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자들을 소개(인명사전)했으며, 그리고 그들의 후손과 친척들에 대해서도 한반도 침략이, 비하에 대한 연관성을 찾기 위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해 놓았다. 제7장(제1대∼103대 내각)과 제8장(제1대∼126대 천왕)에 등장하는 인사 중, 개인적으로는 한반도 침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할지라도 당시 국정운영의 공동 책임자로서 연대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기에, 제1장∼6장과 똑같이 본인과 가족・친척들을 소개해 놓았다.
필자는 역사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비전문가로서, 이 책자를 완성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는데, 2012년에는 약 5년 동안의 자료준비 끝에“2062년 동안의 슬픔”이라는 책자를 출간했으며, 2013년에는“쪽발이 통한가”라는 판소리-시(詩)집을 출간하면서, 특별행사로 「1948년 6월 8일 일본정부의 요청을 받은 오키나와 미공군 소속 B-29 폭격기 9대가 독도 해상에서 어업 중이던 150여 명의 대한민국 어민들을 학살한 사건」을 광주시립국악단의 공연을 통해 판소리극으로, 발표한 바가 있었다. 이때, 우파들로부터 ‘우리의 동맹인 미군이 그럴 리가 있었겠냐’는 엄청난 항의를 받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2021년에는 망해가는 조선에서 훈장을 타내 갔던 일본인들을 소개한 토착 왜구들의 본산 “본토 왜구와 그 후손들”을 출간하는 등 지난 18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료들을 준비해 왔으며, 힘들었던 투병 중에도 쉬지 않고 하루에도 10여 시간 정도의 수면과 휴식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이 책자의 완성을 위해 육체적 중노동을 해 왔다. 물론 이 책자가 노동의 시간만큼 질적으로 반드시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니다.
제1장은 삼국시대 때부터 준동했던 왜구들을 찾다 보니, 일본에는 이미 태재부(太宰府)가 존재했고, 그곳이 왜구들의 총사령부였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또한 태재부의 수장이었던 다자이노소치(大宰帥)라고 하는 형식의 관직을 가진 자가 있었고,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따르면 536년 훨씬 이전부터 하카타(博多,후쿠오카)의 나노쓰(那津)등에 태재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태재부라는 형식의 관청도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마지막 태재부의 다자이노소치는 제91대 아리스가와노미야다루히토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제1-2장참조)이란 자로, 그의 임기는 1869년 8월 15일까지였으며, 이는 한반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구・왜구들의 활동이 종식된 날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에서 이날은 1868년 1월 3인 메이지(明治)유신에 성공한 중・하위급 사무라이들이 메이지 신정부의 첫 내각을 출범시키던 날로, 이 책자에서는“제6장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야욕을 이어받은 메이지(明治) 사무라이 내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일본 역사서에서는 이날을 태정관제(太政官制)가 시작된 날로 보고있어, 제1장의 활동 기간을 BC50년부터 1869년 8월 15일까지로 설정하였다.
제1장뿐만 아니라, 각 장은 모두 제1장과 제2장으로 나뉘어서 편집되어 있는데, 제1장의 경우 총칭은“100만 명 이상 고려인을 학살한 태재부시대(太宰府時代-삼국・고려・조선)의 왜구와 그 후손들”이며, 제1-1장은“한반도를 농락한 태재부(太宰府)의 왜구들”이고, 제1-2장은“100만 명 이상의 고려인을 학살한 태재부시대(太宰府時代), 왜구들의 인명사전”으로, 우리의 역사서가 고려시대 때 왜구들의 침략 사실을 소홀히 다룬 점을 고려하여, 「고려사」와 일본 6국사,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가마쿠라연대기(鎌倉年代記), 노치카가미(後鑑)등을 통해 나름 좀 더 세세하게 보완했다. 인명사전에 수록된 자는 태재부가 227명, 헤이시정권이 1명, 가마쿠라막부가 82명, 무로마치막부가 76명, 에도막부가 31명이며, 그리고 당시 한반도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평조신(平朝臣)과 평조신(平調信), 귤씨(橘氏)・귤왜(橘倭)・귤지정(橘智正), 규슈의 기쿠치씨(菊池氏)등을 합하여 417명이며, 약식으로 소개된 가족과 친족들은 980여 명으로, 총 1,400여 명이 수록되어 있다.
제2장의 명칭은“20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을 학살한 임진왜란의 전범과 그 후손들”이다.이 사건의 연대가 제1장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제2장만 별도로 발췌하여 편집하였다. 제2-1장의 명칭은“임진년(壬辰年)과 정유년(丁酉年), 선전 포고 없이 조선을 급습한 일본군”이며, 2-2장은“20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을 학살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의 인명사전”이다. 인명사전에 당사자로 수록된 자는 217명이며, 약식으로 소개된 가족과 친족들은 459여 명으로, 총 676명이 소개되어 있다.
제3장의 명칭은“개화기・강점기 시대의 왜구와 그 후손들”인데, 그 내용은 제1장에 이어진 왜구들의 침략 내용으로 1870년 고종 7년 5월 7일부터 해방된 해인 1945년 12월 31일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그리고 제3-1장의 명칭은“개화기・강점기시대, 왜구들의 침략”이며, 제3-2장의 명칭은“개화기・강점기시대, 왜구들의 인명사전”이다. 인명사전에 당사자로 수록된 자는 139명이며, 약식으로 소개된 가족과 친족들은 311명으로, 총 450여 명이 소개되어 있다.
제4장의 명칭은“망해가는 조선에서 훈장을 타간 왜구와 그 후손들”로, 제4-1장은“왜, 그들은 망해가는 조선에서 훈장을 타내 갔을까? 이며, 제4-2장은“망해가는 조선에서 훈장을 타내 간 왜구들의 인명사전”이다. 조선 훈장을 수여했던 초창기에는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훈장을 타가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 주로 하급 관리들이 수여 받았으나, 러일전쟁 이후에는 고위급 인사들이 훈장을 받기 위한 경쟁을 벌였는데, 첫 번째 수상자는 사에키곤(佐伯誾,1860∼1904)이란 자로, 1901년 12월 21일 훈3등-팔괘장을 포상금과 부상 등을 함께 받아 갔는데 그는 해군병학교(8기) 출신이었고 1901년 4월, 청일전쟁 때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2355톤급 방호순양함(Protected Cruiser)인 사이엔(済遠)의 함장이었으며, 1904년 러일전쟁 중 같은 일본함정과 충돌하여 45살의 나이로 급사했고, 그의 위패는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에 있다. 마지막 수상자는 의사인 스즈키겐노스케(鈴木謙之助,생몰년불상)로, 조선을 강제 병합시키기 4일 전인 1910년 8월 18일 훈4등-팔괘장을 포상금 등과 함께 타내 간다. 인명사전에 당사자로 수록된 자는 934명이며, 약식으로 소개된 가족과 친족들은 160여 명으로, 총 1,100여 명이 소개되어 있다.
제5장의 명칭은“조선에서 팔자를 고친 조선통감부・총독부・이왕직 등의 왜구와 그 후손들”이며, 제5-1장은“일제강점기 통치 기구였던 조선통감부・총독부・이왕직 등에 대해”, 5-2장은“조선에서 팔자를 고친 일제강점기 왜구들의 인명사전”이다. 인명사전에 당사자로 수록된 자는 총 519명으로, 조선통감부에서 빌어먹고 살았던 자가 75명, 이왕직에서 빌어먹고 살았던 자가 5명, 조선총독부에서 빌어먹고 살았던 자가 439명이었으며, 약식으로 소개된 가족과 친족들은 620여 명으로, 총 1,140여 명이 소개되어 있다.
제6장은“토요토미히데요시의 야욕을 이어받은 메이지(明治)・사무라이 내각”이라는 신조어로, 현재 전범 정당인 자민당의 모태가 된 조직이다. 제6-1장은“조선 강제 병합의 원흉, 메이지・사무라이 내각이란?”이며, 제6-2장은“토요토미히데요시의 야욕을 이어받은 메이지・사무라이 내각의 인명사전”이다. 인명사전에 당사자로 수록된 자는 217명이며, 약식으로 소개된 가족과 친족들은 346명으로, 총 563명이 소개되어 있다.
제7장만 제7-1장과 제7-2장으로 구분되지 않았는데, 역대 내각이 제1대에서 제103대까지 존재함으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제7-2장을 대신했고, 제7-1장은 그냥 서장으로 표기했다. 따라서 제7장은 서장 “역대 일본 내각의 각료와 그 후손들”로서, 제7-2장은 제1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내각에서부터 2025년 6월 현재 제103대 내각까지, 각 해당 내각에서 수상과 각료를 지낸 자들과 그 후손, 친족들까지 소개했다. 인명사전에 당사자로 수록된 자는 2,779명이며, 약식으로 소개된 가족과 친족들은 2,260여 명으로, 총 5,040여 명이 소개되어 있다.
제8장은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에게는 재림한 현인신(現人神)으로, 내각은 물론 일본인들의 개인사의 명운까지도 주관한 천왕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총사령관이자, 모든 전범들의 우두머리였으나 맥아더의 GHQ(연합군최고사령부)조차 그를 처벌하지는 못했다. 이를 두고서 ‘일본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천왕을 활용할 필요가 있어, 맥아더가 그를 역・이용했다’는 등, 당시 전범재판소의 결정을 둘러싸고 여러 설들이 있었으나, 필자는 그 말에 동의한다. 맥아더의 배짱으로는 그를 죽일 수도 전범으로 처벌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맥아더의 미군은 진주 당시 일본을 직접 통치하려 했으나, 일본 전범 출신들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결국은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일본정부를 살려둔 채로 대리 통치에 만족해야만 했는데, 그런 그가 감히 천왕을 감옥소로 보낼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제8장의 명칭은“왜구들의 우두머리로서, 천왕과 그 후손들”이고, 제8-1장은“일본 역대 천왕에 대한 소개”이며, 제8-2장은“왜구들의 우두머리로서, 천왕들의 인명사전”이다. 인명사전에 당사자로 수록된 자는 총 126명이며, 가족과 친족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제1장∼제8장까지 당사자로서 수록된 왜구(일본인)들의 숫자는 5,348명이며, 그들과 관련된 가족과 친족은 5,140여 명으로, 총 10,480여 명의 일본인들이 소개되어 있다.
