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개인전을 오픈했다. 아들이 폭우를 그리기 시작한 때부터 오늘까지 그 변화 과정을 100호 크기로만 작업하여 [Heavy Rain]으로 명제를 붙였다. 전시회 오픈이 한더위 때인 것 같아 망설여지는 나와 다르게, 아들은 그림 이미지와 맞게 소낙비가 자주 내리는 팔월 초에 하자고 주장하여 그에 따랐다.
전시회는, 갤러리를 계약하고 오픈해서 마치는 날까지 내내 신경 쓰이는 일의 연속이다. 전시되는 동안 날씨는 예상과 다르게 가뭄으로 고온 현상이 계속되었다. 방송에서도 35도를 넘나드는 더위의 조심을 알리는 폭염을 예보했다. 다행히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갤러리를 찾아오신 관람객들은 폭우 그림 앞에서 여름날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함을 느낀다고 했다.
전시회를 마치고 아들은 제주 여행을 하자고 했다. 힘들었던 나에게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마음이지 싶다. 제주도는 갈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자연 풍경으로 나를 감동시키고 쌓였던 스트레스도 날려 버리게 한다. 힐링이 되어 그곳에서 살아낼 힘을 얻어 온다. 특히 올레길에서는 제주의 속살을 낱낱이 보고 느낄 수 있고 아름다운 주변 풍경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이번에는 올레 10코스를 걷기로 했다.
아침부터 엄습하는 제주의 더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올레길을 걷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쉬 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길에서 펼쳐질 풍경들도 마음을 당겨 쉽게 포기되지도 않았다.
티브이에서 호우주의보를 발령한다. 하늘에는 옅은 구름이 덮혀있다. 일기예보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면 아들은 제주도 만의 특별한 빗줄기를 캔버스에 담아낼 것이다. 그런 아들과 달리, 나는 시원한 비를 맞으면서도 길을 걷기엔 여간 힘들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아들이 캔버스에 그려내던 세찬 비를 직접 시원하게 맞아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 싶어 비상 우산을 챙겨 호텔을 나섰다.
올레길에는 코스마다 독특한 풍경이 있다. 오늘 선택한 코스는, 서귀포시의, 화순 ‘금모래’ 해변에서 시작한다. 아들은 카메라 렌즈에 피사체를 담기도 하고 노트북에 스케치를 한다. 풍경 속 사물을 바라보며 의미를 담으려는 내 눈길도 바쁘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시원한 절경을 선사해주듯, 생의 모퉁이마다 색다른 풍경 같은 행복이, 주어진다면 정말 살아볼 만한 삶이 되지 않을까.
올레길은 내내 감동을 준다. 갯마을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져 현무암이 되면서 빚어놓은 여러 형상들을 발견한다. 긴 세월을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바위의 심정을 헤아릴 길은 없지만, 바닷바람에 실려 온 소식들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올레길 10코스는 제주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길이다. ‘섯알오름’ 정상에는 일제의 고사포 진지가 있고, 송악산을 돌아 벌판을 가로지르면 제주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4·3 유적지가 앞을 막는다. 비극의 학살 터에는 양민 희생자의 명예 회복 진혼비가 세워져 있고, 대륙 침략을 위한 중간 거점 공항 기지였던 ‘알뜨르’ 전투 비행장도 보인다. 일제 강점기 잔존들을 마주하니 더위에 지친 몸이 더욱 후덥지근해진다. 유난히 가슴 저린 역사가 많은 코스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 길에 들어선다. 추사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로 지정된 문인화〈세한도〉를 그렸다. 이 모든 것을, 제주 유배지에서 완성하였다 한다. 시련을 딛고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았던 추사 김정희의 삶은 느슨해진 지금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절반을 걸었을까. 더운 날씨에 길도 늘어졌나 보다. 더디기만 한 걸음으로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라도 흠뻑 맞으면 시원 하련만, 휴대폰 에서 알리는 호우경보와 다르게 하늘에는 비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 더위에 몸은 점점 지쳐가니 내 몸이 호우경보를 알린다. 쏟아지는 비를 맞은 듯 땀이 온몸을 타고 연신 줄줄 흘러내린다. 옷은 어느새 땀으로 젖는다. 눈에 띄는 편의점에서 얼린 생수병을 구입하여 지친 몸에 퍼져가는 열기를 몇 번이나 식혀본다. 오늘처럼 푹푹 찌는 이 더운 날 길을 걷는 사람은 나와 아들뿐이다.
사서 고생이란 옛말처럼 오지에도 걷고 있다. 몸이 지치니 점점 말을 잃어간다. 종점까지 걷는 건 욕심이란 생각이 든다. 더 이상은 무리인 듯하다. 바다를 마주한 시원한 카페에서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며 생각한다. 포기해야 할 것인가. 초지를 밀고 갈 것인가로 갈등한다. 에어컨이 뿜어내는 냉기와 찬 음료수, 아이스크림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내딛는다. 바다에서 간간이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이 위로를 해준다. 질리지 않는 제주의 푸르름이 더없이 좋고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마음에 편안함을 준다.
17.5Km 코스를 완주했다. 성취감에 더위에 지친 몸도, 극도의 피로도 잊고 발가락 통증도 무뎌진다. 목적한 바를 이루었기에 기분이 좋다. 무겁게 달고 왔던 시름의 무게도 떨어져 나간다. 고통 후에 다가오는 행복이 크게 느껴진다. 무더위로 요동쳤던 마음은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호우는 끝내 내리지 않았다. 오늘의 여름 폭우는 내 몸에서 빗물처럼 흘러내린 땀이었다. 부산으로 돌아가면 땀으로 내렸던 그 여름비는 아들의 캔버스에서 물살을 치며 또 흘러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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