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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국내에서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만주(滿州)와 노령(露領) 지역에서도 반일시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의 시위운동으로는 한반도에서 일제(日帝)의 세력을 몰아낼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비폭력(非暴力) 평화적(平和的) 저항운동(抵抗運動)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이에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은 평화적인 시위운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하여 만주와 노령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던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으며, 재만한인사회(在滿韓人社會)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그 결과 만주와 노령의 한국인 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오십여군데에 달하는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단체들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본문에서는 그 당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 전부를 열거하여 일일이 서술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했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 3개 단체만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1919년 3월 1일에 국내에서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전개되었고, 그 영향은 곧 만주지방에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초순에는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을 실천에 옮길 군정부(軍政府)가 이상룡(李相龍), 이회영(李會榮), 김동삼(金東三) 등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군정부에서는 군대를 편성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수행할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조직 체계를 완비하였다. 그리하여 이상룡이 최고 책임자인 총재에 임명되고, 여준(呂準)이 부총재, 그리고 이탁(李拓)이 참모장을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아울러 군정부에서는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효과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받기 위해서였다.군정부가 수립될 무렵에 상해(上海)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서간도 지역에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된 것을 알고 여운형(呂運亨)을 군정부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에 통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군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상룡이 "하나의 민족이 어찌 두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고 설득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정부라는 명칭을 버리고 1919년 11월 17일 임시정부 산하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었다.서로군정서는 최고 지휘부인 독판부(督瓣部) 아래 무장투쟁을 지도하는 사령부(司令部), 참모부(參謀部), 참모처(參謀處) 등을 두었으며 이를 보조해 주는 기관으로 정무청(政務廳), 내무사(內務司), 법무사(法務司), 재무사(財務司), 학무사(學務司), 군무사(軍務司)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입법 및 주요 안건의 결정기관으로서 서의회(署議會)를 두었으며, 지방조직으로서는 영서(令署)를 두어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의 효율성을 꾀하고자 하였다.서로군정서에서는 대부분 신민회(新民會) 출신의 독립전쟁론자들이 몸담고 있었으며, 지방의 양반 신분으로서 중소지주층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고, 대종교 신자들이 많았으며, 한학과 신학문을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인사가 많았다.서로군정서는 1919년 11월에 성립되었으나, 실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이중에서도 군자금이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그러므로 서로군정서에서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서 부심하였으며 관할지역에 살고 있는 재만한인(在滿韓人)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로부터 군자금을 얻고자 하였다. 한족회의 관할구역은 유하현(柳河縣), 통화현(通化縣), 해룡현(海龍縣), 흥경현(興京縣), 집안현(輯安縣), 관전현(寬甸縣), 임강현(臨江縣), 환인현(歡仁縣) 등이었다. 서로군정서는 이 관할 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군자금을 각출하고자 하였는데, 액수는 호(戶)당 일원오각(壹元五角)이었으며 1만여호가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한족회의 이러한 군자금 모금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 하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이외에도 서로군정서는 국내에 특파원을 밀파하여 군자금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군자금 모금 활동은 주로 1919년과 1920년의 양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실제 모금액도 이 기간 동안에 상당히 모아졌다. 