수록된 자료의 양이 너무 방대하여, 혼자서 마무리 짓기 엄두가 나지 않아, 광주지역에서 오랜 기간 함께 시민환경운동을 해왔던 동지들에게 자료의 강독을 부탁했다. 일부러 전문가는 찾지 않는 이유는, 물론 완성된 이후에는 전문가들의 영역일 수 있겠지만 이 책자를 완성할 때까지는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준동하는 왜구(극우 일본인)들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인물들의 끊기지 않는 일관된 침략사를 구성해 보고, 또 그와 연관된 인명록(왜구들의 족보)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이 자료집이 현재에도 준동하는 왜구들의 가사(家史)까지도 조명하고 고발함으로써, 그들을 극복해 내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필자만의 간절한 고집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제1장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제1장에서는 태재부시대 즉 한국 역사로는 삼국시대에서 조선 말기까지 무려 1919년 동안의 왜구 침략사를 다루고 있는데, 총론부터 언급하자면 왜구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단 한 번도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 침략이 없었던 시기는 거의 없을 정도로 침략의 횟수나 빈도 그리고 그 폐해의 정도가 극심했으며,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 민중들의 피해와 희생도 심각하였다. 필자가 강조한 2075년 동안의 한반도는, 왜구의 침략으로 국토가 유린 되지 않은 적은 한 해도 없을 지경이었고, 내륙과 해안을 막론하고 어느 곳이든 왜구의 침탈을 받지 않은 지역이 없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첫 침략은 BC(기원전)50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BC57∼BC4) 8년에「왜인행병 욕범변 문시조유신덕 내환,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일본인들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 국경을 침범했는데, 신라군들의 위세가 그들보다 강력했던지 서로 싸운 기록은 없었고,‘신라의 시조가 거룩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사건을 요약하여 보면, 왜구들은 항상 우리의 국력이 강하면 아첨과 청원형식으로 접근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였고, 국력이 약하거나 쇠락해지면 가차 없이 잔인하게 침탈을 서슴치 않는 반복적 패턴을 보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태재부의 자료에 의하면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송나라와 일본의 무역이 가장 성행했고, 병행하여 고려와의 무역도 최고치에 이르렀지만, 일본 조정(朝廷,천왕의 조직)은 관례대로 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는 무역이 최고치에 이르렀던 것이 아니고, 불법적인 침략과 약탈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으며, 일본 조정이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태재부를 통해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고려시대‘왜구의 침략이 너무도 극심하였다’라는 것을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는데, 그 피해 정도는 임진왜란 때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특히 고려 조정은 15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해상을 이용한 조운을 포기할 정도였으며, 1350년 충정왕부터 1392년 공양왕에 이르는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고려 전역에 아예 주둔하여 파고 살면서 닥치는 대로 약탈과 유린을 일삼았다. 이 시기의 상황은 실제로 임진왜란보다 더 극심한 침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시대 왜구들에 대해 화포로 큰 승리를 거둔 최무선의 홍산대첩(논산,1376년)과 진포대첩(1380년), 1383년 남해대첩, 1389년(창왕1년) 경상도원수 박위의 쓰시마(대마도)정벌 등은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1383년의 남해현(南海縣) 북쪽에 위치한 관음포(觀音浦)까지 와서 대승을 거둔 목포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의 관음포대첩에 대한 내용과 1380년 전북 남원의 황산에서 대승을 거둔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특히 이때 세운 황산대첩비를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이를 파괴하였다는 내용은 처음 접한 내용들이었다. 아무튼 고려는 일본인들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손실된 국력이 소진되어 마침내 이성계에 의해 멸망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당시 100만여 명의 고려인이 왜구들에게 학살당한 것도 사실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왜구들의 침략과 약탈은 약화되거나 쇠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랄해졌으며 그 폐해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임진왜란 이외에도 삼포왜란 등 수많은 침략 사건이 있었고, 조선에서 수도 없이 구걸하여 연명하면서도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나아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의 잔혹성은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만행이었다.
1603년 에도막부가 들어서고, 태재부는 조선과의 통상・외교권을 거머쥔 쓰시마에 밀려, 왜구들의 총사령부로서의 기능은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 에도막부가 중하위급 사무라이들에 의해 멸망하고, 1869년 8월 15일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사무라이들이 주도가 되어 만든「메이지 사무라이 내각」의 출범 때까지 존속되는데, 그때까지 존속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담처럼 왜구들의 유세(有勢)가 그만큼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함에도 삼국・고려・조선시대의 왜구 활동을“태재부의 왜구들”로 묶어서 왜구들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정리한 필자의 판단이 사료적 가치가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끝으로 제1장의 본문 내용 중에 흥미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305년 전에 벌어졌던 호코지(方広寺)사건은, 오늘날 일제와 과거사로 인해 발생 되는 외교적 갈등이 그 당시에도 똑같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719년 제9차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는데, 당시 교토에서 가장 내 세울만한 랜드마크는 호코지(方広寺)라는 절에 있는 커다란 불상인 대불(大仏)이었다. 일본 측은 호코지 대불을 자랑하기 위해 이곳을 견학시키고, 그곳에서 뒷풀이를 하기로 일정을 계획했으며, 가이드는 쓰시마번의 사무라이이자, 통역이었던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1668∼1755)였다. 그러나 호코지가 임진왜란의 살육자인 토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가 세운 절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뿐만아니라, 그 절 앞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의 귀를 베어가 만든「귀・무덤」도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이 일정에 대해 조선인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하며 거부했고, 그러자 아메노모리호슈는“지금의 호코지는 에도막부가 들어선 후, 도쿠가와(德川)가문에서 재건한 것으로서, 히데요시와는 무관하다”고 강변하는데, 그러나 조선 측은 궤변(詭弁)이라며 일축하고, 견학과 뒷풀이 참석을 거부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그의 얼굴이 마귀처럼 변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일본 측이 사정사정하여, 조선 측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만 참석하고, 다른 일행은 불참하기로 결정된다. 호코지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나,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도, 히데요시의 절(秀吉の寺)로, 이미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의 절이 아니라고 우긴 일본인들의 모습은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을 일삼는 오늘날 일본인들의 자화상과 흡사하며,“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다시금 한번 더 확인하게 한다.
제2장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제2장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과 1597년 재차 한반도를 침략한 정유재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가 침략의 대외적인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명나라를 정복하는데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였다. 이유는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모두 명나라가 아닌 한반도에서 진행된 일본의 침략과 학살, 약탈의 연속이었다. 2-1장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기록인 「태합기(太閤記)」등을 참고하여, 일본군의 군사 편제와 침략자, 침공 규모, 전황 등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들도 발굴하여 적시했으며, 또한 전란으로 인한 조선의 피해 상황을 「조선왕조실록」등 사초의 기록을 참고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사료적 가치를 높이고자 했다.
1597년 일본군은 다시 한반도를 침공하며, 정유재란 초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잔혹한 살육을 자행했다. 일본군 부대는 곧 충청도로 진격했으나 조명연합군의 방어에 막혀 한양 침공을 포기하고 재차 전라도와 경상도로 남하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은 일본군에게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전란이 한창이던 1598년 8월 토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1537∼1598)가 급사하자, 본토 철수를 결정한 일본군은 패퇴를 거듭하던 중 이순신 장군을 위시한 조명연합군으로부터 크나큰 타격을 입는다. 결국 일본군은 패배하고 도주하는 형태로 철수한다. 그러나 7년간의 왜란은 한반도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7년간의 침략전쟁으로 조선의 고을 약 70%가 파괴되었고 조선의 인구 416만 명 중 200여만 명이 학살되거나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 밖에도 「고려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등 중요 사료와 출판물이 유실되거나 도자기, 도공, 예술품, 사찰 보물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어, 지금은 일본의 국보로 둔갑 되어, 버젓이 자기 것 인양 UNESCO에 등재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종전 후에도 사과는 커녕, 오히려 ‘교역하지 않으면 군사들을 보내겠다’는 등 협박을 일삼았다. 무능한 조선 조정은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보상이나 전쟁 책임자 처벌 등은 요구조차 하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지 11년째 되던 해인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어 일본과의 수교를 수락했다.
2-2장은 임진왜란에 직접 관여한 전범들과 그 후손들을 추적, 정리하였는데, 7년간의 전란의 주범이라면 단연 토요토미히데요시이다. 히데요시(秀吉)는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의 말고삐를 담당하던 하급 무사로 시작해 무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노부나가(信長)가 암살된 후, 1591년 일본 통일을 이루고 태합(太閤)에 오르게 되며, 일본의 내란이 수습되자 전리품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 침략을 계획하는데, 당시 일본은 가신이라도 반드시 연봉을 합의해서 고용했고, 전투에서 성공하면 꼭 이익을 나눠 가졌기 때문에 모든 전투 현장마다 언제나 현장을 감독하고 장수들에게 평점을 메기는 군감(軍監)과 군목(軍目)의 시스템이 존재했다.
당시 대표적인 왜장들을 소개하자면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는 임란 당시 제1군 1번대 선봉대장으로, 사위인 쓰시마(対馬)수호 소요시토시(宗義智)와 함께 선발대를 이끌었으며, 2번대 대장인 가토기요마사(加藤清正,1562∼1611)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부산을 함락하고 한양을 거쳐 평양성까지 진격했으나 명나라 이여송의 참전으로 명나라와 강화 협정에 나선다. 이때 거짓 협정을 추진하다가 들켜 히데요시에게 자결을 명받기도 했다가 살아남아, 정유재란 때 재차 조선을 침략하지만 패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도쿠가와군(德川軍)과 토요토미군(豐臣軍)이 맞붙는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토요토미의 서군(西軍)에 가담했다가, 참수당하고 멸문되었다.
가토기요마사는 선발대 제1군 2번 대장이었으며, 함경도를 평정한 후 조선의 두 왕자를 포로로 잡기도 한다.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부산 쪽으로 후퇴하면서 진주성에 피신해 있던 조선백성 3만 5천여 명을 일방적으로 학살하였으며, 이후, 휴전에 찬성하는 고니시유키나가와 달리 휴전에 반대하던 기요마사는 정유재란 때 재차 선봉을 맡아 악명을 떨쳤고 전란 후,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의 동군(東軍)에 서서 전공을 세운 후, 54만 석의 초대 구마모토번(熊本藩)의 번주가 되어, 호사를 누리다가 죽는다.
시마즈요시히로(島津義弘,1535∼1619)는 선발대 제1군 4번대 소속으로 사쓰마번(薩摩藩,가고시마현)의 시조이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협공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대장 원균(元均)을 토벌하며,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의 동군(東軍)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워 살아남는다.
