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에서 신라가 완전치는 못하나마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은 고구려(고구리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가 한, 수, 당에 이르는 막강한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통일 왕조들(단, 나는 수/당을 ‘제하의 통일 왕조’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 나라들은 ‘한족[漢族]’의 문화를 받아들인 탁발선비[타브가치]족이 세웠기 때문이다 – 옮긴이)의 침략을 물리쳐 낸 덕분이기도 하다.
중국은 통일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호시탐탐 한반도(코리아[Korea]반도 – 옮긴이)의 정복을 노려 왔는데(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노린 건 사실이나, 위만조선은 코리아반도에 있던 나라가 아니며, 한나라/위나라와 적이었던 고구리도 요령성이 중심지였지 코리아반도 북쪽이 중심지이지는 않았다 – 옮긴이), 매번 시도할 때마다 고구려에 가로막혀 일차 관문에서 저지당했다. 반면 중국 대륙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을 시기에는 고구려가 선공하여 중국 변방을 지배하기도 했다.
만약 어느 하나의 전쟁에서든 고구려가 졌더라면 중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복속시켜 한반도는 일찌감치 중국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믿음직한 방패막이 고구려가 겪은 최대 전쟁은 을지문덕 장군의 활약으로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살수대첩이 있기 전인 598년에 수의 문제(文帝)[이름은 양견. 원래 성은 ‘보육여’였다. 한(漢) 문화를 받아들인 탁발선비족 집안 출신이다 – 옮긴이]는 중국을 통일한 지(실제로는 북조 국가의 지도자로서 남조 ‘한족’ 정권을 무너뜨린 지 – 옮긴이) 20년이 채 못 되어 한반도마저(사실은 간도와 북만주 땅까지 – 옮긴이)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이른바 ‘천하통일’을 꾀한 것이다. 하지만 육군은 식량 보급 미비와 전염병으로, 수군은 폭풍으로 중도에 돌아가 버려 1차 고구려 원정은 실패한다. 육군과 수군이 우연하게도 동시에 조난을 당했다는 말이나, 30만 대군의 90%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그냥 믿어 넘길 수 있을까?
여하튼 기록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렇다 치고,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 이름은 ‘양광’ - 옮긴이)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14년 만에 제2차 고구려 원정(고구리 침략 – 옮긴이)을 떠난다. 고구려가 조공 길을 방해하니 쳐 달라는 백제와 신라의 간청도 있었지만, 양제는 짐짓 거창한 명분을 앞세운다.
“고구려는 한(漢)과 위(魏)때부터 골칫거리였다. 지금 천하가 다 우리를 받드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남아서 조공 길을 가로막고 도적질을 일삼으니 참을 수 없다. (고구리가 수나라에게 – 옮긴이) 사군(事君, 임금을 받듦)의 마음이 없으니 어찌 (고구리 태왕을 – 옮긴이) 신하의 예로써 대하랴? 더구나 고구려 백성들은 호족들의 탄압에 신음하고 기근에 시달리고 요역에 괴로워하고 있다. 내가 친히 전군을 통솔하여 하늘의 뜻에 따라 나아갈 것이다.”
언제나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에 ‘사군의 마음’이라니? 더구나 언제부터 중국이 남의 나라 백성의 고통에 그렇게 신경을 써 주었던가?
이렇게 해서 양제가 고구려 원정으로 동원한 군대는 전투군만 무려 113만, 군량 보급 부대는 그것의 두 배에 달하니 합계 300만이 넘는데다, 기병 30만, 수군 10만, 함선 3000척까지 거느린 어마어마한 대군이다. 960리에 달하는 행군 대열에다, 매일(날마다 – 옮긴이) 1개 부대씩 떠나 다 출발하는 데만도 40일이 걸렸을 정도라면,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 옮긴이)의 동방 원정군(침략군 – 옮긴이)이 4만, 한니발의 로마 원정군이 8만이었던 사실과 비교하면, 수 양제는 원정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기회에 고구려의 씨를 말리기로 단단히 작정을 하고 나섰던 모양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고구려가 취한 전략은 당연히 맞받아치기를 피하며 일단 수비를 튼튼히 하고, 치고 빠지며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작전이었다. 이른바 게릴라전(유격전 – 옮긴이)인데 이 전술은 실로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랜 전술이다.