그러나 1921년 이후에는 거의 모금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모금 활동에 변화가 있는 까닭을 설명하면, 전자는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애국지사들의 민족 의식의 고취와 관련이 있을 것이고, 후자는 뒤에서도 언급할 예정이지만 1920년 말기부터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으로 서로군정서의 병사들이 밀산(密山)을 거쳐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는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아울러 본부도 역시 일제의 침공을 피하려 북만주의 액목현(額穆縣)으로 이동하였고 세력 역시 약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군자금이 가장 많이 모금된 곳과 관련해서 우선 주목되는 지역은 평안도이다. 즉 이곳에서 모금 활동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평안도와 서간도간의 지리적인 밀접성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는 경상북도 지역이 주목된다. 이는 서로군정서의 간부들 대다수가 경상북도 출신인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안도 지역은 대개 평안도 출신이, 경상도 지역은 경상도 출신이 각각 파견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모금 활동자들이 자신의 출신지역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취해진 정책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들의 연고지였기 때문이다.한편 서로군정서에서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통하여 많은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는 모집한 군자금과 양성된 독립군을 바탕으로 국내 및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부일배(附日輩)를 제거하는 일면 국내로 들어가 일본 헌병대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 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일배 제거 활동은 서간도와 평북 지역에서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대상은 국내의 친일 한국인 관료, 일본군 밀정 및 서간도 지역의 조일(助日) 단체인 보민회(保民會), 거류민회(居留民會) 등의 지도부였다.이러한 부일배(附日輩) 제거는 주로 서로군정서의 핵심 전투조직인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 제1중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부대는 1914년 통화현에서 백서농장(白西農場)을 운영하던 채찬(蔡燦), 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해 조직되었는데, 점차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백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과 통화현 등지에 두었다. 서로군정서의 국내에서의 활동은 대체로 군자금 모금과 마찬가지로 평안북도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 점은 서로군정서가 위치하고 있는 서간도 지역과 평북 지역의 지리적인 인접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서로군정서의 활동이 평안북도 지역에서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5월에 문상식(文相植), 김찬규(金燦圭)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 특공대원들이 경북 지역에서 관공서를 폭파한 사건은 그 단적인 예이다. 또한 동년 8월에 미국 상원의원들이 서울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서로군정서의 특공대원 김동순(金東純), 한우석(韓愚錫) 등은 서로군정서 집법과장 최우송(崔友松)의 지시를 받아 서울로 밀파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조선총독부 건물 공격, 조선총독 살해 등이었으나 계획을 실현하기 전에 일본 경찰에 피체되고 말았던 것이다.이와 같이 서로군정서에서는 국내에 병력을 침투시켜 무력(武力)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당초의 계획처럼 대규모적인 항전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단지 소규모 게릴라 작전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로군정서의 무장투쟁은 북간도 지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등이 수행한 대규모 전투와는 비교되는 것이었다.한편, 일제는 서로군정서의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정예군을 서간도 지역에 파견하고자 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는 천연수림이 가득한 백두산(白頭山) 기슭에 두번째 군사기지를 정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북로군정서와 연계를 맺고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즉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는 군사상 일체의 주요 안건, 사관생도 양성, 무기 구입 등에 관하여 서로 협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 합의에 의하여 서로군정서 산하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에 교관으로 파견되어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기도 하였다.1920년 10월 23일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작림(張作霖)의 양해를 구해 철령(鐵領) 주둔 보병 제19연대 및 공주령(公主領) 주둔 기병 제12연대를 출동시켜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한편 한국인 부락을 초토화시켰다. 이에 서로군정서에서는 본부를 북만주 지역 액목현으로 이동시켰으며, 안도현(安圖縣) 지역에 있던 독립군 병력은 소련, 만주 국경 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다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 적군(赤軍)의 포위 공격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로군정서 대원들이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시참변이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 구성된 무장조직과 만주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와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갈라져서 벌인 군권쟁탈전의 소산이었다. 그 결과 대한의용군에 속해 있었던 서로군정서 대원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 병사들에 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였던 것이다. 