다테마사무네(伊達政宗,1567∼1636)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유일한 다이묘(大名)로 참전해, 약 10만 명의 일본군으로, 조선 의병 3천여 명을 비롯한 일반 백성 등 3만 5천여 명의 일방적인 학살을 진두지휘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도쿠가와이에야스의 동군(東軍)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운 후, 62만 석의 초대 센다이번주(仙台藩主)에 등극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략군의 총대장이었던 우키타히데이에(宇喜多秀家,1572∼1655)는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57만 4천 석의 오카야마성주(岡山城主)가 되며,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본인의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총대장에 임명되어 조선을 침략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토요토미의 서군(西軍)에 섰다가 패배하자, 도주했다가 붙잡혀 유배를 가는데 유배지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죽는다.
히데요시 휘하로 조선을 침략했던 왜장들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와 무단파(武斷派)와 문치파(文治派)로 분열하는데, 그 원인은 조선 침략 당시 군감(軍監)과 군목(軍目)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전공을 평가했던 문치파가 무단파의 전공을 낮게 평가해 불이익을 받게 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문치파는 이시다미쓰나리(石田三成,1560∼1600)를 필두로, 이들 대부분이 히데요시의 가신들이었으며, 조선을 침략했던 왜장들은 대부분 무단파로,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도쿠가와이에야스의 편에 합류하여 살아남는데, 그의 후손들은 이후,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사무라이 내각의 주역이 된다. 그들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강제 병합하고, 태평양전쟁의 주범으로서 전범이 되어 일본 사회에서 추방되었다가, 1952년 미일 샌프란시스코 종전조약으로 풀려난 후에는 1955년 전범들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을 창당하고, 정치인으로서 일본인들의 재신임을 받아 오늘날 일본 정부를 주도하고 있는데, 이렇듯 오늘날 일본의 메인 스트림은 토요토미히데요시에서부터 기인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3장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개화기・강점기 시대로 왜구들의 침략사를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망한 직후부터 1945년 말까지,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보면 1867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마지막 대장군(제15대)인 도쿠가와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가 막부의 깃발을 내린 후, 각 번의 중하위급 사무라이 세력들이 연대하여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성공을 선포하면서부터 조선을 괴롭히기 시작한 시점을 말한다. 이 시기는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해 가는 시기였으며, 조선에게는 치명적인 아픔과 고통을 안긴 민족 수난의 시기이기도 하다.
1870년대 들어, 일본정부는 조선에 대한 외교권과 통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선정벌론을 주장하거나, 쇄국정책으로 걸림돌이 되는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 등 고종의 친정체계를 꾸리는데 개입하는 방식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아래의 제6장에서 재차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106마력짜리 운요마루(雲揚丸)라고 하는 허접한 군함으로 강화도를 침략하고 조선을 개항시켰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최대의 행운이었고, 조선으로서는 불행의 서막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당시 조선의 명줄을 쥐고 있었던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때문이었다. 준비가 덜 된 조선은 갑작스러운 개항으로 일본의 노리개가 되어 가는데, 1876년 2월에 청나라가 끼어들어 어설프고 엉겹결에 체결된「강화도조약」은 일본인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강제적인 형태의 편무조약으로, 1945년 8월 15일까지 69년간의 일제의 강점과 수탈의 시발점이 되었다. 강화도조약은 불평등조약의 대명사인 대표적인 편무조약(片務条約)으로, 당시 일본도 개항 초기 서구 열강들과 맺었던 편무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열강들과의 조약 재개정을 시도하는데 정부의 명운을 걸 정도로 시급한 과제였을 만큼 불평등조약이었음에도, 조선과는 1910년 강제병합 때까지 맺었던 모든 조약이 편무조약이었다.
이어진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조선정부가 일본과 맞서 싸워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맥없이 물러났고, 한번 주눅 든 조선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몸 사리기에 바빴으며, 일본의 눈치를 보며 주저주저하는 사이, 그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 것은 일본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그 배후 조정자가 당시 대표적인 조선 멸시자였던 후쿠자와유키치(福澤諭吉,제3-2장참조)였다. 조선 최초의 토착 왜구들이었던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 일본 유학파들이 그를 사부로 모셨고, 그는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 낭인(야쿠자)들이 대거 조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은 무라타쓰네요시(村田経芳,1838∼1921)가 1880년(매이지・13년)에 개발한 13년식 신식 소총인 무라타(村田) 소총에 속수무책으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는데, 무라타 소총 1정이 50명의 동학농민군을 상대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기본 무장에서부터 동학농민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고, 조선의 마지막 무력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청일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는 이미 예고된 일이었고,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도 거의 공개적으로 자행됐으며, 일본인들의 뒷수습 과정도 조선은 안중에도 없었고, 조선인에 대한 무시와 비하는 이미 상상의 이상이었으며, 조선인들을 아예 인간으로도 보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총괄 두목이었던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楼)는 일본 천왕 메이지(明治)로부터“수고했다”는 치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라, 가는 곳마다 대규모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수립한 고종황제의 치적 중에는 한양의 도시 정비를 아주 짧은 기간에 이뤄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똥 더미를 두고 개들이 다투던 도시가 짧은 기간에 도쿄나 북경보다도 더 깨끗한 도시로 탈바꿈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었다.
1904년의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조선이 기대했던 독립 보전의 희망이 무너졌고, 1905년 11월 17일 국권을 상실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제2차조일협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며,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한다.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에 의해 히로부미(博文)를 저격하는데 성공하며 민족의 울분을 잠시나마 풀어내지만, 1910년 8월 22일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는데, 조선의 황제는 왕으로 강등되고, 조선은 이씨조선(李氏朝鮮)으로 격하되며, 일체의 통치권은 일본 천왕 메이지(明治)란 자가 가져가게 된다.
일제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진압한 후까지, 조선인들이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 보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였는데,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었던 잔악무도한 것으로서, 세계인들로부터 집단 새디즘(Sadism) 정신병자들로 커다란 비난과 지탄을 받게 되자, 일본은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마고토(齋藤實)를 총독으로 파견하여 소위 문화통치(文化統治)라는 것을 실시하는데, 일제는 매질 대신에 강제노동으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으며, 각종 회사를 설립하는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되며, 억압보다는 회유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어 1931년 관동군(関東軍)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군부들이 득세하게 되자, 조선의 문화통치와 일본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회제도)정책은 종언을 고하게 되며,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전시경제로 재편된다. 남면북양(南綿北羊)이라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즉 남쪽은 면화 재배, 북쪽은 1가구당 3마리의 양 사육을 강요받았는데, 이는 추운 중국 북부지방으로 침략하는 일본군을 위해 양털의 군수품화로 진행되었다. 1930년대 후기는 국가총동원법이 발효되고, 모든 산업이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1940년이 되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구상하고, 전력(戰力)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일제는 외지(식민지)와 내지(본토)를 완전히 통합하는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인 민족말살정책을 식민지를 대상으로 강제로 수행하였는데, 조선인 창씨개명(創氏改名)과 함께 일본 기업들의 조선 진출이 가속화된다. 제64∼65대 수상 다나카가쿠에이(田中角栄)가 전혀 연고가 없던 대전에다가 갑자기 이화학연구소라는 회사를 세운 것도 이 시기였다. 조선총독 중에서 가장 악랄한 자였던 미나미지로(南次郎,제7-28장참조)는 1940년 2월 11일 일본 건국 기원절을 시점으로 6개월의 시한을 주고, 조선인 창씨개명(創氏改名,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을 서두르라고 명령하면서, 조선인들이 천왕의 황은에 감격하여 열화와 같이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자율에 맡겨놨는데, 같은 해 5월 20일까지 자발적으로 추진됐던 창씨개명은 7.6%에 불과했다. 각 도별로 그 추진 비율을 보면 경북(22.8%), 충북(12%), 충남(9.6%), 평북(7.7%), 경기도(7.1%), 평남(6.7%), 황해도(6.1%), 강원도(5.5%), 경남(4.8%), 전남(4.6%), 함북(3.7%), 함남(3.6%), 전북(1.8%) 순이었다.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패망하면서까지도 당시 조선에서도 유통되던 엔화의 고액권을 9월 9일까지 계속 찍어댔을 정도로 아주 악랄하고 지독한 자들이었으며, 우리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심보를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제3장의 내용 중에 태극기(太極旗) 탄생의 진실도 실렸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갑신정변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게 덮어씌운 일본은 일본 천왕에게 잘못을 비는 사죄사(謝罪使)의 파견을 요구한다. 이에 조선정부는 철종(哲宗)의 부마인 박영효(朴泳孝,1861∼1939,역적)를 정사로 파견하는데,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공사 하나부사요시모토(花房義質)는 박영효가 배 안에서 조선의 깃발(태극기)를 고안할 때, 자신이 이를 도와줬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내용은 일본의 모든 역사책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부사(花房)는 일장기의 붉은 원 위에 아래쪽은 청실로, 태극 문양의 4괘는 조선 황실의 삼파전(三つ巴,정보불상)의 도안을 검은 실로, 자수를 놓도록 제안하여, 신속하게 제정되었다고 자랑처럼 주장하고 있다. 박영효의 기록에는 사죄사로 일본으로 가는 영국 군함 안에서 영국 영사와 함장의 도움으로 태극기를 완성 시켰고, 동년 8월 14일 고베(神戸)에 도착하여 머문 니시무라여관(西村旅館)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같은 달 22일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붙인 소형 견본과, 함께 만든 태극기를 본국에 보냈다고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애국가에 이어 태극기도 왜놈들의 더러운 손때가 묻었다는 사실에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제4장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조선 말기, 조선에서 훈장을 타내 간 1천여 명에 가까운 일본인들의 명단과 그들의 역할 등을 수집하여 기록한 내용이다. 조선은 조선의 국체 보전과 약해져 가는 국력과 국격을 드높이고자 조선에 도움이 되는 외국인들에게 훈장을 수여코자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인들이 외국인 1,297명 중 91.2%인 1,183명(중복수상자포함)이 훈장을 타내 갔다. 1905년 러일전쟁 종전 이전까지는 조선 훈장에 대해 소극적이던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이 끝나자, 러시를 이루었는데, 일본정부가 정책적으로 주도했다. 그 근거로는 대리 수상을 하면서까지, 천왕 메이지의 처와 왕세자 다이쇼의 처도 조선 훈장을 타내 갔으며, 이토히로부미와 그의 처도 타내갔고 결국에는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이들이 모두 수상자가 되었다. 또한 이들이 노린 것을 조선의 재정을 악화시킬 목적도 있어, 포상금으로 주는 최고 2천 엔과 부상으로 주는 금 솥 등도 탐냈는데, 1890년 당시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인근의 양화식(洋和式) 최신식 주택이 1,550엔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훈장을 타내 간 세력들은 대부분 태평양전쟁의 주역들로 성장하며, 패전 후에는 전범으로 잠깐 죗값을 치렀다가, 1952년 미일 종전조약으로 풀려나, 돌아온 전범이 되어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복귀하는데, 1955년 자민당을 결성하고, 현재 일본정치의 주역으로 재등장했으며, 그의 후손들도 대부분 전범들의 정당인 자민당에 속해있으면서 2025년 현재 일본 사회의 각계에서 주류로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받아 갔던 조선 훈장에 대한 정보를 찾아냈는데, 2023년 8월 21일, 경매사이트인 일본 야후(yahoo)옥션에서 조선 최고 훈장이었던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勲位-金尺大綬章)의 낙찰가가 2,157,000엔(円)이었던 것을 보면 그 후손들도 이를 돈벌이로 즐기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제5장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강제로 제2차 조일협약(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고, 조선통감부와 함께 이사청(理事庁)을 전국 13개 주요 도시에 설치하였으며, 또 이사청의 지청을 그 밑에 급의 11개의 도시에 두어, 조선의 지방조직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되게 되는데, 당시 일본에는 일정 정도의 신식교육을 받은 일본인들이 그만큼 많이 존재했다. 그리고 조선의 내각에 일본인들을 고문으로 고용케 하는‘고문(顧問) 통치’가 시행되었으며 일본인들이 강제로 할당되었다. 현재의 일본 역사교과서에는‘조선정부의 고문으로 고용된 일본인들이 조선 근대화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왜곡된 내용으로, 그들은 높은 임금과 값비싼 주택의 임차, 높은 출장비와 고액의 퇴직금 등을 타내 감으로서 오히려 조선의 재정 압박에 일조했던 후안무치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1907년 헤이그・특사(Haag Envoy)사건을 이유로, 일본은 같은 해 7월 20일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동월 조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어 조선정부의 모든 부서에 일본인을 차관으로 특채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고, 1909년 7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통해 사법권을 박탈하였으며, 1910년 6월 경찰권마저 빼앗고, 경무총감부(헌병경찰제)를 설치한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찬탈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실시하는데, 무단정치란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1527∼1898)가 조선을 침략할 때 파견했던 장수들을 무단파(武斷派)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무단정치의 어원이 되었다.