수 양제가 이끄는 군대는 요동 지방(오늘날의 요동반도가 아니라, 그보다 서쪽인 오늘날의 요서지방이다 – 옮긴이)의 각 성을 공략하며 다녔으나, 하나의 성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고대에는 국경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선(線)의 개념이 아니라 성곽을 중심으로 한 점(點)의 개념이었으므로, 성들을 함락하지 않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건 대단히 위험했다. 후방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제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요동에서 이리저리 맴돌 수밖에 없다.
그동안 양쪽 군대(고구리 군사와 수나라 군사 – 옮긴이)는 바다에서 최초의 결전에 임하는데, 그것은 패강 전투였다.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을 직접 치기 위해 온 수나라 장수 내호아(기록에 따르면 남조 왕조인 진[陳]나라 출신 항장[투항한 장수]이라고 한다 – 옮긴이)는 고구려의 수군과 맞붙을 때마다 연전연승한다.
이에 기고만장해진 내호아는 내친 김에 평양성(요동반도와 요서 지역의 경계에 있는 성이지, 오늘날의 평양특별시가 아니다 – 옮긴이)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정예군 4만을 선발하여 패강 유역에 상륙하는데, 여기에는 고구려 영양왕의 아우인 건무(성은 고씨이므로, 온전한 이름은 ‘고건무’다 – 옮긴이)가 이미 매복하고 있었다. 건무는 병력을 매복시키고 수나라 군대를 얼마간 방치하며 습격의 기회를 노린다.
이윽고 평양 근방에 이르러, 승전 무드에 취해 곳곳에서 약탈을 일삼고 대오도 짓지 않고 있던 수나라군은 건무의 매복 작전에 걸려 몰사하고, 수천 명만 살아남아 선단으로 도망한다(달아난다 – 옮긴이). 건무는 이를 뒤쫓아 수의 보급 선단을 유린해 버린다.
한편 여전히 요동에서 배회(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님 – 옮긴이)하고 있는 양제는 일단 수군과 조우하기로 한 일정 때문에 군사를 나누어 우문술과 우중문 등에게 맡겨서 평양을 향해 진군하게 한다. 각 인마(人馬. 사람과 말 – 옮긴이)에게 100일간의 양식을 주지만, 병사들은 그것도 무거워 몰래 땅에 파묻어 버린다.
물론 예정대로 내호아군이 평양 부근에 도착해 있다면 양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들(수나라 군사들 – 옮긴이)이 먹을 식량이 이미 패강에서 물고기 밥이 되어 버린 사실을 그들이 알 리 없다. 이들이 유인 작전에 속아 고구려군을 마냥 쫓다가 살수에서 몰사(죄다 죽음 – 옮긴이)한 것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그 살수대첩의 고구려 지휘관이 바로 지금(서기 1995년 현재 – 옮긴이)도 서울의 도심 거리 이름을 장식하고 있는 을지문덕이다. 가뜩이나 한 성의 항복도 받아 내지 못한 채 벌판을 헤매던 양제는 30여만 명의 군사를 보낸 살수대첩에서 살아 돌아온 2700명을 보고 아연실색(뜻밖의 일에 너무 놀라서 얼굴빛이 바뀜 – 옮긴이)하여 제 나라로 도망쳐 버린다.
결국 300만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참패한 수 양제는 분을 참지 못해 이듬해 다시 고구려 원정을 떠나지만, 내부의 반란(양현감의 난 – 옮긴이) 소식을 듣고 회군한다. 또 그 이듬해 다시 원정을 계획하지만, 이번에는 ‘고구려에 가면 죽는다.’는 무성한 소문 속에서 징병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막대한 국력 손실로 수나라는 살수대첩에서 패한 지 6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건무의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을지문덕의 승리가 있었을까? 살수대첩은 고구려의 기민한(동작이 날쌔고 눈치가 빠른 – 옮긴이) 수군과 육군이 절묘하게 조화된 작전의 승리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건무의 이름은 『 삼국사기 』 의 열전에도 오르지 못한다. 건무는 그 전공에 힘입어 다음 왕(사실은 태왕 – 옮긴이)인 영류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그나마 연개소문에게 죽는 비운을 당해 1500년 후에까지 길이 후손에 이름이 전해지는 을지문덕의 명예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차라리 왕위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을지문덕과 함께 살수대첩의 영웅으로 나란히 역사에 이름이 빛나기를 더 바랐으리라.
- 『 상식 밖의 한국사 』 ( ‘남경태’ 지음, ‘(주)새길’ 펴냄, 1995년 )에서
- 음력 8월 18일에, 아사달이 올리다