이에 서로군정서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북만주의 영안(零安)으로 돌아오게 되었다.한편 액목현으로 본부를 옮긴 서로군정서는 임시정부 군무부의 군무국장인 황학수(黃學秀)를 영입하여 1921년 5월에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위원제를 택하여 위원장에 이탁, 경리위원장에 이진산(李震山), 학무위원장에 이상룡의 아우인 이척서, 법무위원장에 김동삼, 참모장에 황학수, 총사령관에 박용만(朴容萬)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영안에 있던 서로군정서의 잔여 병력 역시 액목현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서로군정서의 이러한 재기의 움직임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의 희망에 부풀었던 재만 교포들의 열기가 점차 식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920년 일본군의 만주 침공은 한국인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원한 것으로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즉 서로군정서의 대중적 기반이 그만큼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새로이 서로군정서 총사령관이 된 박용만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역시 재만한인(在滿韓人)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은 당연하다.이에 더하여 서로군정서 지도부 내에서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 참가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군정서 지도부에서는 남만주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에 대하여 참가 의사를 표시하지 않자 서로군정서의 핵심 세력인 의용군이 1922년 6월 2일 이에 반발하여 사실상 서로군정서를 탈퇴하였던 것이다.이를 계기로 서로군정서는 점차 와해되었으며, 1924년 11월 25일에 정의부(正義府)에 흡수됨으로써 발전적 해체를 도모하였다.
②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의 전신(前身)은 1911년에 북간도 지역에서 조직된 중광단(重光團)이다. 이것이 3·1운동 후에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1919년 가을부터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라는 이름의 군사단체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후 이 단체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되었다.즉 대한군정서가 창립 직후 상해의 임시정부를 지지할 뜻을 표방하자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북로군정서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창립 당시 북로군정서의 주요 간부 명단을 살펴보면 총재에 서일(徐一), 총사령관에 김좌진(金佐鎭),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 최해(崔海),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 경리에 계화(桂和), 길림분서고문에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에 양현(楊賢) 등이었다.북로군정서는 본부를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 일대에 설치했으며 병력의 증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봄에는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 지역에서 장정 3백여명을 모집하였으며 이성규(李成奎)를 국내에 파견하여 대한제국 육군 장교 출신인 김규식(金奎植), 홍충희(洪忠喜), 박형식(朴亨植) 등을 초빙하였다.병력의 증강과 아울러 북로군정서의 당면한 과제는 무기 구입이었다. 이를 위해 북로군정서는 서일과 계화를 직접 노령으로 보내 무기 구입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북로군정서에서는 1920년 12월경에 이르러 군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북로군정서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운영하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과 장교 박영희(朴寧熙), 백종렬(白鍾烈), 오상세(吳祥世) 등을 비롯한 다수의 훈련 장교 및 각종의 교재를 공급받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서대파 십리평으로부터 약 12킬로미터 떨어진 삼림지대에 8동의 병영을 짓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독립군 병력 확보를 위해 북로군정서에서는 간도 일대의 장정을 모집하여 독립군으로 편성함과 동시에 이들을 정예군사로 만들기 위하여 18세~30세의 청년들을 뽑아 사관연성소에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사관연성소의 교육은 6개월 과정의 속성과였으며 과목은 정신교육, 세계 각국의 독립운동사 및 한일관계사, 군사학, 총기(銃器)의 사용법, 부대의 지휘운용법, 체조 및 구령법 등이었다. 군사훈련 방법은 대한제국의 교육 방법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1정보 넓이의 연병장을 2개나 만들어 이 곳에서 날마다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술과(術科)는 일본 군인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실탄 사격연습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북로군정서에서는 1920년 9월 9일에 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식을 개최하여 298명의 졸업생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하였는데, 대장에 나중소(羅仲昭), 부관에 최준형(崔俊亨), 중대장에 이범석, 소대장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한편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편제는 소대, 중대, 대대로 나뉘어 1소대 인원을 50명으로 하고 2개 소대를 1중대로 했으며, 4개 중대를 1대대로 편제함과 동시에 초병(哨兵)과 첨병(尖兵) 제도를 실시하여 본대와의 연락을 긴밀하게 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독립군 무장투쟁의 보위를 위하여 각 지방에 초소로서의 경신(警信)조직을 설치하였는데, 촌락 1백호마다 경신분과를 두고 20~30호의 촌락에는 경신분소를 두었다. 