무단통치를 실시했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마사타케(寺内正毅,1852∼1919)는 조선을 강제 병합했던 1910년 8월 22일 밤, 거나하게 취한 채, 남산 위에 떠오른 달을 보면서“히데요시(秀吉)가 살아있었다면 오늘 밤 저 달을 보면서 무슨 말을 했을까”라고 히히덕 거렸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자 했던 히데요시(秀吉)를 상기시키는 발언이었다. 히데요시는 그들(사무라이 내각)의 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작금의 일본 청소년들에게도 우상이 되어있다.
데라우치(寺内)가 모델로 했던 무단통치는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秀吉)가 조선에서 실시했던 삼살정책(三殺政策)이었는데, 그 내용은“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죽이고,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빼앗고,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불 지르는 것”이었다. 그는 300년 전의 히데요시(秀吉)의 정책을 한점 틀림없이 그대로 답습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일본 헌병 경찰들은 말린소 음경에 납을 매달아 매질을 해, 조선 백성들은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그리고 통감부나 총독부에서 근무했던 일본인들은 은퇴 후에도 여전히 조선에 남아 전관예우의 몫으로 관청의 촉탁이나, 관련 회사의 임원이 되어 지속적으로 조선의 재화를 착취해 갔다.
일본 천왕 메이지는 1910년 8월 22일 조선을 병합하고 같은 달 29일 제1호 명령을 내리는데 ①조선에 총독을 두고 나의 명령을 받아서 육・해군을 통솔하며, 제반 정무를 모두 관할케 한다 ②황제 순종을 강등시켜 왕으로 삼아「창덕궁 이왕」이라 하고, 황태자는 왕세자로 삼으며 ③태황제인 고종도 강등시켜「덕수궁 이태왕」이라 하고, 그 배필인 황후와 태황후도 왕비와 태왕비로 하고, 황태자비는 왕세자비로 삼아, 모두 일본의 황족으로 대우하고, 특히 전하(殿下)라는 경칭을 사용하게 하니, ‘앞으로 이를 잘 지키고 따르면, 대대손손 행복을 누리게 해주겠다’라고 했다.
가장 핵심적 내용은 조선의 황제를 왕으로 강등시키는 부분이었는데, 당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본 천왕 메이지란 자는 순종황제에게 전보를 보내 황제 폐하 어쩌고 저쩌고 했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마치 뒷골목의 무뢰배처럼 돌변하여, 목에 칼을 대고‘무릎 꿇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달랐다. 청나라에서 쫓겨난 망국의 군주인 부의(溥儀)를 극진하게 모셔다가, 만주국의 황제로 옹립하고, 두 차례 일본으로 불러 초호화의 왕세자궁에서 머물게 하는 등 특별하고 살뜰하게 관리까지 해줬다.
조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분풀이와 비하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1917년 순종황제를 일본으로 불러다가, 천왕이었던 다이쇼(大正)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하는 천기봉사(天機奉伺)를 시키는데, 다이쇼가 왕세자 시절 때 조선에 와서 순종황제에게 천기봉사를 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후에도 조선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비하와 조롱으로 일관했으며, 그 비하와 조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오늘날 돌이킬 수 없는 한일관계의 근원적 출발점이 조선의 황제를 왕으로 강등시키고, 조선을 씨족 국가인 이씨조선(李氏朝鮮)으로 격하시켰던 일본인들의 그 심보가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그동안 과거사의 표기에 있어서도, 1990년대까지는 조선병합(朝鮮併合)이라고 표기해 오다가, 2000년대 고이즈미(小泉)와 아베(安倍)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한병합(日韓併合) 또는 일한합방(日韓合邦)이라고 바꿔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조선의 굴욕을 한국이 이어받은 것처럼 심리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또한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는 용어도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데, 이것도 일제강점기의 분명한 잔재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하하려는 의도인데도, 조선의 친일파들 중, 상당수가 이에 동조하고 자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유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제6장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자료에서 찾아보니, 제6장의 본래 명칭은 근대-태정관제(近代-太政官制)였다. 이에 필자가 우리나라의 관점에 맞춰「토요토미히데요시의 야욕을 이어받은 메이지・사무라이 내각(이하 메이지 사무라이 내각)」이라고 하는 신조어를 만들어 명명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각 번의 중하위급 사무라이 출신들이었으며, 그의 직계 선조들은 멀게는 고려와 조선을 약탈한 왜구들이었고, 가깝게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의 전범들이었으며, 근대에는 조선을 강제 병합시킨 주역들이었다. 당시 리더들이었던‘메이지유신의 10걸’들을 살펴보면 사이고다카모리(西郷隆盛,사쓰마번,제6-2장참조), 오쿠보도시미치(大久保利通,사쓰마번,제6-2장참조), 고마쓰기요카도(小松帯刀,사쓰마번,제6-2장참조), 오무라마스지로(大村益次郎,죠슈번,제6-2장참조), 기도다카요시(木戸孝允,죠슈번,제6-2장참조), 마에바라잇세이(前原一誠,죠슈번,제6-2장참조), 히로사와사네오미(広沢真臣,죠슈번,제6-2장참조), 에토신페이(江藤新平,히젠번,제6-2장참조), 요코이쇼난(横井小楠,구마모토번,제6-2장참조), 이와쿠라도모미(岩倉具視,교토-하급귀족,제6-2장참조)등 10명 중 9명의 태생지와 활동 지역은 제1장 태재부시대 왜구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규슈(九州) 지역 출신들이었다. 이들의 동료와 후손들의 대부분은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전범으로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패전 후에는 극우 정당이자, 전범들의 정당인 자민당의 창당 주역들로서, 오늘날 다시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고,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일본 극우들의 모태가 되었다.
한편 이 내각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발발한 1867년 3월부터 일본의 내각제가 실시되는 1885년 12월까지 약 18년간 존재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사무라이 내각을 발족한지 8년 만인 1875년 12월 245톤급 106마력짜리 쌍돛대 함선인 운요마루(雲揚丸)에 의해 강화도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 일본 외무성의 외무권대승(外務権大丞,서열4위)이었던 모리야마시게루(森山茂,1842∼1919)가 조선을 관할했던 청나라의 실력자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1823∼1901)을 만나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에게 개항을 요구하더라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고, 이홍장 역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하였는데, 이홍장이 조선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지만 않았다면 일본이 그러한 조건으로 개항시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더 큰 함대병단으로 조선을 침략했던 미국(신미양요)과 프랑스(병인양요)의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역사가 가정은 없다 하지만, 당시 세상 물정 몰랐던 이홍장만 없었더라도 조선이 그러한 조건으로 쉽게 개항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일본인들의 교활함으로 시작된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으며, 한번 뚫린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해만 갔다.
앞으로 돌아와서 사무라이 내각이 처음 도입한 제도는 삼직제도(三職制度)이다. 1868년 1월 3일, 천왕 메이지로부터 왕정복고(王政復古)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천왕을 따르는 신정부군(新政府軍)과 에도막부군(江戸幕府軍)과의 마지막 전쟁인 보신전쟁(戊辰戦争)이 시작되자, 신정부는 에도막부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체제로서 이 제도를 도입하는데, 총재(総裁,수반), 의정(議定,의회), 참여(参与,각료)로 구성된 체제를 도입하였으며, 구성원은 총재를 포함하여 총 31명이었다.
이어 정체서(政体書)에 의한 제1차 태정관제가 실시되는데 1868년 6월 11일부터 1869년 8월 15일까지였다. 이어 제2차 태정관제(2관 6성제)가 실시되는데, 1869년 8월 15일부터 1871년 9월 13일까지였으며, 제2차 태정관제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의 온갖 잡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업무를 담당한 신기관(神祇官)이 태정관(太政官)보다 상위에 배치되었는데, 신기관은 새로운 행사나 업무 시작 전에 반드시 고사상을 차려 놓고 잡신들에게 고사를 지낸 후에 업무를 시작하게 했다. 오늘날에도 F-35 등 신형전투기가 들어오면 신관이 나서서 고사를 먼저 지내는 풍습도, 신기관의 구습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신차에 대한 고사도 여기에서 유래된 왜구들의 잔재이다.
