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덕혜옹주와 쇼다케유키(宗武志)의 정략결혼 일 것이다. 월전에 서점에 들려 권비영 장편소설 덕혜옹주 책 한권을 샀으나 서제에 꽂혀진 상태로 한 페이지도 못 넘겼는데 언제 다 읽을지 기약이 없다.
고종황제가 복녕당 양귀인과의 사이에 갑년에 얻은 고명딸을 일개 번주인 대마도도주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조정에서 반대도 많았으나 힘없고 나라 잃은 대한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나라 없는 설움을 평생 떠안고 산 덕혜옹주, 고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옹주가 어린나이에 고종의 독살이 몰고 온 정신적 고통은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구한말에 살았던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여인은 덕혜옹주와 백년한을 쓴 영친왕 약혼녀 민갑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옹주가 자생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강제로 볼모로 잡혀가 학습 받고 대마도 도주와 강제 결혼을 하고 말았다. 원치 않았던 일본인과의 결혼은 순탄치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아버지의 원수인 일본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마음의 깊은 골을 채우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대마도 도주 아들 쇼다케유키는 성격이 포악하고 꼽추에다 애꾸인 불학무식한 놈으로 소문을 퍼트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중학교 국사선생도 그렇게 가르쳐 그런 줄 알았다. 실제 사진을 보니 동경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교수를 했고 이목구비도 반듯하고 키도 훤칠했다. 대마도 고등학교 교가 작사 작곡을 한 쇼다케유키 또한 양국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해야했던 시대의 피해자였을 지도 모른다.
이승만 정권이 왕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구황실재산법 시행령에 따라 구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 옹주는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으나 몸과 아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실어증 까지 걸린 상태였다. 이방자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살았지만 건강이 악화돼 오랜 병상 끝에 세상을 떴다. 쇼다케유키 역시 행복한 삶은 살지 못하고 덕혜옹주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떴다.
덕혜옹주를 찾아 한국에 왔으나 보호자의 반대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덕혜옹주가 낳은 딸 마사에는 현해탄에 몸을 던져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딸의 자살과 정신병동에서의 생활, 남편에 의한 강제 이혼, 긴 세월을 견디어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편린 같아 가슴 저리다.
긴세키죠(金石城)의 야쿠라문(櫓門)
금석성은 역대 대마도주들의 거처였던 곳이며 당시 조선통신사의 접대가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금석성 안에 있는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결혼하였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金石城 성터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돌무더기 하단은 4각형으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흔적으로 봐서
천수각이 서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마도의 영고성쇠는 그들의 무덤 크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가장 큰 무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에
살다간 20대와 21대 도주의 무덤이며,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나서야 했던 소오요시토시의 무덤이 가장 작다.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는 가장 궁핍하고 피폐한 상태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역대 도주들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요시토시의 무덤 앞에서 결정을 했다고 하는데,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서 양국의
정세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대마도의 입지상 조선국과의 평화를 최우선시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소오(宗)가 무덤으로 가는 돌계단을 올라가면 역대 도주들의 묘석이 장엄하게 줄지어져 있고,
석등과 석등사이에 참나무 같은 고목이 뿌리를 박고 수백 년 세월을 함께 버티고 있다.
금석성을 둘러보고 아리다케를 출발하기 직전 지나가는 사람에게 기념사진 부탁,
4시간 산행이라 정상에서 1시간 보내도 5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아 토산이라 우습게보고 배낭도
챙기지 않고 달랑 자판기에서 생수한 병 뽑아 들고 이미 호텔에서 나오면서 팩소주 육포 한 봉지
조끼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산행 한 것인데 영산을 얕잡아 봤다면 큰코다친다.
묘지는 上단, 中단, 下단 등 세 곳으로 나뉘어져 下단에는 일족 및 소오가에서 출가한 사람, 中단에는 측실과 아동,
上단에는 역대 도주와 정부인의 묘석이 있다. 오래 묵은 쓰기나무를 지나면 도주의 무덤이 나타난다.
첫댓글 덕혜옹주의 삶에 잠깐 눈시울을 붉히고,,, 우리의 아픈 역사를 또 다시 한번되뇌여 봅니다.. 안셈과는 대마도에서 열린 "호슈회"에서 뵈었죠.. 외교관 호슈가 선린우호로 한일관계에 임했다는 취지를 받들어 한일 교류의 세미나를 열었던때 참가해서 만난 소중한인연,,, 지금도 사회를 상대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정직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그저 이리에만 밝았다면 사람이 사람으로 하는 일에 사람이 모여들리 없을것같아요.. 마음을 다해서 사귀는 나라관계도 진실되지 않는다면,,, 결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거라 생각해요
개인이나 국가나 힘이 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