각 경신분과에는 과장 1명, 서기 1명, 통신원 5명 이상, 탐사원 2명 이상, 경호원 5명 이상을 두었다. 통신원은 통신사무를 담당하고, 탐사원은 일반 민정을 시찰하며, 경호원은 주야교대로 경계를 담당하여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경신국에 보고하도록 하였다.1920년 8월경에는 북로군정서의 수뇌부가 일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총재인 서일 아래에 부총재로 현천묵(玄天默)이 등용되었고, 총재부 비서장에 김성(金成), 사령관 부관에 박영희, 참모부장에 나중소 등이 각각 취임했다. 7월 1일에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약 1천여명으로 늘어났고, 그 중에서 완전무장되고 잘 훈련된 정예군은 6백여명이었으며 나머지 5백여명은 경호병력이었다. 이때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무기는 기관총(機關銃)을 포함한 총기(銃器)가 8백여정, 박격포(迫擊砲) 2문, 수류탄(手榴彈) 2천여개 등이었다.북로군정서는 이 시기에 만주에서 존재했던 독립군 가운데 단위부대로서는 가장 잘 훈련되고 전투력이 막강한 부대였다.1920년 10월경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당시 개편된 북로군정서의 조직을 보면 아래와 같다.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참모부장 나중소(羅仲昭)부관 박영희(朴寧熙)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중군장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백종렬(白鍾烈) 한건원(韓建源)대대장서리 홍충희(洪忠熙)제1중대장 강화린(姜華麟)제2중대장 홍충희(洪忠熙)제3중대장 김인수(金仁洙)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기관총소대장 최인걸(崔仁傑)
③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독립군은 함경도 지역의 의병대장 홍범도(洪範圖)가 3·1운동 후에 북간도 지역에서 조직한 무장 단체이다. 대한독립군의 핵심 인물인 홍범도는 1907년 가을에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라는 이름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갑산(甲山), 삼수(三水), 혜산(惠山), 북청(北靑) 등지에서 활발한 유격전(遊擊戰)으로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혔던 맹장(猛將)으로 국내에서 3·1운동이 벌어지자 포수와 청년들을 모아 이 단체를 조직하였던 것이다.홍범도가 총사령관, 주건(朱建)이 부사령관, 박경철(朴景哲)이 참모장으로서 부대를 지휘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산하 무장 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독립군이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부터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감행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과 혜산진 등으로 진격,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으며 9월에는 갑산군의 경찰 주재소와 헌병대 분견소 등을 습격하였다. 동년 10월에는 평안북도 방면으로 진격하여 강계(江界)의 요지인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하고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하였다.이러한 대한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크게 당황한 일본군은 이에 대비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큰 전과를 올린데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는 오동진(吳東振), 김응식(金應植) 등을 파견하여 전투 결과를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 박영(朴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의용군과 합세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로 새롭게 편성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은 최진동, 부관은 안무, 연대장은 홍범도, 중대장은 이천오(李千五), 강상모(姜尙模), 조권식(曺權植)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이러한 조직 아래 대한독립군은 국내진공작전을 위하여 종성(鐘城), 온성(穩城), 무산(茂山) 등지에 있는 일본 헌병대와 기타 행정기관 등을 습격하여 적군을 사살하고 군수장비를 노획하기도 하였다.대한독립군이 무장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독립군을 빙자하여 재만한인(在滿韓人)들로부터 금품을 갈취하는 무리도 많았는데, 홍범도는 유고문(喩告文)을 각지의 교포들에게 배포하여 이러한 반민족적(反民族的) 행위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일제(日帝)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방해하던 순사 보조원과 일본군 밀정 등에게도 경고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1920년 봄에 홍범도의 부대는 최진동과 양하청(梁河淸)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과 함께 두만강 연안의 회령, 종성, 온성 지방으로 연속적인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년 2월에는 길림성(吉林省) 지역의 독립군 병사 2천여명이 회령 부근으로 접근, 일본군 진영을 공격하여 적군 3백여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 승전보(勝戰譜)는 외전(外電)을 통하여 널리 내외로 알려져 독립군의 사기양양에 큰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동년 6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이후 7월에 북간도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되자 대한독립군은 동도독립군서(東道獨立軍署)에 편입되었으며, 10월에는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에 대응하기 위해 북간도의 독립군이 재편되자 총병력은 3천 5백여명이 되었고 1대대를 3중대로, 1중대를 3소대로 나누어 27개의 소대를 두었다.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만주의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수차에 걸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감행하여 국경의 일본군 수비대에 큰 타격을 주자, 일본군 제19사단은 1920년 6월초 1개 대대 병력을 파견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도록 했다. 