이어 제3차 태정관제가 실시되는데, 정원(正院,대신), 좌원(左院,의회), 우원(右院,실무각료)등 3원제(三院制)가 운영되며, 존속기간은 1871년 9월 13일부터 1875년 4월 14일까지였다. 1875년 4월 14일부터 내각제가 실시되는 1885년 12월 22일까지는, 제4차 태정관제가 실시되는데, 대심원(大審院,재판소)이 정원(正院,의회)과 태정관(太政官,각료)보다 상위에 배치됐다.
이 과정에서 지방행정제도도 개편된다. 1869년 7월 25일 300여 개의 번(藩)의 번주들이 인민과 땅을 천왕에게 바치는 행사인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이뤄지는데, 일본 천왕은 유사이래 최초로 영토와 인민을 소유하게 되며, 여기에서 판(版)은 땅을, 적(籍)은 인민을 뜻한다. 1871년 12월 10일부터는 폐번치현(廃藩置県)제도가 실시되기 시작하는데, 에도막부의 300여 개의 번(藩)이 폐지되어 63개의 부・번・현 체계로 재편되며, 기존의 번주들이 부・번・현의 수장에 임명된다. 1875년 4월 14일 다시 47개의 도(都-1)・도(道-1)・부(府-2)・현(県-43)으로 재편되면서 기존의 번주들이 쫓겨나고, 새로운 현지사가 공선(公選,의회선출)으로 선출되어, 기존의 지방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하게 된다. 1885년 12월 22일 내각제도가 도입되고, 조선침략의 제1호 수괴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수상)에 임명된다.
제7장 내용 요약은 다음과 같다.
제7장은 제1대(1895.12.)부터 제103대(2025.6.현재) 내각까지 수록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제3장 개화기・강점기시대(1867.11∼1945.12.)의 왜구와 그 후손들”에 이은 제44대 시데하라기쥬로(幣原喜重郎)내각인 1946년부터이다. 제3장이 1945년 12월 31일까지 소개되어 있는데, 제44대 내각의 존립 기간이 1945년 10월 9일부터 1946년 5월 22일까지이므로 전반부는 제3장과 약간 겹쳐있다.
제7장은 1885년 12월 22일, 제1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취임한 이래 140년이 흘러, 2025년 현재, 제103대 내각에 이르렀는데, 현임 내각총리대신은 2024년 11월 11일에 취임한 이시바시게루(石破茂,1957∼)이다.
제103대의 내각에 이르기까지 중임한 자들을 포함하여 총 65명이 수상(내각총리대신)을 지냈는데, 그중 11명(제7장 본장-참조)을 제외하면 한반도의 침략과 수탈, 가학적 폭력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연관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일본 수상을 지낸 자들 중, 83%인 54명이 한반도에 대한 침략, 학살, 약탈, 학대, 강제 노동, 인신매매, 납치, 심각한 인권침해 등에 직・간접적으로 중대한 반인도적 행위에 가담했거나, 공유했거나, 유산으로 물려받은 후손들이라는 얘기이다.
오늘날 그들 대부분은, 사죄는커녕 잘못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전인수식으로, 자신 선조들이 행한 악행을 미화・찬양하고, 후세들의 교과서에 왜곡된 사실을 정당한 역사처럼 기재했거나, 그 작업을 해가는 과정에 있거나 이미 완료한 상태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UNESCO 등 국제기구에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과거사를 왜곡해 등재함과 동시에, 덤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집단으로 셀프 사면시키고 영웅화하고 있다.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의 GHQ는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범죄자(이하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해 전범들의 유형을 만드는데, A항(평화에 대한 죄), B항(통상의 전쟁범죄), C항(사람으로서 도리를 저버린 죄)으로 규정하였으며, 따라서 A급전범, B급전범, C급전범, B와 C를 합쳐서 BC급전범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 12월 말까지 A급전범 용의자 28명을 체포하여 스가모(巣鴨,도쿄)형무소에 구류했다가, 1946년 5월 3일부터 1948년 11월 12일까지 재판을 진행시켜 7명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이와 별도로 미8군은 요코하마(橫浜)에 군사 법정을 열어 BC급전범(포로학대 등 비인도적 범죄) 53명에게 교수형을 집행한다. 이외에도 전범재판소는 호주, 필리핀 등 미군 주둔지와 그리고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영국, 네델란드, 중국, 소련 등이 개설하기도 한다.
일본 전범들의 수가 예상외로 많고, 일본 내의 수용시설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자, GHQ는 일본정부의 로비를 받아들여‘공직추방’이라는 전범들의 유형을 만드는데, 근거는 포츠담선언의 항복조항 중의 하나였던“일본 국민을 속이고 세계 정복에 나서는 잘못을 저지르게 한 세력을 영구히 제거하겠다”는 내용을 근거로 했다. 1946년 1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으로 다음 7가지 내용에 해당하는 자를‘공직추방’의 대상으로 선정하고, 그들을 일본 공직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했는데, (A항)전쟁범죄인 (B항)육・해군의 직업군인 (C항)초국가주의단체 등의 유력분자 (D항)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등의 정치단체의 유력분자 (E항)해외금융기관이나 개발조직의 임원 (F항)만주・대만・조선 등 점령지의 행정장관 (G항)이외 군국주의자・초국가주의 등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GHQ는 최소 100만 명 이상을 추방 대상으로 상정했고, 일본정부의 지속적인 방해 공작이 전개됐음에도, 1948년까지 20만 명 이상이 추방되던 중에, 냉전의 심화와 GHQ의 인원부족과 나태, 돌발적인 한국전쟁의 발발등으로 둔화되기 시작하여, 냉전이 심각하게 심화되자, 조기 미일종전조약이 고개를 들게 되면서, 개점 휴업상태에 이르게 되며, 그나마 추방됐던 자들도 1952년 미일샌프란시스코종전조약의 발효에 의해 국권을 돌려받은 일본정부가 추방자들을 해제시켜 주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제7장의 인명사전에서‘A-급전범’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필자가 만든 용어이다.
공직 추방자들도 엄연한 전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범이라는 실체를 숨기려고‘공직추방’으로 작명한 것은 역시 왜구다운 발상이었는데, 일본정부가 아이디어를 모아 작명했으며, 관련자들 중 대부분이 A급전범으로 체포되었거나 지정대상자였다가 전범재판소의 인력이 부족하여 기소되지 못한 자들이 많았으며, 이외의 대상자들도 모두 전범으로 활약했던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작자들이었다. 필자는 그들의 죄상이 엄연한 A급전범 혹은 그에 준하는‘준・A급전범’이라고 판단하고,‘A-급전범’이라고 명명했다.
제7장의 내용 중에서 해방 후, 가장 먼저 벌어진 사건은 일본이 미국과 짜고 독도를 강탈해 가는 사건이었다.
일본정부와 미군이 짜고, 독도를 세 차례나 폭격했고, 독도에서 조업 중이던 우리 어민 150명도 학살했으며, 그 사건 이후 독도는 한국령에서 일본령으로 바뀌게 된다. 이 내용은 제47장 아시다히토시(芦田均) 내각의 <참고자료>「미・일합동 독도 어민 폭격 사건과 독도」에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미군을 혈맹이라고 제대로 된 항의 한번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은 1965년 한일협정이었다.
필자는 오늘날 한일 간의 과거사가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일협정(어업협정포함)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정희(朴正熙,1917∼1979)와 사토에이사쿠(佐藤栄作,1901∼1975) 사이에서 맺어진 한일협정이 얼마나 부실하고 일방적이었기에,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한일관계는 갈등을 지속하고 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이 주장했던 것은 정당한 절차에 의한 피해 당사자(국내・재일동포등)중심의 국가 배상이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들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었고, 무슨 장물 매매하듯이 협정은 은밀하게 체결됐다. 이에 한일의 많은 지식인들은 후일 분명히 동티가 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경고하고 반대했지만, 박정희는 계엄령을 내렸고, 사토(佐藤)는 국회 경위들을 동원하여 통과시켰다. 이로인해 이승만의 평화선이 이 협정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져 버려, 한국의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박정희가 독도를 팔아넘겼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박정희가 일본에서 가져온 3억 달러는 한국 피해자들에게 곧바로 나눠줄 수가 없었는데, 당시 국회재경위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가 가져온 돈은 식민지 배상금이 아니라, 경제협력지원금이라는 명칭으로 들어온 돈이기 때문에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보상할 경우에는 별도의 입법이 필요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별도의 입법을 통해 그 돈의 일부가 피해자에게 돌아갔다.
문제는 그 후부터였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개별 피해자들의 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일본정부는 모든 것은 그 당시 박정희에게 다 줬으니, 박정희에게 받아 가라고 공식적으로 대응했다. 박정희는 장물아비가 됐고, 일본정부는 박정희에게 장물을 넘겨준 물주가 되었으나, 일본정부의 대응은 일관되게 박정희에게 다 줬으니, 박정희에게 받아 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어떤 정부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무엇을 다 줬다는 것인지, 정말 다 준 것이 맞는 것인지, 주기는 줬는데 무엇 무엇은 덜 줬다든지, 속 시원하게 답변하지 못하고, 애먼 국민들의 가슴만 타들어 가게 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정부였다.
그러는 사이 일본정부는 한일 간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 2가지를 줄기차게 자국민들에게 세뇌시켰는데, 하나는 과거 식민지정책에 대해“지금 와서는 미안하게 됐지만, 그때는 세계가 다 그랬어”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먹혀들었고,“그때는 세계가 다 그랬어”라는 말은 한때 일본인들의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두 번째는“박정희에게 다 줬어”라는 말이었다. 다 줬는데, 지금도 한국인들은 과거사 얘기만 나오면 칭얼대며 돈을 더 달라고 징징대고 있다고 비하했는데, 이 역시 일본사회에 뿌리내려 먹혀들었다.
매년 아사히・마이니치・NHK 등 주요 언론사들이 자국민과 정치인을 상대로 현안에 대한 여론 조사를 실시하는데, 2000년대 이후 고이즈미(小泉)와 아베(安倍) 극우 내각이 20여 년 동안 칼춤을 추게 되자, 기존 40∼50%에 지나지 않았던 과거사와 관련한 한국 비하에 대한 극우지지 여론이 90%에 육박한 지지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리고 구체적으로 한국정부에게도 훈계하듯 하고 있는데“과거사 보상이나 사과에 대해 한국정부가 나서서 한국 국민들이 더 이상 징징대게 하지 말게 하고, 일본정부의 입장을 지지해 주어야 한다”라고 꾸짓 듯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 국민들이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일본 국민들에게“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라고 과거와 같이 자부하는 것은 이미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딱, 두 문장“그때는 세계가 다 그랬어, 박정희에게 다 줬어”가 오늘의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정부에 대한 원망이 클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가“박정희한테 다 줬어”에 대해 대응은커녕, 변명조차도 하지 못했으며, 우리 국민들에게도 그와 관련된 정보를 전혀 알려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 방안은 1965년 한일협정을 과감하게 파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정부에게 박정희에게 무엇을 다 줬는지, 정확한 정보공개를 요구해야 한다. 물론, 우리 정부도 당시 독도를 팔아넘겼다는 어업협정과 박정희의 공화당이 뒷돈으로 받았다는 정치자금 등 모든 관련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 결과에 따라 일본정부의 말이 맞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박정희가 받은 3억 달러도 되돌려줘야 한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주장이 사기였으면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제대로 된‘신・한일협정’을 맺게 하자. 이러한 결단 없이는 장물아비가 된 박정희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일제 종속이라는 공포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아베(安倍)를 필두로, 인정하고 사과했다가, 번복을 거듭했던‘일본군위안부(UN공식용어)’를 둘러싼 공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맺어진 그해 11월 20일, A-급전범으로 자민당 소속의 운수대신을 지낸 중의원의원(13선)인 아라후네세이쥬로(荒舩清十郎,1907∼1980)가 지역구인 사이타마현에 내려가 시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회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배상문제에 대해 얘기하던 중‘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도 증언한다.
“전쟁 중 조선 사람도 여러분과 같이 일본인이 되어서 강제로 저금을 하게 해, 1천 100억 엔이 되었지만, 이것이 종전으로 헛것이 되고 말았다. 조선인들은 그것을 되돌려주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36년간 통치했던 기간에 일본 벼슬아치들이 가지고 간 조선의 보물들을 돌려주라고 말하고 있다. 징용공으로 전쟁 중에 데리고 와서 써보니 괜찮아서 일본군으로 들였는데, 그중 57만 6천 명이나 죽었으며, 그리고 조선의 위안부가 14만 2천 명이나 죽었다. 모두 일본의 군인들이 때려죽인 것이다. 합계 9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되어, 무엇인가 은급(恩給,보상)이라도 내려주라고 말해 왔다. 처음에 이것들의 보상으로 50억 달러를 말해 왔지만, 점점 줄어들어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3억 달러로 깎아서 합의했다” 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아라후네세이쥬로(荒舩清十郎)의 이야기는 후에‘일본군위안부’문제와 연결되어, 1998년 8월 UN의 맥두걸 리포트(McDougall Report)에서‘일본군성노예+학살’근거 자료로 인용됐는데, UN은 이를“매우 신뢰도가 높은 정확한 자료”라고 평가했으며, 이후 2007년 미국 하원, 네델란드 하원, 캐나다 의회, 유럽 의회, 2008년 필리핀 하원, UN인권이사회 등의 일본군위안부 비난 결의안 채택의 주요한 근거 자료가 되었다.
아라후네(荒舩)의 발언에서도 보여주었듯이 위안부에 대한 숫자도 정확했으며, 일본군들이 때려 죽였다는 학살 내용도 UN의 리포트 및 후일 고노요헤이(河野洋平)의 일본군위안부 정부조사단 자료와도 일치했는데, 오늘날 아베(安倍) 등 일본정부가 강제연행에 관여되었다는 근거 자료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1992년 7월 제78대 미야자와기이치(宮澤喜一)내각의 관방장관이었던 가토고이치(加藤紘一)가 소위 가토담화(加藤談話,제7-72장참조)를 발표하는데,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되어 최초로 사과하는 관방장관 차원의 담화였지만, 애써 일본정부의 관여(강제연행)에 대한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부연 설명하면서 여지를 남겨둔다.
이듬해인 1993년 8월 4일 같은 내각에서 관방장관이 된 고노요헤이(河野洋平,제7-72장참조)는 일본정부 차원에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8개월 동안의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는데, 정식명칭은“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이며, 일본정부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의 강제연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담화였다.
이어 1995년 8월 15일 패전 5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제81대 총리인 무라야마도미이치(村山富市,제7-81장참조)가 일본 현직 총리로서,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를 한 최초의 담화를 발표하는데, 정식명칭은“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였다. 그러나 내용 중 식민지 시대를 말하면서“'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遠くない過去の一時期)”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진보적이기로 소문났던 좌파 사회당 당수 출신으로서, 확실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은 연립내각의 수장으로서, 한계가 있었다는 사정의 설명도 있었지만, 필자는 일본인으로서의‘일본 진보(일본에서만 진보)’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대목이 다른 정치인들에게서도 종종 비춰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화해 무드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으로 이어진다. 여러 분야에 걸쳐 공동교류와 화해 협력에 대한 선언과 특히 대중문화 교류에 대해서는 성과가 작지는 않았지만, 상대였던 오부치 수상이 2000년에 급사하는 바람에 당시 합의된 내용 중 가장 핵심 사항이었던“재일동포 지방참정권의 부여”에 관한 사항은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일본에서의 DJ 대통령에 대한 인기는 높았지만,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이 지금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 정부가 낸 국가 부도인 IMF로 인해 20억 달러의 돈을 빌리러 간 처지였기 때문에 EEZ(배타적경제수역)을 0.5해리 더 양보해야 했고, 그 때문에 DJ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도 얼굴은 밝지 못했다. 당시 맺은 EEZ협정은 3년마다 재협정이 가능하다.
2001년 4월부터 시작되는 제87대 제1차 고이즈미쥰이치로(小泉純一郎)의 내각은 한일관계를 다시 냉전으로 되돌려 놓기 시작한다. 2002년 9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예상치 못했던 인정은 일본 사회를 1910년 조선 강제 병합 당시의 정서로 회귀하게 된다. 일본과 달리 납치 문제의 과오를 인정한 김정일 위원장의 행동은 비판과 함께 그 용기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칭찬도 받았어야 할 행동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A-급전범의 손자이자, 아들인 고이즈미(小泉)는 북한과 함께 재일동포 사회, 그리고 남한까지 완전하게 납치 세력을 옹호하는 적색 국가, 테러 지원 국가로 낙인찍어 버리자, 일본 우익들은 환장하게 좋아하며, 대낮에 열차 칸에서 어린 동포 학생들의 치마저고리를 찢고 두들겨 패는 등 난동을 부리는데, 마치 1923년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간토대지진 당시와 같았다고 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다시 전범들의 후손들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당시 고이즈미의 위세는 한반도에 있어, 이토히로부미와 같은 작자였으며, 이어 등장한 아베신조(安倍晋三)는 초대 조선총독으로 조선인을 개나 돼지로 취급했던 데라우치마사타케(寺内正毅,제7-18장참조)와 같이 행동했다. 만 4년의 고이즈미(小泉)정권이 막을 내리고, 2006년 9월 제90대 제1차 아베(安倍)내각이 출범한다.
2007년 3월 5일 미국하원은 일본정부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관여했다고 최종 판단하고, 일본정부를 비난하면서, 일본정부 차원의 사죄와 재발 방지를 위한 후세 교육 등을 권고한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에 아베(安倍)는 일본정부가 절대로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며, 정부 차원의 관여를 인정하지 않는 성명(제7-90장참조)을 발표한다.
이에 이틀 뒤인 3월 7일 미국하원은 성명을 통해 아베(安倍)수상을 비난하는데, 하원 결의안의 통과를 주도한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일본 핏줄인 일계(日系) 미국인인 마이크혼다(Michael Makoto Honda,1941∼)하원의원이었다.
그러자 3월 16일 아베(安倍)는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관여를 공식 인정하고 사과한다. 이어 다음 달 4월 3일 미국 부시 대통령은 전화로 아베에게“진심으로 받아들이라”며, 충고와 경고를 전한다.
이어 4월 27일 겁을 집어먹었는지 아베(安倍)는 갑자기 자청해서 당시 가장 권위있던 외신인 영국 BBC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일본정부의 관여를 공식 인정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지극히 고통스러운 상황에 위안부 분들이 강제적으로 놓여진 것에 대해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라고,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이어지는 일본 언론들과의 후속 인터뷰에서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관여를 수상으로서 공식 인정하고 재차 사과한다.
그러자 전범 세력들은 아베에게 후일을 도모하자며 휴식을 권고하고, 아베는 돌연 수상직에서 물러나는데, 딱 1년간의 재임이었으며, 후임으로 등장한 자는 후쿠오카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탄광을 운영해, 재산을 축적한 아소(麻生) 가문의 장손, 아소다로(麻生太郎)였는데, 능력이 현저하게 모자랐던 관계로 1년을 채우지 못했고, 전범 정당인 자민당은 몰락한다.
그 뒤 그나마 기대했던 하토야마유키오(鳩山由紀夫)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는데, 양보할 줄 모르는 파벌싸움과 도호쿠(東北)대지진에 대한 무능한 대처로 3년 만에 정권을 내놓는데, 제95대 수반이었던 노다요시히코(野田佳彦) 민주당 총재는 자민당보다 더 자민당스러운 인물이었다.
2012년 12월 제96대 수상으로 재 등장한 아베(安倍)는 왜구와 전범의 후손다운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제1성으로 고노담화에 대해 부정하는데, 일본정부가 위안부 여성을 강제로 연행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수정 시사한다.
그 후로는 여야를 불문하고, 일본의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고노담화 수정을 주장하는데, 한편으로는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서는 수정을 반대한다. 여야를 떠나 집단적으로 두 담화에 대한 갈라치기에 들어가는데, 하나를 먼저 해결하고, 다음 것을 도모하는 왜구들의 전형적인 수법을 드러낸다.
그리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개별적 소송이 이어지자, 일본은 다시금 1965년 한일협정 때 박정희에게 다 줬으니, 박정희에게 받아 가라는 공세를 강화하고, 한국인들은 보상을 받고도, 또 보상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집단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가고 있었지만,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어떤 해명이나, 항의하지 않음으로서, 일본정부의 공세는 더 강화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필자 역시 우리 정부가 왜 그러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2015년 12월 아베(安倍)는 박근혜에게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며,“일본군위안부화해재단설립”을 제안하고, 박근혜는 이를 국민적 합의 없이 굴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1965년 한일협정의 재판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은 박근혜의 부친 박정희와 아베의 작은 외숙부 사토에이사쿠(佐藤榮作)와의 협정이었다.
그리고 불가역적(不可逆的)이란 단어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할 당시 사용했던 제국주의적인 용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합의해 주는데, 박정희의 딸다운 결정이었다.
2016년 11월 아베(安倍)의 요구대로 박근혜는 북한의 군사적 정보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굴욕적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하는데, 당시 북한은 일본인 납치 문제로 인해 일본이 주도한 경제 및 군사적 제재를 가혹하게 당하고 있을 때였다.