일본군은 간도의 삼둔자(三屯子)에 이르러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으나, 삼둔자 서남방(西南方)에 잠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습격을 받고 패퇴하였으니 이 싸움이 곧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이다.함경도 나남(羅南)에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少佐)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보내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 야스카와 대대는 간도로 진격하여 안산(安山) 후방 고지에서 독립군과 첫 교전을 치르고 계속해서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까지 독립군을 추격해 왔다.두만강 유역 온성 대안에 있는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지형이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요새였다. 그러므로 주위 야산의 고지만 차지하면 그 안에 들어간 적군을 쳐부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수뇌부인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등은 우선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재만 교포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고 이천오(李千五) 중대를 봉오동 윗마을 서북단에, 강상모(姜尙模) 중대는 동산(東山)에, 강시범(姜時範) 중대는 북산(北山)에, 조권식(曺權植) 중대는 서산(西山)에 각각 매복시켰다. 그리고 홍범도 자신은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서북단에 매복함과 동시에 군무국장 이원(李圓)으로 하여금 본대 병력을 인솔하고 서북고지(西北高地)에서 탄약(彈藥)과 식량을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퇴로를 확보하도록 했다. 게다가 홍범도는 이화일(李化日) 분대를 보내 고려봉(高麗峰) 북쪽 1천 2미터 고지와 그 북쪽 마을 앞에 잠복하여 기다리다가 적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유인하게 하였다.대한북로독군부가 포위망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일본군은 1920년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여 전위중대(前衛中隊)를 내보냈다. 이화일 분대는 적군을 유인하기 위한 퇴각을 하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가해 일본군 전위중대를 전멸시켰다. 일시 후퇴하여 대열을 정비한 일본군은 같은 날 11시 30분에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지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척후병이 오후 1시에 독립군의 포위망 안에 당도하였지만 대한북로독군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적군을 기다렸다. 그러자 야스카와 대대는 안심하고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이에 홍범도 장군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매복해 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삼면에서 일본군에게 집중사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를 중심으로 집결하였던 일본군은 갑작스러운 독립군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여 대열이 흩어지고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상자가 늘어났다. 야스카와 대대는 포위망 안에서 3시간 동안 응전하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강상모 중대가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만 157명이나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이 전부였으니, 한국의 전쟁사(戰爭史)에 길이 남을 쾌거 가운데 하나인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가 이것이었다.봉오동전투 승리는 독립군이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봉오동의 지형에 익숙한 독립군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승전(勝戰)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큰 것이었다. 즉 봉오동전투 승리는 독립군 장병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에게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의 전투를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느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데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었다.
●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의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단체들은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이에 일제(日帝)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현지의 경찰이나 소수의 전투 병력만으로는 도저히 이러한 독립군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간도에 대규모 부대를 출병시켜 반일 무장 단체들을 토벌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그러나 일본군이 중국의 영토인 만주 지역에 직접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이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국제외교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출병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켰다. 