2019년 7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굴욕적 외교의 산물인 일본군위안부 화해재단이 해체되고, 이에 아베는 곧바로 무역보복으로, 한국에 대한 무역최혜국 대우를 박탈한다. 이 조치는 제101대 기시다(岸田) 정권인 2023년 6월 27일까지 지속되며, 이에 대해 한국은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노재팬(NO JAPAN)운동으로 극복해 내면서, 2019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가 저지른 한일 군사접보협정(GSOMIA)의 파기를 선언한다.
2022년 5월 새로운 대통령이 된 윤석열은 2023년 3월 6일 윤석열은 국내 신・친일파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의 후원 모임인“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사장 이국언)”이 일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와 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2018년 역사상 최초로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승소한 판결에 대해, 일본과의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일본을 대신하여 1965년 한일협정 당시 경제지원금을 받았던 우리나라 기업에게 대신 변제하게 한다.
그리고 동월 윤석열은 일본으로 기시다(岸田)를 찾아가, 덤으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대한 복원도 국민적 합의 없이 독단으로 약속해 주자, 듣기만 하던 기시다(岸田)도 무역 보복을 단계적 철회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러한 것들에 합의한 후, 기시다(岸田)로부터 수고했다며 오무라이스와 함께 폭탄주도 한잔 얻어 마시는데, 세간에서는 이를“오무라이스 밥집 합의”라고도 불렀다.
2023년 5월 윤석열이 기시다(岸田)의 사주를 받은 자처럼, 후쿠시마원전 핵폐기수의 태평양 방류를 지지하고 옹호해 주면서, 이를 반대하는 자국민을 탄압하고, 한발 더 나아가 한국정부의 예산으로 일본 핵폐기수 방류를 홍보해 주는 등 매국노와 같은 행동을 보였는데, 한편 당시 여당 국민의힘의 국회의원들도 덩달아서 1910년 조선 강제 병합 때, 신속하게 조선을 합방해 달라며, 일본 천왕 메이지(明治)에게 청원했던, 매국노 송병준(宋秉畯)이 조직한 일진회(一進會)의 회원들처럼,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핵폐기수 방류에 대해 시민들에게 강압적으로 찬성을 강요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한 의원은 횟집 수족관 물까지 마셔가면 퍼포먼스를 벌이며 일본 측을 옹호하는 등, 마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직원들처럼 행동했다.
2023년 8월 윤석열은 일본이 전범국가의 탈피를 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히로시마 원폭 위장 평화국가 프로세스”에 합의해 주고, 일본 피해자들보다 더 근엄한 태도로 히로시마 원폭 공원에 참배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자초한다.
2024년 10월 1일 제102대 수상으로 자민당 소속의 이시바시게루(石破茂)내각이 출범하며, 이어 중의원의원을 해산하고 같은 해 11월 11일 제103대 내각을 출범시킨다.
2025년 4월 윤석열이 불법 계엄령으로 파면되고, 그가 굴욕적으로 맺었던 한일관계는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지만, 한일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2025년 6월 17일 캐나다 G7-회의에서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시게루(石破茂)수상이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제8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필자는 일본 천황에 대한 호칭을 천황(天皇)에서 천왕(天王)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그 이유 첫 번째는 천황이라는 호칭은 과거 우리나라와 세계인에 대한 침략과 학살, 수탈을 상징하는 대표 전범(戰犯)의 호칭이었던 만큼, 따라서 천황(天皇)이라고 불러주는 것, 그 자체가 일본의 과거사를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천황이라는 단어가 세계의 일반시민들을 근본적으로 비하하는 배타적 극존칭이기 때문이며, 특히 한자문화권 나라에서는 천황이라고 부르는 그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중국의 경우 황제를 지칭하는 천자(天子)는 하늘의 아들을 뜻한다. 그런데 천황은 하느님의 동양적 호칭인 옥황상제보다 더 상위 개념이다.
따라서 호칭 자체만으로도 일본인들은 배타적 선민이 되는 것인데, 일제는 실제로 1906년 오사카박람회와 1907년 도쿄박람회 때 조선인과 류큐・아이누・대만인들을 일본인과 다르다며 철창 속에다가 강제로 전시하여 인종적으로 비하를 시킨 적이 있는 인종 학대범이며,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황이 전범의 대표로서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들을 배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일부에서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천렵의 왕인 천왕(川王)으로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본은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할 당시 무소불위의 권한으로 조선의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를 하루아침에 왕으로 강등시켰으며, 조선을 씨족 국가인 이씨조선(李氏朝鮮)으로 폄훼하고 조롱했다는 것과, 또한 1917년 순종황제를 일본으로 불러 어리버리한 다이쇼(大正)에게 무릎을 꿇리는 천기봉사(天機奉伺)를 강제로 시켰음에도, 이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전에 출간한 책자에서도 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많은 독자들이 필자의 의견에 동의해 주었으며, 천왕(天王)이라고 표기해 준 것만으로도 일본을 예우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해 주었다.
또, 전임 천왕인 아키히토(明仁)가 스스로 본인들은 백제 무녕왕의 후손들이라고 발표한 만큼 더더욱 천황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메이지유신 이전까지의 천왕들의 처지는 비참했는데, 에도막부 말, 존왕양이(尊王攘夷)파들에 의한 왕정복고(王政復古)운동이 성공하고, 1868년 1월 3일“왕정복고 대호령”으로 메이지유신이 선포된 이후에서야 비로서 역대 천왕들의 족보를 확정 짓기 위한 황전강구소(皇典講究所)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1926년이 돼서야, 제123대 천왕 다이쇼(大正)까지의 천왕들의 족보가 처음으로 확정되었는데, 제122대 천왕 메이지 이전의 천왕 중 최고의 석고(石高,연봉)를 받았던 자는 메이지의 부친인 121대 천왕 고메이(孝明)로, 겨우 4만 석에 불과했다.
이런 환경에 처해있었던 천왕들이 오늘날 어떻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의 연속이며, 필자에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과제가 되었다.
천왕은 지금도 즉위식을 거행할 때 삼종신기(三種の神器,청동거울・청동검・곡옥)라고 하는 것들을 필수 인수인계 품목으로, 신성시하고 있는데, 일본 건국 신화에서 천손(天孫)인 니니기미코토(瓊瓊杵尊,제1대천왕-증조부)가 하늘나라인 고천원(高天原,타카마가하라)이라는 곳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神,천왕가 시조신)로부터 건네받아서 가지고 내려왔다고 한다. 필자가 판단할 때는 백제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이렇듯 일본 천왕가는 온통 수 많은 신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일본에는 수백만 개에 이르는 신사와 신궁, 절들이 현존해 있고, 천왕은 이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과 연관되어 천왕의 흔들리지 않는 위상이 형성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단정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에게는 전범의 우두머리로서의 천왕이, 과거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행보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해방 80주년과 한일협정 60주년 !
지난 20여 년간의 한일관계를 극단으로 몰고 간, 전범들의 후손들인 극우 고이즈미(小泉)와 아베(安倍)가 물러나고 이시바시게루(石破茂)내각이 들어섰다. 그는‘일본군위안부’문제를 인정한‘고노담화’와 과거 조선의 식민지배를 사과한‘무라야마담화’를 계승하자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수상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판하고 있다. 그동안의 그의 행적을 보더라도 고이즈미(小泉), 아베(安倍)와는 결은 다른데, 그러나 그들의 정책과도 결별할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왜구와 전범들의 정당인 자민당 족벌체제의 구성원이며, 또, 조선 멸시자이자, 조선 최초 친일파들의 사부였으며, 조선 정벌론자였던 후쿠자와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철학이 살아 넘치는 게이오학원(慶應学院)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그에게 고노담화와 무라야마담화에 대한 계승 의지와 실천, 그리고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견해를 물어야 한다. 그가 계승과 실천에 대해 찬성한다면 한일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막장・협정과 다를 바 없었던 1965년 체제를 끝내자는 구상을 제안하여, 한일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신・한일협정’의 체결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꼭 빠뜨리지 않아야 할 부분이 가칭‘1965년 한일협정 정보공개 위원회’의 구성이다. 반드시 이 위원회를 통해 과거 협정관련 정보를 빠짐없이 모아야 하고 가공 없이 공개하여야 한다. 만약 이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나라는 영원히‘장물아비 박정희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 새로운 신・협정의 미래에서도 종속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협정의 추진과 함께 꼭 제안하고픈 3가지 사업이 있다.
첫 번째는 가칭‘자이니치(在日)-UNESCO-공동등재사업’이다. 자이니치는 일제의 잔재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기가 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다. 1945년 패전 후 일제에 의해 분단된 조국의 어느 곳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지난 80년간 일본 천왕이 발급한 여권을 가지고. 적국의 땅 일본에서 온갖 멸시와 차별, 학대를 견뎌내 온 그들의 역정을 한일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공동으로 UNESCO에 등재하는 사업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여, 일본인들의 양심을 세계인들에게 확인시켜줘야 한다.
두 번째는 동해와 일본해의 공동표기(병기)에 대한 것으로, 이는 제국주의 일본의 대표적인 잔재이다. 그동안 일본은 반대 논리로 동해와 일본해를 공동으로 병기하면 관련 종사자들이 지명의 혼란 때문에 해난 사고가 많이 발생할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이 문제는 그동안 일본정부가 분담금을 제공하면서 이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국제수로기구(IHO)’에 동의서만 제출하면 해결되는 사안이다.
세 번째는 동북아시아 3국의 평화유지와 갈등해소・상생을 위한 공동사업의 추진이다. 최대 현안인 후쿠시마원전 폐기수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가칭‘후쿠시마원전 폐기수 3국위원회’를 발족시켜, 3국이 화해와 상생으로 가는 단초를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이상은 새롭게 출범한 이시바시게루(石破茂)내각이 새로운 한일관계에 대한 전향적인 의지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제안하는 사업들이다.
왜구침략 2075년, 해방 80주년 !
유사 이래 한반도는 왜구와 일본인들에게 당한 3가지 유형이 공식처럼 존재했는데 ①소를 잃고 외양간을 안 고치고 어떻게 해 보려다가 또 소를 잃어버린 경우 ②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치던 중에 또 소를 잃어버린 경우 ③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쳤다고 안심했다가 또 소를 잃어버린 경우로, 어떤 것도 왜구와 일본인들의 잔임함과 간교함을 당해내지 못했다.