제1차 훈춘사변은 1919년 9월 12일에 일어났는데, 9백여명의 마적단(馬賊團)이 일본 영사관이 있는 훈춘을 공격하여 재만한인(在滿韓人) 30여명이 살해되는 비극이 벌어졌지만 이 사건의 주범이 한국인 무장 단체라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제2차 훈춘사변은 1920년 10월 2일에 일어났는데, 일본의 훈춘 영사관 소속 경찰관 50여명과 중국 경비대가 함께 방어전(防禦戰)에 나섰지만 일본 경찰이 수비를 맡았던 성문이 손쉽게 열려 마적단의 노략질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중국 군인 60명과 한국 민간인 7명이 살해되었으며, 일본의 영사관도 비습되어 일본인 수십명이 사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일본 측은 훈춘을 습격한 마적단이 조선 독립군과 관계가 있었는가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전에 '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국의 병력을 투입하겠다.'는 구실로 미리부터 예정하였던 소위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곧 실천에 옮겼다.곧 일본군은 1920년 10월 7일부터 간도에 침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소바야시[磯林直明] 지대(支隊)는 10월 14일에 훈춘하(琿春河) 골짜기로 출동하였으며, 기무라[木村益三] 지대는 10월 17일에 왕청(汪淸)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그리고 아즈마[東正彦] 지대는 15일에 용정에 도착한 후 18일에 삼도구(三道溝)에 주둔해 있는 홍범도의 부대를 찾아서 출발하였다.일본군 아즈마 지대는 10월 20일 포병 약 5천명의 병력으로 이도구(二道溝)와 삼도구를 포위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洪範圖)가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의군부(義軍府), 한민회(韓民會), 한국광복단(韓國光復團), 의민단(義民團), 신민단(新民團) 등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을 모두 섬멸하고자 하였다.독립군 측은 처음에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채택하였으나, 일본의 침략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들어와 한국인 마을을 불지르고 죄 없는 교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자 결정을 바꾸어 일본군을 맞아 싸우기로 하고 작전을 논의하였다.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여단이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7일간 단독작전 혹은 합동작전으로 일본군 1만 5천여명의 전투 병력과 맞서 10회의 접전을 벌여 승리한 싸움이다. 청산리대결전 최초의 전투는 21일에 있었던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야마다[山田] 보병연대를 삼도구 골짜기인 백운평 부근에서 격퇴시킨 싸움이다. 두번째 전투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전개된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로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여단이 아즈마 지대의 일부 병력을 격멸한 승전(勝戰)이었다. 세번째 전투는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로 북로군정서가 시마다[島田] 기병중대 120명을 전멸시킨 싸움이다.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가장 치열하고 사상자가 많았던 전투는 22일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였는데, 김좌진(金佐鎭) 부대와 홍범도(洪範圖) 부대가 함께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호 고지를 선점하고 공동으로 일본군의 돌격전(突擊戰)을 저지하며 맹렬한 혈전(血戰)을 벌여 적군 1천 6백여명을 살상하였다. 그 밖에도 맹개골 전투, 쉬구 전투, 만기구전투(萬麒溝戰鬪), 천보산전투(天寶山戰鬪), 고동하곡전투(古洞河谷戰鬪) 등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소련과의 국경지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일본군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총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완패를 당하자 그 보복으로 한국인 마을을 불사르고 비무장 상태인 한국인 농민들을 무참히 살육했으며 학교와 교회를 불태웠다. 청산리대결전 때부터 그 해 연말까지 간도 일대에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무고한 한국인의 수는 공식통계로는 3115명이었고 실제로는 무려 1만명이나 되었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은 패전(敗戰)을 은폐하기 위하여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희생된 한국 민간인들을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독립군으로 조작하여 사령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승리한 여러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1920년 12월 말경에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군부(義軍府), 혈성단(血誠團), 야단(野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10개 독립군 부대가 집결하여 지도자들간의 회의 끝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라는 통합 부대가 결성되었는데,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 이청천(李靑天)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
●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0년 10월 이후 일본군의 간도 침입과 동시에 만주 지역의 독립군은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은 좀 더 활동하기에 유리하고 일본 측의 위협이 적은 곳에 정착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문창범(文昌範), 한창해(韓滄海) 등의 도움으로 소만(蘇滿) 국경 하천인 우스리 강을 넘어 이만(Iman)으로 이동하였다.1921년 3월 하순까지 일단 이만에 집결한 조선 독립군은 단합하여 1921년 4월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黑龍州)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적군(赤軍)으로부터 대일공동전선(對日共同戰線)을 형성하자는 제의를 받고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에 따라 해체되었다. 