조선말 고종황제의 외교 고문이었던 샌즈(W.F.Sands)는 본인의 저서인「조선 비망록」이라는 책에서 300여 년 전의 임진왜란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는 나라라고 소개했다. 조선의 물정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그의 눈에 임진왜란의 상흔이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300년이 지난 임진왜란의 상처가 그때까지도 조선 백성들의 일상의 삶을 옭아맬 정도로 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서에 기록된 BC50년 왜구들의 침략 이래 오늘날까지 2075년 동안의‘왜구・상흔’은 우리 국민들의 DNA에도 저장되어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왜구’라는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지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추적해 볼 사안이다.
그리하여 DNA적인 상흔도 치유하고,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하기 위한 방안으로, 왜구들의 DNA적 상흔을 우리들의 생산적 자산으로 재생산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먼저 그동안 우리 역사는 감당하기 힘든 왜구와 일제의 침략사를 애써 무시하고 격하시키는 차원에서 향토사(鄕土史)로 치부하여 사장시켜 왔는데, 당당하게 정사(正史)로 끌어 올리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며, 그리고 이를 다양한 방안으로 재・자산화하여 세계시장에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왜구들이 저지른 고려시대 진포・황산대첩, 조선시대 삼포・임진왜란 등 고려와 조선의 대표적인 침략사건과 과해량, 세사미, 항왜의 후손들, 왜관과 일본인, 일본사신, 조선과 쓰시마, 조선통신사 등 주요 왜구들의 인성과 관련된 사건들과 이어 식민지침탈과 관련된 강화도침략과 강화도조약, 동학농민전쟁의 학살과 무라타(村田)소총, 호남의병 대학살, 명성황후의 시해를 지시한 일본천왕 메이지(明治), 조선강제병합과 일진회, 31독립만세운동의 잔인한 학살과 일본인들의 새디즘(Sadism), 간도 대학살(경신참변), 임시정부, 간토대학살, 광주학생독립운동, 사할린동포 폐기사건,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612만 6천 180명의 조선인 강제동원(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일제의 강제공출과 자원수탈, 우키시마호 폭살사건, 사할린 조선인 폐기사건, 자이니치, 히로시마 조선인 원폭피해자 차별, 일제의 잔재 친일파, 야스쿠니신사와 조선인 위패, 독도강탈을 위한 일본과 미군의 독도 폭격사건, 1965년 한일협정, 일본의 근대산업혁명유산과 조선인 강제징용 등을 모두 독자적인 유네스코 등재사업이나 그에 버금가는 사업으로도 추진하여, 자연스럽게 일본의 역사 왜곡을 막으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과거의 슬픈 역사를 극복하고 이뤄낸 성과를 세계인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하여, K・팝, K・푸드에 이은‘K・역사컬쳐’의 위대함으로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는 역사교육과 역사 컬쳐화사업의 강화를 통해 역사 공부가 학술과 문화, 산업 등 직업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함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이 강화・유지되고, 외세에 굴종하지 않으며, 국내 정치권력의 항상적 가치지향이 유지되도록 하는 미래의 동량으로 커나갈 수 있는 계기로 만들었으면 한다.
나아가 우리나라 과거사의 사건 사건마다 빌붙어서 기생했던 우리나라의 불량 권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켜냈던, 4・19혁명, 5・18민중항쟁, 6월항쟁, 윤불계엄령(윤석열불법계엄령)국민적 진화 사건 등을 왜구의 역사와 결합시켜, 우리나라 국가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아야 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우리나라 외교의 이념적 가치와 지향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미얀마 민주화운동과 홍콩 민주화운동’당시, 그들이 한국에게 지원을 원했던 것은 뜻밖에 5・18민주화운동이었다. 그러나 관련 단체에서는 이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고, 법적으로도 정비되어 있지 않아 많은 것을 도와 줄 수 없었다고 한다. 요즘 미국의 시민들도“한국을 본받아 포기하지 말고 트럼프를 탄핵하자”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 곳곳으로부터 이러한 요구는 언제라도 요청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대비해 신속히 준비해야 하며, 나아가 우리들이 인정받고 있는‘외세・독재・가난 극복’상징의 민주주의 모델에다가 인권과 평화, 환경 등을 추가하여,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확정하고, 외교의 기본노선으로 삼아, 외교부에 3・1독립대사, 5・18대사, 4・19대사, 반・윤대사 등을 두어, 의전 중심의 수구적 외교를 버리고, 외교부를 새로운 가치 중심의 외교관계 시스템으로 새롭게 짜서, 상대 국가의 특징에 맞게 대사를 파견하는 등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는 우리국민들이 피와 땀의 투쟁으로 쟁취한 성과이니 만큼 신속하게 추진되어야 할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국내적 성과가 발현되기 위해서는 각국에 친구들도 많이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일제강점기시절, 독재정부시절. 민주화운동시절과 일본군위안부 등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친구가 되어준 일본과 미국, 유럽의 친구들과 나아가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와준 친구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아시아 제3국과, 남미, 아프리카 등 정책적으로 새로운 친구들도 만들어야 우리의 가치 외교는 확산되고, 정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며, 이어 이러한 친구들은 반드시 우리나라의 국력 신장의 밑바탕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끝으로 일본 외교의 사례 중에 시사점이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서장을 마치고자 한다.
첫 번째는 해방 후 한일 수교 전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건이다. 1956년 일제는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들을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했다가 패전이 되고, 사할린은 소련의 영토가 되자,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이 귀찮다고 본국으로 송환도 해주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서, 조선인들은 국제적 미아가 되는데, 1956년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어떻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소련과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교가 수립되어 있던 일본에게 주선을 부탁한다. <당시 이승만과 일본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배상 문제로 협상 중에 있었다>. 그 사건의 본래 책임자였던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마치 제3자인 양, 서비스하듯이 한국에 협력했는데, 일본인들의 입장은“그때는 그때의 사정이 있었고, 그때도 그때의 조건 아래 최선을 다했으며, 지금은 지금의 조건 아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는 입장만을 피력했다.
두 번째는 1992년 10월 20일 일본 천왕 아키히토(明仁,1933∼)가 중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당시로서는 뜻밖의 사건이었다. 중국 국가주석 강택민(江澤民,1926∼2022)은 천안문사태로 인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정치・경제적인 제재를 받으며 곤혹을 겪고 있던 때였는데, 이를 돌파하기 위해 1990년 11월 천왕 아키히토(明仁)의 즉위식에 오학겸(呉学謙) 중국 부수상을 보내,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가이후도시키(海部俊樹,1931∼2022)에게 천왕의 중국방문을 요청하는데, 당시 일본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가이후(海部)가 미적거리자, 당시 실세 부총재로 친중파 의원이었던 가네마루신(金丸信,1914∼1996)이 밀어붙여 성사되는데, 중국은 일본 천왕의 방중으로 천안문 사태의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강택민은 가네마루(金丸)에게 전화를 걸어“언젠가 우리도 일본에게 꼭 신세를 한번 갚겠다”고 약속한다.
세 번째는 최근 일본정부는 미국의 트럼프가 러시아의 푸틴과 화해의 기미를 보이자,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지난 2025년 5월 29일 일본정부는 재빠르게, 고인이 된 아베(安倍) 전 총리의 부인인 아베아키에(安倍昭恵,1962∼)를 특사로, 러시아에 보낸다. 이에 러시아 대통령 푸틴도 반기면서 커다란 꽃다발로 환영해 주는데, 현재 일본 내각의 총리와 모든 각료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지원했다는 이유로, 러시아로부터 입국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이다.
우리 외교는 일제에 의해 근대에는 자주권을 상실했으며, 해방 후에는 스스로 족쇄에 갇혀서 미국과 친한 나라로 한정했고, 스스로 공산국가와의 외교를 단절했다. 감히 최고 권력자를 포함하여 누구도 공산국가와의 외교 통상을 주장하지 못했다. 스스로 자승자박 당하는 꼴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일본은 달랐다.
패전 다음 날부터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수교와 통상 재개 협상을 벌였으며, 미국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냉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반일을 외치면서 일본에게 외교를 부탁했고, 미국에게 의지했다.
조선시대 말 양반에게 건강을 위해 테니스를 치라고 권유했더니, 자기 집 머슴에게 테니스를 치게 하고 본인은 구경만 한 양반이 있었는데, 그 꼴이었다. 현 정부가 내일 전 대통령(민주당)의 부인을 특사로 러시아에 보낸다면 국민의힘과 극우 세력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또, 여기에 밥줄이 연결되어 있는 레거시(legacy-media) 언론들은 당장 나라가 망할 것 같이 소동을 벌이지나 않을까 궁금하다. 우리 외교는 아직도 반쪽에 목을 메고 있는 꼴이다. 외교는 즐탁동시(喞啄同時)가 명제임을 다시 한번 주장하고 싶다.
이 책자는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미완성작이다.
사료적 측면에서의 미완성작이고, 앞으로 한일관계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미완성작이다.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는 수많은 분들의 노고와 협조가 있었다.
필자의 요청으로 2025년 2월에 꾸려진 강독위원회에게는 각 장을 분담해서 교정과 내용(사건)에 대한 조언, 각 장의 축약을 부탁했다. 이 분들도 모두 역사를 전공한 분들은 아니지만, 왜구와 한일문제에 대해서는 해박한 원초적 지식과 견해들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고, 박사과정에 있는 아들에게는 찾기 힘든 용어나 데이터와 자료수집을 빈번하게 요구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제1차 강독위원회에 함께 하신 분들을 소개하자면 제1장은 정영일(위원장,광주NGO시민재단이사장), 제2장은 김경대(광주시의회전문위원), 제3장은 서정훈(전,광주NGO재단센터장)과 정치훈(MBN기자), 제4장은 문기전(전,광주YMCA사무총장), 제5장은 최낙선(시민생활환경회의상임이사), 제6장은 최철원(광주광역시승마협회장)과 정치훈(기자), 제7장은 총 제103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양이 워낙 방대한 관계로 여러분들이 분담하여 맡았는데, 총괄은 김재주(광주지속협사무총장), 그리고 신수정(광주시의회의장), 김병내(광주광역시남구청장), 이영우(광주환경공단처장), 강훈(광주환경공단팀장), 박인규(광주환경공단팀장), 김대중(광주환경공단팀장), 김찬중(광주환경공단차장)님 등께서 맡아 주셨으며, 제8장은 최강은(백남기농민기념사업회상임이사)님, 마지막 총괄 교정은 임수연(전,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사무처장) 께서 맡아 주셨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5년 8월 28일
왜구침략 2075주년,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 80주년, 한일협정 60주년
왜인록・倭人錄・Who's Who ln Japanese Wokou
2075년 동안 한반도를 유인한 왜구들의 인명사전을 출간하면서, 김강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