그 결과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 등 북로군정서 계열은 이만에서 다시 밀산으로 되돌아갔으며,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이청천(李靑天) 등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서로군정서 계열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이처럼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자, 각기 사정이 다른 부대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즉 적군(赤軍)의 제2군단 제6연대장으로서 흑하 지방의 수비대장 직책을 겸임하고 있던 오하묵(吳夏默)과 니항군(尼港軍)이라는 적계(赤系)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박일리아간의 군권(軍權) 장악을 위한 암투가 그것이다.이런 상황하에서 홍범도와 최진동은 오하묵, 박일리아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도리어 이들의 주도권 쟁탈전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1921년 6월 28일에 자유시대대의 오하묵이 소련 적군의 지원을 받아 박일리아의 군대에게 선제공격을 가하여 6시간의 교전 끝에 박일리아 측 군인 36명을 사살하고 864명을 포로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다.박일리아 세력을 제압한 오하묵은 소련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부대를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킴과 아울러 독립군도 강제로 그곳으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독립군 장병들은 이만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다.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군(赤軍) 제5군단 예하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3일에는 갈난다라사발리 대신에 오하묵이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 여단에서는 1921년 10월 28일에 6개월 수업기간의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이청천(李靑天), 교관에 채영(蔡英), 김승빈(金勝彬) 등을 각각 임명하였다.1922년 2월 17일에 여단은 특립연대(特立聯隊)로 개편되었는데, 연대장은 오하묵이 담당하였으며 군정위원장에는 박승만(朴承萬)이 임명되었다.한편, 자유시사변을 피하여 은신하였던 이용(李鏞), 김규면(金圭冕) 등은 1921년 7월에 연해주에 도착하여 장기영(張基英), 한운용(韓雲用) 등과 합세, 박일리아를 만나 10월 29일에 재차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를 조직하였다. 한국의용군사회는 한인(韓人) 이주민들에 대한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군자금 조달과 무기 구입에 주력한 결과 단기간에 500여정에 달하는 총기(銃器)를 획득하여 의용군 대원을 무장시켰다. 이 무렵 연해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백군(白軍)을 동원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백당임시정부(白黨臨時政府)를 창립하고 11월 상순부터 백군으로 하여금 스파스크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북진하도록 지원하였다.
이만시가 백군(白軍)의 공격 위협을 받게 되자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는 연해주 지구의 적군(赤軍)과 제휴하여 백군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소련 측으로부터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제공받은 한국의용군은 11월 13일에 이만에서 시가전(市街戰)을 벌였다. 그러나 백군이 이만을 점령하고 적군이 퇴각함에 따라 한국의용군도 이만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한운용이 이끄는 한국의용군 제3중대 제1소대 45명은 이만 역에서 벌어진 백군과의 전투에서 끝까지 퇴각하지 않고 전원이 전사하는 분전을 보여 "까렌스키 빨치산은 죽어서도 총을 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곳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게다가 한국의용군은 하바로스크를 공격하는 전투에도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한편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에 편입된 독립군은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이들을 자극시킨 것은 연해주에서 이용이 이끄는 한국의용군이 용전분투(勇戰奮鬪)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르쿠츠크를 탈출하여 어떻게 하면 연해주의 한국의용군과 합세할 수 있을까에 대해 궁리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을 우려하는 소련 당국의 태도로는 만주로의 출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채영과 황하일(黃河一) 등은 1차로 30명을 탈출시키고 2차로 다시 병력을 탈출시키려다 발각되었다.그 후 이르쿠츠크에 있던 오하묵 등은 소련 당국과 협의하여 자기들도 연해주로 이동시켜 줄 것을 간청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의용군의 세력과 명성이 날로 커져 갔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22년 8월 15일부터 오하묵의 이르쿠츠크 주둔군은 연해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오하묵 부대와 한국의용군 사이에는 또다시 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한국의용군은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었다.1922년 10월 이후 소련 공산주의 정권은 극동에서 백군(白軍)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일본군 역시 연해주에서 철병하였다. 그리하여 소련 당국은 이 지역의 공산화작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더욱이 소련은 소련 영토에서 철수한 일본군에게 다시는 소련에 진주할 구실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국인들의 무장 활동을 적극 제재하였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적군에 편입되어 있던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든 한국인의 무장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출처; 박영석 著「만주, 노령 지역의 독립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編(1999년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